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일까?

경제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바로 정주영이라는데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21만 임직원이 일하는 현대그룹을 일군 주인공, 미국
포브스지에 의해 세계 9번째의 부자로 뽑힌 정주영.

과연 그가 오늘의 성공을 이루게 된 것은 어떤 비결이 있었기 때문일까? 땀흘려 일궈온 그
의 인생 이야기 속에서 땀의 가치와, 오늘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 보자.



☞ 성공 비결 1 -"내 몸이 담보요"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16세에 가출, 막노동판을 전전 하다가 서
울의 쌀가게에 취직을 하게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와 신용밖에 없다고 생각
한 정주영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게 되고, 그 결과 쌀가게 주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신
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스물 일곱 되던 해,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차리게 되는데. 자동차 정비공장
문을 연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화재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빚을 얻어 시작한 정비공장이
전소되자, 정주영은 빚위에 또다시 빚을 지게 되고. 다시 일어서야 할 그때, 정주영에게 돈
을 빌려 준 사람들은 쌀가게 시절 알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정주영이 다시 일어나 오늘 현대그룹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신용을 잃지 않
았기 때문이었던 것.



☞ 성공 비결 2 -"국 한 그릇, 반찬 하나"

현대그룹 총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30여년 전에 지은 그의 집엔 20여년이 넘은 소파와
10년이 다 된 17인치 TV가 전부다. 17년전 작업복을 아직도 입고 있는 정주영. 그는 젊은
시절부터 아끼는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한국 제일의 부자 정주
영. 짜디짠 냄새가 나는 왕소금 회장의 일상을 들여다 본다.



☞ 성공 비결 3 - "새벽 닭을 깨우며"

정주영 회장의 성공비결 또 하나. 그 누구보다 부지런 했기 때문이었다. 쌀가게 시절부터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점포를 정리했던 청년 정주영은 자신이 사업을 하던 시절
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곤 했다. 그리곤 해가 빨리 뜨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곤
했다는데. 지금도 새벽 6시 기상, 7시면 회사로 출근하는 그의 요즘 모습을 담아 본다.



☞ 성공 비결 4 - "빈대도 머리를 쓰는데…"

정회장이 부하직원을 야단칠 때 늘 하는 말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
두 노동자 시절 몸으로 익힌 정회장의 철학이 담긴 욕설이라는데. 부두 노동자 시절, 몸에
기어 오르는 빈대를 피하기 위해 네 개의 물그릇에 상다리를 담궈 놓고 상위에서 잠을 자
던 정회장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빈대에게 시달리게 된다. 살펴 본즉 빈대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정 위에서 몸으로 뛰어 내린 것인데. 빈대도 머리를 쓰면 되는데, 사람이 못할 것
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주영.

그는 사업에 있어서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어 멋지게 성공을 하곤 했다. 한겨울 보리
를 심어 잔디를 대신 했던 부산 UN묘지 공사며, 폐 유조선으로 단번에 물길을 막았던 서
산 간척지 공사. 그의 성공은 상식에 매달리지 않는 신선한 발상의 성공이었다.



☞ 성공 비결 5 - "오백 원으로 빌린 사천만 달러"

정주영 회장의 별명은 불도저. 그것은 한 번 마음먹은 사업을 무섭게 밀어 붙이는 추진력
때문인데. 1970년, 울산 모래 벌판에 세워진 조선소는 모두가 불가능 했다고 말한 사업이
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던 시절, 그곳에 조선소가 세워지리라고 믿었던 사람은 오직 정주
영 뿐이었다.

울산 모래 벌판의 사진 한 장을 달랑 들고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반에 해당하던 4500
만불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 규모의 도크를 만들었던 정주영. 그는 조선소 도크 건설과
동시에 26만톤 짜리 두척의 배를 만드는 세기적 실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30개월 후, 대한민국 최초로 만든 거대한 유조선은 한국을 세계 제 1위의 조선국으
로 도약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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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G생명보험 세일즈 리더 이대균 / 3년 만에 10억 연봉 고지에 오른 보험업계 최고의 맨파워

이대균 세일즈 리더는 한때 만성 신부전증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후 그는 3년 만에 연봉 10억의 보업업계 기린아로 성장했다.

체력, 경제적 여건 등 모든 면에서 보통 이하로 시작한 그의 성공은,
누구든지 하고자 한다면 어떤 여건이나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1996년 이대균 세일즈 리더(이하 리더)는 지긋지긋한 인생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혈액 투석을 받은 지도 어언 6개월.
신장이 피를 걸러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 속의 피를 몽땅 밖으로 끄집어내
걸러낸 다음 시 주입하는 일을 이틀에 한 번씩 6개월 동안 한 것이다.

