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견디는 힘이 더 멀리 뛰게 한다.

참을성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인생에 있어서 약하다. 한 줄기의 샘이 굳은 땅을 헤치고 솟아 나오듯
참고 견디는 힘이 마침내 광명을 얻게 한다. 하나의 어려운 일을 참고 극복하면, 강한 힘의 소유자가
된다. 고난과 장애물은 언제나 새로운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물 앞에서 결코 낙심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서서 더 멀리 바라보자.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더 멀리 뛰자. ‐러셀

가수 김흥국 씨는 무명 10년 만에 ‘호랑나비’로 일약 유명인이 된 케이스이다. 무명 10년은 그의 말
마따나 가진 건 몸 밖에 없으니 그저 몸으로 때워야 했던 시절들이었고 남몰래 눈물도 많이 훔쳤다.
어릴 때 그는 축구를 좋아했지만 축구화를 살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유명해진 이
후 남들보다 축구 홍보에 앞장 서고 월드컵 때도 대대적인 활약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굉장
히 낙천적인 소유자인 그는 어떤 고난과 장애물이 와도 참고 견디는 힘을 길렀고 그것을 통해 딛고 일
어서고자 노력했다. 이런 원동력이 주위에 어려운 분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다. 비록 가
진 것을 없지만 나누려고 했다. 그가 크고 작은 선행을 베푼 것도 바로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
문이다.

‘호랑나비’가 뜬 이유는 아마도 그의 천성대로 상식을 깨는 춤과 꾸밈 없이 노래를 불러 편안했기
때문이다. 특유의 허스키한 웃음이 들어간 노래는 원래 의도된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 그냥 낄낄거
린 것이 녹음되었는데, 콧수염이 그 모습의 일부이듯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도 성공적인 요인이 된 것
이다. 그의 얼굴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오랫동안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으로 살다 보니 얼굴 근육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김흥국 씨는 결코 낙심을 모르는 사람이다.


Q. 김흥국 씨를 생각하면 가수에서부터 축구, 불교, 해병대 등 많은 것이 떠오릅니다. 처음 연예인
이 된 계기는?

A.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음악에 좀 더 많은 관
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라벌고등학교 재학시절, 밴드부에 가입하게 되었죠. 엄격한 선
배들의 군기를 참아가면서 음악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고, 내가 앞으로 쭈욱 해나갈 수 있는
일, 진정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 음악이구나… 하는걸 깨닫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회
에 나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다 보니 힘든 점도 참 많더군요.

B급 그룹의 일원으로 서러움을 맛보기도 했고, 작곡가 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눈치만 보던 시
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0여년간의 무명생활을 지내던 어느날,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다니던 끝에
제 노래가 빛을 발하게 되었고 그렇게 인기가수라는 힘든 대열에 낄 수가 있게 되었죠. 오죽하면 ‘무
명가수 무명가수’해서 제 이름의 호가 혹시 '무명'이 아닐까 할 정도로 기나긴 무명생활의 끝에 찾아
온 기회였습니다.

Q.유명연예인으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가장 큰 비결은?

A. 편안함과 솔직함, 이것이 제게 있어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입니다. 사실 연예인으로 살아가다 보
면, 카메라 앞에서, 관객 앞에서 자신을 속이고, 포장하고, 돋보이려 노력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
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연기일 뿐, 제 진짜 모습은 아니죠. 방송국과 각 가정의 라디오 및 TV까
지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마이크를 타고, 브라운관을 타고, 또 제 목소리를 타고서 진실은 통하는 법
입니다. 저도 고생을 했던 사람이고, 평범한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그러
면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형제, 혹은 동네 아저씨처럼 마음을 다할 뿐이죠. 아, 저 사
람도 우리랑 똑같은, 아니 어쩔 땐 나보다도 더 부족한 면도 있는 내 주위의 이웃일 뿐이구나… 하는
동질감이, ‘김흥국’이란 인간에 대한 호감도를 더 높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Q.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A. “쥐구멍에도 해뜰날있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그 쥐구멍도 문이 닫혀있으면 아무리 해가 떠도
그 빛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노력 없이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죠. 가끔 보면, 제대로 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언젠간 풀리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주위
에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운이 좋아 저러겠지… 하는 질투심만 키운 채 하루하루 시간을 버리는 사람
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고 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축구할 때도 보
세요. 자신의 포지션에서 가만히 서 있는다고, 게임이 풀립니까? 공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볼
을 잡을 수 있고, 그래야만 슛을 날릴 수 있는 겁니다. 앉아만 있기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
다.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서 열심히 뛰는 것! 그것만이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지름길일 것입니
다.


김흥국 씨의 퍼스널 브랜드 전략 3가지

1. 솔직하게 접근하라.

김흥국 씨의 가장 큰 무기는 솔직함이다. 자신을 속이고,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
고 노력했다. 가끔 그것이 지나친 애드립으로 주위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이
웃 같은 이미지를 확보하는데 그의 천성대로 꾸밈 없이 솔직하게 접근한 것이 브랜드 전략에 주효했
다.

2.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김흥국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 뛰었다. 자연스레 축구사랑모임 회장, 월드컵문화시민예술
단 단장,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안전홍보위원 등 축구에 관련된 직함을 여러 개를 갖게 되었고 축구
에 대한 사랑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널리 자신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확보하라.

