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자 대표는..
인생의 성공을 거머쥐는 비결은 바로 ‘마음’이라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이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자신에게 보내오는 강한 메시지에 따라 나를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만드는 진실한 ‘마음’, 바로 그것 말이다.

이희자 이사는 그녀만의 당당함과 자신 만만한 열정에 무일푼에서 한국문화에 맞는 음식물쓰레기 처리기술을 개발해 현재는 ㈜루펜비아이에프 대표 이사로 국내 유수의 건설 사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 안되면 안 된다!! 꼭 성공해야 한다고 마음먹어라. ]

 

나는 괜찮아요. 음식물건조기는 앞으로 어느 가정이나 업소에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서 국내만 해도 10조 원의 시장이죠.
이 아이템으로 다시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고생해 주세요. 정말 죄송해요.”
남편의 사업으로 수십억 원의 부도가 나고 하루 아침에 가족은 알거지가 되어 빚더미에 올라 앉아 친척들까지 모두 피해를 봤을 때, 저을 걱정해 주는 친척들에게 당당히 이야기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일을 해 나가는 방식은 ‘정면 돌파’ 입니다.
폭력으로 협박하는 사채업자들 역시 직접 만나 설득하고 단판을 짓곤 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해서도 피해 다니지 않았습니다.
더 어려운 일이라도 올 테면 와 봐라, 그렇게 당당하게 맞서 나갔습니다.”


 

[ 여기서 죽더라도 길을 내줄 수는 없다. ]

 

“1990년대 중반, 음식물건조기를 자칭한 제품들을 보면서, 많은 시도와 실패들이 있다는 것은 음식물쓰레기 처리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때가 무르익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제품이 없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수많은 음식물쓰레기 처리기가 소비자들에게 외면 당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니, 문제는 음식물쓰레기에서 나는 악취였고, 해결 방법을 찾던 중 일본 마루이치 사에서 처리 기술을 개발한 제품이 있다는걸 알게 됬어요.

‘그 기술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일본 행을 결심했어요.
그리고 마루이치 사 회장을 만나서, “독점권을 주십시오. 저는 비록 큰 기업의 사장은 아니지만 확실한 마케팅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로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 우선 건설 사와 계약을 해 분양하는 모든 아파트의 싱크대에 마루이치 사의 처리기가 설치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못 믿으신다면 우선 현찰로 200대를 구입해서 한국 시장에 보급시켜 보겠습니다.”
결국 저는 일본 마루이치 사에서 지원 받고 구입한 200대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씨앗이 됬습니다.


 

[ 한국문화에 맞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개발 해야 한다. ]

 

“저는 늘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 하던 중, 어떤 종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해서 열풍건조방식으로 기존의 분쇄압축방식과 미생물발효방식의 결함을 극복한 루펜이 나오게 됬지요.


 

[ 10조원 시장, 하나씩 잠식해야 한다. ]


어디에 어떻게 팔 것인가?
제가 또 한번의 단판을 앞두고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바로 롯데 건설 사장이었습니다.
“루펜은 우리가 개발한 우수한 제품입니다. 좋은 제품이니까 일단 한번 사용해 보시고 그 다음에 결정하십시오.”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당당한 단판 승으로 롯데 건설과 계약을 맺게 된 후, 저는 롯데 건설의 경쟁사였던 LG 건설을 찾아 갔고, 계속해 포스코 건설, 삼성주택전시관으로 이어갔어요.


 

[ 새로운 도약의 2005년  ]

 

기회는 항상 시련 뒤에 온다고 하지요.
국내 중견기업들의 배신으로 좌절과 경제적 압박을 받으며 버텼어요.
그러니까 정말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오더라구요. 40년 전동을 자랑하는 가구의 명가 BIF 보르네오와 합작법인을 설립하게 되었고, 루펜 BIF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지분 율은 루펜이 80%, 보르네오가 20%이며, 안성에 루펜BIF 공장을 설립하게 됬어요. 처음에 일본으로 무작정 건너 갈 때는 항공비가 없어 빌려서 갔었는데, 이제는 국내 유수의 건설 사 음식물쓰레기 처리기의 90% 이상을 점유하게 됬어요.