만성 신부전증 환자는
물 한 방울만 들어가도 심장마비를 일으키기 때문에,
목이 마르면 젖은 수건으로 입술을 축이는 것으로 갈증을 대신해야 했다.

결국 말라서 죽는 무서운 병이다.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제 막 돌이 지난 애기를 안고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다

돌아서서 눈물짓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가족들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줘야 해.’
그래서 그는 죽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기로 결심했다.
1997년 1월 그는 아내와 동료들의 노력으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으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빈손으로 보험업계에 투신해
3년 만에 연봉 10억의 신화를 이룩해냈다.

벼랑끝에서의 도전
1997년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막대한 수술비로 그는 빈털털이가 되어 있었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IMF가 닥쳤으며,
다니던 경남은행에서도 명예퇴직을 당하게 되었다.

그 무렵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보험 일이었다.
미국 AIG생명보험에 가입한 그의 장모가 세일즈 매니저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사위에게 아주 적합한 일이라 생각해 권해 왔던 것이다.

“당시 보험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몇 번 제의가 들어온 보험영업 일을 무조건 거절했었는데,
장모님의 소개여서 일단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AIG생명보험 세일즈 리더와의 첫 만남은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그의 명함을 받는 순간, 이 일을 꼭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아내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만류하고 나섰다.
그는 신장을 이식했기 때문에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하는데,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체력이 세 살배기 수준밖에 안 된다.

예를 들어 감기가 걸려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루에 다섯 번의 눈물을 극복하라”
그러나 이대균 리더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난 목숨이니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뛰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이때의 결정을 ‘벼랑 끝에서의 도전’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일요일 이대균 리더는 가족과 함께 나들이 삼아 가까운 친척을 찾았다.
그런데 그 친척의 반응이 아주 냉담했다.
이대균 리더가 보험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친척이,
혹 보험가입 권유라도 할까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그리곤 보험을 권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매몰찬 말을 남겼다.
뜻밖의 당황스런 일을 당한 그는 어쩔 줄 몰라했으며,
되돌아 앞서 가는 그의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이대균 리더도 ‘내가 왜 보험 일을 선택해서아내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
싶어서 뒤따라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오기가 솟구쳤다.
‘내가 여기서 무너져 버리면 정말 구걸하러 온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꼭 일어서야 한다.

그 후에도 그는 수없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은
지금은 그 친척을 포함해서 모두 그의 열렬한 고객이 되었다.

“하루에 다섯 번 솟구치는 눈물을 극복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거절의 아픔을 극복해냈으며,
보험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타고난 적극성,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리더십 등이 보험영업 일에 잘 조화되면서
그의 실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정말 이 일이야말로 자기가 원하던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은 친한 선배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 선배는 이대균 리더의 말을 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보험 일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때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의 거절은 저한테 굉장히 많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선배님의 거절을, 나의 고객이 안 되겠다는 거절이 아니라,
나를 좀더 나은 세일즈맨으로 트레이닝시키려는 의도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보험에 가입하겠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선배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간 이대균의 역사’ 파일로 가슴을 팔다
이대균 리더의 성장 밑바탕에는
‘인간 이대균의 역사’라고 이름 붙여진 파일이 있다.

이 파일에는 이대균 리더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학생회장 시절의 모습,교사자격증, 아내의 편지,
AIG생명보험에서의 시상 장면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망라해서 담아놓았다.

“어차피 ‘AIG생명보험’이라면 고객들은 잘 모릅니다.
결국 나를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평생 애프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신뢰감만 심어준다면
고객은 나를 믿고 따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대균 리더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그의 파일은 고객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고,‘
이런 사람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라는 신뢰감을 주었다.
그는 비로소 보험은 가슴으로 영업하는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신뢰가 상대편에 전달될 때,
비로소 거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저를 통해서 보험에 가입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마산 앞바다에서 회식을 하다가 실종되어서 시체로 떠올라 2억을 보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아 있는 미망인과 애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 친구가 보험에 들때 조금만 더 설득을 했더라면
4억을 보상받도록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안이하게 대했다는 데 대해서 가슴을 쳤던 겁니다.”
그때부터 그는 고객을 만날 때,이 사람은 오늘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전제하에
그 사람이 최대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객을 설득해 나갔다.
그에게 보험은 하나의 사명으로 각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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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술 사장의 성공스토리>

정문술 사장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43세였다.
그는 원광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한 후
제대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특채되어 18년간을 근무한 후 강제퇴직을 당하였다.

