*********************** [ "오륙도, 사오정 난 몰라"- 보험설계 칠순의 현역 ] ***********************



직장인 사이에 '오륙도', '사오정'에 이어 '삼팔선'이 회자될 정도로 명예·조기퇴직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고희(古稀)를 넘긴 할머니가 보험회사 현역 팀장으로 젊은이들 틈에서 뛰고 있다.

주인공은 대한생명 강남지점 서광영업소 김유수(金幼洙·71) 수석팀장. 김팀장은 1933년 9월생으로 30년 경력의 베테랑 보험설계사다.
집에서는 할머니지만, 젊음의 거리 강남에서 10명의 팀원을 이끌고 있다.

22일로 설계사를 시작한 지 꼭 30년이 된 김팀장의 (보험설계사로서의) 장수 비결은 성실성과 도전정신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결근하는 법이 없다. 오전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사무실로 출근, 오후 7시 퇴근 때까지 12시간 강행군을 한다. 요즘도 매주 여러 건의 신계약을 따내면서 월 평균 6백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지난해 그는 30대의 젊은 설계사들과 함께 100일간 재무설계사(FP) 양성교육을 마쳤다.

김팀장은 "생소한 컴퓨터 용어와 간단한 조작법조차 익히기 쉽지 않았지만 고객에게 더 완벽한 재정설계를 해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교육받았다"고 말했다. 결국 '평범한 설계사'에서 최고령 'FP설계사'로 거듭났다.

주부로 있던 41살 때 남편의 사업실패로 2남1녀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설계사를 시작, 출발은 평범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면서 두드러진 실적을 내기 시작, 80년대 중반 1등 설계사에게 주어지는 '연도대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덕에 대졸 신입사원을 상대로 한 설계사 강의를 맡았고, 85년 63빌딩 준공식에서 대한생명 설계사 3만명을 대표해 준공선서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김팀장은 오히려 "지금이 인생의 최전성기다.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보험영업을 계속할 생각"이라며 '영원한 영업맨'을 꿈꾼다.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세대들, 명예·조기퇴직 바람으로 풀죽어 있는 가장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김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젊은이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면 그들과 같은 실적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이는 어차피 자연적으로 먹는 것일 뿐이고, 나이와 상관없이 정신자세를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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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구류 청소 '침대 청소박사' 설기철 사장>

무점포창업이 '돈 되는' 사업 아이템으로 뜨고 있다.

사업영역도 갈수록 넓어지는 추세다.

무점포 사업이 일시적 호구책이거나 '종잣돈' 마련을 위한 예비사업으로 여겨지던 시대는 갔다.

인터넷이 거액의 창업자금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무점포의 단점도 인터넷이 보완해 준다.

물론 한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업을 하는데 점포(사무실)는 물리적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고객을 끌어들이고 지속적인 거래관계를 맺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무점포 사업가를 소개한다.

'침대청소박사' 일산점의 설기철 사장(33)이 그 주인공이다.

점포가 없는 대신 건강한 몸과 사업 열정으로 무장한 이들 사장의 성공전략은 한 여름의 무더위를 씻어주는 청량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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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철 사장은 침대 카펫 등을 청소하는 일을 한다. 점포는 없다.

한달 순익은 4백만∼5백만원. 직장인은 물론 웬만한 점포보다 수입이 좋다.

설 사장은 3년전만 해도 '잘나가던' 치킨점 사장이었다. 돈도 모이기 시작하니 탄력이 붙었다.

내친 김에 모은 돈을 모두 털어넣어 치킨점을 확장했다. 내부 인테리어 비용만 1억원 넘게 들었다.

이게 실책이었다. 순조롭기만 했던 사업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건물 주인이 상가임대차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보증금 2천만원을 3천만원으로, 월세 80만원을 2백만원으로 각각 올려버린 것.

새 법이 시행되기 전에 미리 임대료를 최대한 올리겠다는 속셈이었다.

인테리어 비용은 물론이고 지난 6년간 벌었던 돈을 한꺼번에 날렸다.

설 사장은 "너무 억울해 속병이 생겼고 한국이 정말 싫어져 이민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놨다.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조그만 치킨집을 차렸다.

그러나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한때 10명의 종업원을 뒀던 대형 치킨집이 10평짜리 소형 점포로 쪼그라드니 울화가 치밀었다.

자연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그래서 시작한게 무점포 사업인 '침대청소박사(www.drbedclean.com)'.

침대 카펫 소파 등을 살균 세척하는 일이다.

