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자농민 제조기 민승규 씨 ] *******************************



< 벤처농업대 세워 농민교육 >

인삼초콜릿, 마늘초콜릿 등 우리 농산물 상품들이 예쁜 포장에 담겨 백화점 선물코너에 놓인다면? 밸런타인데이에 21년생 도라지로 만든 캔디 12개가 든 '252년간의 사랑' 한 상자를 받는다면 또 어떨까?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등 시장개방 문제를 놓고 농민시위가 끊이지 않는 요즘, 일각에서는 또 다른 '희망 찾기'가 한창이다.
그 중심에 민승규(閔勝奎·43)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이 있다. 그는 “농업도 섹시한 산업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 농사를 안 짓습니까? 농업에서 꿈 돈 희망이 안 보이니 그런 것 아닙니까. 농업으로 돈 버는 '스타 농민'이 많이 나오면 농업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는 첨단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한 '벤처 농업'을 지향한다. 전통농업에 과학과 예술 문화 등을 덧붙여 고부가가치화해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낸다는 것.

농산품에 예쁜 포장과 얘깃거리를 붙이고 대기업과 연계해 홍보와 유통체제를 바꾼 인삼초콜릿 도라지캔디 등이 이렇게 태어났다.

“그냥 농사만 지어선 안 됩니다. 팔릴 상품을 만들어야죠. 환경과 건강을 찾는 요즘 분위기에 미적 감각과 우리 고유의 정서까지 더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94년 일본 도쿄대에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농촌진흥청을 거쳐 '위기관리 전문가'로 삼성경제연구소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학부 때부터 품었던 농업에 대한 애정은 95년부터 경기 화성의 한 마을에 대한 정보화봉사 등 농촌봉사 활동으로 이어졌다.

2000년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충남 금산의 한 폐교에 한국벤처농업대학(www.vaf21.com)을 세우고 정문술(鄭文述) 전 미래산업 대표를 학장으로 초빙했다.

이 대학은 전국의 농민 중 '가장 빨리 부자가 될 만한' 학생들을 모아 마케팅 경영전략 등을 교육한다.
학생 선발기준은 창의력과 기업가정신. 명함과 e메일 주소가 없는 사람은 아예 입학자격이 없고 졸업논문은 '사업계획서'로 대체한다.

얼마나 톡톡 튀는 사업아이템과 실행계획을 내느냐가 심사기준.

매월 1회 1박2일씩 1년간 수업하는 과정이다. 해마다 90여명이 입학하지만 졸업생은 채 반도 안 된다.

수업비용은 철저하게 자부담, 강사료는 농산물이다. 커리큘럼에 따라 그때그때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빙하는데, 농민학생들과 밤샘토론을 해본 강사들은 '언제 다시 불러줄 거냐'고 조르곤 한다.

또 수업에서 농민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동안 고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고 반성한다.

“벤처 농업인들에겐 독특한 유전자 코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험심과 도전정신, 열정과 에너지가 그것이죠.”

졸업생 중에는 이미 '스타'가 태어났다. 매화꽃 축제로 유명한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 경영자 홍쌍리씨,

최근 일본에 200만달러 어치의 제품을 수출한 21년근 장생도라지 대표 이영춘씨,

인삼초콜릿으로 매달 억대 매출을 올리는 본정 이종태 대표, 부산에서 도정기술만으로 연 3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풍년농산 나준순 대표 등.

희망은 또 있다.

“성공사례 1000명을 만드는 게 1차 목표입니다. 홍쌍리씨가 뜨니 인근 농가들이 모두 매실을 재배해 수익을 올리게 됐습니다.
장생도라지에 납품하는 계약농가가 100곳이 넘고 버섯농사도 네트워크로 이뤄집니다. 벤처농업의 '생태계'는 그렇게 발전합니다.”

민 박사는 농업과 대기업의 관계 설정에도 신경을 쓴다. 기업 쪽에는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당장 쌀 한 가마 사주는 것보다 농민들에게 마케팅과 경영, 디자인 전략 등을 전수해달라는 얘기다.

