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터놓고 말한다.

 

그가 처음 방송에 데뷔했을 때였다.

당시 작은 방송국에서는 아나운서가 엔지니어 역할까지 했다.

시그널 음악을 틀고 멘트를 내보내기 위해 볼륨을 줄였다.

그러나 긴장한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볼륨을 높였다가 다시 낮추었지만 여전히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방송책임자가 소리쳤다. “이것은 말로 하는 사업이야!”

그 순간 래리 킹은 첫 마디를 토해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저의 방송 첫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초조해서 입안이 말라 붙었습니다.

방금 전에는 총국장이 ‘이것은 말로 하는 사업이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자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겨서

첫 방송을 무난히 할 수 있었다. 가식적으로 말하려고 하면 긴장이 되고,

솔직하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으면 긴장이 사라진다.

 

 

 2 열심히 노력하여 말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는 말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잡았다. 새벽방송 일기예보 스포츠 리포터 뉴스앵커,

때로는 강연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청하여 일을 맡았다.

그리고 말을 잘하기 위한 연습을 하였다.

연습 방법은 방안이나 자동차 안에서 소리내어 말하였고,

거울 앞에 서서 동작을 곁들여 연습하였다. 또 집에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

새나 금붕어와 같은 애완동물을 상대로 말하는 연습도 하였다.

화술은 학습이다. 먼저 기본요령을 배우고, 연습하고 연습해야 한다.

연습 없이는 숙달도 없다.

 

 

3 상대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화제를 준비한다.

 

그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화젯거리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화제가 있다”고 한다.

가장 안전하며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화제는 날씨이다.

날씨는 말문을 여는 데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상대가 어린이나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다면 가장 손쉽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화제가 된다.

또 사무실이나 집을 방문했을 때 가구나 기념품이 있다면 그것을 화제로 삼고,

벽에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나 상장이 걸려있다면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도 좋다.

화제 선택의 기준은 개인적으로 가장 친근한 것들이어야 한다.

 

 

4 상대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그는 ‘대화의 제 1규칙은 경청’이라고 하며, ‘당신이 타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그들도 당신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대담의 황제’로 불리게 된 비결은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데 있다.

훌륭한 화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경청자가 되어야 한다.

주의깊게 들어야 말할 차례가 왔을 때 더 잘 응대할 수 있고, 말을 더 잘할 수 있다.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까닭은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는 것이다.

 

 

5 상대에게 관심을 갖고, 상대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는 데일 카네기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화의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상대가 대답하기 좋아하는 질문을 하라. 그들 자신이 이룩한 성취에 대하여 말하도록 하라.

당신과 대담하고 있는 상대는 당신이나 당신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희망이나 자신의 문제에

백배나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말을 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상대의 관심거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상대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대화성공의 비결이며,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첩경이다.

 

 

6. 보디랭귀지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그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인 보디랭귀지의 사용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그 사용은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보디랭귀지를 우리 말로 하면 ‘몸말’인데,

세분화하면 태도 자세 제스처 표정 시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시선의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

한마디로 대화할 때 상대와 눈을 맞추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의 눈을 계속 뚫어지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끝낼 때, 당신이 말하거나 듣는 동안 상대와 눈을 맞추면,

어떤 자리, 어떤 경우 그리고 상대가 누구든 당신은 대화의 성공자가 될 수 있다.

결코 허공이나 바닥을 보아서는 안된다.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청춘남녀의 사랑은 눈의 외교로부터 싹튼다’는 교훈을 명심할 것. 

 

 

- 김양호(한국언어문화원장. 이화여대와 중앙대 산업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저서로 <상대를 움직이는 대화의 심리작전>, <성공하는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등 30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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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IBM에서 직장인 생활 16년 하시다가 1인기업으로 나오셨습니다.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구본형 :

직장생활에서 40이라는 나이를 지나면 무언가의 모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정이 있는 가장이다보니 수입없이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모색 중에서 지속적인 수익성과 병행하는 일을 함께 고려하여 나를 찾는 과정을 했습니다.