김흥국 씨는 콧수염, 너털웃음 등 자신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를 확보하여 동네 이웃집 아저씨 같
은 이미지를 굳건히 하였다. 1989년 각종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호랑나비'로 일약 ‘10대 가수’
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TV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나와 결혼 상대자 소개와 태어날 아
이의 이름을 ‘번칠이’로 짓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공개해 더욱 인기를 높였고, 유행어 '아~응애
에요'로 히트를 쳤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확실히 대중에게 포지셔닝 하여 그의 방송생명력을 길
게 연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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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트레이시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선량한 시민이었으나 안정된 직업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집안의 주제가처럼 여겨질 정도였고, 언제나 부족하게 지내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졸업할 즈음 학교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조그만 호텔의 접시 닦이였다. 그 뒤엔 주차장에서 세차하는 일을 했으며, 밤늦게 건물 바닥을 닦는 청소부로 일하기도 했다.
제재소에서 통나무를 쌓는 일, 벌목꾼, 주유소 점원, 화물선 잡역부 등 온갖 허드레 직업을 전전했다.

집이 없어서 겨울엔 자동차에서 잠을 잤고, 여름철엔 노숙을 했다. 학력이 보잘것없어 자신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육상 경기에서 한 바퀴 이상 처지면, 맨 앞에서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시에 그의 기분이 그랬다. 남보다 너무나 뒤쳐져 있어서 오히려 자신이 첫 번째인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늘 전전긍긍했다. 그는 상사들이 난데없이 나무라는 통에 주눅이 들기 일쑤였고, 스스로를 장기판의 졸(卒)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 인생을 바꾼 질문 하나 >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면서 늘 돈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고, 자기가 한 노력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고, 앞날에 대해 희망을 잃은 채 조용히 살고 있었다.

반면에 주위에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사는가?’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했다.

그리고 결국 그 의문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오늘날 남부 캘리포니아에 멋진 저택을 짓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 인터내셔널 사를 설립해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10여 개국에서 비즈니스를 훌륭히 이끌고 있다.

매년 여러 나라에서 50만 명 가량을 대상으로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고 있으며, IBM이나 맥도널드 더글러스 같은 큰 회사와 함께 일해 왔다.

그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기부여가이자, 비즈니스 분야의 컨설턴트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무역학 학사와 MBA 학위를 취득했다. 철학, 경제, 역사, 경영 분야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책과 논문을 섭렵하면서 폭넓은 지식을 쌓아 왔다.

놀랄 만큼 해박한 지식과, 세상을 꿰뚫어보는 지혜로 성공, 리더십, 자기 개발, 경영, 세일즈, 전략 기획, 목표 수립, 시간 경영, 창조성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가 집필한 저서들은 31개국 18개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우리 나라에도 다섯 권이 출간된 바 있다.

그 가운데 <절대 변하지 않는 8가지 성공원칙>은 비즈니스에 적용할 성공 법칙이 가득한 책이며, <세일즈 슈퍼스타>는 판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보아야 할 명저이다.
<내 인생을 바꾼 스무 살 여행>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만한 좋은 책이다.


< 자연은 농담을 모른다. >

그가 진지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최초의 돌파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의 법칙’이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올림푸스 산에 있는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믿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선보였다.

모든 현상은 이유가 있어서 발생하며, 단지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 의하면 모든 성취, 부, 행복, 번영, 성공은 특정한 원인과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결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와 불경에 나오는 ‘인과응보’가 같은 뜻이다.

따라서 원하는 결과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 원인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능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더 쉬운 방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성취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생각은 원인이고, 조건은 결과이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이 달라진다는 얘기이다.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다음과 같은 괴테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한다.

“자연은 농담을 모른다. 자연은 늘 진실하고 엄격하고 옳으므로 오류나 착오는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자연은 자연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를 경멸하고, 오로지 타당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자만을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자연의 비밀을 보여준다.”


< "당신들은 사하라에서 죽을 것이다." >

원주민들조차 극구 말렸던 죽음의 여행. 하지만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목숨을 건 도전 앞에 불가능은 없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스무 살 때 2만70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 후 얻게 된 성공 원칙 일곱 가지.

브라이언 트레이시와 친구들은 불과 300달러씩을 내어 긴 여행에 나섰다.

그들은 자동차로 북아메리카를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횡단했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와 스페인을 관통했으며, 다시 자동차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죽음의 사하라 사막을 넘었다.

2만7000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이었고, 그 목표를 이루는 데 12개월이나 걸렸다.

그들은 이 여행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려고 한다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감동 어린 진실을 만나게 된다.

또 너와 내가 따로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돕고 격려하는 동료애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 이야기를 <내 인생을 바꾼 스무살 여행>이라는 책에 담았는데,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배우는 진한 성공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이 책에서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누구에게나 건너야 할 사하라 사막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공의 열쇠는 하나에 집중하는 힘이다. 삶의 과정에서 당신의 모든 것 - 정신과 육체 - 을 쏟아 부어야 할 결정적인 시점이 있게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면, 사명감을 갖고 그것에 온 힘을 쏟아라. 일단 시작하면, 그 목표를 향해서 시간과 정력을 전력으로 투자하라.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말라. 목표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완전히 성취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이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시험이다.”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며 그가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성공 원칙이다.

1. 어떤 일에서나 성공의 문을 열어주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첫 걸음을 떼는 것이다.

2만700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거리를 가야 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첫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만약 첫 걸음을 떼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여행이 어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2. 목표를 향해 첫 걸음을 떼었다면, 그 이후로 실패의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말라.

인내력은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당신의 궁극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 정비례한다.

인내력은 성공에 절대적인 것이며,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마음의 결정이다.


3. ‘한 번에 하나씩!’이란 원칙대로 충실히 산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목표도 성취해낼 수 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순간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 전체가 결정된다. 당신이 매일, 아니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산다면, 당신의 미래는 저절로 열릴 것이다.


4. 반대하는 사람을 멀리하라.

당신은 실패할 것이고, 당신은 소중한 시간과 돈을 낭비할 것이고, 사하라 사막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경계하라.

반대의 목소리에 굴복한다면, 당신은 어떤 일도 이루어낼 수 없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꿈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이 하라.


5. 성공의 사다리를 끝까지 오르고 싶다면, 어려움과 난관을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소중한 통과의례로 받아들여라.