“2005년부터 음식물 직 매립이 금지되어 국민 모두가 음식물쓰레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는 돈이 연간 15조 원, 그 처리비용은 10조 원! 전 국민 모두에게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나눠준다 해도 10조 원이 채 안 들어갑니다.
건조된 쓰레기를 100% 자원화 할 수 있기 때문에 환경과 예산절감, 자원확보 등 나라살림에 엄청난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수 많은 성공 코드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나를 있게 한 가장 근본적인 힘,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은 사업을 해오면서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을 움직이는 것, 직원을 움직이는 것, 고객을 움직이는 것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 환경, 자원의 미래를 위해 음식물쓰레기는 반드시 루펜이 해결하겠다는 나의 굳은 마음이 루펜BIF를 세계로 뻗어나가게 할 것입니다,”


 

[  결심했다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라, 의심하는 순간부터 실패는 찾아온다.  ]

 

사업을 위한 실질적인 철저한 준비는 기본이지요. 각자 알아서 해야 할 몫입니다.

제가 특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결심’했다면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될까 안 될까 스스로 의심하는 순간부터 실패는 새어 들어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았으면서 노력했다고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결심과 그것을 이루려는 다양한 시도와 행동, 노력들이 있다면 어떤 사업도 성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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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 대표는..


이철우 대표는 옷을 잘 만드는 비결은 솜씨 좋은 재단과 마름질, 디자인을 보   는 안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입을 고객 한 명 한 명에 대해 최고의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올해로 75세가 됐다.


이대표의 넉넉한 자신의 사이즈가 대변하듯 중년 부인들을 위한 고급스런 빅 사이즈 기성복을 국내에 정착시켰다.


 

디자이너는 고객의 몸에 꼭 맞는 살아 숨쉬는 옷을 만드는 ‘옷 주치의’라고 말하는 그녀의 작품은 늘 편안함을 준다.







[ 뚱보 패션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다 ]




1978년 서울 조선호텔의 패션쇼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무대였어요.


 

몸집이 크고 뚱뚱한 사람들은 맞는 옷을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니 예쁘고 세련된 기성복을 찾기란 더 힘들지요.


날씬한 몸매에 쭉 뻗은 다리를 과시하는 모델들만 봐왔던 관객들에게 넉넉한 덩치의 최용순 씨나 강부자 씨가 입은 세련된 빅 사이즈 기성복 패션쇼를 처음 선보였어요.







[ 꼬마 재단사에서 군수공장 미싱 공으로 ]




저는 어려서부터 못 말리는 아이였어요. 별명이 ‘둔갑 쟁이’었을 정도에요.


 

이불 홑 청이든 베갯잇이든 눈에 보이는 천이면 모두 자르고 이어 붙여 변신의 재료로 사용했죠.



한 번은 어머니가 명철을 위해 고인 간직해 둔 꽃망울 무늬 레이온을 몰래 꺼내 돌도 안 된 막내 여동생의 옷을 만들었어요.


배냇저고리를 벗기고 꽃무늬 박스 원피스를 만들어 입힌 사건으로 어머니에게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볼기짝을  맞기도 했었어요.

그래도 참, 이상하지요. 삐뚤삐뚤한 바느질이지만 내 머릿속의 디자인을 실제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수가 없었어요.

여학교를 다니던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고, 1950년에는 다시 6.25전쟁이 발발해 온 가족이 서울로 피난을 가면서 넉넉하던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 졌어요.

배고픈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공부를 한다는 건 사치라고 생각되어서 생계를 위해 군복을 만드는 한봉제공장에 취직했죠.


 

하루 종일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미싱을 돌리고 났는데도 불구하고 저녁이면 텅 빈 공장에서 구호물자로 나누어준 옷감으로 동생들의 옷을 만들곤 했어요.







[ 야간 열차에 실은 디자이너를 향한 열정 ]




제가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 게 된 건 전쟁이 끝난 후 광주로 내려오면서부터였어요.


 

‘소화양장점’이라는 곳에서 1년간 일하고 직접 가게를 차렸어요. 광주 금동 큰 길가에 자리 잡은 ‘언니양재사’가 제 첫 번째 가계였죠.


 

5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재봉틀 한대, 재단 대, 벽 쪽에 붙여 만든 긴 나무 판 의자, 그리고 선반이 전부였지만 저에겐 꿈에 그리던 작업실이어서 너무 행복했었어요.