그는 퇴직금으로 풍전기공이라는 금형제조기업을 인수하여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사기에 속아 인수한 것으로
부채부담과 납품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 사업에 실패한 후 그는 새로운 창업아이템을 찾게 된다.
공무원 시절에 공식, 비공식으로 알고 지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과 술을 내는 대가로 정보를 수집하고 친구들 사업을 도와주면서 경험을 쌓고
증권객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증권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도 배우는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고민과 연구의 기간이 약 2년. 결론은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였다.
반도체 제조장비라면 중소기업으로도 할 수 있고 외국기술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몇가지 제조장비들이 전량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한 분야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회사의 이름은 「미래산업」,
총 자본금 8천만원에 사장까지 포함해서 전 직원이 여섯명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회사로 1983년 2월에 출범하였다.

미래산업이 최초로 도전한 제품은 「리드프레임 매거진」이라는 기구였다.

이것은 반도체 조립공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리드프레임」이라는
반도체소자에 단자를 부착하기 위해 사용되는 복잡한 형상의 금속상자로,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고부가가치상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반도체산업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보니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밀도와 내구력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몇달 동안이나 전력을 다해 온갖 시도를 다해 보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모두가 그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기존의 납품거래선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고
엔지니어들도 지쳐버려 결국 제품개발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정문술사장의 입에서는 짜증섞인 푸념이 흘러나왔다.
“에이, 빌어먹을, 조립하지 않고 통째로 꽝꽝 찍어버렸으면 좋겠구먼.”
이때 공고출신 엔지니어인 백정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정말 그러면 되겠는데요! 금형으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미래산업이 가진 금형기술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렇게 하여 매우 정확하고 내구성도 높은 「리드프레임 매거진」이 탄생했다.

금형으로 한번에 찍어내는 이음새 없는 매거진이었다.
제품이 생산되자 반도체업체들은 탄성을 보냈고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시장을 모두 장악했다.

순식간에 매출액이 억단위로 뛰어올랐고,
미래산업은 일약 반도체조립장치업체의 반열에 올랐다.

리드프레임 매거진의 성공으로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자
정사장은 또다시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최첨단의 반도체제조장비인 「무인웨이퍼검사장비」의 개발이었다.

반도체의 기본소자인 웨이퍼의 검사를 현미경과 육안으로부터 기계로 대체하는 것으로,
개발만 되면 사업성은 확실하지만 당시의 미래산업으로서는 엄청난 기술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일단 개발목표가 정해지자 엔지니어들은 야전침대까지 갖다 놓고 일하는 등
제품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 정사장도 엔지니어들이 걱정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최선을 기울였다.

그러나 막대한 금액을 차입까지 해서 개발비용으로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째가 되도록 원하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의 미래산업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수준 자체가
이 장비를 개발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전인식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다.

정사장이 제품개발에 쏟아부은 돈은 4년동안 무려 18억원,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그는 파산의 위기에 직면하여
가족동반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제품개발에 실패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을 살려 한단계 낮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을 돌리게 된다.

새로이 도전하는 품목은 「핸들러」였다.
당시 코엑스에서 열린 “세미콘코리아”라는 반도체전시회에 다녀온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한 품목이었다.

그러나 개발초기에는 소프트웨어나 컨트롤러 같은 핵심기술은 물론 설계도면도 없어
핸들러의 기계구조를 파악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김두철이라고 하는 평소 실적도 신통치 않고
엉뚱한 소리만 하던 공고출신의 한 조수가 불쑥 설계도면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기계내부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타고난 눈썰미에다
뛰어난 상상력과 구성력으로 머리 속에서 도면을 그려보고 나름대로 수정까지 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걸어다니는 사진기”였다.
미래산업은 이 설계도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저기서 입수한 핸들러 관련자료들을 참고로 해서 천신만고끝에 시제품을 완성했다.

이 시제품은 테스트 결과 당시 사용되고 있었던 일본제품보다
훨씬 양호한 성과를 보여 납품기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그 자리에서 주문까지 받을 수 있었다.

주문을 확보한 미래산업은 일본기업들이 생산한 핸들러의 개조나 복제를 통한
모방학습을 마친 뒤, 비메모리 DIP타입 테스트 핸들러 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정사장은 당시 홍릉에 있던 산업연구원과 KAIST를 다니면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독일, 일본의 데이터베이스들을 검색하면서
에어베어링, 정밀서보모터, 정밀스태핑모터, 고정밀베어링 등등에 관한 논문과
제품목록 등을 조사하는 한편 기술관련문헌정보와 카탈로그, 기술잡지, 특허정보
등도 검토했다.

핸들러를 개발하는 석달동안 그는 일주일에 3일정도는 밤낮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산업연구원들의 연구원들도 50이 넘은 사람의 열정에 감탄하여 성심껏 도와주었다.