우선 내가 무엇을 잘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평상시에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소설을 써볼까 생각했는데 그곳은 쟁쟁한 경쟁자가 너무 많아 포기

하고 그렇다면 IBM에서 경영혁신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했는데 이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범용화시켜 사람

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변화경영을 포지션해 일을 다니며 새벽 4시에서 6시까지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98년에 익숙함과의 결별을 내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책을 낼 수 있는가 테스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99년,2000년에 1년마다 1권씩 썼고 시장에서 반응도 좋아 1인기업으로 독립했습니다.

 

 

질문 : 나를 찾는 과정에 대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에 있어 구체적입니다.

 

구본형 :

핵심은 3가지입니다.먼저 자신이  어떤 기질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성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영업을 한다고 하면 성과가 안 나옵니다.

두번째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재능을 찾은 사람은 자신이 조금만 노력해도 탁월한 성과가 나옵니다.

세번째로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무엇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왔고 과거를 뒤져 내가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아내세요.

과거의 사건들과 만남을 회고하여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 알아내야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타고난 기질이 무엇이고 쓸 만한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개인의 역사를 자세히 되짚어

나의 정체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기질, 재능 그리고 경험을 서로 연결하여 특별한 나만의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질문 :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의 괴리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조율할 수 있겠습니까.

 

구본형 :

가령 음악을 너무 좋아해 가수를 꿈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수를 위해 노래연습을 아무리 해도 실력이 일정수준에 도달해도 그 이상 향상이 되지 않으면

가수의 길을 가기보다 방향을 엔지니어로 바꿔 그 일에 성과를 낸다면 음악을 계속해서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 이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은 잘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자신이 좋아하면서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강점에

올인해야 합니다.

 

 

질문 : 직업에 있어 차별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구본형 :

산업사회에서 요구한 스탠다드의 시대는 지나갔고 차별적이고 특화된 전문가의 지식 시대가 왔습니다.

노동 시장 어디서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자리는 치워졌습니다.

이제 평생직장의 시대는 갔습니다.직업을 여러 차례 거치는 신유목주위 사회에서 지금은 ‘유일한 것이

최고’인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설령 미래를 예측해 우연히 자신이 그 시장을 선점해도 전문성이 없으면 곧 다른 사람에게 대체

될 수 있습니다.차별화와 더불어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질문 :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4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구본형:4가지가 핵심키워드입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한 성취가 자랑할만한가.

두 번째는 당신 고객이 당신의 업무처리에 감동한 적이 있는가.

세 번째는 경력을 통해 얻은 전문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네 번째는 전문성 강화에 도움을 주는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했는가.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 네 가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고용안정성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 : 전문가로 입신하고 싶은 취업을 앞둔 대학생이 유념해야 될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구본형 :

첫째는 ‘무엇을’ 팔 수 있는 지 알아내서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타고난 기본적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

야 한다는 뜻입니다.

직업은 재능을 파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디에’ 이 전용적 소질을 팔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나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야가 실제로 활용되는 직업이 어디인지 정보를 구하고 연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썰미가 맵고 기억력이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장신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훌륭한 악세사리 코디네이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범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훌륭하고 차별적인 수사관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재능은 한 직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직업에 전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능을 ‘전용적 소질이라고도 부릅니다.

재능은 그 쓰일 곳을 알아내야 비로소 제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일하고 싶은 조직에 ‘어떻게’ 취업할 수 있는 지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전용적 소질과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와 주제를 찾아가는 끈질긴 자기탐색

노력을 포기한 채 ‘어떻게’라는 구직의 요령으로 넘어가서는 절대로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질문 : 그렇다면 자기 계발이 필수이겠습니다.


 

구본형 :

그 영역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하고 있는 일, 두 번째는 인간관계, 세 번째는 좁은 의미의 자기계발-취미, 자기세계를 구축

하는 것입니다.

자기계발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일입니다.