돌이켜보면 일본 잡지 등을 보면서 공부한 주먹구구식 독학이었지만 성실함을 하나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홈 드레스 등 간단한 것부터 최신 유행 스타일까지 이것저것 만들어 가게 한 쪽에 걸어두었고, 중산층 이상의 부인들 사이에선 저희 가계는 사랑방이 됐었죠.


 

그렇게 옷을 혼자 만들어 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았어요. 한 번은 몇 개의 천을 이어 붙여 180도 플레어




스커트를 만들었을 때, 옷감의 위아래를 생각지 못하고 마름질을 해 제대로 붙은 쪽은 많이 늘어지고 거꾸로 붙은 쪽은 늘어지지 않아 “플레어 치마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서 무슨 양재를 한다고 하냐”고 손님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계 문을 닫고 당시 광주에서 꽤 유명했던 ‘남성양복점’에 양장 부 주임 디자이너로 취직했어요.


 

그곳에서 체형에 따라 주름잡는 법, 옷감의 특성에 따른 다림질 법 등을 배울 수 있었죠.

나날이 손님이 늘어 가면서 뿌듯한 마음보다는, 가게를 키워보고 싶단 생각에 한 달에 두세 번씩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 시장에 갔었어요.


신제품과 주문 받은 원단, 부자재 등도 둘러보고 최신 유행 흐름을 파악하려고요.


그리고는 명동으로 가서 서울의 일류 멋쟁이들이 단골로 삼는 미도파 백화점과 송옥 양장점을 둘러봤지요.







[ 모든 것을 잃고 무일푼으로 다시 도전하다. ]




어디에 어떻게 팔 것인가?


 

어느 날인가 새벽녘 가게에 나가보니 한쪽 벽면에 차곡차곡 쌓아둔 옷감이 몽땅 사라진 거에요.


 

사라진 옷감은 전날 동대문 시장에서 들여온 겨울용 옷감으로 신소재 오버 코트 감, 수입산 등 약 30둥치 정도였어요.


다행히 범인을 찾은 덕분에 잃어버린 원단 대부분을 다시 찾을 수 있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사업이 잘 되면서 남편(이길선 사장)이 조금씩 나태해 지더니 돌아온 결제를 막지 못해 부도를 내게 됐어요.




남편은 서울로 잠시 몸을 피해야 했고 저는 살던 집을 팔고 거래처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빚은 꼭 갚을 테니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며 다녔어요.

그러다가 1973년 1월에 대형 화재가 나서 주문 받아 제작해 둔 옷들과 원단들이 모두 불타버렸어요.


 

너무 절망하던 때에 저는 이 기회에 아예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알고 지내던 미용전문가 문옥현 선생이 저의 처지를 알고 도와주셨어요.


 

서울 인현동 명보극장 근처에 그 분의 미용실이 있었는데 한 켠에서 의상실을 차리면 어떻겠냐고 하시는 거에요.


당시 문옥현 선생님은 일본 포라 화장품에서 기술전수를 받고 ‘포라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저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지요.


당장 돈이 없어 나중에 드리기로 하고 우선 가계를 열었어요.

재단 대와 옷장 몇 개만 놓고 포라 의상 연구실을 열면서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광주 매일 신문과 전남일보에 이전 광고를 냈어요.


 

‘지난 1월 화재로 인해 광주 충장로에서 서울로 이사온 ‘남성양장점’이 을지로 인현동에 개업했습니다.


 

피해 입으신 분들은 이리로 찾아오시면 성심 성의껏 보상해드리겠습니다.’라구요.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과 신용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마담포라 마침내 날개를 달다. ]




1977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한 낯선 남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명함에는 ‘롯데쇼핑 센터 양화윤 계장’이라고 적혀있었는데, 당시에는 롯데 쇼핑센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죠.


 

“2년 반 뒤 소공동에 일본 동경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같은 분위기의 롯데 쇼핑센터가 개장합니다.


이 선생께서 숙녀 의류 부 유어 사이즈(Your Size)의 빅 사이즈 부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뜻밖의 제안이 왔었어요.

양화윤 계장이 다녀간 후 저는 일본 다카시마야 백화점의 부인복 사이즈를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의 체형에 맞는 사이즈를 다시 만들기로 했어요.


단골손님들의 체형을 기준 삼아 기성복 준비를 했죠. 그때 브랜드 명을 ‘마담포라’로 지었어요.