당시 산업연구원은 중소기업의 기술지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는데,
그 덕택에 선진국의 핸들러 제품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시장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사장은 이렇게 하여 모은 다양한 자료들을 엔지니어들이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엔지니어들이 핸들러를 개발하는 동안 그는 외곽지원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생끝에 미래산업은 마침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MR- 3000이라는
「트랜지스터 테스트 핸들러」의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래산업은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된다.

정문술 사장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98년 11월호 「신동아」에 실린 미래산업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연간 매출액 615억2300만 원(97년 기준)에
우리 나라 상장회사 중 유일하게 3년연속 당기 순이익 30% 이상을 기록.
97년도 한국능률협회가 선정한 최우량 10대 기업 중 1위.
혹시 돈이 필요하면 다른 은행보다 저리(低利)로 얼마든지 빌려 주겠다고
지점장들이 달려와 각축을 벌이는 회사.
총 320명의 직원 중 연구원만 150명인 회사.
직원 보너스를 본봉 기준이 아니라 총수령액 기준으로 800%를 지급하고,
직원들 직계가족의 치료비까지 부담해줄 뿐 아니라 아침밥값 500원을 빼고는
끼니를 공짜로 제공하는 회사.
연구원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지체없이 먼저 갖다 쓰고 나중에 결재받도록 하는 경영주.
45세에 창업해 15년만에 20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진 사람.


<정문술 사장의 성공요인 분석>

1. 열정

□ 43세의 늦은 나이로 사업을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목표실현

- 핸들러를 개발하는 석달동안 일주일에 3일정도 밤낮을 홍릉에 있던
산업연구원과 KAIST에서 보내면서 관련자료를 조사하고 수집

- 기술개발과정에서 18억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지면서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상황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술개발의 목표를 실현

□ 열정의 원천은 일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

- 군대 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처럼 생각하던 전후(戰後) 혼란기에
각개전투훈련나 총검술을 신기하고 흥미롭게 생각할 정도의 호기심의 소유자

- 5·16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행정요원을 뽑을 때 모두가 기피하였지만
틀림없이 뭔가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용감하게 지원

- 반도체장비업이라는 미지의 분야에 도전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호기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가능

2. 인간관계

□ 정문술 사장의 성공배경에는 핵심개발인력이나 사원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중요한 역할

- 공고출신 엔지니어 백정규나 김두철은 기술개발의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오늘의 미래산업이 있게 한 주역

- 1994년에 미래산업이 부천에서 천안으로 이동시 인력유출이 우려되었지만
직원 137명 중 단 한 사람만이 나갈 정도로 직원들의 회사신뢰도가 높았음

□ 끈끈한 인간관계의 원천은 일과 사람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

- 회고담 : "나는 사업경험은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현장직원들이 부품을 사다 달라면 즉시 청계천으로 달려가서 필요한 부품을 사다 주었다.
거래처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찾아가서 몇번이고 도와달라고 애걸을 했다.
그러다 보니 별 치욕스런 꼴을 다 겪었지만 더 큰 자존심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청소도 직접 하고 은행도 내가 다녔다.
나는 직원들에게‘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시켜 달라’고 공공연히 부탁했다.
허수아비 사장이라고 무시하던 예전 직원들도 차츰 나를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 사람으로 입사한 백정규도 자연스럽게 현장책임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풍전기공은 점차‘내 공장’이 되어 갔다"

3. 전문지식

□ 사업에 필요한 전문지식은 대부분 대학 이후 경험과 독학을 통해 습득

- 대학시절 전공은 종교철학으로 사업에 별로 도움이 안됨

- 군복무와 18년 정보부 생활에서 체득한 기획·분석·예측·감사능력이 사업에
중요한 자산으로 됨

- 반도체장비업에 필요한 지식은 기술조사 및 개발과정에서 습득

□ 전문지식의 원천은 열정과 호기심, 인간관계

-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즐거움으로 훈련소에서 다른 사병들이 밤에 담넘어가
막걸리 마실 때 내무반에서 책을 읽고 행정학교로 배속되었을 때는
기획관리·문서관리등 미육군의 행정제도를 습득

- 핸들러를 개발하기 위해 산업연구원과 KAIST에서 관련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할 때는
정사장의 열정에 감동한 연구원들이 자료조사에 적극 협력

□ 높은 학력이 고도의 전문지식과 동의어는 아님

-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일등공신인 부사장, 매거진사업본부장, 설계팀장,
전자개발부장이 모두 공고 출신

