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처신화 탄생--레인콤 대표(양덕준 사장) -------


또 하나의 벤처 신화가 탄생했다.

'아이리버'란 상표의 MP3 플레이어로 세계 시장을 휩쓴 레인콤이 19일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자마자 시가 총액 6천8백38억원으로, 코스닥 간판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날 레인콤의 주가는 공모가(4만7천원)의 두배인 9만4천원으로 첫 거래 가격이 정해진 뒤 거래 시작 50초 만에 가격제한폭까지 올라 액면가(5백원)의 2백10배인 10만5천2백원으로 마감했다.

<관계기사 19면>

1999년 초 자본금(5천만원)과 운영비 등 2억원으로 회사를 세운 양덕준(52·사진)사장은 1천6백35억원(1백55만주, 23.97%)어치의 주식을 가진 벤처 부호가 됐다. 梁사장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대표 등과 함께 단숨에 벤처 갑부 3인방 대열에 진입했다. 1천~5천주의 우리사주 배정분을 갖고 있는 임직원들도 1억~5억원이 넘는 자산가가 됐다.

레인콤이 MP3 플레이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0년 8월. 특히 자체 브랜드인 아이리버로 제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월이다. 제품 생산 3년여 만에 국내 시장의 절반을, 세계 시장의 22%를 차지하는 최강자로 부상한 것이다. 해외에선 필립스·애플 등을 앞질렀고, 국내 시장 점유율은 선발 주자인 삼성전자의 세배 규모다. 이름도 없던 중소기업이 국내외 대기업을 가볍게 따돌렸다.

삼성전자에서 20년간 근무하며 비메모리 반도체의 해외영업 담당 이사를 맡고 있던 양덕준 사장이 동료 6명을 규합해 세운 레인콤의 첫 사업 아이템은 반도체 유통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의 특성에 한계를 느낀 梁사장은 MP3 플레이어 같은 디지털 복합기기로 눈을 돌려 개발 작업에 착수했다.

품질에선 자신있는 제품을 만들어냈지만 유통망을 뚫을 수 없어 처음엔 제조업자 개발 생산(ODM) 방식으로 미국 소닉블루에 '리오'란 브랜드로 납품했다. 이후 시장에서의 반응에 자신을 얻고 지난해 독자 브랜드인 아이리버를 만들었다.

이 회사 조용준 과장은 "특히 고장난 제품을 고친 뒤 고객의 집이나 회사에 택배로 배달하는 등 서비스에 최선을 다한 것이 성공의 또 다른 비결"이라고 말했다.

레인콤은 99년 이후 올해까지 연평균 2백63%의 매출액 성장률을, 5백18%의 당기순이익 성장률을 달성했다. 올해 매출액도 지난해의 세배 가까운 2천3백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김준현 기자

takeital@joongang.co.kr


레인콤 연혁
^설립:1999년 1월
^대표:양덕준
^주력제품:MP3 플레이어
^올 매출액:2천3백억원(추정)
^올 당기순이익:4백30억원(〃)
^국내시장 점유율:50%
^세계시장 점유율:22%
^주가:19일 현재 10만5천2백원(액면가의 2백10배)


<앞으로는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성공할 길이 더 많이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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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밀리레스토랑 9社 1등 점장들의 '나만의 집객 노하우' ] *******************



< 고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

일 년 중 고객이 지정한 하루에 쿠폰을 제공하는 '원데이스페셜(One Day Special)' 서비스,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음식을 무료 서빙하는 '웨이팅 푸드(Waiting Food)' 서비스, 추첨을 통한 무료 식사권 제공, 빵 등 일부 메뉴의 '리필(Refill)' 서비스, 무릎을 꿇고 주문받는 이른바 '퍼피독(Puppy Dog)' 서비스, 어린이 전용 놀이방 등 다양한 편의시설 제공….