설 사장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영업하러 돌아다녔다"고 고백할 정도로 억척스럽게 사업에 매달렸다.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명함을 돌리고 있다. 한달에 평균 1만장의 명함을 뿌린다.

전단지를 대신하는 그의 명함에는 서비스 종류와 가격을 비롯해 연락처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설 사장은 해가 지면 치킨집의 배달 아르바이트로 나선다.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다.

배달하면서 침대청소 영업을 하기 위해서다. "단골을 확보하려면 양질의 서비스와 친절은 기본이고 이외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설 사장은 자신의 달변을 알파로 활용하고 있다. 가정을 방문하면 일단 즐거운 대화거리를 유도한다.

단골은 이 대화에서 태어난다. 침대 카펫 등 부탁받은 물건 외에 서비스로 집안의 구석구석까지 말끔히 청소해 준다.

이런 서비스도 단골을 만드는 그만의 노하우다.


< 온라인 인쇄편의점 '번개통신' 박용찬 사장 >

광명시에서 무점포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박용찬 사장.

그는 2년전 창업을 결심했다.

유통회사 목재회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고 점점 커가는 애들을 보면서 겁이 덜컥 났다.

월급을 받고 며칠만 지나면 돈이 거덜나는 악순환에도 염증이 생겼다. 하지만 막상 내 사업을 벌이자니 걸리는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했으나 모아 놓은 돈도 별로 없었다.

무작정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다 발견한게 온라인 인쇄편의점을 표방한 '번개통신(www.bungae114.co.kr)'.

창업자금이 별로 들지 않고 일 자체도 비교적 간단해 보였다.

업소를 돌면서 명함 스티커 전단지 판촉물 등의 주문을 받아 본사 공장에 제작을 의뢰하면 된다.

영업이 사업의 전부인 셈이다.

창업자금이라야 가맹비(5백만원)와 주문을 받기 위해 필요한 컴퓨터 팩스 전화기만 갖추면 끝이다.

그러나 시작은 쉽지만 성공은 멀었다.

사업 거점이 없다보니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다. 박 사장이 무점포 사업을 '맨땅에 헤딩하기'에 비유하는 것도 이래서다.

무점포 사업을 시작했다가 사업을 접거나 직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통상 처음 3개월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사장도 "처음 몇달동안은 밤마다 잠을 설칠 정도로 중압감에 시달렸다"고 당시의 심정을 고백했다.

그 많던 아침 잠이 저절로 없어졌다. 새벽 5시만 되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전단지 명함 등을 들고 광명시를 헤집고 다녔다.

버스 지하철 등에서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전단지를 돌렸다.

3개월이 지났다.

거짓말처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올해로 2년째 접어든 사업은 이제 안정권에 진입했다. 월평균 3백여개 업소에서 주문이 들어온다.

한달 순익도 4백만원을 웃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건 일대일 대면영업이다.

"주문에서 제작까지 컨셉트 자체가 온라인 사업이지만 영업은 직접 부닥쳐야 한다."

박 사장의 지론이다.

그는 인터넷 전화 등으로 주문을 접수해도 직접 방문해 주문 내용을 확인하고 감사표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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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소리 한번 들어봤으면….', '나이 마흔에 인생역전하고 싶은데...'

모든 월급 생활자들이 갖고 있음직한 이 두 가지 소원(?)을 한꺼번에 이룬 사 람이 있다.

방일석 올림푸스한국 사장(40)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2000년 잘 다니던 전 직장 삼성을 나와 직원 5명으로 올림푸스한국을 시 작했다.

이제 겨우 3년 남짓 지났을 뿐인데 올해 올림푸스한국은 자회사 ODNK 를 포함해 직원 250명에 매출 190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정도도 '인생 대역전'이다.

하지만 방 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1일 쟁쟁한 일본인 경영인들을 제치고 올림푸스 본사의 아시아ㆍ태평양 영상시스템그룹 총괄사장과 올림푸스중국 부회장으로 선임된 것이다.

남들은 평생 하나 갖기도 힘든 `사장님` `회장님` 타이틀을 3개나 갖게 된 셈 이다.

2000년에 세웠던 올림푸스 최연소 사장이란 기록에 최연소 부회장이란 기록도 더하게 됐다.

"비결요? 그냥 열심히 했던 기억밖에 없는데…."

하지만 방 사장은 `그냥` 열심히만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월급쟁이 사장이지만 진짜(?) 월급쟁이였던 삼성전자 시절부터 `내 일 에 있어서는 내가 곧 사장`이란 생각으로 일해온 것이다.