이런 그이기에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쌀을 태우는 농민들의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정책도 문제지만 농민들 스스로 바뀌어야 합니다. 앞으로 10년은 자유무역이 대세입니다. 지혜로운 농민이라면 배수진을 치고 전략을 세워야죠.”

퇴근하면 벤처농업대학 연락센터인 서울 용산구 벤처농업포럼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는 ‘투잡족’ 생활. 밤낮없이 뛰며 농민들에게 꿈을 주는 그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뭘까.

“선친이 돌아가시기 전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상황버섯 등 좋다는 것은 모두 보내주셨어요. 그 덕인지 아버지는 2년 6개월을 더 사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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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라이프 생명보험(주) 보험설계사 오권용씨(32).

보험 에이전트들에게 최고의 영예라는 'MDRT(백만불 원탁회의)' 회원이자 억대 연봉을 받는 보험전문가다.

보험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일까? 오씨는 사실 최고 두뇌의 공학도들만 모여든다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 출신이다.

KAIST에서 산업경영을 전공한 오씨는 국내 대기업의 인터넷사업부와 개발기획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전형적인 엘리트사원이었다. 3년반의 직장생활.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책상 앞에서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는 일에 점점 싫증이 나고 있었다. 주어진 일만 수동적으로 하다보니 성취감도 적었고, 거대조직의 톱니바퀴 속에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느낌도 들었다.
현장에서 발로 뛰어다니면서 일한 만큼 대우를 받는 직업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지금의 회사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며칠 일해본 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자신의 적성에 '딱 들어맞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능력에 따라 그에 합당한 보상이 뒤따르고 유동적으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의 반대가 뒤따랐다. 그러나 확신을 갖고 선택한 길이었기에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왜 그 학벌에 하필 그 일을 하려드느냐'는 분들이 많은데, 모두다 잘못된 선입견입니다. 보험설계사만큼 전문적인 지식과 두뇌가 필요한 일도 드물거든요.”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매일 아침 7시 출근에 늦어본 적이 없고 밤 11시 이전에는 퇴근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유능한 보험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기계발에도 한치의 빈틈이 없었다. 주말에는 학원을 다니고 책과 씨름했다.

얼마전 CFP(국제공인재무설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뒤를 이어 감정평가사와 공인회계사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2년8개월을 그렇게 밤을 낮삼아, 주말도 없이 살았는데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다고 한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렇지요. 연애할 때 밤을 새워도 힘들지 않은 것과 똑같은 거죠.”

당연히 실적도 좋을 수밖에. 입사 1년여만에 빼어난 실적으로 MDRT회원에 가입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외국계 보험회사에서도 흔치 않은 경우다.

그의 꿈은 70살이 되어서도 현장에서 영업직으로 활동하는 것. 관리·감독만 하는 매니저직에는 흥미가 없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뛰어다니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학벌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였다면 과감하게 진로를 바꾸지 못했을 겁니다. 당연히 지금처럼 행복하지 못했을 거구요. 확신이 든다면 때로는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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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0만원을 20억 만들어 부동산 경매도사 이홍복 ] ***********************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이홍복 사장(37)은 자칭 라이프 디자이너(Life Designer)이다.

보험업계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연상되는 그러나 세상에 없는 새로운 직종을 만들어낸 이 사장은 자신을 부동산 경매 전문가라기보다는 라이프 디자이너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앞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도 거기서 찾을 작정이다.

"부동산 경매에 관한 한 박사라고는 못해도 도사 쯤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테크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은 10억이니 부자니 하면서 다들 들 떠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왜 벌려고하는지, 얼마나 벌려고하는 지 등에 대해서는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이지 못하고 목표가 없으면 그저 허상을 쫓고말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은 인간이 행복해지는데 필요한 한가지 요소입니다. 재테크도 그런 각도에서 접근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행복해지는 재테크를 위해서는 먼저 인생을 새롭게 디자인해야 합니다."