4. 창의성

□ 정사장은 제품개발이나 사업전개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

- 리드프레임 매거진 개발시에는 “조립하지 않고 통째로 꽝꽝 찍어버렸으면 좋겠구먼.”
이라는 푸념을 내뱉어 금형으로 한번에 찍어내는 이음새 없는
매거진 개발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

- 4년동안 18억원의 개발비용을 쏟아부었던 「무인웨이퍼검사장비」의 개발이 실패했을 때는
자살일보직전에서 그동안 축적한 기술보다 한단계 낮은 제품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핸들러로 현재의 미래산업의 기반을 구축

□ 창의성의 원천은 호기심과 열정

- 정 사장은 모든 창의력은 호기심에서 출발한다고 역설

- 회고담 : "제품 개발과정에서 기술적인 벽에 맞닥뜨린 적이 있었어요.
젊은 엔지니어가 해결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는 겁니다.
가서 문제가 뭔지 일단 파악을 하고 그 친구에게 「넌 해낼 수 있을 거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줬지요.
그 때부터 실무자인 그와 사장인 제가 산고(産苦)를 함께 앓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물론 그 젊은 친구도 절박하겠지만 사장인 저보다야 더 절박하겠습니까.
그 친구는 잘못 돼봤자 직장 그만두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주문을 받아놨는데 개발 못해내면 망하는 겁니다.
몇날 며칠을 긴장상태에서 지내면서 집중하다보니 해결책이 떠오르더라구요"

5. 리더십

□ 열정, 인간관계, 전문지식, 창의성의 결합을 통해 리더십 발휘

- 인내와 성실, 근면이라는 산업화 시대의 열정과 함께 집중과
도전정신이라는 디지털 시대의 열정도 겸비

- 믿고 맡기는 권한 위임, 직원만족을 위한 세심한 배려, 친인척의 경영개입이나
청탁등을 철저히 배제한 원칙중시의 인간관계 구축을 통해 직원들의 신뢰를 확보

- 열정과 인간관계를 통해 전문가 못지 않은 지식을 쌓아 아이템선정이나
기술개발방향제시등에서 탁월성을 발휘

- 뜨거운 열정을 갖고 기술개발이라는 목표실현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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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20일, 김효준(金孝俊.47)BMW코리아 사장은 어둠이 깔린 서울 테레란로를 걷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한줄기 소나기가 세차게 뿌리고 지나간 뒤다.

강남 거리는 이제 막 불을 밝히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가끔 비 긋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산도 쓰지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기분좋은 밤이 오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과연 나는 꿈을 이뤘나. 여기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하던 곳이었던가"

김 사장은 그날 오전 7월1일자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BMW의 본사 임원(Senior Executive)으로 선임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바이에른의 자동차공장(Bayerische Motoren AG)"이라는 뜻을 가진 BMW는 부와 성공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브랜드.

그 BMW가 서울대도 도쿄대도 아닌 상업고등학교 출신을 본사 임원으로 등재한 것.더구나 BMW는 해외 근무경험이 전혀 없는 그의 경력을 감안해 "두 지역(국가) 이상에서 확실한 성과를 거두어야만 된다"는 내부 규정까지 고쳐가며 그를 임원으로 발탁했다.

김 사장은 덕수상고와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그나마 방통대는 고교 줄업(75년)후 22년만에 마친 것이었다.

그는 자동차업계에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났다.

증권사와 외국계 보험회사 경력을 갖고 있던 그가 수입차업계에서 일대 돌풍을 일으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0년 이후 BMW코리아의 비약적인 성장은 전적으로 그가 이끌어낸 것이다.

그는 타고난 수완가인가.

아니면 시류를 잘 만난 행운아인가.

# "아니 상고 출신이라고 차별하는 겁니까"

김 사장은 성동중학교를 다녔다.

학급반장을 도맡을 정도로 성실하고 총명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때 부친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활능력을 상실하는 바람에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3남2녀중 장남인 그는 고교 1학년 때부터 중학생들을 지도하며 동생들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을 도왔다.

고 3때인 74년 여름 삼보증권(현 대우증권)에 취직이 돼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재무와 경리를 담당했다.

75년 여름 첫 휴가를 받았다.

그는 놀러다니는 대신 부산 대구 광주 지점들을 차례로 돌았다.

당시 본사와 지점의 업무 양식은 들쭉날쭉했다.

평소 전화 통화만 하던 직원들을 만나 서로의 애로를 확인하며 업무 양식을 통일했다.

신입사원으로선 쉽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매사에 당당했다.

사무실에 사장이 나타나면 모든 직원들이 일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총무부장을 찾아가 개선책을 마련해달라고 건의했다.

