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와 쳤던 고스톱 게임으로 만들어 대박 ] ************************



◆ 인터넷포털 NHN 김범수 사장


국내 1위 인터넷포털업체인 NHN의 김범수 사장(39)의 일과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무려 한 시간을 욕조에서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즘 세상에 매일 아침 씻는 것이 뭐 특별한가 싶지만 김 사장에게 있어서 아침 목욕은 하루를 새롭게 충전해 쓸 수 있는 힘을 준다.

"기상하자마자 샤워하는 시간은 하루중 가장 생각이 집중되면서 행복한 순간입니다.
마음 편하게 물 속에 있다 보면 20∼30분 'Feel(느낌)'이 딱 꽂히며 사업 아이템이나 회사 조직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 사장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머리로 받고 있을 때면 폭포 수 아래 수양하는 수도승 심정이 이러리라는 생각이 든단다.

NHN은 지난해 인터넷포털 `네이버`에 지식검색 등 새로운 서비스를 성 공적으로 안착시키고 '한게임'에 게임 배급사업을 확장하면서 국내 일 등 닷컴기업으로 급성장했다.

김범수 사장도 종종 협의를 원하는 직원들과 전략회의를 하거나 업계 대표자로 참석해야 하는 외부 모임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정 신없이 하루를 넘기기 일쑤다.

본인이 '최고로 자유로운 시간'이라 말하는 아침 목욕은 지난 2000년 이해진 사장이 이끌던 네이버와 본인이 이끌던 한게임이 합병하기 전부 터 시작해 5년째 이어지는 신성한 의식(?)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닷컴 사업에 힘이 돼준다.

NHN은 지난해 매출 1666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고 영업이익도 전년보다 2배 이상 뛰었지만 직원 수가 연초 300명에서 700명으로 늘어 났고 아이브이엔테크놀로지와 솔루션홀딩스 등 기술업체들을 인수하고 합병하다보니 지난 4분기 실적 발표 때 '어닝쇼크'(기대 이하 실적)의 주인공이 돼버렸다.

김범수 사장은 그러나 차분히 준비해온 해외사업이 있어서인지 자신감 이 있어 보였다.

김 사장은 연초 중국 상하이 현지 사무실로 출장을 다녀온 데 이어 이 달중 일본 자회사인 한게임재팬을 방문해 순차적인 유료화 사업도 챙길 계획이다.

"지난달 상하이를 처음 방문해 현지에서 서비스를 준비중인 한게임 직 원들과 만났어요. 중국은 급성장하는 시장이지만 NHN이 후발주자로 뛰 어들어 약간은 흥분도 되지만 비장감도 들더군요."

NHN은 일찍이 2000년 한게임재팬을 설립해 일본 시장을 개척해와 지난 해까지 400만명이 넘는 회원을 모아 일본 웹보드게임 선두업체에 올랐 고 지난해 40억원대 매출(추정치)을 올렸다.

중국 사업을 위해 지난해 홍콩계 재벌업체 PCCW와 합작법인을 설립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위한 티켓 전산화사업에 뛰어든 것도 장기적인 포석이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SDS에서 PC통신 유니텔 사업 을 맡으며 인터넷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뜬 김범수 사장은 98년 한게임 을 창업했다.

자금이 달려 PC방을 운영하는 등 고생도 많이 했지만 김 사장은 특유의 낙관적인 성품으로 일과 놀이를 조화시켰다.

NHN의 한게임 서비스도 사실은 김 사장이 즐기던 바둑이나 당구,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치던 고스톱을 인터넷으로 재현하는 게임들을 개발하 면서 시작됐다.

그는 집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초등학생 아들과 게임 대전을 벌이고, 어린 딸과 NHN의 '엔토이'를 통해 메신저를 하면서 회사 서비스에 대한 솔직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받는다.

그의 집에는 노트북까지 포함해 무려 5대 PC가 최신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어 김 사장 아들은 방과 후 친구들을 '우리집 PC방'으로 몰고올 수 있어 학교에서도 인기가 좋은 편이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배우게 된 골프도 별로 칠 기회는 없었지만 타고난 운동감각 때문인지 80대 실력이다.

김 사장이 재미를 느낀 골프도 역시나 3월이면 한게임에 등장할 예정이 다.

◆김범수 사장은..