난관이나 역경에는 그에 합당한, 아니 그 이상의 기회와 결실을 안겨주는 씨앗이 담겨 있는 법이다.

아프리카 여행은 문제의 연속이었고, 수많은 실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배우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사하라 사막에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을 성취했다면, 그 과정을 곰곰이 돌이켜 보라. 성취는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그것에서 얻은 교훈으로 빚어낸 결실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라. 그리고 그 성취 과정에서는 유연하게 대처하라.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시도하라. 항상 열린 가슴으로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대처하라.

당신이 처한 환경이 전해주는 피드백을 기꺼이 인정하면서 궤도를 수정하라.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핵심적인 가치가 이것이다. 그들은 탄력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7.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독불장군은 없다. 독립을 주장하는 젊은이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300달러로 2만7000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을 하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도전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삶에서 함께 웃음과 사랑과 눈물을 나누는 사람들은 소중한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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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은 준비된 자만이 누리는 특권”>


복(福)이란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관적 개념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큰 돈을 벌었거나 힘든 일을 성취해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면 성공했거나 복 받은 사람이라고 쳐준다.

당사자도 내놓고 자랑하지는 않지만 내심으로는 행복해 한다.

‘운(運)이 좋았다’는 대체로 성공한 이들이 다소 겸양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사람 입장에서 보면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운이 없어서’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운이든 복이든 성공 CEO로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전 회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생애를 통털어 하늘이 낳은 큰 부자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상징적으로 ‘돈병철’이란 세인의 부러운 탄식을 듣기도 했다. 호암은 중요 사업구상 때마다 일본에서 보내곤 했다.

삼성재팬에서 이십수년 그의 수발을 들었던 정준명 사장에게 보여준 호암의 사람을 사로잡는 일화다.

격려 차원에서 ‘백지수표’를 당시 정 과장에게 준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신뢰와 존경으로 승화됐다.

사람 경영에 뛰어난 그는 ‘사람복’이 많았다. 그것이 ‘돈복’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에게도 안 되는 게 있었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한 행운아들 >

자식 농사와 골프점수, 그리고 자동차사업 진출이 그것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그 세가지 빼고는 모두 만족스럽게 이뤘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1등주의’와 ‘사업보국’이라는 경영철학과 투지, 그리고 노력으로 그는 모든 것을 달성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전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CEO다.

큰 부(富)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의 상징인 삼팔선 육로를 통해 우람한 소 1,000여 마리를 끌고 다닌 한국의 거인이었다.

그는 강원도 산골짜기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0여세 때 가출해 ‘시련은 있어도 절망이 없는’ 인생드라마를 일궜다.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그는 조선소 건립을 위한 자금을 꾸기 위해 런던에 갔다.

거북선이 있는 한국화폐를 보여주며 한국의 몇백년 된 조선산업 역사를 역설했다.

행운이 왔다. 아마 거북선보다 그의 기업가 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이 행운의 여신인 티케(Tyche)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들 편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티케는 로마신화의 포르투나(Fortuna)와 동일시되는 신이다. 영어에서 행운을 뜻하는 ‘포춘’(fortune)의 어원이기도 하다. 티케는 손에 마술 뿔을 갖고 있다.

티케가 돌아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여신이 풍요의 뿔을 뒤집어서 선물을 듬뿍 쏟아줬기 때문이다.

역시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티케를 만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이 낳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낳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행운을 내 편으로 하려면 근면은 기본이 아닌가 싶다.

한국 건설 사상 최초의 해외공사는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태국 정부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도입해 1965년 9월30일 국제경쟁 입찰에 부쳤다.

현대건설은 서독·일본·프랑스 등 16개국 29개사와 경쟁한 끝에 공사를 따냈다.

66년 1월7일 착공에 들어갔지만 공사는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아무런 경험 축적도 없이 의욕만 갖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 기회는 슬그머니 찾아온다. >

장비 부족·경험 부족·기술 부족으로 현장 내부에서 여러 가지로 갈등이 고조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말단 경리담당 이명박 사원은 밀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국에서 온 인부들이 군용 단검을 들고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폭도들은 사무실 금고를 목표로 삼은 듯했다.

이명박 사원은 금고와 경리장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사무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폭도들은 15명 정도였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들 중 한명이 들고 있던 단도를 갑자기 이명박 사원 책상 위 금고 옆에다 내리꽂았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금고 열쇠 내놔!” “못 내놓겠다.”

벽으로 뒷걸음질친 이명박 사원 목의 왼쪽으로 칼이 날아와 꽂혔다. 앞이 캄캄했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열쇠를 내줄 수는 없었다. 회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명감 같은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굴복당하기 싫은 본능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금고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야, 뭉개버려!” 옆구리와 등, 엉덩이, 온 몸에서 불이 났다.

그럴수록 있는 힘을 다해 금고를 끌어안았다. 그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금고 사건이야말로 이명박 사원에게는 행운의 출발점이었다.

금고 사건으로 이명박 사원은 일개 대리에서 현장 소장으로 발탁되며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고속 승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연도 큰 운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처럼 큰 행운은 없다.

프랑스의 독립투사 드골 사령관과 프랑스의 문화를 짊어진 작가 앙드레 말로의 만남이 그렇다.

그들은 동지이며 친구이며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국가 경영을 함께했다.

농민 마오쩌둥(毛澤東)과 지식인 저운라이(周恩來)의 만남 또한 그렇다.

저운라이는 당 서열과 학식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주인공 자리를 마오쩌둥에게 내주고 나라건설 공동지도자로 활약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한신혁 부회장도 40년 지기로 알려지고 있다. 김 회장에게 있어 한 부회장은 드골의 앙드레 말로이며 마오쩌둥의 저운라이였다.

김 회장은 대학생 때부터 아버지 김진만 회장을 도와 1960년대 미륭건설 창업에 동참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1944년생이면서도 1.5세대 기업가로 호칭된다. 김 회장은 오늘날 한국의 10대 기업군 동부그룹을 일궈냈다.

