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통을 다시금 헤아려본다. 달랑 천원짜리 석장이 권사장을 비웃듯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자신을 원망스레 바라보는 아내. 아내의 볼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감지하지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아내의 얼굴을 보면 자신도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 마리, 세 마리를 팔더군요.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지요. 어떻게 해서 차린 가게인데….”

1991년 3월13일 권원강 사장(당시 41세)은 경북 구미시 외곽에 치킨집을 차렸다. 대구시에서 노점생활 5년여, 그리고 택시기사로 또 5년 등 10여년간의 고생 끝에 마련한 치킨집이었다.

개업식 날, 주변의 도움으로 수지를 맞춘 이래 서너달째 내리 죽을 쑤고 있었다.

“가게를 차리기 전에 택시기사를 했는데 너무 힘들더군요. 당시 몸이 정상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개인택시, 셋방까지 털어 만든 금액이 3000만원. 이 돈을 가지고 대구시에서 가게를 얻지 못하고, 구미시 원평동에서 가게를 얻었지요. 보증금 1500만원에 월새 45만원이더군요.”

지금은 시내 중심권에 속해지만 당시로서는 외곽 지역이었다. 상호명은 ‘교촌통닭’. 권사장은 가게 한쪽에 두평짜리 방을 만들고 생활했다.

배수진(背水陣). 이제 여기서 물러난다면 죽음밖에 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연 가게였다. 그러나 가게 월세조차도 맞추지 못하는 나날들의 연속으로 권사장 부부는 거의 사색이 되었다.

닭요리에 대한 어떤 노하우도 없이 차린 치킨집이란 게 문제의 시발이었다. 단지 어릴적 재래시장에서 먹던 맛을 재현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차린 가게였던 것이다.

권사장은 이날 이후 매일 밤 기도하는 자세로 닭요리를 연구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은 맛이 없기 때문’이라는 판단에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과 차별화된 맛있는 닭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이게 그에게 떨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아니 그의 목숨을 건 화두였다.

참으로 다행스런 것은 여름철에 접어들면서 매출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닭요리 개발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흥도 났다. 자신이 연구한 닭요리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다는데 희열마저 느꼈다. 포인트는 간장이었다. 간장을 중심으로 한 소스개발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우리 입맛에 가장 알맞은 정통 소스라는 판단에 간장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지요.”

권사장은 맛개발에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고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 또한 끊임없이 이뤄졌다.

“한여름 치킨을 배달하는 차량의 문을 연 적이 없어요. 식으면 맛이 떨어지잖아요. 물론 배달용 차에는 에어컨도 없었고요. 땀에 젖은 몸으로 배달하면 고객들이 놀라곤 했지요.”

그의 정성에 반해서일까. 오픈 7∼8개월이 지날 무렵부터는 제법 매상이 올랐다. 현상유지 수준인 하루 20마리 매상을 거뜬하게 올리게 된 것이다.

“힘이 솟더라고요. 이제는 밥을 굶을 걱정은 없다는 생각에 신이 났지요.”

그해가 가기 전에 월간기준으로 처음으로 50만원의 흑자가 나왔다. 그는 그 돈을 전량 지역정보지 광고비로 투자했다.

“아내의 반대가 심했지요. 이제 겨우 흑자를 기록했는데 그 돈을 전부 투자하면 어떻게 되겠냐고 극구 말리더군요.”

효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상이 늘어났다. 가게를 오픈한지 3년이 지나자 하루 100마리 이상 닭을 팔게 됐다. 주말 판매량은 이보다 훨씬 높은 150마리에서 200마리를 헤아릴 정도가 됐다. 그의 손도 덩달아 바삐 움직이고, 손맛도 더욱도 정교해졌다.

교촌치킨 가맹점 1호는 우연찮게 이루어졌다.

장사를 시작한 지 3년 6개월이 지난 1994년 9월께 권사장을 찾는 사람이 있었다.

“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가맹점을 내달라고 하대요. 그 사람은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이 설명하면서 경북 김천에 가게를 내게 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지요.”