불황을 쉽게 타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이러한 서비스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주5일 근무제 도입으로 외식업계가 호황을 누릴 것이라는 당초 전문가들의 예상에도 불구하고 지난해부터 경기 불황이 지속되자 패밀리레스토랑 업계에는 비상이 걸려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고, 가격을 인하하고, 심지어 패스트푸드점이 발행하던 할인 쿠폰까지 등장했지만 매출에서 큰 변화는 감지되지 않을 정도다.


< 기본기에 더욱 충실해야 할 때 >

1988년 미도파백화점이 서울 신사동에 코코스 1호점을 낸 데 이어 TGIF, 스카이락, 씨즐러, 베니건스, 토니로마스, 마르쉐, 빕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등이 경쟁에 차례로 뛰어들면서 국내 패밀리레스토랑 업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게다가 지난 9월에는 최강의 패스트푸드점인 피자헛까지 피자헛플러스를 새로 론칭하면서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들 업체들은 서울 등 수도권은 물론 지방에서까지 출점전쟁을 벌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황이 장기화되자 점포들은 말그대로 생존 경쟁으로 내몰렸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업계에서는 벌써 포화상태에 달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업계는 사면초가에 빠졌지만 인기 패밀리레스토랑에는 여전히 손님들의 줄이 길다. 이들 점포를 이끌고 있는 점장들은 어떻게 고객들을 매장으로 끌어들이고 있을까.

12월2일 오후, 국내 주요 패밀리레스토랑 업체에서 최고 점포로 뽑힌 점장 9명이 서울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 모였다.
그들은 각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선발한 최고 점장들인 만큼 불황속에서 누구보다도 발빠른 대응책을 마련해 놓았다.

대부분이 나름의 집객 노하우를 통해 매출 그래프의 화살표를 위로 올려 놓은 주인공들이다. 1등 점장들의 진가는 위기 속에서 더욱 또렷해진 셈이다.

명예퇴직 바람에 휩싸인 기업에서는 '삼팔선'이나 '36.5'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지만 이들 1등 점장들은 공교롭게 모두가 30대.

다양한 패밀리레스토랑의 콘셉트만큼이나 9명의 점장이 말하는 집객 노하우는 다양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점포운영의 모든 것을 고객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 패밀리레스토랑 업체에서도 최고 매출을 내고 있는 1등 점포 점장들은 “이런 때일수록 패밀리레스토랑의 기본 콘셉트에 충실하면서 타 업종과 차별화된 마케팅을 시도해야 고객들의 발길을 되돌릴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9명의 점장들이 털어놓은 불황기 집객 비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다닌다. 고객들이 직접 음식을 시식할 수 있도록 음식을 들고 회사로 찾아가기까지 한다.
고객의 손에 쥐어준 닭다리 하나가 여러 장의 명함이나 전단지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2. 지역 고객에게 만족하지 않고 타 지역 고객들까지 타깃으로 잡는다. 고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서울은 물론 일산·분당 등 경기도 지역까지 고객을 찾아나서 자신의 점포를 알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3 충성고객을 만든다. 점장들은 여러 매장을 옮겨 다니지만 멀리서도 옛 고객들이 찾아올 정도다. 어느 매장을 가더라도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충성고객이 생기는 곳이다.
충성고객은 입소문을 통한 무료광고 메신저 역할을 해준다. 고객에 최선을 다하는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철저히 실천하는 것이다. 또 충성고객은 신규고객에 비해 너그럽다는 부수효과도 노릴 수도 있다.

4. 솔선수범한다. 직원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점장이 직접 고객들의 클레임(불만사항)을 직접 해결한다.
'앞으로 시정하겠다'는 식의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한다. 퇴근 후나 휴가 중에도 고객의 불만사항이 있으면 매장으로 돌아와 그것을 해결하기도 한다.