이러한 역사 속에는 그의 오랜 동반자인 한 부회장이 함께하고 있다. 한 부회장은 그 흔한 매스컴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낮고 조용한’ 리더십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난국을 해결했다. 행운을 만들곤 했다.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영의 귀재라고 불리는 GM의 잭 스미스 전 회장이 노자의 ‘무위자연’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런 행운을 창조하는 만남은 어디 동부그룹의 김 회장과 한 부회장뿐이겠는가.

LG그룹의 구(具)씨 가문과 허(許)씨 가문의 동반자 관계가 그렇고, 최태섭 한국유리 전 회장과 이봉수 전 신일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의 관계가 그렇다.


< 최고 연봉의 윤윤수 회장 >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은 약 10년 전 당시 18억원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연봉을 받은 것으로 장안의 화제를 뿌렸다.

그런데 그 연봉 책정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행운의 여신 티케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윤 회장과 휠라비즈니스 파트너인 미국의 알티스가 휠라에서 손을 떼며 본의 아니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휠라그룹 본사가 윤 회장을 휠라코리아 사장으로 앉히며 알티스에게 윤 회장의 가치가 얼마인지 물었다.

“그 사람은 휠라 에이전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1년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다. 그것을 고려해서 대우를 해 줘야 할 것 같다."

사실 알티스는 윤 회장에 대해 잘 몰랐다. 윤 회장이 휠라비즈니스로 1년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돈을 알티스는 윤 회장이 모두 챙기는 줄 알았다. 그 돈이 회사를 운영하는 데 들어간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결과 150만 달러의 연봉이 결정됐다.

만약 본사가 윤 회장에게 직접 얼마나 받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면 결코 그렇게 엄청난 액수를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는 한국 대기업 사장 연봉이 1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윤 회장은 당당하게 최고의 연봉을 받은 뒤 세금을 내고도 느긋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투명 경영을 통해 한국에서 글로벌 경영이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한국 경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 CEO다. 대부분 기업 CEO들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분 아래 감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 사장은 오히려 감원 대신 4조 2교대로 일자리를 나누면서 충분한 휴식과 평생학습으로 종업원 모두를
지식근로자로 양성하고 생산성을 배가시켰다.


< 국에 빠진 파리도 삼켜... >

그의 ‘새로운 패러다임 운동’은 고용 없는 성장시대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 사장의 이러한 놀라운 경영 대안은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그는 사장에 오를 경우에 대비해 미래학자 존나이스빗을 멘토로 메가트렌드를 연구하고 대비했던 것이다.

채수삼 서울신문 사장도 ‘욘사마’의 매력을 지닌 열정적인 농부형 CEO다. 현대상사 무역인 출신이지만 광고회사
금강기획 사장 시절 ‘채수삼 열풍’을 일으켰었다.

특수 스프링 메이커인 삼원정공은 연간 매출액이 200억원밖에 되지 않는 작은 기업이지만 50억원 상당의 순익을 내는 무서운 기업이다.

시테크와 초절약형 경영자로 알려진 양용식 사장의 일화 한토막이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그는 당시 문학무 사장집이자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종업원이라고는 사장과 양용식 사원
둘뿐이어서 그들은 늘 겸상을 했다.

어느 날 국에 죽은 파리가 있었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면구해할 것을 염려해 그는 국과 파리를 모두 꿀꺽 먹어 치워버렸다.

이렇게 절절하게 사는 양 사장에게 어찌 행운이 따르지 않겠는가. 시테크 경영강사로도 유명세를 타면서 회사도 알차게 키웠다.

가정적으로도 행운이 따라왔다. 아들 둘 모두가 최고 명문대학을 나와 유학을 마치고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있느냐’는 말이 있다.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현실에서는 흠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박정희 정권 때 유한양행의 CEO인 유일한 박사는 정권에 아부하지 않았다.

아부는커녕 소집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무사찰이란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당국의 날고 기는 십수명의 세무공무원이 덮쳤다. 그러나 아무리 뒤지고 까 봐도 먼지 하나 나지 않았다.

당시 최고 권력자가 “다시는 유한양행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화가 복이 된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모든 부를 사회에 환원한 공인형 CEO의 본보기로 귀감이 되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 스토어(Life-Style Store)를 표방하는 까사미아의 이현구 사장도 행운의 여신 티케와 한편이다.

그는 종업원 2~3명 시절부터 조회를 서는 등 기업으로서의 모양새를 지키며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왔다.

특히 고객들에게 ‘행운’을 나눠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까사미아 마니아 30만 고객을 확보한 기업이 됐다.


< 사회적 책임 다할 때 행운도 따라 >

그만큼 고객 사랑은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미덕이다.

‘내 자식이 먹을 수 있는 과자’ 크라운산도 열풍을 일으킨 윤태현 전 크라운제과 회장은 위암으로 고생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과자를 시식했다.

그의 생전 공장에 불이 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불난 집이 잘 된다’는 속담처럼 크라운은 승승장구했다. 분발했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후임자인 윤영달 사장은 화의라는 어려움을 등산 경영으로 극복했다.

답답해서 시작한 등산 경영으로 구성원들의 호연지기가 크게 신장됐다. 나아가서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업계 판도를
바꾸는 저력과 행운을 누리고 있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으로 탈락한 임직원끼리 퇴직금을 합쳐 만든 오디티의 이일 사장과 IT 분야 설비제조업체인 미래
컴퍼니의 김종인 사장도 벤처업계의 행운아들이다.
한우물을 파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수요의 폭발이 가져온 행운들이다.

행운이란 끊임없는 도전과 근면,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행동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다.