우리는 성인이 된 후 깨어있는 시간의 1/3이상을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삶이 크게 변하게 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가족입니다.

가족과 보낼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이 절실합니다.

일과 가족 외에도 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생 전반부에 좋아하는 일을 못 했다면 인생 후반부에 이 좋아하는 일은 취미수준을 뛰어넘어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변신해야 합니다.

취미를 프로로 전향하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평생직장이 됩니다.

취미가 있냐 없냐에 따라 삶의 후반기에 여전히 품삯을 벌기 위해 일하느냐, 즐기기 위해 일하느냐가 갈리

게 됩니다.”


 

 

질문 :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구본형 :

나의 명함을 보면 우리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라고 써 있습니다.

그 말은 부럽고 따라하고 싶은 남의 모습이 아닌 내 안에 숨겨진 모습을 찾아내어 어제보다 나은 자신을 

변화하는 자들의 발전을 돕는 것이 앞으로도 비젼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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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이사이상 받는 김선태 목사의 인생 드라마


 
  올해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선태 목사는 "나를 위해 기도해준 이들에게 가는 상이다. 다만 대신 받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열 살 때 폭탄 파편에 맞아 시력을 잃었다. [사진=변선구 기자]
 
 



“헬렌 켈러처럼 살고 싶었죠. 앞 못 보는 이들이 어둠을 헤쳐가게 도와주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었어요.”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 올해 수상자로 7월 31일 선정된 김선태(66·실로암안과병원장) 목사의 소망이다.

8월 1일 수상 소식을 접한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상금이 5만 달러(약 4500만 원)라고 합니다. 모두 시각장애인 의료시설인 실로암 아이센터 건립에 쓸 생각입니다.”

김 목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고, 그 자신이 시각장애인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겐 각별한 별칭이 따라다닌다. ‘남자 헬렌 켈러’라는 별명이다.

절망에 절망을 헤쳐온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숨 쉬는 드라마’처럼 느껴지면서 헬렌 켈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였다. 미처 피난을 못간 김 목사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뚝섬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폭탄이 터졌다. 함께 놀던 8명 중 7명이 즉사했다.

김 목사만 살아남았으나 눈에 파편을 맞아 시력을 잃고 말았다.  열 살 때였다.

“당시의 절망감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생명이 끊어진 줄 알았죠. ” 얼마 후 폭격에 맞아 부모님마저 세상을 떴다.

“친척집을 돌다가 구박을 엄청 받았죠. 결국 친척집을 나와서 거지가 됐어요. 구걸을 하며 목숨을 이어갔죠.”

엄동설한에 밖에서 잠을 자다 한쪽 다리가 동상에 걸려 썩었다고 한다. 앞을 못 보니 상한 음식을 얻어 먹고

식중독에 걸려 죽을 뻔도 했다.

“한번은 옻나무를 가득 쌓은 남의 집 창고에서 잠을 자다가 온몸에 옻이 올랐어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갔죠.”

그때 평생의 은인이 된 한 할머니가 그를 집으로 데려가 간호를 해줬다. 크리스천이었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고 성직자의 삶을 꿈꾸게 된다.

“다 낫고 나서 할머니가 그러시대요. ‘나는 돈은 없지만 일평생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대신 너는 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저는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고아원에서 살면서도 그는 학교를 빼먹지 않았고 성적도 우수했다고 한다. “점자로 공부했죠. 반 친구들이 8시간

잘 때 저는 5시간만 잤어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빵과 물로 배를 채우며 공부했죠.”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난 당시 그는 박사 학위 3개를 따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뤄간다.

헬렌 켈러도 박사 학위가 3개였다. “헬렌 켈러처럼 가난하고 앞 못 보는 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그런데 박사 학위가 있어야 제게 현실적인 힘이 생길 것 같았죠.”

그러나 5·16 군사혁명이 터지고 대학갈 길이 막히고 말았다. “군사 정부가 새로 손질한 문교 정책이 장벽이

되었죠.  대학에 가려면 국가고시를 봐야 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앞 못 보는 사람도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길이 없었죠.”