재테크 열풍에 대한 그의 충고가 이어진다.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을 스스로 신뢰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돈에 쫓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사람을 신뢰하겠습니까?"

이 사장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데다 인트라넷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를 차리는 등 IT쪽에도 식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경매 쪽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순전히 생존 차원이다. 지난 1997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IMF가 터졌다.

그 여파로 건물주가 부도나는 바람에 세들어 있던 사무실의 임차 보증금 9000만원을 날리게 될 상황에 처했다.

"배운 것이라곤 디자인과 컴퓨터가 전부라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이 너무나 불안했다"고 회고했다.

경매나 부동산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그가 관련 서적을 밤새워 탐독하고 법원이며 등기소, 은행, 변호사 사무실 등을 수시로 드나들게 된 것은 돈을 억울하게 그냥 날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하나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사장은 직접 뛰고 부딪히면서 경매에 관해서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 사장은 경매가 재테크의 수단이 될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게 됐다. 이 사장은 살던 집을 처가로 옮기고 손에 쥔 430만원으로 경매를 시작했다.

2000년부터 1년새 7건의 경매에 참여해 부동산 자산이 어느덧 20억원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뒀다.

지난 1999년 감정가 8000만원이던 빌라를 4300만원에 낙찰받았고, 2500만원에 낙찰받은 상가의 감정가는 1억1500만원에 달했다.

이 사장은 "대개 시가의 절반 가격에 부동산을 낙찰받아 상당한 수익을 얻었지만 초기 투자금은 한푼도 없었던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물론 돈 버는게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내 집 마련 차원에서 낙찰 받은 빌라는 점유자를 설득하고 타협하는데 수십번의 방문과 전화 통화가 3개월간 계속된 뒤에야 일단락됐다.

서울 성산동 빌딩은 낙찰받은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5건의 송사를 치뤄야했다. 그린넷이라는 프로그램개발 및 컨설팅 회사를 설립, 회사를 운영하는 5년동안 6억원 가량의 적자를 봤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부동산 경매 컨설팅 프로그램인 '천지인'을 개발한 것도 큰 자산이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이 경매로 돈을 벌 수 있을까?

"부동산 경매를 제대로 하면 돈이 보입니다. 1년에 한건만 제대로 성사시키면 1년간의 생활비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년 정도 부동산을 추적하다보면 평생 생활비를 벌어주는 물건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돈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돈벼락 맞을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경매가 수익률 높은 재테크 중의 하나이지만 일확천금이 생기는 일은 아니므로 과욕은 절대 금물이란 것.

이 사장은 "경매가 돈 된다고 하니 이 분야도 경쟁이 치열해진데다 어떤 물건이 좋다더라고 하면 이미 그 물건은 가치가 희석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너나 없이 경매를 돈벌이로만 생각하면서 달려드는데, 그리 녹녹치 않은 분야가 바로 경매입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재산이 경매로 날아가게 생겼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내가 경매로 수익을 내려는 이면에는 그것을 지키려는 강력한 몸부림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한 그게 서민들의 눈물일 경우도 많습니다."


이 사장은 요즘 경매와 돈, 인생에 관한 얘기를 인터넷(www.hongbok.com)을 통해 회원들과 공유하는가 하면 직접 사람들을 만나 강의도 하고 있다.

자신의 경매 경험담을 상세하게 담은 책을 내는데도 짬을 내고 있다. 날마다 출근하는 사무실에는 직원이래야 이 사장을 빼면 한두 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경매 투자는?