 

당시만 해도 뚱뚱하고 후줄근한 아주머니들이 푸대접을 받기가 일쑤였어요. 서비스 문화라는 것이 별로 없었지요.


 

기성복은 꿈도 꾸지 못하던 뚱보 아주머니들도 우리 매장에서만큼은 귀한 대접을 받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까다롭고 요구사항이 많은 손님에게도 미소를 지으라고 강조했구요.

저희 매장에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소품들도 구비해 두었어요.


 

옷에 맞는 구두 몇 벌과 립스틱 등 화장품을 매장 한 쪽에 준비시켜 정장차림새에 맞는 화장이나 구두를 준비하지 못한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두었죠.

롯데 매장에 이어 신세계백화점 등 기타 백화점에 입점하면서 강남 논현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마담포라 사옥을 짓게 되었어요.








[ 쓰러진 육체를 일으켜 세우고 사랑을 전하다. ]




무리하게 일을 한 탓에 건강을 챙기지 못해 고혈압 성 뇌출혈로 쓰러지기를 여러 번했어요. 후유증으로 거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되었죠.


 

1989년 브랜드 ‘꼼베땅’도 저에겐 대표적인 실패사례 구요.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 삶과 옷에 대한 더 큰 사랑을 불러온 것 같아요.


1992년에는 장애 우를 위한 복지법인 ‘사랑의 날개’를 설립해 매년 회사의 이윤을 사회에 조금이라도 환원하려고 해요.


무조건 장애 우를 돕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직접 채용하면서 우리 사회의 동반자로 만들고 싶었어요.







[ 여성 CEO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




성공한 커리어 우먼 들은 자기 일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가는 길은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막히게 마련입니다.




준비된 자가 되십시오.


 

내 안에 실력을 쌓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표정이나 감정표현, 사람과의 만남들이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터널을 지난 후 느끼는 성취감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또 ‘리더는 고독하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부터 일의 분담을 맡기고 사람을 키우는 일, 직원과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모두 리더의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를 전합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오늘 너를 돌보시는 영원한 하느님께서 내일 또 너를 돌보실 것이다.


 

그가 고난을 피하게 하든지 견딜 수 있는 힘들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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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대표는
2003년 CNN 선정 '새 시대 지도자'로, 2004년에는 [아시안월스트리스저널]의 '주목해야 할 여성기업인 50명'에 선정되었다.
그의 이름은 휴렛팩커드의 칼리 피오리나, 제록스의 앤 멀케이 그리고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이들 속에서 빛이 났고, '한국의 반항적인 딸'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에서 남성위주의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비즈니스 리더로 성장한 '생존가'로 [아시아위크] 에 소개되었다.

이런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주라는 기업인을 발굴해낸 것은 한국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8년 MBC '성공시대'에 출연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매우 대단했다. 내노라하는 우리 사회의 남성 지도자들이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그의 이름 앞에 '세계가 먼저 주목한 글로벌 리더'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능력과 자질에 관계없이 이런 영광을 받을 때가 가장 두렵습니다. 제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할까 두렵고, 또 내게 어떤 숙제를 주려고 이런 무거운 짐을 주시나 하는 마음에 두렵습니다. 그래서 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가 그녀에게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 투명한 기업을 일군 김성주 대표

 

"제 생각에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자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겐 기술력에 뒤지고, 중국에겐 인건비에 뒤지고... 그 안에서 한국 패션 사업은 점점 낙후되고 있었죠. 성주디앤디를 통해 증명해보이고 싶었습니다. 변방국가로 알려진 한국의 중소기업이, 그것도 여성CEO가 운영하는 기업이 세계로 뛰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제가 사업을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풍토는 권위적이고 상명하달식의 뻣뻣한 조직구조와 술과 봉투로 상징되는 검은 관행들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모두들 봉투없이 하는 사업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였죠. 그때 결심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깨끗하고 투명하게 일하자구요."

투명함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업계에서 '왕따' 취급을 받았지만, 투명함을 지킴으로 인해 결국 1996년 영국최고의 유통회사인 막스앤스펜서의 한국 내 독점 운영을 파트너로 선정되었다.


 

* 여성의 경쟁력을 활용하라

 

사장단 회의에 나가면 젊은 여성이 사장단 회의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하다고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시하는 이도 있었다. 또한 성주디앤디를 찾은 대표들을 마중나간 김대표에게 "비서 말고 사장"을 외치다, 대표가 여성임을 알고 일언지하에 발길을 돌린 이도 있었다.