5. 신규 고객보다 기존 고객 유지에 노력한다. 사실 패밀리레스토랑이 포화상태라는 현실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고객의 유입은 어렵다.
타 브랜드를 이용하는 고객을 빼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기존 고객이 빠져 나가지 않게 ‘문단속’에 철저히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6. 고객의 재방문을 유도한다. 이를 위해 결코 고객에 대한 자신들의 서비스에 스스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
항상 고객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발견하고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점장의 몫이기 때문이다.

7. 목표 고객을 명확히 해야 마케팅력이 극대화된다. 젊은 여성·단체고객·VIP고객·가족고객 등 자신들의 매장과 상권에 맞는 주고객을 철저히 파악하고 집중 공략한다. 여러 계층의 고객을 다 잡겠다는 것은 인력과 시간, 노력만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8. 직원을 가족처럼 대한다. 직원들의 불만이 없어야 고객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점장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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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취미인 사람들은 '베텔스만'이라는 북클럽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베텔스만에 대해 '책 만드는 곳이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을 했던 이들도 정작 회사 규모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베텔스만은 현재 전 세계 60여 나라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미디어 제국이다. 이 제국에는 1백 종류가 넘는 신문·잡지와 역시 1백여곳의 출판사, 24개의 TV 방송국, 17개의 라디오 방송국, BMG를 비롯한 수십개의 음반사, 그리고 온라인 서비스망이 있다.

지난 1835년 독일에서 조그만 가족 기업으로 시작한 지 1백70여년 만에 8만1천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한 베텔스만.

1940년대 말만 해도 매출액이 1백만 마르크에도 못 미쳤으나, 지금은 이보다 무려 4만1천배나 증가한 4백10억 마르크를 넘어섰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영세한 출판사에 불과했던 베텔스만이 이렇게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 회원제 판매로 기반 일궈 >

베텔스만은 독일의 베스트팔렌주 동부 귀터스로라는 작은 마을에 본사를 두고 있다.
외양만 봐서는 도저히 전 세계 미디어를 지배하고 있는 그룹의 본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 작은 곳에서 '신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그 신화는 라인하르트 몬(Reinhard Mohn)이라는 경영자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올해로 만 82세를 맞은 그는 지금도 귀터스로에 있는 검소한 베텔스만 재단 사무실로 매일 출근한다.

“사무실은 깊이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정리 정돈돼 있고 조용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그는 결코 호사스러운 외관과 겉치레를 용납하지 않는다.

라인하르트 몬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잿더미로 변해 버린 베텔스만의 건물에서 사업 재건에 나섰다.

당시는 생존에 필수적인 소비재를 구매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출판업이 잘 안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을 만큼 경제는 피폐했고 베텔스만을 비롯한 많은 회사들은 자금난을 겪어야 했다.

라인하르트 몬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1950년 6월1일 시작한 '레제링'(Lesering)이라는 '회원제 서적 판매조직'이 그것.

'독자들이 우리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책이 독자를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레제링은 베텔스만과 고객들 모두에게 윈윈이었다.

출판사로서는 매출을 미리 예측할 수 있어 보다 많은 책들을 훨씬 값싸게 생산해서 많은 독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어 좋았고 독자들은 가만히 앉아 좋은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같은 방식은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켜 시작한 지 1년 만에 회원수 10만명을 돌파했고, 4년 후에는 1백만명, 그리고 1960년에는 3백만명의 조직이 됐다.

당시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대성공이었고 베텔스만이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 또한 이 레제링이었다.

60년대에 이르자 베텔스만은 더이상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직원수가 5천명을 넘어섰고 연 매출도 1억5천만 마르크를 넘어서는 대기업이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인하르트 몬은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었지만 회사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다 보니 새로운 경영방식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일정 규모 이상 성장하면 모기업과 분리시켜 동반자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파트너십 모델이었다.

모기업과 분리된, 독자적인 경영권을 지닌 수익센터의 대표는 인사·자본 운영·생산에서 최고경영자와 비슷하게 수익을 분배받는 것과 동시에 상당한 경영 자율권을 보장받았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경영방식이었다.