이후 구미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가맹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0개 정도로 가맹점이 늘어나자 권사장은 새로운 결심을 한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보자. 배운 것도 없고 경력도 일천하지만 남자로서 승부수를 던지자.’

구미 가게를 종업원에게 물려주고 권사장은 대구시 태전동에 30평 규모의 사무실을 냈다. 직원 4명으로 시작한 사업은 그러나 만만치 않았다. 대구 특유의 보수성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렵게 하나둘 연 대구시내 가맹점은 제대로 맥을 추지 못했다.

돌파구는 골드윙에서 나왔다. 닭날개요리로 개발한 골드윙이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이다. 대구시 접수도 골드윙이 날개 돋은 듯 팔리면서 이루어졌다.

“닭날개는 별로 인기가 없었잖아요. 이를 어떻게 하면 맛있는 부위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까 연구 끝에 개발한 것이 골드윙입니다. 골드윙은 개발되자마자 교촌가맹점에서 인기 1위 품목으로 급부상하더라고요.”

프랜차이즈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대구시를 시작으로 울산시, 부산시, 창원시 등 영남권을 휩쓴 교촌은 1998년부터 충청권과 강원 등지로 범위를 넓혔다. 지역에서 튼튼한 기반을 닦은 교촌이 수도권 공략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말. 맛의 고향이라던 호남공략도 같이 시작됐다.

뒤늦게 수도권 공략에 나섰지만 서울 입성은 화려한 기록을 양산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수도권 지역에서만 3개월여만에 가맹점을 100개 이상 만든 것. 지방업체의 서울 공략이 대성공을 한 것이다. 2003년 3월 현재 전국 가맹점 수는 590여개. 이 추세대로라면 연내에 1000호점 돌파도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이처럼 교촌의 확산에는 무엇보다 맛의 차별화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닭다리만으로 이뤄진 로얄, 닭날개만으로 골드, 닭다리와 닭날개를 혼합한 스페셜 등은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 개발, 대형 매장에서만 팔고 있는 하드윙은 술안주로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닭고기를 먹을 때 양념이 찐득진득하게 손에 묻지 않는 점도 교촌치킨만의 장점이다. 포장용기의 고급화도 다른 치킨집과 비교, 차별화되는 요소다.

“저는 가맹점주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사업이다. 더 이상 다른 아이템은 없다’ 라고 생각하자고 얘기합니다.”

소자본 창업에 왕도는 배수진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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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오전 10시 삼성 라이온즈의 대구 경산 볼파크.

22년간의 프로야구 감독 생활을 접고 구단 CEO로 전격 선임된 김응용 신임사장(63)은 선수들과의 상견례 자리에 유니폼 대신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구단의 사장으로 선수들에게 전한 첫 마디는 “야구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월급도 연봉도 올려주겠다”는 것.

김응용 사장은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는 나누며 “수고했다”는 말로 지휘봉을 놓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구단의 CEO로 새출발을 하는 김응용 사장이 지나온 야구 인생, 구단 경영자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한국야구사가 씌어진 다면 가장 많은 이야기가 거론될 ‘살아있는 전설’답게 털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도 만만치 않았다.

=구단 사장이 됐는데 실감이 나시는지.

▲사장 실감 안난다. 주위에서 벌써부터 사장 취급하길래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욕을 해줬다. 이제 양복입고 출퇴근할 게 걱정이다. 넥타이를 오래 매고 있으면 속이 메스껍다. 기껏해야 1년에 한 두번 매는 정도였는데 걱정된다. 양복도 3~4벌뿐이다. 그것도 삼성으로 옮기면서 맞춘 것이다.

=출퇴근하는 게 정말 오랜만일텐데.

▲20여년 만에 출퇴근을 하게 된다. 한일은행에 입단했을 때 서울 회현동 9평짜리 아파트에서 미도파 근처 한일은행 지점으로 출퇴근했다. 그때 와이프가 살 빼라고 아침으로 빵 한조각만 달랑 줬는데 남대문 시장을 지나면서 배가 고파 순대 돼지국밥집에서 꼭 국밥을 먹었다. 그러니 와이프는 왜 살이 안빠질까 의아해할 정도였다(껄껄).