"삼성을 다니면서 월급쟁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주인의식이 강했다 고 할까요. 특히 제가 있던 플래시메모리 사업은 당시만해도 신규 사업이라 직 급을 떠나서 경영자 마인드를 갖고 일하기 좋았죠."

올림푸스와의 인연도 그의 유별난 주인의식에서 시작됐다.

95년부터 삼성 일본 주재원으로 거래처 올림푸스와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 면서 올림푸스 본사 임원진과 신뢰를 형성해왔다.

그리고 2000년 봄, 올림푸스 경영진이 한국 디지털카메라 시장의 성장 가능성 에 대해 궁금해 하길래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주말을 이용해 보고서를 만들어 줬던 게 계기가 됐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의 보고서에 감탄한 올림푸스 경영진이 한국 사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해왔다.

그의 월급쟁이 같지 않은 `주인의식`이 그를 올림푸스한국의 `주인`으로 만든 셈이다.

그는 "처음부터 나와 한국 직원이 주인이 되는 올림푸스한국을 만들고 싶었다" 고 말했다.

결국 그의 의지는 관철됐다.

다른 일본계 기업과 달리 올림푸스한국은 회계와 인사, 경영에서 일본 본사로 부터 완전 독립했을 뿐만 아니라 올림푸스 전체의 소프트웨어 연구개발과 생산 에 주력하는 ODNK를 자회사로 설립할 수 있었다.

"올림푸스한국에는 저 외에 임원이 1명밖에 없습니다.

연매출 600억원을 올리 는 시화공장 총책임자가 과장일 정도죠. 직원 모두가 `내가 곧 회사의 주인`이 란 마인드로 일한 게 올림푸스한국의 성공 비결이라고 할까요."

◆방일석 사장은...

△63년 충남 천안생 △82년 숭실고 졸업 △86년 중앙대 전기공학과 졸업 △88 년 ROTC 제대 △88년 삼성전자 엔지니어 입사 △95~2000년 삼성 일본 주재원 근무 △2000년 9월 올림푸스한국 사장 취임 △2003년 12월 올림푸스 아ㆍ태 영 상시스템그룹 총괄사장ㆍ올림푸스중국 부회장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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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애ㆍ가난 딛고 기업가로 우뚝 김동환 감라씨엔아이 사장 ] *******************



볼펜을 생산하는 길라씨엔아이 김동환(46)사장은 신체장애와 가난, 학력을 모두 극복하고 견실한 중소기업을 일궈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김사장은 어릴 때 방바닥을 굴러다녀야 했고 어머니가 방모퉁이를 가로질러 걸어놓은 동아줄을 잡고 걸음마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2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외가 친척이 도박에 빠지는 바람에 빚쟁이들이 집안살림을 모두 가져가면서 길거리로 나앉게 됐다. 어머니와 시장길목에 좌판을 벌이고 계란과 떡을 팔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텃새가 심했어요.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시장경비원들이 계란과 떡이 담겨있던 바구니를 발로 차며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지금도 그때의 서글펐던 기억들이 또렷합니다.”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떡을 집어먹으며 배고픔을 달래야 했던 옛날의 아픈 기억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김 사장에게는 신체장애, 가난과 함께 짧은 학력이 또 하나의 콤플렉스다.

그는 집이 가난해 고등학교 2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자퇴해야만 했다.

그는 방송통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움에 대한 열망을 달랬다. 김사장이 발명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기반은 이렇게 해서 다져졌다.

“어느날 저녁 길거리에서 경찰관들이 메모판에 무엇을 쓰느라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한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한 사람은 무엇을 쓰고 있더라구요.
그순간 볼펜에서 빛이 나오면 어두운 곳에서도 간단하게 메모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바로 개발에 들어갔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외주업체를 찾았고 밤을 새워가며 연구개발에 매달렸다.

오늘의 길라씨엔아이를 있게 한 반디펜은 이렇게 탄생했고 지금은 중동과 동남아 등 해외시장에 수출하는 인기상품이 됐다.
이어 그는 경찰봉, 도로표지병, 라이트스틱 등을 잇따라 개발하면서 매출액 100억원의 견실한 중소기업을 일궈냈다.

반디펜은 볼펜볼에서 빛이 나오는 제품으로 깜깜한 밤에도 사용할 수 있다. 미국, 이스라엘 등 군부대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음악회 등의 행사에서 관객들이 환호할 때 좌우로 흔드는 라이트스틱도 길라씨엔아이에서 만든 제품이다.