물론 쓰라린 아픔도 있었다. 93년 독일 쾰른의 TV 방송국인 VOX사가 파산하면서 베텔스만은 설립 이래 가장 큰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다.
실질적으로 수익을 내지 못하는 수익센터들이 늘어나면서 부실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베텔스만의 경영진은 이같은 징후를 통해 내실 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성장 일변도 정책을 수정했다. 사실 그것은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경영진은 우선 각 수익센터의 정리·통합작업을 통해 90년대 말까지 그룹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98년 11월 회장으로 취임한 토마스 미델호프는 인터넷 시대에는 무엇보다 스피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세 가지 경영 원칙을 발표했다.

'High speed', 'Content is king', 'High Trust'가 그것이다.
이때부터 베텔스만은 이 세 가지 경영 원칙을 근간으로 하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략방향을 설정해 실천하고 있다.


< 독특한 기업문화 '베텔스만 에센스' >

이제 베텔스만은 더 이상 출판사가 아니다. 베텔스만의 영역은 엄청나게 넓다.
신문과 잡지·음반·라디오·TV방송은 물론이고 온라인 서비스와 검색엔진·전자상거래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소니처럼 고객과 접점을 확보할 수 있는 콘텐츠 플랫폼 구축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기존의 서적·영화·음악 등의 각종 콘텐츠를 고객에게 직접 제공할 수 있는 다각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콘텐츠의 생산과 배분을 모두 담당할 수 있는 통합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전 실현을 위해 베텔스만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사업 전개와 더불어 기업문화의 재구축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네트워크 문화 창조를 목표로 한다”는 미델호프의 말은 기업 내 신뢰의 문화, 빠른 생각과 판단의 문화를 더 확고하게 구축해야만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라인하르트 몬·마르크 뵈스너·토마스 미델호프로 이어지는 베텔스만 경영자들의 철학은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바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베텔스만의 직원들은 이러한 그들만의 기업문화를 '베텔스만 에센스'라 부르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전 직원들이 자신들의 자산을 기업에 투자하고 공정하게 수익을 배분받는 독특한 기업 문화, 이러한 기업 문화가 직원들이 회사의 성공을 위해 다함께 노력하도록 하는 동인이 됐으며,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직원들과 함께 나눈 성공.' 이것이 바로 오늘의 베텔스만을 있게 한 성공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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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박사 부대찌개 '주동만 사장' ] ******************************


모박사 부대찌개 '주동만 사장'

연탄난로를 들여놓고 나란히 누운 다섯 식구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가장인 주동만씨가 생활고를 감당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연탄가스가 방안에 가득찰 무렵 큰 아들이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렸다.

"죽을 결심으로 다시 살아보자"고 두팔에 매달렸다.

연탄난로를 바깥에 내다놓고 주씨는 펑펑 울었다.

20여년전의 이야기다.

경기도 안성을 본거지로 탄생한 '모박사 부대찌개'(www.mamadoctor.com,031-675-5288).

주동만 사장(61)이 모박사 부대찌개를 개발한 장본인이다.

'모박사'란 이름엔 부인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다.

성이 모(毛)씨인 부인을 박사처럼 존경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주 사장의 장사 인생은 14세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 행상,옷가게 점원,공장기술자,책 도매상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에든 손을 댔다.

"6·25전쟁 직후라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지요.먹고 사는게 급해 안해본 일이 없이 온갖 장사에 다 손을 대봤어요.덕분에 열 다섯살 때 처음 적금에 들어봤습니다."

10대에 처음 시작한 행상은 20대로 이어졌다.

제대후 곧바로 결혼했지만 일자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부인은 당시 천안경찰서 수사과장의 딸.

어울리지 않은 결혼이란 눈총을 받았다.

그럴수록 가장으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밀려왔다.

닥치는대로 일했다.