그땐 돼지국밥이 얼마나 맛있던지.신입행원땐 오전에 은행에서 근무하고, 점심때 모여 운동했다. 그래서 지금도 돈을 잘 센다. 한일은행에서 마지막 차장때 월급이 38만원이었는데 프로야구에 들어와서 연봉을 2,000만원이나 받았다. 100만원씩 저축하고도 살 만할 정도였다.

=감독을 그만두시는 것에 대해선 아쉬움을 남을 텐데.

▲메이저리그에서도 경험을 중시한다. 그래서 팀에선 60~70대 감독들을 필요로 하고, 여전히 현장에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데 어쩔 수 있나. 워낙 나이든 사람들이 밀려나는 분위기라 야구도 할 수 없이 따라가게 되는 것 아닌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모든 것을 나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감독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선수와 가장 기뻤던 순간은.

▲기억에 남는 선수들은 선동열, 이승엽, 이종범, 양준혁이다. 이 선수들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아서하기 때문에 따로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아쉬운 선수들도 많다. 아마추어때 재능 있던 선수들이 부상과 야구 외적인 일로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도 많아 아쉽다.기억에 남는 순간은 해태 감독 시절 첫 우승을 했을 때다. 그동안 우승한 것은 다 선수들이 잘 해서 된 것이다. 감독으로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한테 인복이 있는 것 같다.

=월남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1ㆍ4후퇴때 3일만 피해있으면 된다고 해서 구경가는 셈 치고 아버지 손잡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누이, 여동생 셋이 북한에 남았다. 그동안 이산가족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대부분 사기 당했다.

=감독시절 선수들에게 선행을 베푼 일화도 유명한데.

▲해태 감독 시절 혼자 40평 아파트에서 사는 데 선수들은 30평 아파트에서 우글우글 모여 지냈다. 그게 보기 안쓰러워 신인들을 데려다 함께 생활했다. 한번은 모 대학팀이 광주로 훈련하러 오겠다고 해놓고 연락이 안 오더라.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여관비가 없어서 못 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선수들과 한달간 숙식하며 훈련하기도 했었다.

=야구는 어떻게 시작했나.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부산 계성중) 1학년때다. 학급 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처음으로 글러브를 잡았다. 그 전엔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선수시절엔 투수, 1루수, 좌익수 등 여러 포지션에서 다 뛰었다.

=어릴적 어떤 꿈을 가졌나.

▲야구선수였을 때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에 대표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스 감독을 했던 박현식씨와 같은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릴때 배고프던 시절엔 배불리 먹는 게 꿈이었다. 61년쯤인가, 대표팀에서 합숙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선배들한테는 밥을 주고 나한텐 안 주더라. 화가 나서 밥상을 뒤엎었다. 그랬더니 나중엔 내 밥상 아래 밥 두공기가 놓여져 있더라(웃음). 그땐 밥 한 그릇 더 준다고 하면 힘들다고 꺼려하는 배팅볼 던져주는 것도 신나서 했다.

=어떤 취미를 갖고 계신가.

▲ 산 타는 걸 좋아한다. 아침 점심 저녁마다 색깔도 변하고, 날씨도 변하고. 산에는 간섭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오로지 새 소리만 지저귄다. 몇 년 전 삼성으로 이적할 즈음 산을 오르다 넘어져 팔을 다쳤다. 할 수 없이 기자회견장에 깁스를 하고 나타났더니 기자들이 새로 팀을 옮기며 삼성?군기를 잡기 위해 일부러 깁스를 하고 나타났다고 써서 정말 난감했다.

=야구 외에 즐기는 운동이 있는지.

▲프로야구 감독하기 전까지는 테니스를 많이 쳤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무릎이 아파 테니스를 못 친다. 골프는 90개 정도 친다. 85년도엔 롱기스트 상을 받았을 정도다. 드라이브 샷이 250~260야드 정도 나간다.