△서울생(66년) △건국대부속고 졸업(86년)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90년) △서울대 산업공학대학원 졸업(92년) △삼성SDS 입사(92년) △( 주)한게임커뮤니케이션 설립(98년) △네이버컴(주) 합병 공동대표이사( 2000년 7월~2001년 9월) △NHN(주) 공동대표이사(2001년 9월~2004년 1 월) △NHN(주) 대표이사(2004년 1월~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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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업사원 출신 첫 임원 탄생 - 현대자동차 경기 대형트럭 지점 이달재씨 ] *************



< 20년동안 4일에 한대꼴로 트럭 팔아… >

현대자동차에 처음으로 순수 영업사원 출신으로 임원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최근 이사로 승진한 경기 대형트럭 지점 이달재(李達載·54) 이사.

그는 77년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차에 입사하면서 영업직을 선택했다.

“당시 영업사원은 판매수당이 붙어 관리직의 3배가 넘는 월급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영업사원 공개채용에 대학 졸업자들이 대거 몰려 입사 경쟁률이 20대1이 넘었지요.”

이 이사는 “영업사원 입사시험에 연거푸 떨어진 후 세 번째 면접 시험에서 ‘이번에 떨어져도 될 때까지 계속 지원하겠다’고 말해 간신히 합격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끈질긴 방문으로 요약된다. 고객이 차를 구입해 줄 때까지 줄기차게 찾아간다.

에피소드를 하나 들어보자. 이 이사는 지난 82년 말 수원 영업소에 근무하면서 서울과 동탄에 위치한 아주레미콘 영업소와 공장을 1년 이상 거의 매일 방문한 끝에 한꺼번에 150대의 레미콘 트럭 공급계약을 따냈다.

이는 당시 현대차가 생산하는 1년치 대형트럭 대수의 4배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이 이사는 임원으로 승진한 후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덤프트럭 운전기사들이 있는 건설현장과 골재 채취장, 레미콘 공장, 화물차 휴게소를 찾아다닌다.

그는 “새 구두를 구입해도 한 달만 신으면 바닥이 닳아 교체한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지난 20년 동안 4일에 한 대꼴로 트럭을 팔아치웠다. 지난 83년 이후 1800대의 대형트럭을 판매한 셈이다.

“매일 트럭 운전기사들을 만나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차를 사겠다고 나서는 고객이 있습니다. 영업에는 타고난 천재가 절대 없습니다. 발로 뛴 만큼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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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깃집도 브랜드 있어야 뜬다."- '신씨화로' 김원석 사장… ] ******************



'고기와 와인과 재즈' - 컨셉트로 프랜차이즈 시장서 돌풍


“삼겹살과 와인 그리고 재즈.’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 세 가지를 무기로 불황 속에서도 성장하는 프랜차이즈가 있다. 직화(直火) 구이집인 '신씨화로'다.

지난 2002년 3월 해장국 골목으로 유명한 청진동 골목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신씨화로는 채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21개의 점포를 오픈했다.

현재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것까지 포함하면 27개에 이른다. 이중 8개가 본사 직영. 본점 한 곳만 장사가 잘 되면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드는 다른 곳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김원석(40) 사장은 “신씨화로는 가맹비와 인테리어 등으로 수입을 올리는 다른 프랜차이즈와 달리 본점과 가맹점 모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본점 경영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한다.

신씨화로 점포는 모두 서울과 수도권에 있다. 수도권도 분당에만 있을 뿐이다. 모든 점포가 월 매출액 1천만원(신씨화로 가맹점주들은 이를 '1천만원 클럽'이라고 부른다)을 넘자 소문을 듣고 프랜차이즈를 내고 싶다는 문의가 전국에서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김원석 사장은 지방에는 점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본사가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밖에는 가맹점을 내지 않는다는 게 신씨화로의 경영 방침이기 때문이다.


< 대학시절 보따리 장사 경험이 밑천 >

김사장의 장사 인생은 지난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사장은 평소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이 많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외국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와야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해서 군 제대 뒤 실행에 옮겼죠.”

수송병 출신이었던 김사장은 군경력을 살려 운전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여행 경비를 마련한 김사장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가 모두 바닥났지만 일본을 더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공사판 노동을 했습니다.”