버스와 열차안이 그의 장사 무대였다.

손톱깎이,빗,호두과자 등 잡다한 물건을 팔아 돈을 모았다.

"행상으로 모은 돈을 밑천삼아 책 도매상을 했어요.교재 참고서 소설 백과사전 같은 덤핑 책을 사들여 충남 서산 당진 장항 등지를 돌아다니며 팔았는데요,이익이 짭짤해서 돈을 꽤 모았지요."

이번에는 좀 자신이 붙어 사업을 좀 더 확대했다.

그러나 이게 악수였다.

가진 돈을 몽땅 말아먹었다.

허탈한 심정에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아이들도 3명으로 불어났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타향인 안성에 올라와 또 다시 행상을 시작했지요.장사가 안될때는 점심도 굶고 허기져서 논두렁에 쓰러진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지요."

연탄가스 자살소동을 벌인게 바로 이 무렵.

그런 일이 있고난 뒤 더욱 악착같이 장사에 매달렸다.

떠돌이 생활이 지겨워 만화방을 차렸다.

70년대초 주씨의 50평짜리 만화방은 안성에선 규모가 큰 편이었다.

"당시 만화방의 베스트셀러는 이현세의 까치와 박봉성의 기업만화였어요.우연히 기업만화를 보다가 만화 스토리가 내 인생과 너무 닮아 깜짝 놀랐지요.장사를 하든,사업을 하든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도 이때였습니다."

어느덧 나이도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음식점 장사를 하기로 하고 안성 변두리에 점포를 물색했다.

처음엔 임대했고 나중엔 아예 사버렸다.

자동차가 점점 많아지고 도시 주변 도로가 넓어지는 추세여서 변두리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이 자리에서 16년간 음식점 장사에 매달리고 있다.

음식점 초기에는 기사식당 간판을 걸고 부대찌개,삼계탕,해장국,제육볶음 등 다양한 메뉴를 취급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큰 돈이 안됐다.

밥벌이에 그치는 정도였다.

"한가지로 일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그래서 부대찌개 맛을 나름대로 개발해 승부를 걸기로 했지요.부대찌개로 메뉴를 단일화 하자 처음엔 매출이 줄다가 1년정도 지나니까 매출이 껑충 뛰는 것이에요.바로 이거다 싶어 무릎을 쳤어요."

주 사장이 개발한 부대찌개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가맹점을 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맹비 5백만원씩 받고 기술을 전수해주다보니 1년만에 20개가 넘어섰다.

지역도 수도권에서 충남 전북 경남북으로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기술을 전수해주는 것 외에 본사가 요구하는건 없어요.다만 부대찌개의 주 재료인 햄이나 소시지는 본사가 지정하는 최고급 물품만 받아야 합니다.안그러면 맛이 제대로 나지 않기 때문이죠."

개인 식당에서 프랜차이즈 본사로 영역을 넓히면서 일손이 달렸다.

공무원을 하던 장남이 맨 먼저 합류했다.

최근에는 차남과 딸,사위까지 잇따라 주 사장 일을 돕고 있다.

사업확장에 따라 가족기업으로 변모한 셈이다.

"현재 10억원을 들여 본점 신축공사를 하고 있는데요,그야말로 카페같은 식당입니다.6천원짜리 부대찌개도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을 손님들에게 드리려고 합니다."


'주 사장의 사업철학'

장사로 5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주 사장은 장사의 달인이다.

그러나 성공했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건 몇년 되지 않는다.

장사가 안정권에 접어들어 부자로 인정받은 것은 50대 중반 이후다.

멀고 험한 장사 역정을 걸어온 셈이다.

그가 내세우는 장사의 키워드는 '준비성'과 '전문성'.

미리 미리 준비해 놓으면 때가 온다는 논리다.

남들이 좀처럼 따라하기 힘든 기술을 개발해 놓는 것은 전문성 영역이다.

그에게 있어 우연이란 없다.