그는 문교부를 찾아가 매달렸다.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서른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했죠. 결심을 했죠. 훗날에도 공부하고픈 시각장애인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자고 말이죠.” 그는 무작정 문교부 장학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작대기를 들고 휘둘렀다.

“마침 신문기자들이 와있더군요. 앞을 못 보는 제가 그들의 눈길을 끌었죠. 결국 기자들이 장관실로 데려가더군요.”

문교부 장관은 그에게 국가고시를 볼 수 있는 특전을 주었고, 그는 시험을 거쳐 숭실대에 입학했다.

이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전공했고, 미국 매코믹대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땄다. 훗날 명예

철학 박사학위와 명예 신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헬렌 켈러 이후 처음으로 세 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이다.

공부를 마친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점자 성경과 점자

찬송가를 소개했다.

또 앞을 못 보는 젊은이 10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86년에는 재계의 지원을 받아 서울 등촌동에 실로암안과병원을 설립했으며 지금까지 이 병원에서 개안

수술을 받은 이가 2만7000명이 넘는다.

또 실명 위기에 처한 35만 명에게 무료 안과 진료를 실시했다.

 

최근에는 46인승 리무진 버스에 안과 시설을 갖추고 돈이 없어 진료를 못 받는 시각장애인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김 목사에게 가슴에 담아둔 성경 구절을 물었다. 그는 ‘고린도 전서 15장10절’을 꺼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막사이사이상 =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죽은 필리핀 전 대통령 R.막사이사이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아시아의 노벨상’

으로도 불린다.

공공사업, 국제협조 증진, 지역사회 지도, 정부 공무원, 언론문화 등 5개 부문에 걸쳐 매년 수여한다.

 

한인으로는 1962년 언론인 장준하, 63년 김활란 전 이대총장을 비롯해 오웅진 신부(96년), 법륜스님(2002년),

시민운동가 윤혜란(2005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박원순(2006년) 등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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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작가지망 이혼녀에서

해리 포터의 성공을 일구어낸 조앤 롤링 이야기

 





‘아이 딸린 가난한 이혼녀에서 억만장자 작가로 변신!’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의 삶은 그 자체가 현대의 신데렐라 이야기다.
롤링은 1997년 해리 포터 시리즈 제1탄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내놓기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이혼녀였다. 생활비가 모자라 정부보조금으로 딸을 양육했다.
작가지망생이어서 글을 쓰고 싶었으나 집에는 집필공간이 없어서 동네 찻집의 책상에서
손으로 원고를 써내려 가던 처지였다.





▲ 해리 포터의 저자 조앤 K. 롤링

그랬던 롤링이 지금은 세계적인 명사가 됐다. 2001년 의사와 재혼해서 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를 포함, 세 아이들과 함께 19세기에 세워진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롤링은 천문학적인 부를 쌓았다. 2005년 12월 현재 그의 재산은 약 1조원에 이른다. 사회적인 명예도 최상급이다. 그는 포브스지(誌)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도 포함돼 있다. 그것도 순위가 급상승 추세다. 올해는 지난해 85위보다 45계단이나 껑충 뛰어오른 40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올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75위였다.

조앤 K. 롤링은 1965년 7월 31일 영국 치핑 소드베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터 롤링은 비행기 공장 지배인, 어머니 앤 롤링은 실험실 연구원이었다. 그의 부모는 영국의 전원과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다. 아이는 종종 자기 방이나 뒤뜰의 키 큰 풀숲 속에서 상상놀이를 즐겨하곤 했다. 그런 아이의 상상력을 한껏 길러주기 위해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집안이 온통 책으로 뒤덮여 있었고, 부모님은 끊임없이 번갈아가며 내게 책을 읽어주셨지요.”