차비와 식대를 중간에서 가로챘던 공사장 십장과 대판 싸움을 하고 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항구에서 그는 일본을 오가며 보따리 무역을 하던 아주머니를 만난다. “빈 몸으로 돌아가려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학생이냐고 물은 뒤 물건을 사가면 돈이 된다며 돈을 꿔주시더군요. 그래서 깨를 샀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한 뒤 깨를 팔았는데 두 배가 넘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틈틈이 보따리 무역을 해서 돈을 벌었다.

지난 92년에는 선배와 격주간 중고차 매매 전문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망했다. “이때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너무 빠르면 안 된다'는 진리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목포행 트럭에 몸을 싣다 과로로 병원 신세를 졌다.

“제가 쓰러지자 사장이 회사 일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니라며 발을 빼더군요. 참담하더군요. 이런 사람 밑에서는 절대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운전을 하면서 만났던 한 가게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점포를 맡아 장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가진 돈이 3백만원밖에 없어 전세 개념으로 시작한 장사였지만 경기도 안성에서 오픈한 커피숍은 장사가 잘 됐다.
커피숍의 성공을 바탕으로 빵집도 시작했다. 여기서 모은 돈으로 서울 장안동에 고깃집을 오픈했다. 입맛과 분위기에 까다로운 룸살롱 아가씨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24시간 장사를 했는데 밤부터 새벽녘에는 룸살롱 아가씨들 고객이 많았습니다. 고깃집 같지 않은 젊은 인테리어 감각과 고기 맛이 그들에게 먹혔던 것이죠.”

지난 99년 처음 시작한 고깃집의 성공에 힘입은 김사장이 드디어 자신만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실현한 점포를 구상해 만든 것이 '신씨화로'였다. 아이템은 고기로 잡았다.

“쇠고기든 돼지고기든 고기는 범용성이 있는 음식입니다.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젊은 인테리어 감각만 있으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사도 브랜드가 중요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사 노하우를 신씨화로에 쏟아부었다. 인테리어 컨셉트는 자연 친화적인 벽돌과 나무로 잡았다.

“벽돌과 나무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재료들입니다. 어제 와도 또 내일 와도 한결같이 편안함을 주는 가게여야 손님들이 자주 찾을 것 아닙니까.”

의자 높이와 테이블 크기도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안락함을 느낄까 연구했다. 바닥에서 테이블까지의 높이 70㎝, 의자 높이 43㎝ 등 신씨화로만의 인테리어 모델을 만들어냈다. 권리금을 생각해 위치도 청진동 골목 외진 곳으로 잡았다.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김사장은 브랜드 마케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신씨화로에서 후식으로 주는 사탕 하나에도 신씨화로 브랜드가 찍혀 있다. 숟가락·젓가락·물수건 포장지도 마찬가지다.

술도 소주나 맥주 외에 과감하게 와인 리스트를 따로 준비했다. 가격도 와인 전문점보다 싸게 책정했다. 서민적 공간에서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김사장은 매월 본사 직영 점포에서 나오는 수입 1억원을 모두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음식 재료 공장만 해도 세 개다.

“저에게 돈을 버는 재주는 하느님이 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돈은 제 돈이 아닙니다. 적게는 저희 회사의 돈이고 크게는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돈이기도 합니다.”

김사장은 1년 전부터 나누는 삶을 시작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달 통장에 1만원씩 넣어준다.
매년 1억원 정도 기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규모를 늘릴 생각이다. 잘 벌어 잘 쓴다는 간단하지만 무거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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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상고 동기동창 CEO 2인 ] *******************************



"우리가 얼짱 친구 라구요? 만나면 일 얘기뿐인걸요."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과 김광진 현대스위스저축은행 회장은 덕수상고 동창이다.

75년 함께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내년 2월이면 벌써 졸업 후 만 30년 이 되는 셈이다.

두 사람은 학교 다닐 때보다 사회에 나와 끈끈한 인연 을 맺게 됐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얼굴을 마주 대할 정도다.

상고 출신으로 최고경영자(CEO) 자리까지 오른 두 사람은 서로 닮은 듯 다르다.

졸업 후 증권사와 외국계 보험회사, 한국신텍스 등에 근무했던 김효준 사장은 95년 BMW코리아 상무로 스카우트되면서 2000년 사장까지 올랐다 .
특히 김 사장은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독일 BMW그룹의 임 원(Senior Executive)에 선임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 사장 별명은 업계에 널리 알려진 대로 &apos;김고객&apos;. 골프치는 시간이 아까워 재작년부터는 좋아하던 골프도 그만뒀다.