"모르는 사람들은 나보고 운이 좋다는 말도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안성과 천안에 사둔 땅도 지금은 많이 올랐지만 살 당시에는 모두 쳐다보지도 않던 곳이죠.미리 내다보고 준비한 결과 수십억원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거예요."

부대찌개에 관한한 그의 전문성은 박사급이다.

맛의 핵심인 육수도 그가 직접 개발했다.

밤잠을 안자고 매달린 결과다.

우선 물은 아무거나 쓰지 않는다.

반드시 경수를 쓴다.

경수에 넣는 잡뼈는 한우 뼈만을 쓴다.

수입산은 절대 안된다.

햄과 소시지도 싼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최고급 유럽산만을 고집한다.

사리로 넣는 라면은 농심라면만 사용한다.

이렇게 하면 가맹점마다 야채류가 다르더라도 거의 같은 맛을 낸다는게 주 사장의 설명이다.

부대찌개에 대한 그의 애착은 남다르다.

1950년대 이후 서민의 애환이 서린 음식이라 앞으로 최소 30년간은 더 명맥을 이어갈 음식이란 주장이다.

지난해 가을 부대찌개 온라인 판매도 시작했다.

소비자 기호와 유통채널이 다양해지는데 대한 대응전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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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창업열전] 곱창 순대 요리점 ‘숲풀림’ 이재영 사장

대학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한달 수입이 기껏 48만원. 5평 남짓한 옥탑방 월세를 지불하고, 라면 몇 박스를 사면 남는 게 없다.

라면이 물려서 힘든 게 아니었다. 영화, 연극 등 문화생활은 평생 즐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 27세였던 이재영씨가 무엇보다 힘들어 했던 것은 빚이었다. 경호사업을 벌인 지 1년 만에 빚진 돈만 5000만원가량. 그에게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평생 갚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목을 옥죄는 빚에 대한 부담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빚만 갚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우선 떠오르는 게 장사더군요. 그러나 주변의 시선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명색이 대학 시간강사였으니까요.”

이는 사치스런 이유에 불과했다. 반년 남짓 고민하다가 이씨는 결국 스스로 타협을 봤다. 시간강사와 장사를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창업자금은 200만원. 무엇을 시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이 돈마저 없어 누나와 여자친구의 카드를 빌려 만들었다. 그는 이 돈으로 1t이 채 안되는 중고 소형트럭을 마련하고, 곱창과 순대 재료를 샀다.

영업장소는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삼호아파트 후문 쪽. 강사로 나가는 대학과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1996년 10월부터 그는 낮에는 모 대학교 경호의전과 시간강사로 일하고,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차량을 활용한 노점장사를 시작했다.

이는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7년 만에 노점상에서 가맹점 110여개를 거느리는 사장이 되는 첫걸음일 뿐이었다.

첫날 수입은 3만원. 첫수입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한달 수입 100만원은 거뜬할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에 미치자 행복감마저 느꼈다.

단골고객은 의외로 빨리 늘어났다. 부지런하고 꾸밈새 없는 그의 언행에 대해 주민들이 호감을 가졌다. 단골이 늘어나면서 이씨의 요리솜씨도 눈에 띄게 향상됐다. 단골들로부터 요리를 배웠기 때문이다.

“단골 손님들이 하는 ‘이렇게 만들어 봐라’ ‘어디에 가면 저렇게 하더라’라는 말을 귀담아 들었지요.”

이제 하루 24시간이 따로 없었다. 낮에는 대학, 밤이면 장사, 새벽이면 요리연습…. 한마디로 미쳤다.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이같은 강행군은 무술로 단련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한때 대기업총수 경호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무술가였다.

그의 이같은 ‘미친 성실성’은 장사 시작 7개월만인 97년 5월에 1일 매출 10만원을 돌파하는 것으로 보상받았다.