남성 중심의 한국 문화에서 김대표는 불평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역으로 여성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현명한 전략을 선택했다. 일하는 여성들의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인 남성 접대문화에 참석하지 않고, 그 시간에 아이와 함께하거나 잠을 보충하여 다음날 일에 집중하였으며, 바이어들을 술자리 대신 콘서트와 전시회에 초대하는 성주디앤디만의 문화를 개발했다.

"사회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먼저 여성이 변해야 합니다. 자기를 박차고 나오는 늠름한 여성, 당당한 여성이 늘어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사회가 변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남성에 비해 감성이 풍부합니다. 물론 이것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잘만 훈련하면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어요. 감성지수와 지성지수가 결합된 우먼지수가 앞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인적함수라고 저는 믿습니다."


 

*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계발을 하라

 

"온실 속 장미처럼 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매우 큰 유혹이었습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반항아 기질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저는 여성이었습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 반항아 기질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저는 여성이었습니다. 남성인 오빠들은 아버지에게 경영 수업을 받으며 대기업의 대표가 되지만 저는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부잣집 마나님으로 살아야 했죠. 여성인 저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을 넘어서지 않고 남을 컨트롤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더 높은 단계에 도전한다는 심정으로 저를 단련시켰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노력했고, 재벌가의 딸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했고, 배워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공장에서 진두지휘하며 직접 핸드백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이겨내기 위한 저만의 자기계발 과정이었죠."

 

 

*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이루어진다

 

"외환위기가 올 것을 대비해 재고를 최소화 하고, 위기극복 전략으로 큰 이익을 창출하고 있던 구찌를 과감히 본사에 매각하는 것을 추진했어요. 다행이 유리한 조건으로 매각하는데 성공해 위기를 넘겼죠. 그 후 성주디앤디는 최고급 브랜드 중심에서 탈피해 진정한 중산층을 위한 브랜드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MCM이나 막스앤스펜서가 그것이죠. 성주디앤디가 한 단계 도약하는 시기도 그때였다고 생각됩니다."

올 10월 모든 인수가 마무리되면 성주디앤디가 만든 제품이 전 세계로 수출됩니다. 이제까지 글로벌을 외치는 시기였다면 이제 해보이는 시기라는 생각에서 결정한 일인 만큼, 앞으로 5년 안에 루이비통 같은 브랜드를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출 계획입니다"

그는 자신의 거친 손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고 사랑한다. 한국의 왕따에서 회망의 상징이 된 김성주, 그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가슴 속에 벅찬 희망과 세계를 향한 아름다운 비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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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평범한 영웅

Manchester United, Ji-Sung Park

 

초등학교 시절, 나는 왜소한 체격 때문에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축구는 체격으로 하는 게 아니다' 라고..

 

대학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다 퇴짜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에 어렵사리 진학했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난 그렇게 보잘것 없는 나의 조건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

정신력 따위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으로 탈의실에 앉아

있던 내게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데리고 다가왔다.

 

"박지성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축구의 천재다 신동이다 하는 소리보다

내 기분을 더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 내내 그 날 감독님이 던진

칭찬 한마디를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다...

 

2003년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 이적

 

PSV 에인트호벤 네덜란드리그 우승

 

팀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등극

 

2005년 7월 한국인 최초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

 

아버지 전 멘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유명한 스타가 되는걸 원하지 않아요.

 

10분 뛰는 것에도 만족할 것이고,

그 다음엔 20분,

 

그 다음엔

전반전만 뛰는 선수라도 만족할 겁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언젠가는 저도

 

반니스텔루이나

웨인루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뛸 날이 오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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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 대표는
KBS 아역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해, 현재는 배우 겸 문화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극단 76극장에 입단했다.

<에쿠스>로 백상연기상을 수상하고 하이틴스타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 돌연 미국 유학 길에 올라 3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극단 환퍼포먼스를 창단해 <루브>, <고래사냥> 등 정극과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1996년 ㈜PMC프로덕션을 설립해 비언어뮤지컬 <난타>를 성공시킴으로써 국내뿐 아니라 세계무대를 난타했다.
문화CEO 송승환의 꿈은 <난타>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2, 제3의 난타를 만들기 위해 그는 오늘도 도전의 페달을 밟고 있다.