건방지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지만 이 일은 직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비슷한 일화는 또 있다.

76년엔 친하게 지나던 선린상고 출신의 선배 한 사람이 승진인사에서 누락되는 일이 벌어졌다.

평소 근무태도나 전문지식,인간관계로 봤을 때 반드시 돼야할 사람이었다.

김 사장은 한밤중에 인사담당 임원의 집을 찾아갔다.

"저희 회사에는 능력이 출중한 상고출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단지 상고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졸 출신들과 차별한다면 누가 이 회사에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79년 보충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그는 하트포드라는 외국계 화재보험사로 옮겼다.

삼보증권시절 학력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저는 전혀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다른 이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외국계 회사가 상대적으로 낫다는 생각에 전직을 했습니다"

당시 하트포트에는 재정담당 임원이 없어 실질적인 부서장 역할을 했다.

권한과 책임의 중요성을 알게되면서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됐다.

대학교의 경영학 교재를 체계적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참 신기했습니다. 업무를 하면서 배운 실무지식이 책에 다 나와있었기 때문이었죠"

# "제가 인센티브를 포기하겠습니다"

하트포드에서 6년6개월동안 재무담당을 하면서 다른 욕심이 생겼다.

제조 부문에 대한 경험을 쌓아보고 싶었다.

마침 86년 제약회사로 명성이 자자하던 미국 신텍스가 한국법인 설립을 위한 창설요원을 모집했다.

창립 멤버(재경부 차장)로 입사해 초기 회사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약회사 영업에는 엄청난 활동비가 들어간다.

신약이 출시되면 의사와 약사들에게 임상실험을 부탁하고 그 대가로 음성적인 돈을 건네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다.

그는 해당분야의 세법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끝에 "임상실험비"라는 항목을 찾아냈다.

회사는 연간 수십억원의 경비를 손비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충북 음성에 제약공장을 지을 때는 갖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을 만나 끈질기게 설득해 인가를 얻어냈다.

재무 전문가가 그런 역할을 해내자 신텍스 본사에는 "굉장히 이상한 파이낸스 디렉터가 한국에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3명으로 시작한 한국 신텍스는 직원이 1백35명으로 늘어났고 매출액도 일취월장했다.

김 사장은 부장 이사로 승진을 거듭한 끝에 94년엔 대표이사 부사장이 됐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았던 그 시기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신텍스 본사가 스위스 로슈에 매각된 것.한국 신텍스는 로슈가 한국에 투자한 한국 로슈와 합병해야 했고 김 사장은 1백여명의 직원들을 정리해고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한국 로슈는 그에게 당시 아파트 한채 값의 인센티브를 제시하면서 직원들과의 퇴직금 및 위로금 협상을 원만하게 마무리지어줄 것을 부탁했다.(당시 그는 마포에 24평짜리 연립주택에 살고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조직적으로 강력 반발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개인적인 인센티브를 깨끗이 포기했다.

그 대신 모든 직원들이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퇴직할 수 있는 협상안을 만들었다.

소송사태까지 준비하고 있던 한국 로슈는 김 사장이 한달만에 전 직원의 동의를 구해내자 입을 딱 벌렸다.

"제 손으로 만든 회사를 제 손으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9년이 넘도록 고락을 같이해온 직원들의 해고통지서에 서명하던 날,폭음을 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 "당신같은 사람에게 왜 학위가 필요합니까"

BMW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헤드헌터 덕분이다.

신텍스 직원들의 재취업을 위해 고용한 헤드헌터가 정작 김 사장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억원의 인센티브를 포기한 일로 업계 평판도 무척 좋았다.

자동차업계가 워낙 낯설어 잠시 망설였지만 일자리는 찾아야 했다.

95년3월 미국 유명대학의 박사와 MBA(경영학 석사)출신의 예비후보 2명과 함께 독일에서 면접을 보았다.

그는 "한국의 수입차 시장 현황"이라는 두툼한 보고서를 준비해갔다.

자신의 부족한 학력을 메우기 위해 현재 방송통신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석사학위도 딸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합격통보를 받고 나서 당시 비간트 BMW코리아 사장으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당신을 뽑기 위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꾸 공부를 더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금융 제조회사 근무 경험에다 신텍스 시절의 훌륭한 업적까지 갖고 있는 당신에게 무슨 공부가 더 필요합니까. 학력은 그저 참고사안일 뿐이었습니다"

김 사장은 멀고 외진 길을 돌아왔다.

출발은 볼품 없었지만 전인미답의 길로 새로운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분명 지름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늦은 것도 아니었다.

이제 겨우 47세다.