‘용장과 지장도 좋지만 최고봉은 행운을 몰고 오는 장수’라는 나폴레옹의 인사관은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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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은 준비된 자만이 누리는 특권”>


복(福)이란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관적 개념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큰 돈을 벌었거나 힘든 일을 성취해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면 성공했거나 복 받은 사람이라고 쳐준다.

당사자도 내놓고 자랑하지는 않지만 내심으로는 행복해 한다.

‘운(運)이 좋았다’는 대체로 성공한 이들이 다소 겸양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사람 입장에서 보면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운이 없어서’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운이든 복이든 성공 CEO로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전 회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생애를 통털어 하늘이 낳은 큰 부자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상징적으로 ‘돈병철’이란 세인의 부러운 탄식을 듣기도 했다. 호암은 중요 사업구상 때마다 일본에서 보내곤 했다.

삼성재팬에서 이십수년 그의 수발을 들었던 정준명 사장에게 보여준 호암의 사람을 사로잡는 일화다.

격려 차원에서 ‘백지수표’를 당시 정 과장에게 준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신뢰와 존경으로 승화됐다.

사람 경영에 뛰어난 그는 ‘사람복’이 많았다. 그것이 ‘돈복’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에게도 안 되는 게 있었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한 행운아들 >

자식 농사와 골프점수, 그리고 자동차사업 진출이 그것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그 세가지 빼고는 모두 만족스럽게 이뤘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1등주의’와 ‘사업보국’이라는 경영철학과 투지, 그리고 노력으로 그는 모든 것을 달성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전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CEO다.

큰 부(富)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의 상징인 삼팔선 육로를 통해 우람한 소 1,000여 마리를 끌고 다닌 한국의 거인이었다.

그는 강원도 산골짜기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0여세 때 가출해 ‘시련은 있어도 절망이 없는’ 인생드라마를 일궜다.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그는 조선소 건립을 위한 자금을 꾸기 위해 런던에 갔다.

거북선이 있는 한국화폐를 보여주며 한국의 몇백년 된 조선산업 역사를 역설했다.

행운이 왔다. 아마 거북선보다 그의 기업가 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이 행운의 여신인 티케(Tyche)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들 편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티케는 로마신화의 포르투나(Fortuna)와 동일시되는 신이다. 영어에서 행운을 뜻하는 ‘포춘’(fortune)의 어원이기도 하다. 티케는 손에 마술 뿔을 갖고 있다.

티케가 돌아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여신이 풍요의 뿔을 뒤집어서 선물을 듬뿍 쏟아줬기 때문이다.

역시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티케를 만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이 낳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낳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행운을 내 편으로 하려면 근면은 기본이 아닌가 싶다.

한국 건설 사상 최초의 해외공사는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태국 정부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도입해 1965년 9월30일 국제경쟁 입찰에 부쳤다.

현대건설은 서독·일본·프랑스 등 16개국 29개사와 경쟁한 끝에 공사를 따냈다.

66년 1월7일 착공에 들어갔지만 공사는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아무런 경험 축적도 없이 의욕만 갖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 기회는 슬그머니 찾아온다. >

장비 부족·경험 부족·기술 부족으로 현장 내부에서 여러 가지로 갈등이 고조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말단 경리담당 이명박 사원은 밀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국에서 온 인부들이 군용 단검을 들고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폭도들은 사무실 금고를 목표로 삼은 듯했다.

이명박 사원은 금고와 경리장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사무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폭도들은 15명 정도였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들 중 한명이 들고 있던 단도를 갑자기 이명박 사원 책상 위 금고 옆에다 내리꽂았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금고 열쇠 내놔!” “못 내놓겠다.”

벽으로 뒷걸음질친 이명박 사원 목의 왼쪽으로 칼이 날아와 꽂혔다. 앞이 캄캄했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열쇠를 내줄 수는 없었다. 회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명감 같은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굴복당하기 싫은 본능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금고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야, 뭉개버려!” 옆구리와 등, 엉덩이, 온 몸에서 불이 났다.

그럴수록 있는 힘을 다해 금고를 끌어안았다. 그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금고 사건이야말로 이명박 사원에게는 행운의 출발점이었다.

금고 사건으로 이명박 사원은 일개 대리에서 현장 소장으로 발탁되며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고속 승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연도 큰 운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처럼 큰 행운은 없다.

프랑스의 독립투사 드골 사령관과 프랑스의 문화를 짊어진 작가 앙드레 말로의 만남이 그렇다.

그들은 동지이며 친구이며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국가 경영을 함께했다.

농민 마오쩌둥(毛澤東)과 지식인 저운라이(周恩來)의 만남 또한 그렇다.

저운라이는 당 서열과 학식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주인공 자리를 마오쩌둥에게 내주고 나라건설 공동지도자로 활약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한신혁 부회장도 40년 지기로 알려지고 있다. 김 회장에게 있어 한 부회장은 드골의 앙드레 말로이며 마오쩌둥의 저운라이였다.

김 회장은 대학생 때부터 아버지 김진만 회장을 도와 1960년대 미륭건설 창업에 동참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1944년생이면서도 1.5세대 기업가로 호칭된다. 김 회장은 오늘날 한국의 10대 기업군 동부그룹을 일궈냈다.

이러한 역사 속에는 그의 오랜 동반자인 한 부회장이 함께하고 있다. 한 부회장은 그 흔한 매스컴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낮고 조용한’ 리더십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난국을 해결했다. 행운을 만들곤 했다.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영의 귀재라고 불리는 GM의 잭 스미스 전 회장이 노자의 ‘무위자연’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런 행운을 창조하는 만남은 어디 동부그룹의 김 회장과 한 부회장뿐이겠는가.

LG그룹의 구(具)씨 가문과 허(許)씨 가문의 동반자 관계가 그렇고, 최태섭 한국유리 전 회장과 이봉수 전 신일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의 관계가 그렇다.