=애주가로 소문이 나 있다

▲ 젊을 땐 술도 많이 먹었다.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마셨다. 막걸리에서 시작해 배가 좀 차면 소주, 나중엔 도라지 위스키까지 먹었다. 그때만해도 최고급은 정종 먹는 것이었다. 예전엔 경기에서 지면 잠을 못 잤다. 그래서 소주하고 맥주하고 ‘비벼서’ 먹은 뒤에야 잠이 왔다. 요즘은 맥주 한잔 정도씩만 먹는다. 소주를 먹으면 머리가 아파서 잠을 못 잔다.

=삼성이 서울로 연고를 옮긴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삼성 라이온즈는 대구에 있어야 한다. 대구가 서울보다 시장성은 떨어지겠지만 야구도시 아닌가.

=선동열 감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3년 동안 오라고 했다. 감독되기 전에 코치 경험을 해보라고 충고했다. 지난 1년 동안 함께 해보니 나보다 더 잘할 것 같다.

=애창곡은.

▲노래는 정말 못한다. 진짜 음치다. 해태 감독 시절 광주구장의 응원가였던 ‘목포의 눈물’을 하도 많이 들어서 유일한 애창곡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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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구 무교동 45번지 코오롱 빌딩 앞에서는 매일 새벽 6시부터 오전 11시까지 고소한 토스트 냄새가 행인들의 걸음을 멈추게한다.

냄새의 근원지는 골목 한 귀퉁이에 세워진 하얀 스낵카. 1.5평 남짓한 공간에서잘 달궈진 그릴판 위에 쉴 새 없이 식빵을 굽는 사람이 바로 여기서 8년째 토스트를팔고 있다는 '석봉토스트'의 김석봉 사장이다.

토스트 장사로 연봉 1억을 벌고 대형 쇼핑몰에 '석봉토스트' 브랜드를 입점시킨그는 이제 15개 체인점의 창업주로서 지난 6월에는 '샌토매니아'라는 브랜드로 중국에까지 진출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담아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넥서스BIZ刊)를 펴냈다.


하얀 호텔 조리사 복장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손님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김사장은 언뜻봐도 여느 노점상인들과 많이 다르다.

손님이 쓰는 티슈 한 장, 토스트에 들어가는 치즈 한 장도 좋은 것만 사용한다는 그는 청결과 위생을 중시한다.

"재료를 구입할 때도 항상 손님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손님 마음에 들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지요. 손님들이 그런 노력을 알아주고 인정해주실때 기분이 좋습니다."

양배추, 오이 등 모든 재료를 매일 직접 깨끗이 씻고 커피물도 정수기로 걸러내고 토스트와 함께 판매하는 우유도 아침마다 새로 구입한다는 김 사장은 음식을 다루면서 돈을 만지는게 불결하다는 생각에 '셀프계산제'를 도입했다.

손님이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그는 "가끔 돈을 안내고 갔다가 다시 돌아와 계산을 하거나 계산을 잘못했다며 돌아와 더 내고 가는 분들도 계신다"면서 "손님과 신뢰가 쌓이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도 장사 초기에는 자릿세를 요구하는 불량배들의 위협이나 철거를 하라는 노점단속원들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자신만의 무기인 미소로 매번 위기를 극복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럴땐 저도 속으로 많이 떨었어요. 처음 당하는 일이라 가슴도 벌렁벌렁 거리고. 그래도 그냥 웃으면서 손님처럼 대하자 생각하고 매번 웃었지요. 결국 제 미소작전이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사장은 오전 11시에 장사를 끝내고 매일 오후에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장애복지관 등을 찾아 불우한 어린이들, 노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직접 토스트를 구워주고때때로 인형극 공연 봉사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장사해서 남는 게 있겠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봉사를 하면서 얻는 기쁨이 큽니다.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부터 해왔던 일이고 손님들이 가게를 찾아주시니 결국 손님들이 하는 일이라고 봐야지요"라고말했다.