"아직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그는 과거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을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한번도 가난을 탓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부자들을 존경하고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당장 현실이 힘들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옵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포켓북 영어

김 사장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다국적 기업의 CEO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해외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대학생들이 보는 토플이나 고급 단어집도 보지 않았다.

김 사장은 영어를 잘 하는 비결을 두가지 얘기한다.

물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첫번째는 문장을 무조건 외우라는 것.타임이나 비즈니스위크와 같은 난해한 영문을 붙들고 매달리기 보다는 조그만 포켓북을 하나 들고 다니면서 틈틈히 암기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특히 업무상 필요한 문장과 단어는 무조건 외우는 길 외에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두번째는 눈높이를 낮추라는 주문이다.

밥 먹는 것,차표 사는 것,쇼핑,길 물어보기 등 일상사의 작은 표현부터 반복해서 익혀야한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흔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쉽게 "영어의 함정"에 빠져든다고 얘기한다.

"한 순간의 노력으로 영어실력이 늘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길고 지루한 과정을 참지 못하면 제 아무리 두뇌가 우수해도 안되는 것이 영어입니다"

김 사장은 젊은 시절 조각 조각 모은 영어실력으로 86년 서강대 어학당을 들어간 적이 있다.

초급 1단계에서 최고급 6단계로 나뉘어있는 단계에서 처음 4단계 실력의 판정을 받았고 석달만에 난이도가 가장 높은 6단계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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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철(申憲澈ㆍ59) SK(주) 사장은 유난히 눈물 많은 경영자다.

신중한 표정과 조심스러운 몸가짐에는 오랜 신산(辛酸)을 견뎌낸 수양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1955년 울릉도를 오가며 해산물 수송일을 하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신 사장이 부산 해운대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는 남동생 우철씨(부산지방법원 판사), 여동생 홍란씨와 함께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던 홀어머니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봐야 했다.

초콜릿과 사탕은 미군이 운영하는 동네 교회에서 얻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가난한 학생들이 흔히 그랬듯이 신 사장도 은행원의 꿈을 안고 상고에 진학했다.

부산상고 시절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당시 부산 출신 기업가 김지태씨가 운영하던 '백양장학회'의 장학생이 됐다.

이때 같이 장학금을 받았던 사람들이 한 학년 아래의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두 학년 아래의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편안한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

63년 겨울 지금도 절친한 친구인 부산상고 동기 이성태 한국은행 부총재와 함께 서울대 상대에 도전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당시 서울대 상대에 수석 입학한 이 부총재는 "헌철아, 너무 실망말거라. 내년에 시험 다시 쳐서 서울에서 만나자"고 위로했지만 64년의 재도전에서도 그는 실패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자신보다 못한 학교 성적으로도 너끈히 합격한 친구들을 보며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다시 65년 겨울이 왔다.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터였지만 그는 이번에도 낙방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감은 불길했고 몸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안전하게' 연세대나 고려대를 지원할 수도 있었으나 사립대는 등록금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귀착지는 부산대 상대였다.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결론내렸어요. '어떤 대학이든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2년을 허송세월했다는 자책감이 찾아왔다.

결국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해병대(179기)에 자원 입대하게 됐다.

해병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간단했다.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2개월 정도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스케줄은 제대를 4개월 앞둔 68년 1월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또다시 구겨졌다.

전 사병의 제대가 무기한 연기된 것.

뒤 이어 8월에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서울 진격 사건, 10월에 울진 무장간첩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결국 복무예정기간 26개월보다 7개월 많은 33개월이 지나서야 군복을 벗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지요."

신 사장은 잇단 대입 낙방과 해병대 생활을 '내 인생 최대의 비료'라고 말한다.

고통을 참고 어려운 세월을 인내하는 지혜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성취와 보람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7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했다.

처음 맡은 업무는 판매기획과의 마케팅.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규 주유소 부지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월급은 4만6천5백원으로 삼성물산(4만2천5백원)보다 많았지만 무척 고생스러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73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해인사 주유소 개발권을 따낸 것.

사찰 소유의 주변 땅은 꽤나 넓었지만 주유소가 설치될 장소는 한 곳에 불과했다.

정유 4사 직원들이 스님들을 찾아 큰 절을 올리며 접전을 벌였지만 승리는 유공에 돌아갔다.

신 사장은 73년 6월 사내 소식지 '유공 스탠드'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우릉대고 소쩍새는 봄부터 울었다지만 하나의 폴 사인을 얻어내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의 노력들이 개업식날 휘날리는 깃발 하나하나에 전설처럼 나부끼고 있다."

주유소 자리를 찾아 험한 산자락도 마다하지 않다 보니 죽을 고비도 여러차례 넘겼다.