“같은 쥐를 보더라도 누구는 징그럽다고 외면하지만 누구는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시각의 차이죠. 전자에게는 쥐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 후자에게는 미키마우스를 만들어낼수 있는 가능성이 되지요.”

김사장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말고 가능성을 보고 도전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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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봉 1억 뿌리치고 사업가변신 승부수 황인규 프랜드리베이비 사장 ] ***************



[인생 2막 새로운 도전]

황인규 프랜드리베이비 사장은 출산유아용품전문점에 인생의 승부수를 띄웠다. 그리고 당당하게 사업가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현실안주라는 단어를 생리적으로 싫어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화를 모색하는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 굴지 보험회사의 잘 나가는 중간간부로 일하던 황인규 사장은 연봉 1억원에 사인하기 3일 전 사표를 썼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잘나아가는 출산유아용품 프랜차이즈 업체`프랜드리베이비`의 사장이 돼 내일의 꿈을 키우고 있다.


<'내 사업을 해볼까' '월급쟁이가 편하겠지``이제는 기회가 없을거야``기회는 또 올지도 몰라…`>

황 사장은 한 달여를 끌어온 결정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황사장은 “결단의 갈등은 절체절명의 운명처럼 다가왔다”며 “당시에는 아마 햄릿도 이만큼 고뇌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삼성생명 강남지역 영업관리 차장으로 일하던 황 사장이 사업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7년 말 IMF를 거치면서였다.

직장 선후배들이 하나 둘 구조조정 한파에 밀려 떠나갔지만 갈 곳이 없어 보직도 없이 두세달 씩 직장에서 머뭇거리는 그들을 보며 황 사장은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차라리 제가 떠나고 싶었어요. 동료들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졌어요. 일단 떠나기로 맘을 단단히 먹었죠. 하지만 나이가 얼만데, 애들처럼 대책도 없이 사표를 던질 수도 없고…”

황 사장은 서서히 준비를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넷을 뒤졌다. 영업을 하면서도 꾸준히 사업을 구상했다.

고민을 거듭한지 9개월. 유아용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한 업체를 접한 순간 그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외치며 무릎을 쳤다.

98년 8월, 황 사장은 대출금 4,000만원을 종잣돈으로 강동구 둔촌동에 10평 규모의 아기용품 매장을 냈다.

이때부터 직장생활과 사업을 병행하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첫 달 매출은 170만원. 월세와 종업원 월급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였지만 그는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으로 매달렸다.

황 사장은 마일리지 도입, 선물공세, 안부전화 등 삼성생명에서 익힌 영업 노하우를 본격적으로 사업에 접목했다.

그의 고객만족전략은 곧바로 먹혀 들었다. 한 달만에 매출이 2,000만원으로 늘었고 석달째는 2,500만원이 됐다.

황 사장은 그동안 준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로 마음먹고 프랜드리베이비로 가게이름을 바꿨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가격이 싸고 품질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하루 최고 매상이 1,070만원까지 올랐다.

그런 그에게 사업을 한 단계 키울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98년 12월 말, 안산에서 유아용품점을 한다는 사람이 “프랜드리베이비의 취급 상품들을 팔고 싶다”며 찾아온 것이다.

황 사장은 이 사람을 첫 번째 가맹점주로 97년 한해 동안 7개의 점포를 열었다. 사업이 번창할수록 직장생활과 사업의 병행이 어려워진 황 사장은 2001년 3월, 고민 끝에 사표를 제출했다. 연봉 1억원 사인을 3일 앞둔 날이어서 주위 사람들은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사장은 연봉에 사인을 하면 또 1년 동안 샐러리맨 생활을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과감히 미련을 접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 그의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가맹점은 한 달에 3∼4 군데씩 늘어 지금은 50여 개에 이르고 있다. 황 사장은 300∼500여개의 아이템 중 인기가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품목은 과감히 도태시키고 반응이 좋은 상품은 물량을 늘려 소비자의 기호를 철저히 반영했다. 품목이 바로 유행이고 경쟁력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또 20∼30대 신세대 여성 층을 타깃으로 출산용품 외에 장난감, 교육자재, 선물용품 등에 이르는 400여 종의 제품을 취급, 원스톱 쇼핑을 구현했다.

이제 사업을 본 궤도에 올린 황 사장의 목표는 업계 선두권에 올라서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열정과 노력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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