회사 주최 골프 행사를 열더라도 골프는 치지 않고 카트를 타고 다니며 고객 사이를 돈다.

골프를 치면 기껏해야 만날 수 있는 인원이 세 명이지만 카트를 타고 돌면 150명 이상 되는 고객들을 일일이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점심 먹기 위해 들른 한 호텔 일식당에서 반주로 맥주를 고르면서도 꼭 고객 회사 제품을 주문한다.

"이 회사에서 우리 차를 네 대나 가지고 있거든요. 음료 한 병을 시켜 도 이왕이면 고객 회사 것을 팔아드려야죠."
"직원들은 참 재미없는 사장을 만났다고 할거야. 매일 일 얘기만 하고." 김광진 회장이 너스레를 떤다.

김광진 회장 역시 사회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증권사. 하지만 곧 자기 사업을 시작해 98년 현대스위스저축은행 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사업 때문에 골프마저 그만둔 김 사장과 달리 김 회장은 직원들과 어울 려 곧잘 술과 노래를 즐긴다.

김효준 사장은 "업계 특성상 고객을 찾아 발로 뛰어야 하는 우리와 달리 전략적 사업 관리가 가능한 김 회장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추켜세웠다.

김효준 사장은 덕수상고 출신의 저력으로 &apos;어떠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뚝심&apos;을 꼽는다.

"우리 동창생들은 머리는 있지만 가정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더 빨리 직장생활도 시작했죠. 그런 어려움이 좋은 자양분이 됐어요.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 타당한 원칙들을 지키면서 사업에 접목시켜 나가는 것.
그게 바로 우리 동문들 의 힘인 것 같아요. 원칙들을 일관성 있게 지켜나가려면 자신의 철학이 없으면 지켜나가기 힘들거든요."

준비하는 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는 믿음 역시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 김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사업가를 꿈꿔왔다"고 했다.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내 사업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워 시장의 흐름을 읽고 준비 해왔다.

김 회장에게는 위기가 곧 기회였다.

"사회 초년병 시절 증권회사를 다닐 때 꼭 성공해서 이 회사 오너가 돼 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증권회사는 도저히 제가 좇을 수 없는 꿈이었죠.
그 이후에도 금융사를 꾸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공부해왔어요. 그러던 중 IMF가 터졌죠.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은 이전까지 프리미엄만 200억~300억원 붙던 것이 IMF 사태 이후에는 프리미엄 없이 인수하라는 조건이 들어오더군요."

김효준 사장도 마찬가지. IMF 이래 다른 회사들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 하거나 투자를 줄이는 사이 BMW코리아는 오히려 본사에서 2000만달러를 유치하는 등 과감하게 투자를 늘렸다.

상고 졸업 후 바로 사회에 뛰어들어 뒤늦게 대학(방송통신대ㆍ연세대 경영대학원) 공부를 마친 김 사장은 사원을 뽑을 때도 남녀 구분없이, 나이와 학벌 제한 없이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한다.

항상 최종 인터뷰는 김 사장이 직접한다.

부유한 고객층을 상대로 하는 BMW코리아와 서민들을 상대하는 저축은행. 고객층이 양 극단에 위치한 두 CEO가 느끼는 체감 경기는 어떨까.

"서민경제는 여전히 어렵죠. 신용불량 문제까지 겹쳐 하위층 폭이 점점 더 두터워지고 있어요. 제1금융권에서 대출 못 받는 서민들을 우리 같 은 제2금융권에서 도와야 하는데 쉽지가 않아요. 악순환이죠. 저소득층 의 저신용 고객에게 신용대출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 고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쟁력 있는 시장이기도 하고요." (김광진 회장) "중간층이 사라지면서 소비자 분포가 모래시계 형태로 바뀌는 것 같아요. 소비뿐만 아니라 산업 자체도 고급 하이엔드(high-end)로 가느냐, 저가 로우엔드(low-end)로 가느냐의 두 갈래로 나뉠 겁니다."

우리 회사도 지난 1월에 비해 성장이 주춤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입차 시장이 전체의 2%에 불과하기 때문에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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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 오영교 KOTRA 사장 ] *********************



잭 웰치나 빌 게이츠 같은 유명 기업인이 한 말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경영어록이 많으니까. 하지만 정통관료 출신인 공기업 사장이 저술한 책 제목이라면 의미가 좀 색다르다.