"최근에는 새로운 경매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낙찰받은 물건을 관리해야하는데다, 지금은 투자하기에 썩 좋은 시기는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경매도 투자라 남들 관심이 덜하고 가격이 쌀 때 메리트가 있는 법입니다. 경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하거나, 경매로 재산을 잃게 된 선의의 사람들은 무료라도 자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장은 지난 4월에 낸 첫 책(머니톡 머니텍)을 전문 출판사에 맡기지 않았다. 원고, 디자인, 마케팅, 판매 등 전 과정을 이 사장이 해냈다.
이 때문에 책의 제작 비용과 유통 비용이 일반 도서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만큼 이 사장에게 떨어지는 수입이 다른 책에 비해 몇 배는 많다. 전문 출판사에 맡기지 않은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패스트푸드점인 KFC의 창립자인 커넬 샌더스는 자신이 직접 회사의 CF에 출연하곤했는데 출연료 때문에 자주 실갱이를 벌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인색했다기보다는 넉넉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악착같이 더 받아낸 출연료를 몽땅 기부하는데 썼으니깐. 이 사장도 그럴 계획이다.

"돈은 나눠야 벌린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수익에 연연할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투자, 즉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더 공을 들여야합니다. 그러면 돈은 저절로 들어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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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코리아’ 하벨야나 사장

‘돌 코리아’ 임마누엘 하벨야나 사장(51)은 두 개의 인생을 살고 있다.

전반부 절반은 두 다리로, 그리고 후반부 절반은 한 다리와 의족으로. 하벨야나 사장은 다리 하나 없는 뒤쪽 인생을 덤으로 얻은 것이라 생각한다. 필리핀인으로 현재 다국적 청과기업 돌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돌 코리아 대표이사’ ‘돌 아시아 부사장’ ‘돌 뉴질랜드 대표이사’ ‘DLC 대표이사’ 등. 그가 경영인으로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또한 얼마나 노력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하벨야나 사장의 인생을 변화시킨 사건은 1978년 6월 일어났다. 필리핀 아테네오 드 마닐라 대학을 졸업하고 설탕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위험한 근무지로 단신 부임한 하벨야나 사장은 늘 베개 밑에 권총을 장전해 두고 잠을 잤다. 강도 등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사고는 새벽 2~3시까지 일하고, 곧바로 5시에 일어난 더운 어느 여름날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 장전을 풀다가 오발사고를 일으켰다. 발사된 총알은 오른쪽 넓적다리로 들어가 발꿈치로 빠져나왔다.

3주 동안 수술을 7번 받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다리를 자르기로 의료진이 결론을 내리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목숨을 잃었을 것을 다리 하나로 막았다”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상황보다는 무언가 확정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게 더 좋았다.

절단수술 중의 일화. 수술대에서 마취 처치를 해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는데, 회복실이 아니고 여전히 수술실이었다는 것. 물론 척추에 마취를 해서 고통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뼈 자르는 소리와 같은 수술 과정의 모든 소음을 들었다. 심지어 의료진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4시간여에 걸친 수술을 끝낸 뒤 마취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25세의 나이에 다리 하나를 잃은 것에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운동선수도 아니었고, 좀 불편하겠지만 사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다만 예전처럼 운동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축구와 골프를 어려서부터 배웠다. 의족을 차고 축구를 하기는 불가능했고, 골프만은 포기하기 싫었다.

수술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걷기 연습을 시작했고, 퇴원 후 한달 반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골프채도 다시 잡았다. 골프는 5살 때 변호사인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시작했다. 소년기·사춘기를 거치면서 즐겁게 체득한 골프. 골프에는 아버지와 성장기의 기억이 담겨 있다. 사고 당시 핸디캡은 4. 그때로서는 프로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동네 축구장에서 한 다리로 처음 골프 연습 스윙을 시작했다. 당연히 넘어졌다. 당장 균형을 잡기조차 어려운 형편에서 골프채를 휘둘렀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하벨야나 사장은 다시 일어났다. 그 풍경은 그러나 비장하지 않았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즐거웠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눈물을 훔치는 그런 광경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소년의 열망 같은 정겨운 모습이었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지금 핸디캡은 11~12. 싱글에 근접하는 실력이다. 스윙 자세가 달라지긴 했지만 라운딩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수영·스키 같은 계절 스포츠도 빼놓지 않고 즐긴다. 여름이면 의족이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는다. 그에게 장애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하벨야나 사장은 태생적으로 요즘 말하는 ‘아침형 인간’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 6시 전에 일어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골프를 배울 때도 6시에 라운딩을 나갔다. 부모님이 아침형이었고, 장성한 딸도 그렇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오후 6시에 재워 다음날 아침 6시에 깨웠다고 한다.