인터뷰 중에 웬 아주머니가 스낵카 천막으로 들어와 갓 구운 토스트와 우유를들고 나갔다.
김 사장에 따르면 그녀는 매일 가게에 들러 공짜 토스트와 우유를 가져가는 노숙자라는 것.

종종 이런 무일푼 손님들이 들러 끼니를 해결한다고 말하는김 사장의 얼굴에서 싫은 내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년이 없는 직업인만큼 앞으로도 계속 같은 자리에서 토스트를 구울 계획이라는 김 사장은 움직일 수 있는 한 계속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살아갈 생각이다.

"체인사업이 활성화하면 그때는 하루 종일 스낵카를 몰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찾아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제대로 봉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 날이 곧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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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지만 막상 좌절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마저 신용불량자로 만들 정도로 철저히 실패했다면….

기능성 침구용품업체 트윈세이버 황병일 사장(41)은 신용불량자로 출발해 5년 만인 2003년 1천만달러 수출탑을 받은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지난해는 2백억원의 매출을 올린 어엿한 중견 사업가로 변신했다.

매출 20억원 남짓한 통신판매회사를 운영했던 황사장은 1998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나면서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살던 집마저 팔았지만 6억원의 빚과 함께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거래처가 줄도산하면서 연쇄 부도를 맞았어요. 고의 부도를 낼 수도 있었는데. 그랬으면 2억~3억원은 챙겼을 겁니다. 그러나 차마 나혼자 살자고 그럴 수는 없었어요."

빚쟁이에게 시달리던 황사장은 그해 가을 남은 돈을 긁어모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 때 일본 유학을 목표로 공부해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일본에서 될 만한 아이템을 골라 한국에서 재기하겠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잡지를 뒤적이다 유럽산 메모리폼 베개를 본 순간 황사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통신판매를 하면서 웰빙 관련 제품이 잘 팔린다는 사실을 경험했던 터라 뭔가 될 것 같았다.

메모리폼 베개란 충격 흡수 소재인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베개다. 짧은 시간을 자도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침 일본에서는 숙면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메모리폼 베개는 유럽산이 유일했다. 중계무역을 계획했던 황사장은 수입해서 파느니 만들어서 수출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폴리우레탄 전문가와 각종 연구소를 찾아 다녔다. 우여곡절끝에 기술을 개발하고 종자돈 3천만원을 마련해 99년에는 회사를 세웠다. 신용불량자인 탓에 형님 이름을 빌려 설립한 회사가 지금의 트윈세이버다. 이렇게 시작한 트윈세이버 베개는 순식간에 일본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일본에는 사실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갔어요. 일본에서 막 유럽산 메모리폼 베개가 팔릴 시기였조. 한국에서 왔다며 유럽산보다 싸게 공급하겠다고 하자 유통업체들이 납품을 받기 시작한 것이죠.

황사장은 사업을 하면서 여윳돈만 생기면 빚을 갚아나갔다. 99년 회사를 세우자마자 채권자들이 찾아와 빚을 갚으라며 소란을 피웠다. 2001년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면서 빚갚고 제품 파는 힘든 시기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수출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막했다. 전문전시회를 통해 판로를 뚫자는 생각에 2002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홈패션 침구장식 전시회인 하임텍스에 참가했다. 황사장은 전시회를 통해 러시아,체코,크로아티아,스페인,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독일,싱가포르,대만,중국 등 세계 19개국에 판로를 뚫었다.

지난해 매출 2백억원의 75%가 수출이다. 지금까지 판 베개만 5백만개가 넘는다. 일렬로 세우면 서울과 부산을 29번 왕복(약 25만㎞)할 수 있는 양이다.
메모리폼 베개가 뜨면서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도 아류 제품이 쏟아져 난관을 맞기도 했다.

