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우 대표는..
이철우 대표는 옷을 잘 만드는 비결은 솜씨 좋은 재단과 마름질, 디자인을 보 는 안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입을 고객 한 명 한 명에 대해 최고의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올해로 75세가 됐다.
이대표의 넉넉한 자신의 사이즈가 대변하듯 중년 부인들을 위한 고급스런 빅 사이즈 기성복을 국내에 정착시켰다.
디자이너는 고객의 몸에 꼭 맞는 살아 숨쉬는 옷을 만드는 ‘옷 주치의’라고 말하는 그녀의 작품은 늘 편안함을 준다.
[ 뚱보 패션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다 ]
1978년 서울 조선호텔의 패션쇼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무대였어요.
몸집이 크고 뚱뚱한 사람들은 맞는 옷을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니 예쁘고 세련된 기성복을 찾기란 더 힘들지요.
날씬한 몸매에 쭉 뻗은 다리를 과시하는 모델들만 봐왔던 관객들에게 넉넉한 덩치의 최용순 씨나 강부자 씨가 입은 세련된 빅 사이즈 기성복 패션쇼를 처음 선보였어요.
[ 꼬마 재단사에서 군수공장 미싱 공으로 ]
저는 어려서부터 못 말리는 아이였어요. 별명이 ‘둔갑 쟁이’었을 정도에요.
이불 홑 청이든 베갯잇이든 눈에 보이는 천이면 모두 자르고 이어 붙여 변신의 재료로 사용했죠.
한 번은 어머니가 명철을 위해 고인 간직해 둔 꽃망울 무늬 레이온을 몰래 꺼내 돌도 안 된 막내 여동생의 옷을 만들었어요.
배냇저고리를 벗기고 꽃무늬 박스 원피스를 만들어 입힌 사건으로 어머니에게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볼기짝을 맞기도 했었어요.
그래도 참, 이상하지요. 삐뚤삐뚤한 바느질이지만 내 머릿속의 디자인을 실제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수가 없었어요.
여학교를 다니던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나고, 1950년에는 다시 6.25전쟁이 발발해 온 가족이 서울로 피난을 가면서 넉넉하던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 졌어요.
배고픈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공부를 한다는 건 사치라고 생각되어서 생계를 위해 군복을 만드는 한봉제공장에 취직했죠.
하루 종일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미싱을 돌리고 났는데도 불구하고 저녁이면 텅 빈 공장에서 구호물자로 나누어준 옷감으로 동생들의 옷을 만들곤 했어요.
[ 야간 열차에 실은 디자이너를 향한 열정 ]
제가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 게 된 건 전쟁이 끝난 후 광주로 내려오면서부터였어요.
‘소화양장점’이라는 곳에서 1년간 일하고 직접 가게를 차렸어요. 광주 금동 큰 길가에 자리 잡은 ‘언니양재사’가 제 첫 번째 가계였죠.
5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재봉틀 한대, 재단 대, 벽 쪽에 붙여 만든 긴 나무 판 의자, 그리고 선반이 전부였지만 저에겐 꿈에 그리던 작업실이어서 너무 행복했었어요.
돌이켜보면 일본 잡지 등을 보면서 공부한 주먹구구식 독학이었지만 성실함을 하나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홈 드레스 등 간단한 것부터 최신 유행 스타일까지 이것저것 만들어 가게 한 쪽에 걸어두었고, 중산층 이상의 부인들 사이에선 저희 가계는 사랑방이 됐었죠.
그렇게 옷을 혼자 만들어 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았어요. 한 번은 몇 개의 천을 이어 붙여 180도 플레어
스커트를 만들었을 때, 옷감의 위아래를 생각지 못하고 마름질을 해 제대로 붙은 쪽은 많이 늘어지고 거꾸로 붙은 쪽은 늘어지지 않아 “플레어 치마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서 무슨 양재를 한다고 하냐”고 손님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계 문을 닫고 당시 광주에서 꽤 유명했던 ‘남성양복점’에 양장 부 주임 디자이너로 취직했어요.
그곳에서 체형에 따라 주름잡는 법, 옷감의 특성에 따른 다림질 법 등을 배울 수 있었죠.
나날이 손님이 늘어 가면서 뿌듯한 마음보다는, 가게를 키워보고 싶단 생각에 한 달에 두세 번씩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 시장에 갔었어요.
신제품과 주문 받은 원단, 부자재 등도 둘러보고 최신 유행 흐름을 파악하려고요.
그리고는 명동으로 가서 서울의 일류 멋쟁이들이 단골로 삼는 미도파 백화점과 송옥 양장점을 둘러봤지요.
[ 모든 것을 잃고 무일푼으로 다시 도전하다. ]
어디에 어떻게 팔 것인가?
어느 날인가 새벽녘 가게에 나가보니 한쪽 벽면에 차곡차곡 쌓아둔 옷감이 몽땅 사라진 거에요.