그는 일찍부터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드러낸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 디가 세 살이 되자 다섯 살짜리 언니는 환상적인 동물들과
이상야릇한 장소들에 대해 앞뒤가 제대로 갖춰진 이야기들을 만들어서 동생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여섯 살이 되자 첫 번째 이야기를 종이 위에 연필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래빗(Rabbit)이란 이름의 토끼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의 머릿속에선 홍역에 걸려 고생하는 토끼와, 토끼를 문병 온 몸집이 큰 꿀벌
미스 비(Miss Bee)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에 관한 깜찍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후 수년간 오로지 토끼에 관한 이야기만 썼으며 마치 토끼에 중독이라도 된 듯했다”고 말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그의 글을 흥미로워했다.
“점심시간 때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나긴 이야기를 연속해서 들려주곤 했지요.
이야기 속에서 영웅적이고 신나는 모험을 마음껏 즐기곤 했어요.”

엑세터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비서직으로 취직했으나 얼마 뒤 해고를 당한다.
그는 최악의 비서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늘 정신나간 사람처럼 무언가를 긁적이고 있었어요.
내 이야기들을 컴퓨터로 깔끔히 타이프할 수 있어서 그나마 즐거울 수 있었어요.”

그후 옛 남자친구와의 재회를 계기로 맨체스터 상공회의소 사무직을 얻었다.
집이 있는 런던과 맨체스터를 기차로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갑자기 기차가 덜커덩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그때, 해리 포터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내 마음의 눈에 해리와 그가 다니는 마법학교가 선명하게 보였어요.”

기차가 런던의 나이츠 크로스(Knight’s Cross)역에 정차했을 때 그의 머릿속엔 이미
해리 포터 첫 번째 이야기의 기본 컨셉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해리의 흥미진진한 모험과 등장인물들의 기기묘묘한 이름을 고안해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달콤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이다.
게다가 스물여섯 나이에 또 다시 일자리를 잃었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중 평소에 품었던 ‘먼 나라에 가서 글을 가르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포르투갈 북부의 소도시 오포르토의 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해리 포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그는 포르투갈의 TV 방송국 기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러나 첫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1992년 첫 아이를 임신했으나 남편과는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는 여동생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같이 살자’는 편지를 받고 영국 에든버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딸 제시카와 옷가방 하나, 그리고 제3장까지 완성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원고뭉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현실은 비참했다. 그는 훗날 피플지(誌)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밝혔다.
“갓난아기는 있죠, 일자리는 없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낯선 장소에 내동댕이쳐진 셈이었어요.”
간신히 꾀죄죄한 단칸방을 구해 비바람은 피했지만 그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모든 힘을 쏟아서 어떻게든 빨리 해리 포터 이야기를 완성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글에만 매달리는 게 딸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그는 여동생 디에게 해리 포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동생은 금세 빨려들어갔고 언니에게 그때까지 써놓은 원고를
모두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 그는 용기를 얻는다.
결국 그는 1년 이내에 책을 완성해서 출판을 하기로 결심한다.
생계는 공공보조금을 신청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글을 써내려갔다.
집에서는 글을 쓸 공간이 없어서 잠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근처 카페로 가서
구석 테이블에 앉아 손으로 원고를 썼다.
그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원고가 완성되자 그의 글에 관심을 보인
크리스토퍼 리틀이라는 에이전트를 통해 영국 굴지의 출판사들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원고를 받아주겠다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러다가 1996년 블룸스베리(Bloomsbury)라는 출판사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출판사가 제시한 판권 금액은 겨우 2000파운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블룸스베리에서 판권을 사간 지 몇 달도 안 돼 이 책은 입소문을 타고
전세계 출판업자들로부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대한 관심은 1997년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전시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책의 내용에 반한 아더 A. 리바인이라는 출판기획자가 이 작품의 미국 판권을 달러로
여섯자리 숫자의 거금을 내고 산 것이다.