황사장은 이를 스피드 경영으로 정면 돌파했다. 중소기업 형편에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연구개발과 기획, 생산 전과정을 자회사에서 원스톱으로 해결하고 나라별 기호와 특성에 맞게 연간 50여개의 제품을 쏟아낸 것이다. 국내서는 개개인의 두상과 체형, 수면습관을 분석해 최적의 베개를 만들어주는 첨단 수면보조시스템 까르마를 내세워 고가정책을 유지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경기 안성에 동양 최대 규모의 수면용품 전문 사업장을 세웠다. 대량 생산을 통해 내수 시장은 물론 수출지를 다변화해 연매출 3백억원을 넘기는 게 올 목표다. 그는 트윈세이버를 세계적인 수면환경 전문회사로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베개, 매트릭스, 조명, 향, 색깔을 이용해 현대인에게 최적의 수면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것. 각 분야의 전문회사는 있지만 황사장은 이를 집대성하는 게 목표다.

"부도났을 때 도망가지 않고 맞섰어요. 잠깐 피했다면 언젠가 신용은 살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 앞에 다시 떳떳하게 나설 수 있겠어요?" 신용불량자에서 아시아 최고의 수면용품 회사를 일군 비결에 대한 황사장의 대답이다.


이글을 읽으니 세상은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은자가 강한거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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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보 누루미


“마음이 모든 것이다. 고무 같은 근육들까지도. 내가 나인 것은 모두 마음 때문이다.”
- 핀란드의 육상 선수. 1920년 제7회 안트워프 올림픽 대회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땄고, 1924년 제8회 파리 대회에서 다섯 개 종목에 출전해 전 종목에서 우승하였다. 또한 1928년 제9회 런던 대회에서 한 개의 금메달을 추가한 그는 모두 아홉 개의 금메달과 세 개의 은메달을 획득하여 육상 장거리 선수들의 우상이 되었다.



■ 제시 오웬스


“우리는 모두 꿈이 있다. 그러나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두려운 결심, 헌신, 훈련,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 미국의 흑인 육상 선수.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 넓이뛰기의 네 종목에서 우승하여 4관왕이 되어, 당시 유태인과 흑인의 참가를 차별하였던 독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 이블린 애시퍼드


“내가 지닌 근육은 모두 고된 훈련의 소산이다.”
- 미국의 육상 선수. 다섯 차례나 올림픽 팀에 뽑힌 그는 동독의 여자 선수들이 단거리 종목을 석권하고 있을 무렵 미국에 금메달을 되찾아 주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지칠 줄 모르고 연습하여 1984년에는 100미터에서, 1984·1988·1992년에는 400미터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 윌마 루돌프


“어머니는 나에게 아주 일찍부터 이렇게 가르치셨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그 첫 번째는 목발 없이도 걷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미국의 육상 선수. 네 살 때 성홍열과 소아마비에 폐렴까지 앓은 그는 그 후유증으로 여섯 살에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각고의 노력 끝에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그는 중학교 때 농구 선수가 되었다가 육상 선수로 전향하였다. 열 여섯 살 때인 1956년 미국 육상 대표로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해 400미터 계주에서 동메달을 땄고,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에서는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페기 플레밍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스포츠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스포츠를 해서는 안 되며, 스포츠를 자신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
- 미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1968년 프랑스 그레노블에서 열린 제10회 동계 올림픽 대회에서 여자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을 땄다. 그는 연 5회 미국 챔피언이었으며, 연 3회 국제 선수권을 독차지했다.



■ 아베베 비킬라


“나는 남과 경쟁하여 이긴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마라톤은 대단히 고된 운동이기 때문에 숨은 턱에 차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뛴다. 때로는 몸이 너무 무거워서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컨디션을 가다듬어 평소처럼 뛰어야 한다. 나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에 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렸을 때, 그것이 승리로 연결되었다.”
- 이디오피아의 육상 선수. 황제 친위대 하사관으로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 대회 마라톤에서 맨발로 달려 우승함으로써 ‘맨발의 왕자’라 불리었다. 1964년 도쿄에서 열린 제18회 올림픽 대회에서도 2시간 12분 11초 2라는 당시 세계 최고 기록으로 우승하여 올림픽 사상 최초로 마라톤 2연패를 이룩하였다.