인생을 낙관하고 부지런하기에 다리 하나의 부재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업인으로서 경영관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그대로 반영된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늘 강조하는 두 가지는 상식과 집중이다. 지난 91년부터 3년 동안 돌의 한국 진출을 진두지휘할 때나 2001년 돌 코리아로 다시 부임한 이후나 일관되게 관철시킨 경영철학이다.

하벨야나 사장은 말한다. “인생이나 경영에 장애는 없다. 극복 가능한 불편만 더러 발견될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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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연봉에 현혹되지 마세요”

“소신을 가지고 일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푸르덴셜생명 이그제큐티브 라이프플래너 임재만(43)씨는 보험설계사들 사이에서 '종신보험의 산증인'으로 통한다.

벌써 10년 넘게, 종신보험 전문회사인 푸르덴셜생명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선 우직한 '보험사랑'이 느껴진다.

보험설계사들 10명 가운데 7명이 1년 이내에 그만둔다는 사실에 견주어 보면 그의 우직함이 더욱 빛이 난다.

물론 임씨가 보험설계사들 사이에 (신화)로 자리 잡은 것은 단순히 한 직장에 오래 다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푸르덴셜에 근무하면서 매주 3건 이상 계약한다는 의미의 '3W'를 450주 연속으로 달성했다.
얼추 계산해도 9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3W'를 달성한 셈이다.

보험설계사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이그제큐티브 라이프플래너'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탁월한 실적이 밑받침됐다.
이제 보험설계사로서는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는 위치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임씨는 “일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이해한다면 결코 힘든 일은 아니다”며 겸연쩍어 한다.

사실 임씨가 처음 보험설계사의 길로 접어든 90년대 초반만 해도, 보험은 단지 저축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보험설계사들도 종신보험을 설명하면서 저축의 기능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임씨는 종신보험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심어 주기 위해 노력했단다.

그는 고객들에게 가장이 없으면 가족들에게 돌아오게 될 고통을 당사자가 몸소 느낄 수 있도록 설득했다.

처음에는 다른 설계사들처럼 70∼80명에 이르는 지인들에게 종신보험에 대해 널리 알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했지만, 곧이어 단순한 고객유치 이상의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다.

핵심은 바로 신뢰를 쌓는 일이었다. 보험가입 추천도 종신보험에 가입한 고객들을 통해서 이뤄지도록 한 건 무엇보다도 신뢰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종신보험에 가입한 고객이야말로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고객들을 설득해 나가다 보니 어느새 임씨의 고객은 1400명을 훌쩍 넘어서게 됐다.

대개 보험설계사들은 고객을 설득해 보험에 가입시켰을 때 비로소 성취감을 느낀다. 하지만 임씨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보험금을 무사히 전해 줬을 때 보람을 느껴요.” 그는 사망보험금이 유족에게 지급된 후에야 비로소 보험설계사로서의 임무가 종료된다고 철썩같이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보험설계사의 길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늘 스트레스가 쌓여 힘이 들었다. 무작정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종신보험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못했던 90년대에 종신보험에 대해 이해시키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힘들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이런 자세 때문인지 어느새 스트레스는 습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는 보험설계사의 일이 “가장 좋은 일”이라며 자신 있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러면서도 임씨는 보험설계사를 지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생명보험회사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오랫동안 일할 각오가 섰을 때 지원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는다.

“억대 연봉만을 바라보고 보험설계사를 선택한 사람은 결코 오래갈 수 없어요.” 이미 억대연봉의 반열에 올라선 그는, 돈 버는 것보다 오래 일할 수 있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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