그는 점차 장사에 매료되어 갔다. 그는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곱창 순대 요리에 대해서만은 최고가 되고 싶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맛있다는 전국의 식당을 찾았다. 97년은 요리 사사를 위해 ‘전국 음식점 순례’를 한 해로 얘기해도 될 것이다.

장사를 시작한 지 1년2개월만인 97년 12월. 그는 대학강사자리를 미련없이 던졌다. 도박에서 말하는 소위 ‘올인’ 선언이었다.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라는 세속적인 문장이 의미를 가질 때였다.

“그때부터 장사 이상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랜차이즈 사업 구상이 그림의 대강입니다.”

97년 말에 터진 IMF외환위기는 이사장에게 오히려 기회였다. 가격에 장점을 가진 노점이 부각되면서 노점상 매출이 급증한 것이다. 1일매출 100만원 돌파도 간혹 이어졌다. 탄력이 붙었다.

구매손님들로 노점상이 북적대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 기술전수를 부탁했다. 소위 ‘자생적 프랜차이즈’가 이뤄진 것이다. 그에게 물건을 받아가는 노점상만도 2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힘입어 그는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공장을 임대, 곱창과 순대 생산에 들어갔다.

“40평 규모의 작은 공장이지만 이곳에서 저의 미래 모습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이제부터는 장사가 아니라 사업’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솟구쳤습니다.”

그는 2001년 10월에 노점상을 하던 인근 지역에 직영점을 차렸다. 이는 만 5년 동안 해오던 노점상 시대를 마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국내 최초의 곱창 순대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가게 규모는 6평 남짓. 곱창 순대 시범점포로 적절한 크기였다. 가게이름은 ‘숲풀림’으로 정했다. 숲처럼 깨끗한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이듬해인 2002년 9월까지는 조금씩 가맹점이 늘어났다. 1개월에 2∼3건씩 가게를 오픈, 가맹점이 28개로 늘어났다.

그에게 또다시 기회가 왔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불황아이템인 곱창 순대가 부각된 것이다.

“1인분 5000원 남짓한 저가에다가, 당시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향수 어린 곱창 순대에 사람들이 몰렸지요. 마치 IMF 때를 연상케 했습니다.”

이후 최근까지 1개월에 5개 이상의 가맹점을 오픈했다. 2004년 1월 초 현재 가맹점은 차량을 이용하는 노점 가맹점 32개를 포함, 112개나 된다. 홍보 광보비 한 푼 안들이고 이만한 성과를 올린 프랜차이즈 업체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숲풀림의 성장에는 무엇보다 입소문이 주효했다. 가맹점개설은 대부분 점주들의 소개로 이뤄졌다.

숲풀림은 창업비용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익을 내는 업체로 업계에 소문이 나있다. 10평 기준으로 하루에 60만∼70만원 매출을 거뜬히 올리는 곳이 많다. 가게당 1일 평당 매출이 10만원을 넘는 곳도 있다.

“순수익은 노점상들이 더 좋습니다. 노점상들은 부대비용이 나가지 않는 상황에서 매출이 늘고 있거든요.”

이사장은 오는 2월 새로운 브랜드로 프랜차이즈사업에 도전한다. 흑염소요리가 주아이템이다. 전라도 음식인 흑염소요리에 대한 연구는 끝냈다. 건강이 주요 트렌드로 부각될 것으로 보고 2년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다. 때맞춰 국내에는 광우병 파동이 벌어지고, 웰빙붐이 일고 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돕고 있는 것일까.

7년만에 하루 3만원벌이 노점상에서 세칭 일류기업의 임원급 연봉 수십배를 버는 이사장에게 그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운이 좋았습니다.”

짧은 한마디. 더 이상 말이 없다. 이 말은 기자에게 낯설지 않다. 내실 있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가끔 듣는 말이다.

그러나 기자는 스스로 묻는다. 왜 이사장은 자신의 성공을 운으로 돌리는 것일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못내 궁금하다. (02)30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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