오영교 사장(57)은 한때 무용론(無用論)까지 일었던 KOTR A를 맡아 3년 만에 민간기업보다 더 경쟁력 있는 공기업으로 변화 시켰다.

그 과정에서 오 사장은 100m 달리기 선수였다.

일류 공기업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곁눈질할 시간도 없이 전력 질주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경영인 오웰치 다.

꼴찌 KOTRA를 맡아 경영인 타이틀에 도전한 그는 지난해 공기업 사장 평가와 고객 만족도에서 모두 최고 평가를 받아내기까지 네 가지 원칙을 실천했다.

실무 중심으로 조직 개편, 기업서비스 혁신, 정당한 업무 평가, 제대로 된 보상이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본부 조직 축소. 본부 직원 90명을 외국으로 내보 내고 국내엔 190명 정도만 남겼다.

여기에다 3∼4년 국외 근무 후에 국 내 근무를 2년만하는 시스템도 정착시켰다.

"지금은 오히려 국내 직원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와요. 하지만 중소기업 같은 고객들로서는 좋아진 셈이지요."

7개 전세계 지역사업본부, 무역관을 중심으로 재편된 조직은 KOTRA가 고객인 기업의 만족을 위해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는 밑거름이 됐다.

모든 업무가 자동으로 평가돼 실시간으로 업무와 업무실적이 전산화 되 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KOTRA를 통해 국외사업정보 서비스를 받는다면 그 단계에 따라 담당자 실적이 평가되는 방식이다.

기업을 위해 시장조사에서 현지 안내, 가격협상, 사후관리까지 해주는 지사화 서비스도 뿌리를 내리게 됐다.

오 사장의 웰치식 경영에 대해 내부 반발이 적지 않았을 듯하지만 처우 개선과 공정 인사로 이를 막았다.

"월급이 적다는 소리가 안 나오게 임금 수준을 올리고 재외 공관은 아 예 사무실과 자동차 등도 다 바꿔줬어요. 가장 연봉이 낮은 무역관도 예전보다는 많이 받을 거예요." 물론 공짜로 올려준 건 아니다.

오 사장은 "자동 실적평가로 일할 만큼 연봉을 준다"며 "한 직급 내 연 봉 차이가 640만원까지 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인사청탁에 관한 한 독하게 대응했다.

청탁이 들어오는 직원을 좌천시킨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래서 외국에서 KOTRA 직원의 안내를 받은 한 국회의원이 "내가 오 사 장에게 잘 말해주겠다"고 하자 그 직원은 파랗게 질려 "그러면 내가 좌천된다"며 만류했다는 일화도 있다.

오 사장은 요즘도 가만히 앉아서 일하는 체질이 아니다.

취임 후 매년 100일 이상을 수출현장을 누비면서 3년 간 50만마일 이상 을 이동했다.

지난주에도 미국 애틀랜타와 중남미 출장에서 막 돌아와 취재에 응했다 . "시차 때문에 언제 자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내 말처럼 잘 먹고 잘 자니 겨우 버티지.
주말이면 골프 등산 같은 운동을 즐기는 것도 건강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행시 출신 관료로 승승장구하며 동기보다 앞서 산업자원부 차관에 올랐던 오 사장이 KOTRA를 선택한 것은 독립된 조직을 '경영'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시골 촌놈이 차관까지 했으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무래도 내 체질은 경영인 쪽에 가까운가 봐요. 이 게 더 재미있어요." 시골 촌놈답게 오 사장은 인간적 매력도 대단하다.

직원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직함 대신 '○○○씨'라고 이름을 불러준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라면 '주5일 음주'도 마다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4~6㎞, 저녁 6~8㎞ 등 하루에 최소 10㎞ 이상을 걷는 철저한 체력관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오는 4월이면 임기가 끝나는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안팎에서 관심이 많 다.

그 동안 장관 물망에도 여러 번 올랐고 전례가 거의 없는 KOTRA 사장 연임설도 나돈다.

얼마 전엔 열린 우리당에서 공천 제의도 왔지만 거절했단다.

"이젠 어디 가야겠다, 뭘 해야겠다는 생각 안해요. 평생 승진에 매달려 고민하지 않고 평탄하게 공직생활하고 경영인도 해봤으니까. 그저 일할 수 있으면 즐거운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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