< 최고 연봉의 윤윤수 회장 >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은 약 10년 전 당시 18억원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연봉을 받은 것으로 장안의 화제를 뿌렸다.

그런데 그 연봉 책정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행운의 여신 티케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윤 회장과 휠라비즈니스 파트너인 미국의 알티스가 휠라에서 손을 떼며 본의 아니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휠라그룹 본사가 윤 회장을 휠라코리아 사장으로 앉히며 알티스에게 윤 회장의 가치가 얼마인지 물었다.

“그 사람은 휠라 에이전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1년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다. 그것을 고려해서 대우를 해 줘야 할 것 같다."

사실 알티스는 윤 회장에 대해 잘 몰랐다. 윤 회장이 휠라비즈니스로 1년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돈을 알티스는 윤 회장이 모두 챙기는 줄 알았다. 그 돈이 회사를 운영하는 데 들어간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결과 150만 달러의 연봉이 결정됐다.

만약 본사가 윤 회장에게 직접 얼마나 받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면 결코 그렇게 엄청난 액수를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는 한국 대기업 사장 연봉이 1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윤 회장은 당당하게 최고의 연봉을 받은 뒤 세금을 내고도 느긋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투명 경영을 통해 한국에서 글로벌 경영이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한국 경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 CEO다. 대부분 기업 CEO들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분 아래 감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 사장은 오히려 감원 대신 4조 2교대로 일자리를 나누면서 충분한 휴식과 평생학습으로 종업원 모두를
지식근로자로 양성하고 생산성을 배가시켰다.


< 국에 빠진 파리도 삼켜... >

그의 ‘새로운 패러다임 운동’은 고용 없는 성장시대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 사장의 이러한 놀라운 경영 대안은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그는 사장에 오를 경우에 대비해 미래학자 존나이스빗을 멘토로 메가트렌드를 연구하고 대비했던 것이다.

채수삼 서울신문 사장도 ‘욘사마’의 매력을 지닌 열정적인 농부형 CEO다. 현대상사 무역인 출신이지만 광고회사
금강기획 사장 시절 ‘채수삼 열풍’을 일으켰었다.

특수 스프링 메이커인 삼원정공은 연간 매출액이 200억원밖에 되지 않는 작은 기업이지만 50억원 상당의 순익을 내는 무서운 기업이다.

시테크와 초절약형 경영자로 알려진 양용식 사장의 일화 한토막이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그는 당시 문학무 사장집이자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종업원이라고는 사장과 양용식 사원
둘뿐이어서 그들은 늘 겸상을 했다.

어느 날 국에 죽은 파리가 있었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면구해할 것을 염려해 그는 국과 파리를 모두 꿀꺽 먹어 치워버렸다.

이렇게 절절하게 사는 양 사장에게 어찌 행운이 따르지 않겠는가. 시테크 경영강사로도 유명세를 타면서 회사도 알차게 키웠다.

가정적으로도 행운이 따라왔다. 아들 둘 모두가 최고 명문대학을 나와 유학을 마치고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있느냐’는 말이 있다.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현실에서는 흠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박정희 정권 때 유한양행의 CEO인 유일한 박사는 정권에 아부하지 않았다.

아부는커녕 소집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무사찰이란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당국의 날고 기는 십수명의 세무공무원이 덮쳤다. 그러나 아무리 뒤지고 까 봐도 먼지 하나 나지 않았다.

당시 최고 권력자가 “다시는 유한양행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화가 복이 된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모든 부를 사회에 환원한 공인형 CEO의 본보기로 귀감이 되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 스토어(Life-Style Store)를 표방하는 까사미아의 이현구 사장도 행운의 여신 티케와 한편이다.

그는 종업원 2~3명 시절부터 조회를 서는 등 기업으로서의 모양새를 지키며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왔다.

특히 고객들에게 ‘행운’을 나눠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까사미아 마니아 30만 고객을 확보한 기업이 됐다.


< 사회적 책임 다할 때 행운도 따라 >

그만큼 고객 사랑은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미덕이다.

‘내 자식이 먹을 수 있는 과자’ 크라운산도 열풍을 일으킨 윤태현 전 크라운제과 회장은 위암으로 고생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과자를 시식했다.

그의 생전 공장에 불이 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불난 집이 잘 된다’는 속담처럼 크라운은 승승장구했다. 분발했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후임자인 윤영달 사장은 화의라는 어려움을 등산 경영으로 극복했다.

답답해서 시작한 등산 경영으로 구성원들의 호연지기가 크게 신장됐다. 나아가서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업계 판도를
바꾸는 저력과 행운을 누리고 있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으로 탈락한 임직원끼리 퇴직금을 합쳐 만든 오디티의 이일 사장과 IT 분야 설비제조업체인 미래
컴퍼니의 김종인 사장도 벤처업계의 행운아들이다.
한우물을 파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수요의 폭발이 가져온 행운들이다.

행운이란 끊임없는 도전과 근면,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행동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다.

‘용장과 지장도 좋지만 최고봉은 행운을 몰고 오는 장수’라는 나폴레옹의 인사관은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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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은 기분 좋게 해주고 뭘 달라는데, 여기서는 시원찮은 것들(국회의원)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4주기가 지났다.

정 명예회장은 1998년 북한을 다녀온 뒤 인터뷰를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있었던 일화를 공개하면서 두 시간이 넘도록 아랫배가 아플 정도로 웃겼다.

정 명예회장의 성음(聲音)은 상당히 독특하다. 목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에도 흉내 내기가 고생스러울 정도로 특이한 리듬이 있다.