사라진 옷감은 전날 동대문 시장에서 들여온 겨울용 옷감으로 신소재 오버 코트 감, 수입산 등 약 30둥치 정도였어요.
다행히 범인을 찾은 덕분에 잃어버린 원단 대부분을 다시 찾을 수 있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사업이 잘 되면서 남편(이길선 사장)이 조금씩 나태해 지더니 돌아온 결제를 막지 못해 부도를 내게 됐어요.
남편은 서울로 잠시 몸을 피해야 했고 저는 살던 집을 팔고 거래처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빚은 꼭 갚을 테니 기다려 달라고 사정하며 다녔어요.
그러다가 1973년 1월에 대형 화재가 나서 주문 받아 제작해 둔 옷들과 원단들이 모두 불타버렸어요.
너무 절망하던 때에 저는 이 기회에 아예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알고 지내던 미용전문가 문옥현 선생이 저의 처지를 알고 도와주셨어요.
서울 인현동 명보극장 근처에 그 분의 미용실이 있었는데 한 켠에서 의상실을 차리면 어떻겠냐고 하시는 거에요.
당시 문옥현 선생님은 일본 포라 화장품에서 기술전수를 받고 ‘포라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저로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지요.
당장 돈이 없어 나중에 드리기로 하고 우선 가계를 열었어요.
재단 대와 옷장 몇 개만 놓고 포라 의상 연구실을 열면서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광주 매일 신문과 전남일보에 이전 광고를 냈어요.
‘지난 1월 화재로 인해 광주 충장로에서 서울로 이사온 ‘남성양장점’이 을지로 인현동에 개업했습니다.
피해 입으신 분들은 이리로 찾아오시면 성심 성의껏 보상해드리겠습니다.’라구요.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과 신용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마담포라 마침내 날개를 달다. ]
1977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한 낯선 남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명함에는 ‘롯데쇼핑 센터 양화윤 계장’이라고 적혀있었는데, 당시에는 롯데 쇼핑센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죠.
“2년 반 뒤 소공동에 일본 동경의 다카시마야 백화점 같은 분위기의 롯데 쇼핑센터가 개장합니다.
이 선생께서 숙녀 의류 부 유어 사이즈(Your Size)의 빅 사이즈 부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뜻밖의 제안이 왔었어요.
양화윤 계장이 다녀간 후 저는 일본 다카시마야 백화점의 부인복 사이즈를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의 체형에 맞는 사이즈를 다시 만들기로 했어요.
단골손님들의 체형을 기준 삼아 기성복 준비를 했죠. 그때 브랜드 명을 ‘마담포라’로 지었어요.
당시만 해도 뚱뚱하고 후줄근한 아주머니들이 푸대접을 받기가 일쑤였어요. 서비스 문화라는 것이 별로 없었지요.
기성복은 꿈도 꾸지 못하던 뚱보 아주머니들도 우리 매장에서만큼은 귀한 대접을 받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까다롭고 요구사항이 많은 손님에게도 미소를 지으라고 강조했구요.
저희 매장에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소품들도 구비해 두었어요.
옷에 맞는 구두 몇 벌과 립스틱 등 화장품을 매장 한 쪽에 준비시켜 정장차림새에 맞는 화장이나 구두를 준비하지 못한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두었죠.
롯데 매장에 이어 신세계백화점 등 기타 백화점에 입점하면서 강남 논현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마담포라 사옥을 짓게 되었어요.
[ 쓰러진 육체를 일으켜 세우고 사랑을 전하다. ]
무리하게 일을 한 탓에 건강을 챙기지 못해 고혈압 성 뇌출혈로 쓰러지기를 여러 번했어요. 후유증으로 거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되었죠.
1989년 브랜드 ‘꼼베땅’도 저에겐 대표적인 실패사례 구요.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 삶과 옷에 대한 더 큰 사랑을 불러온 것 같아요.
1992년에는 장애 우를 위한 복지법인 ‘사랑의 날개’를 설립해 매년 회사의 이윤을 사회에 조금이라도 환원하려고 해요.
무조건 장애 우를 돕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직접 채용하면서 우리 사회의 동반자로 만들고 싶었어요.
[ 여성 CEO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
성공한 커리어 우먼 들은 자기 일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가는 길은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막히게 마련입니다.
준비된 자가 되십시오.
내 안에 실력을 쌓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표정이나 감정표현, 사람과의 만남들이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터널을 지난 후 느끼는 성취감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또 ‘리더는 고독하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부터 일의 분담을 맡기고 사람을 키우는 일, 직원과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모두 리더의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를 전합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오늘 너를 돌보시는 영원한 하느님께서 내일 또 너를 돌보실 것이다.
그가 고난을 피하게 하든지 견딜 수 있는 힘들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