 

1 : 일터를 놀이터로 생각하라.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선진적 작품 수준이요? 물론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문화 호사보다 더 많이 자극을 준 것은 바로 생활의 발견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시는 바람에 벌어놓은 돈마저 날려버려 맨몸으로 도미한 나는 뒷골목에서 손톱깎이와 시계를 파는 노점상을 차렸더랬습니다. 한인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뒷골목에서 노점상을 했었는데, 같이 일하는 흑인 노점상들은 정말 여유롭더군요. 나는 이들에게서 삶의 여유와 관조를 배웠습니다. 여름 뙤약볕이 내리쬘 때는 파라솔을 한쪽에 세워놓고 오일을 발라가며 거리에서 여유롭게 선탠을 하면서 일합니다. 마치 피서 온 기분으로 일을 즐기는 것이지요. “Enjoy life!”그들이 여유 작작 일을 하며 내뱉은 말이 내 가슴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 그 이후 일터를 놀이터로 생각합니다.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그렇게 세상사를 보니 만사가 여유로워지고 즐거워지더군요.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말하지요. 어차피 일할 직장이고 일해야 하는 곳이라면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억지로 하지 말고 즐겁게 자기 발전 동력으로 움직이라고요. 고지에 깃발 꽂듯 허걱허걱 숨가빠하며 인생을 치 달리기 보다는 차분차분 돌아보고 안단테의 속도로 지금 현재의 과정도 즐기라고요.

가량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어갈 때 “저 고개를 어떻게 넘어가지?” 하고 걱정과 번민을 하며 페달을 밟아야 하면 그 사람은 괴롭겠지요. “어떻게든 넘어야만 해.” 하고 사명감만으로 고개를 넘으려 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왕이면 힘들고 골치 아픈 일일지라도 경춘가도에서 하이킹하는 기분으로 페달을 밟으십시오. 그러면 한결 경쾌해지고 즐거워지는 게 삶의 이치랍니다. 생계를 위해서만 일을 하면 불행할 뿐 아니라 오래 버티지도 못하답니다. 보람과 재미를 함께 느끼는 사람만이, 일터를 놀이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국가대표 급 전문가로 우뚝 설 수 있지요.


 

2 : 놀이터에서 얻은 성공


난 배우출신 CEO입니다.
경영학의 기역자도 모르고, 그 주변도 가보지 못한 내가 처음 CEO가 되니 정말 두렵기까지 하더군요. 배우와 경영자의 역할은 정말 다르니까요. 배우는 결과와 상관없이 열심히 했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만 CEO는 ‘최선을 다 했다’는 스스로의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오직 잘해냈다는 성과만이 유일한 성적표니까요. 나 역시 처음엔 그 책임감이 너무 두렵고 싫었습니다. 하지만 자꾸 도전하고 해결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재미있고, 또 신나게 생각하려고 마음먹으니 즐거워지더군요.

일터를 놀이터로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는 것 못지 않게 놀이터를 일터로 생각하는 마인드 또한 필요합니다. 내가 <난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관한 이야기 하나 소개할까요?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일간지 기자와 연극인들의 술자리에서 였습니다. 한 기자가 “세계무대에서의 공연이 비언어 쪽의 공연으로 추세가 돌아서고 있다.”라고 한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치더군요. 물론 다른 연극인들도 이 말을 함께 들었지요. 그들은 다만 그것을 일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생각을 했더라도 현실로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는지 엄두가 안 났던 것이겠지요. 나 역시 만일 자나 깨나 우리 공연의 해외 수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지 않았더라며 그것이 기막힌 아이디어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할 때는 일만 하고, 놀 때는 놀기만 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일하는 것도 노는 것처럼 즐겁게, 놀 때도 일을 염두에 두고 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가 정말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하고 싶고, 하고 있다면 일터를 놀이터로 생각하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결코 아닙니다.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평소의 치열한 관심과 집중이 없다면 불가능하지요. 늘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해서 사고하는 것을 습관화하면, 어느 날 좋은 아이디어와 실행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남들은 내가 운이 좋았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결국 지나가는 말을 아이디어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치열한 사고와 집중력입니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는 일터에서뿐 아니라 놀이터에서도 싹이 트지요.