대화를 스스로 풀어주는 부사인 ‘일테면’은 특허처럼 들어간다. 아마 ‘거… 저… 일테면…’하면서 더듬거릴 때면 정 명예회장은 뭔가를 번개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김 위원장이) 나보고 정주영 ‘회장선생님’이라고 하면서 회장 밑에 선생님이라는 쟁반 하나 더 받쳐서 불러줬거든.
기념사진 찍을 때도 연장자라고 내가 가운데 서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놓고는 나한테 발전소를 지어주고, 중유 좀 달래,
하하항. 그래도 뭐 여기서는 ‘5공 청문회’할 때 시원찮은 것들(국회의원들을 지칭)이 막 그냥 증인 어쩌고 하면서
손가락질까지 하며 대들고 그랬는데.

북한에선 나를 기분 좋게 해줘 놓고 발전소를 지어달라 하고 기름을 좀 달래니까 밉지는 않잖아! 그러고는 나한테
‘회장선생님은 어째 그리 정력적이시냐고’하며 아주 부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그랬지. 나는 손만 잡아도 아기가 생길 정도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백두산 정기가 몽땅 회장
선생님한테 다 갔구먼 기래요!’ 이러는 거야 하하항. 자기(김 위원장)는 시원찮대 요즘. 하하항.”

정 명예회장은 인터뷰 도중에 유언과도 같은 말을 종종 했다.

그는 “내가 죽으면 절대 화장을 못 하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 자신이 평생 하지 않았던 사업과 앞으로 국가를 위해
꼭 해야 될 사업 등을 말했다.
자신의 사생활을 이야기하면서 평생 주례를 서지 않은 이유도 말했다.

이런 말들은 이제 모두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평생토록 하지 않았던 사업이 세 가지 있다고 밝혔다.


첫째, 목축업이었다. 현대그룹 내부에서도 한때 목축업을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목축업 사업계획서를
받아보고는 휙 던져 버렸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은 생리적으로 살생을 거부한다고 했다.

소를 키우다가 팔게 되면 도살장으로 보내는 셈이 되니까 결국 살생을 하는 사업이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에겐 서산목장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사업적으로 운영하는 게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는 소를 길러 식용으로 판 적이 결코 없다고 강조했다.


둘째, 농민에게 고통을 주거나 걱정을 끼치는 사업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비료공장이었다.

그래서 현대그룹은 비료공장을 갖지 않았다. 그는 “건국 후 지금까지 오르기만 했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던
비료 값을 생각하면서 비료공장 건설 추진 자체를 막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솔직하게 “비료공장을 짓고도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경쟁하기 위해) 손해를 보더라도
원가에 비료를 공급하게 될 테니 기존 사업자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내가 그 사업을 하면 결국 도산하는 업체가 나올 것이 뻔해 비료공장 생각을 접었다”고 했다.

정 명예회장은 가족사를 얘기할 때 항상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부친에 대해서는 ‘일등 농사꾼’으로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부친을 자랑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한번은 인터뷰 중 서산농장 이야기를 했다.

“서산농장이 완전하게 조성되면 조그맣게 아버지 동상을 세우려고 해요. 일등 농사꾼이셨던 아버지에게 헌납식을
하려고 그래요. 평생 농사만 지으셨죠.
그 많은 논과 밭을 일구시면서 한 번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농사를 지어 동생들과 자식들을 다 키우셨지요.
그래서 서산농장을 하늘에서도 풍족하게 바라보시면서 지내시라고 아버지께 헌납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마지막 셋째는 장의차를 만들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그는 특별히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우리는 안 만들어요”라고 했다.

특히 정 명예회장은 인터뷰 때마다 국가를 위해서도 꼭 해야겠다며 마지막까지 집념을 보였던 사업이 있었다.

바로 거대한 ‘해저(海底) 가족공원묘지’ 건설이었다.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해금강에 해저 공원묘지를
건설하는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업은 즉흥적으로 구상한 게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해저 시설을 살피고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많은 자문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유훈이 됐다. 다음은 정 명예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 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 회장님은 사후에 화장(火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철학에서 나온 생각이십니까?

“회장 다음은 화장인가? 하하항…. 물론 나는 화장을 원하지 않지요. 일테면 인간은 자연에서 나왔으니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화장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없애는 거다 해서 난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화장해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땅에 묻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살과 뼈는 전부 흙이 되어버리니까 말이지요.”(그렇다면 해저 가족공원묘지 건설 구상과는 다르지 않으냐고 했더니
‘사람에 따라 화장을 원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는 말로 일축했다.)


* 며느리를 볼 때 특별한 합격 기준이 있었나요.

“그런 것 없어요. 나는 회사 일이든 뭐든 치밀하게 관여하는데, 아들들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혼이거든요.

따라서 부모가 선정해 줘서 피차 의견이 잘 안 맞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부모의 책임이 너무 크지 않겠어요?

그래서 ‘부부가 만나는 것은 운명이니까 너희 운명은 너희가 정하는 게 좋다.’ 나는 자식들한테 늘 그렇게 얘기해 왔습니다.

나는 ‘인생의 세 가지는 운명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거, 이건 본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어떤 집안,
어떤 가정을 마음대로 선택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진다는 거지요. 어린애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고 운명으로 되는 거다 그거지요.

둘째는 상대를 만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 나라 그 사회에 수많은 결혼 적령기 남녀가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딱 하나를 골라 결혼하게 되는지, 그게 다 만남의 운명이지요. 특히 운명이라는 것이 시간 아닙니까?
그 시간에 그 배우자가 나타나서, 일테면 서로 좋아서 결혼하게 된다는 게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겁니까?

그래서 좋은 부부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 만나지는 게 아니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러니 너희가 정해 가지고
아버지는 인생 경험이 많으니까 아버지한테 이러저러한 여자인데 제가 결혼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양해만 구해라.
그러면 내가 참고할 얘기는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전부 자기들이 찾아서 결혼했지 부모가
여자를 찾아서 결혼시킨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세 가지 중 마지막은 죽어가는 거라고 생각하지요. 죽어가는 것은 자기 노력으로 못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자신이나 주변 사람의 노력으로 죽음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영원히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겁니다.