74년엔 마산의 한 야산에서 운전 중이던 차가 굴렀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아팠고 차는 박살이 났다.

마침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리나케 달려온 동료가 권하는 커피 한 잔을 받아든 그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왠지 서러웠습니다. 걱정해주던 상사와 동료들이 고맙기도 했고…."

80년대 초 호남정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입사 10년 만에 부장이 된 그는 대전지사장을 맡아 15개의 주유소와 충전소를 매입했다.

대전이 장차 물류중심이 될 것으로 보고 시세보다 조금 비싼 가격에 과감하게 베팅을 했다.

그때 3억원을 주고 사들인 일부 주유소들의 요즘 가치는 1백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경영자로서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95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 수도권마케팅본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SK그룹이 기름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 사장을 신흥 경쟁시장인 통신시장에 투입한 것.

매일 새벽 2시에 퇴근해 집에서 옷만 갈아입고 출근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96년 55만명이던 CDMA 가입자는 98년 7백만명으로 증가했다.

대성공이었다.

주유소나 통신시장이나 남보다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선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그의 장년에 뜻하지 않은 복병이 찾아왔다.

98년 말 어느날 갑자기 무릎이 아파왔다.

진단 결과는 퇴행성 관절염.필드에 나가면 제대로 걷지를 못해 퍼터를 지팡이 삼아 서있어야 할 정도였다.

관절염에 좋다는 온갖 약을 다 먹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물리치료였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 매일 물 속에서 자전거타기와 스트레칭을 반복했다.

자전거타기는 3백65일 매일 한다는 각오로 3백65회, 55세에 맞은 고비를 극복한다는 자세로 서서 하는 스트레칭은 55회, 33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앉아서 하는 스트레칭은 33회를 했다.

그러던 중 "퇴행성 관절염에는 마라톤이 최고"라는 권유를 듣게 됐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마라톤을 시작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2개월 동안 7.6km의 남산순환도로를 왕복으로 달렸다.

신기하게도 무릎 통증이 사라지고 몸에는 활력이 넘쳐났다.

신 사장은 그해 10월 동아마라톤대회에 처녀 출전해 42.195km를 4시간39분 만에 완주하는데 성공했다.

"38km 지점을 지나자 결승점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자 그곳에서 네 시간이 넘도록 가슴 졸이며 서있던 아내가 달려와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마라톤을 8차례 완주했고 4시간3분의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

신 사장은 지난 5월 장애 어린이들에게 회사 각종 행사에서 모금된 성금을 전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삶의 여러 형태에서 걸러진 내 나름대로의 결론은 '가난과 불행은 성공을 위한 보약이며 선생님의 회초리'라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그런 환경을 모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믿고 견디고 바라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사장은 젊은 시절의 고통과 좌절을 철저한 노력으로 극복했고 장년에 이르러 회사와 사회가 인정할 만한 성취를 이뤄냈다.

청춘의 열정이라는 것은 본래 밖으로 표출되게 마련인데 젊은날을 온통 기다림과 인내로 채우고 버텼다.

신 사장의 편지는 그래서 심금을 울린다.

신헌철 사장은 지난 81년 국내 정유업계 판도를 뒤흔들었던 호남정유(현 LG칼텍스정유)와의 '3백일 전쟁'을 첫 손가락에 꼽았다.

당시 업계 선두 유공(현 SK㈜)은 40%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첨가제 'CX-3'를 앞세운 호남정유의 대공세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10%포인트나 곤두박질쳤다.

알토란 같이 키웠던 주유소들은 초토화됐고 적진에 투항하는 곳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업계 1위 자리를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유공을 살려낸 주역 중 한 사람이 바로 신 사장이다.

당시 직함은 판매기획부장대행.

영업의 전략 전술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사령부의 실무 책임자였다.

유공은 전국을 무대로 호남정유와 백병전을 펼쳤다.

열세 지역에 인력과 자원을 즉각 투입하고 주유소에 대한 외상거래도 대폭 확대했다.

또 옥탄가(연료의 이상폭발을 방지하는 성질을 나타낸 수치) 89짜리 '보통 휘발유'를 일선 주유소에서 모두 없애버리고 똑같은 가격에 94짜리 '고급 휘발유'를 깔아버렸다.

시장점유율을 회복하지 못할 경우 회사 재무구조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었다.

유공의 작전은 적중했다.

상대는 예상대로 멈칫했으며 유공은 밀리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보통 휘발유가 주류를 이루던 국내 시장은 유공이 주도하는 고급 휘발유 시장으로 재편됐다.

당시 예측을 불허하며 상대의 의표를 찔렀던 마케팅은 지금도 정유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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