 

3 :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

‘연극해서 돈 번 사람은 송승환 하나’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는 등 <난타>의 상업적 성공과 국제적 성과를 인정받은 탓인지 나를 흔히들 ‘공연 계의 마이더스’라 부르더군요. 하지만 알고 보면 나도 손해 본 작품이 히트 친 작품보다 훨씬 많답니다. 다만 남들은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요.

하지만 돈을 못 벌었다고, 기껏 밤새워 일했는데 내 인건비도 못 건졌다고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바로 내 일이 재미있고 그 수고와 손해는 고수가 되기 위한 일종의 게임비용이니까요. 나는 이 과정을 통해서 작품제작에서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배운 수업료를 치른 셈이죠. 또 매사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할 때마다 그 작업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 재미있고, 여전히 연인을 만날 때처럼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진답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집이 풍비박산이 되는 경험을 한 것도 물론 ‘한몫’ 했습니다. 대학교 때에는 연예 활동하면서 방송국과 극단을 오갔습니다. 방송국에서 번쩍거리는 수입 차를 타고 들락날락하는 부자들의 모습을 목격 했다면 연극동네에선 퉁퉁 불은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는 가난한 자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지요. 극과 극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나는 오히려 빈부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었답니다.

지금 CEO로 있는 나는 운전기사를 두고 비싼 고급 대형차를 탑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길거리에 나앉는 처지가 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껏 하고 싶었던 일을 열정을 다 바쳐 재미있게 했고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전문가로업적을 이뤄냈다는 보람을 느끼니까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열정과 아이디어의 고갈이지, 도전의 실패가 아니랍니다. 도전하지 않고 얼치기 중간에 머무르는 것보다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원칙이지요.

참, 혹시 내가 예전에 <장학퀴즈> 출연진들과 광고모델로 나온 것 기억하나요? 많은 분들이 속으로는 ‘딴따라’인 내가 어떻게 장학퀴즈에 출전했나 궁금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인 나는 자신 있게 장학퀴즈에 출전했었지요. 물론 장원은커녕 꼴찌를 했지만요.
그때는 좀 창피하기도 했지만 도전의 씨앗이 뿌려놓은 게 유용하더군요. 몇 십 년이 지난 요즘, 그것을 기회로 CF 모델 섭외가 들어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아역 스타인 내가 대중에 알려진 얼굴인데 꼴찌 할 것이 두려워 장학퀴즈에 나갈 것을 지레 포기했다면 오늘 수천만 원의 CF모델 제의는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지레 스스로를 검열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십시오. 그것이 당장은 수확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언제 어디에서 예기치 않은 행운의 박씨를 물고 올지 모르는 법입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도전하십시오. 행운과 기회도 자신이 준비를 해 놓지 않으면 마중도 못한 상태에서 아쉽게 배웅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4 :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말라


어디에 어떻게 팔 것인가?
열정과 실패를 두려워 않는 내 도전의 동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곰곰이 되짚어보면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선택한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아역 연기자 출신인 내가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새 출발, 연극영화가 아닌 일반학과에 진학하기로 한 것도 모험이었지요. 그렇게 어렵게 공부해 들어간 대학임에도 연극에 대한 열정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것도 무모하다면 무모한 선택이었습니다. 부모님도 반대하셨지만 우회로를 통해 오히려 연극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의미 없는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잘 나가던 연예계 스타생활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뮤지컬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난 것도 그렇지요. 달랑 3,000달러만 들고 떠난 미국 유학은 정말 겁 없는 선택이었지요. 만일 현실에 안주하느라, 남의 눈치를 보니라, 주위의 모든 여건이 충족되기를 기다리느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선택을 미루고 주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오늘날의 송승환 브랜드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 선택은 당시로선 지그재그 우회 행로로 보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을 확인하고 다지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일 그 같은 도전이 없었다면 무엇을 선택했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안고 사는 아쉬운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 :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하라.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그 선택에 100퍼센트 책임지십시오. 우리나라 직장인 90퍼센트 이상이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늘도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절한다는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나는 돈이나 주위의 인정 등 현실과 타협하거나 조건이 모두 갖춰지기를 기다리느라 선택의 수간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출근하러 갈 때 늘 먼동이 트기도 전에 가슴에 이슬이 맺히도록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일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비록 그 길이 당장 멀고 힘들어 보이더라도 결국 그것이 성공인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가슴 두근거리도록 행복한 일을 선택하는 것은 당신이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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