지금 집사람(변중석 여사)이 병석에 누워 있는데 말도 없이 저렇게… 있는 걸 보면 내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되고.
어디 구경 가고 싶으냐 해도 말이 없고…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아 화 좀 내보라 해도 그냥 표정이 없고…

* 자기 친구가 부탁한다고 24평짜리 현대아파트 하나만 당첨되게 해달라고 할 때 왜 화를 내고 그걸 못해줬는지…

생각하면 참으로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안하고… 내가 아무리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도 예전처럼 건강하게 해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쩌다 병에 걸려 죽고, 좋지 않은 암에 걸린다거나 또는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거나, 어떤 모양으로 죽든
그건 운명이니까 슬퍼하지 말자고 합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자식의 죽음을 몇 번 봤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보는 아비의 가슴보다 더
아픈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아비도 막을 수 없는 자식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고 인명은 재천이다. 모든 게 운명이니까 어떤 죽음이 선택되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그렇게
말하고 또 내 자신이 그렇게 소화해 왔습니다.” (여기서 정 명예회장은 잠시 눈빛을 내리고 소파의 팔걸이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마도 솟구치는 회한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 아들들이 여자를 선택해 오면 회장님께서는 꼭 말씀을 해주신다던데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 여자의 학벌이나 가문은 보지 않아요.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더 사귀어 보라고 합니다.
피차 장단점을 깊이 알고 나서 결혼해야 한다는 걸 강조합니다. 후회 없도록 하기 위해 더 사귀어 보라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몇 달 사귀고 나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더 사귀어 봐라’고 해서 우리 아이들은 거의 다 1년
이상이나 끌었지요. 서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다 결혼했는데, 아직 우리 집안 애들은 파경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또 부모가 신중을 기하라고 권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지요.

부모 말 잘 들어 손해 보는 자식 없어요. 그렇게 하고 내 말을 안 들으면 안 도와주는 거지 뭐, 지가 무슨 수로 큰
회사 회장이 돼요. 하하항….”


* 깊이 사귀어 보라고 하는 동안에 여자가 바뀐 경우도 있습니까?

“있죠. 좋다고 결혼하겠다는 걸 안 된다, 잘 사귀어 보라고 하는 동안에 (바뀐 경우가) 한 두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부가 되지 않은 여자는 그 여자도 불행을 막은 셈이지요.”


* 그 여자는 재벌가 며느리가 안 된 것이 오히려 불행하다고 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철없는 여자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 몇째가 그랬습니까.

“녹음기 끄면 내가 얘기하지요 하하하. (끄겠다고 했더니 ‘우리 ○○ 회장이 알면 괴로워할 거 아니야.
며느리도 괜히 좋은 마음 안 생기고. 그래서 과거는 아무 쓸모가 없어’라고 했다. 그러곤 약속을 했다.)
인연이 안 되려니까. 나는 괜찮아 보이는데 성사가 안 된 적도 있지요. 다 운명이지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여자를 선택한 뒤 장단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더 사귀라는 것이니까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애들 엄마는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애들이 여자를 데리고 오면 손도 잡아주고 등도 토닥거려 주고 해서 내가
어떨 땐 한소리 하지요. 그렇게 하면 그 여자애가 며느리가 되는 줄 알고 혼동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나만 인기
떨어지고, 하하하.”


* 안 된다고 하신 것은 관상적으로나 회장님께서 보시기에 마땅치 않아서였습니까.

“나는 관상 같은 거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엉덩이가 크면 좋다고 그래요, 하하하.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엉덩이가 커야 자식을 수월하게 낳을 수 있다고. 엉덩이가 작으면 듬직해 보이지 않지요. 남자가 큰일을 하는데 집안을
꾸려야 하는 여자가 가볍게 쏘다니면 안 되잖아요. 엉덩이가 가벼우면 발딱발딱 일어날 거 아니에요, 하하항.
사고 내서 신문에도 나고 대통령한테 불려가서 혼이 난 회장, 높은 양반들을 보면 다 부인들이 엉덩이가 작더래, 하하하항!”


* 세 가지 운명론은 새로 인생을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지침이 될 수 있겠는데. 주례를 서본 일이 있으십니까?

“결혼식 주례는 평생 한 번도 안 섰습니다. 나는 거짓말과 위선을 제일 싫어합니다. 나는 30대에 내 아내 아닌 다른
여자도 좋다고 생각해본 일이 있기 때문에 주례를 선다는 것은 위선이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평생)
주례를 한 번도 안 섰습니다.

자기가 표본이 될 만해 가지고 주례를 서야지, 과거 30대에 탈선했던 사람이 무슨 주례를 서느냐 싶어 자책감 때문에
주례를 안 섭니다.

그건 위선이고 전도양양한 젊은 사람 앞에서 주례는 안 되지요. 주례는 성직자나 아주 고결한 스승이나 그런 사람이
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중요하고 신성한 결혼식에, 더구나 많은 하객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교훈이 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이름이 좀 있다고 해서, 아니면 직위가 좀 높다고 해서 젊은 사람 앞에 위선이나 거짓을 해선 절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 회장님의 근검절약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지런하거나 근면해야 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몸에 밴 거지요.
우리 집 가난을 쫓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부지런히 일해 수입을 도와야 했고, 또 수입이 있다고 해서 헤프게
다 쓰면 열심히 일해 얻은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축적되지 않기 때문에 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어렵고 힘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렇게 소년 시절을 지내다 보니까
근면하고 검소해야 한다는 게 생활이 됐고 내 철학처럼 된 거지요. 그래서 나도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밴 거죠.

나는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일생을 통해 몸에 배고 자기화(自己化)되는 것은 생활의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생활 습관이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내가 부지런하고 근면하고 근검하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그 일념으로 생활해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어려운 사람은 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첫째로 근면하고
둘째로 절약하는 생활이 제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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