■ 마크 스피츠


“나는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 나는 내일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오늘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 미국의 수영 선수. 1968년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 두 개를 땄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자신이 참가한 일곱 개 전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해 올림픽 통산 최다 아홉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네 명의 선수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나머지 세 명의 선수는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1920~1928·육상), 소련의 라리사 라티니나(1956~1964·체조), 미국의 칼 루이스(1984~1996·육상)다. 올림픽 한 대회 최다관왕인 스피츠는 역대 최다 세계 신기록 경신 기록(스물 여섯 번)도 보유하고 있다.



■ 브루스 제너


“인생에서 뭔가를 이루려면 오직 열심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승리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 미국의 10종 경기 선수.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10종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 나디아 코마네치


“고된 훈력 덕분에 쉬웠다. 그게 나의 비결이다. 그래서 나는 승리했다.”
- 루마니아의 체조 선수. 1975년 유럽 선수권에서 체조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은 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1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기록하며 3관왕에 올라 체조 요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80년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 대회에서는 2관왕에 올랐다.



■ 세바스찬 코


“모든 압박감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것을 활용하여 뭔가를 이루지 못하면 그것에 자신이 당할 수밖에 없다.”
- 영국의 육상 선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남자 1500미터를 2연패하였고, 각종 대회에서 800미터와 1마일, 1500미터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무려 40여 차례나 경신하였다.



■ 매트 비욘디


“성공과 실패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 비해, 어떻게 일하며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관해서는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여행을 즐기고, 매 순간을 즐기고, 승리와 패배를 걱정하지 마라.”
- 미국의 수영 선수.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 남자 수영에서 다섯 개의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 에밀 자토펙


“한 번의 훈련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수백, 수천 번 훈련했을 때, 신체의 여러 부분에서 발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가 온다고? 그건 문제가 안 된다. 피곤하다고? 그 또한 문제가 안 된다. 의지력이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 체코의 육상 선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 기관차’ 에밀 쟈토벡은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1만 미터에서 우승하고 5000미터에서도 2위를 차지하며 중장거리의 강자로 혜성과 같이 등장했으며,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서 5000미터, 1만 미터, 마라톤 등 세 종목을 모두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 그레그 루가니스


“두려움은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커다란 위험을 무릅쓴다면 당신은 큰 보수를 얻게 될 것이다.”
- 미국의 다이빙 선수.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 이어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도 스프링보드·하이보드 다이빙 두 종목에서 연속 우승하였다. 특히 서울 올림픽에서는 3미터 스프링보드 예선에서 뒤로 도는 연기를 하다 머리를 보드에 부딪혀 피를 흘렸으나, 약물 규정 때문에 마취제도 쓰지 않고 상처를 네 바늘 꿰맨 뒤 다이빙을 해 2관왕에 올랐다.



■ 플로렌스 그리피스-조이너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집중력을 키우고, 끊임없이 연습하며, 꿈(목표)을 가져야 한다.”
- 미국의 육상 선수.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대회 육상 여자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서 우승하였고, 1600미터에서는 2위를 하였다. 이 때 세운 100미터 기록과 200미터 기록은 지금까지도 세계 신기록으로 남아 있다. 육상 실력 못지 않은 빼어난 미모와 패션 감각으로 ‘트랙의 패션 모델’로 불리기도 하였다.



■ 칼 루이스


“인간은 경쟁 상대가 있을 때 상승 에너지가 솟구친다. 만약 경쟁 상대가 없다면 기록은 퇴화될지도 모른다.”
- 미국의 육상 선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의 4관왕을 시작으로 서울·바르셀로나·애틀랜타 대회에 이르기까지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여 아홉 개의 금메달을 따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린다. 육상계를 뛰어넘어 1999년 IOC와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에 의해 ‘20세기 최고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 재닛 에번스


“나는 올림픽에 처음 참가해서 출발대 위에 섰을 때, 재미있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었다. 재미를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 미국의 수영 선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3관왕의 위업을 이루면서 수영 슈퍼스타로 등극하였으며, 이어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도 자유형 800미터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개인 통산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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