아동도서 출판 사상 미증유의 선불금을 기록한 이 작품에 관한 소문은 곧 세계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1997년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영국에서 출판됐다.
오랜 세월에 걸쳐 준비된 데뷔작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지금까지 시리즈 여섯 권이
모두 공전의 히트를 치는 세계 출판사상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작가가 되는 길을 묻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글을 쓰는지 감이 올 때까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우선 읽어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부터 쓰기 시작하세요.

여러분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적는 겁니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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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부자 가수방미의 놀라운 재테크 비법 첫 공개 80년대 ‘날 보러 와요’ ‘올가을엔 사랑할거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미모의 여가수 방미. 가수가 아닌 재테크 전문가, 100억원대의 자산가로 돌아온 그녀가 들려주는 실전 재테크 노하우. “오후에는 ‘7080 가요콘서트’ 공연이 있으니까 아침 일찍 오세요. 제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준비하고…. 9시 30분쯤 오면 되겠네요.”
말투가 싹싹하고 시원시원했다. 집을 번듯하게 꾸며놓지 않아서 볼 건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오라고 화끈하게 OK한 가수 방미. 한강과 한적한 한남동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UN빌리지 언덕 위의 경치 좋은 집.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드나이트블루 미니스커트와 톱을 차려입은 그녀의 이미지가 상쾌한 아침과 잘 어울렸다. 입구를 따라 거실에 도착했을 때 기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거실에는 TV와 소파 2개, 안방에는 침대 하나, 작은 방에는 콘솔 하나가 전부였다.

 

분명 그녀가 100억원대의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갔는데 말이다. “아니, 필요한 가구만 있으면 되지, 뭘 더 사야 하나. 하나하나 다 갖춰놓고 살려면 한도 끝도 없고, 그런 게 다 사치예요. 하하.”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거실의 통유리창 옆에 있는 책상은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얻어온 것이다. 아이들이 쓰던 책상이라 마징가Z부터 드래곤볼까지 스티커가 빼곡하게 붙여 있다. 부엌의 한 코너에는 스타벅스 커피잔이 소복이 쌓여 있다. 분리 수거를 잘 하는 구나 싶었다.

 

“이거 종이컵 하나에 50원 주잖우. 60개 모으면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공짜라니까!” ‘하하하’ 웃다가 고개를 돌리니 커피숍에서 들고 온 냅킨 한 움큼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박한 생활상이 신선했다. 부자는 어느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구나.

 

종이컵 하나도 버리지 않는 짠순이 살림꾼 그녀는 원래 MBC 코미디언 공채 2기 출신이다. 그러나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1980년 ‘날 보러 와요’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했고,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데뷔하자마자 히트곡을 낸다는 게 어려운데, 참 운이 좋았어요. 갑자기 바빠지니까 혼자서 스케줄 관리를 못 하겠더라고요. 마음에 맞는 매니저도 만나야 하고 그래서 81년부터는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돼 일을 했어요.” 그때부터 영화와 CF에도 출연했고, 라디오 DJ로도 활약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93년 겨울, 그녀는 모든 활동을 접고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노래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10대 댄스 가수들 중심으로 가요계 판도가 바뀌니까 설 자리가 없더라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제 노래가 댄스곡인가요? 아니면 발라드인가요? 그렇다고 트롯인가? 나이 든 가수가 노래 부르면 무조건 트롯이 되잖아요. 그렇게 어중간하게 분류되는 게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을 세우고 가지는 않았다. 일단 보스턴에서 1년 동안 영어 공부를 했고, 뉴욕으로 건너가서 연극 공부를 마쳤다. “미국에 있으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새로운 사람 만나면 말수도 없고, 내성적이었는데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그런 게 없어졌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아는 척하는 게 싫었는데 미국에서는 유학생들이나 아줌마들이 조금만 아는 척 해줘도 너무 반갑더라고요.”

 

그녀는 특히 뉴욕을 사랑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음악, 패션, 공연, 재즈, 영화, 미술, 건축, 새로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곳.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아파트 분양 재테크를 줄곧 해왔던 그녀는 미국에서도 일을 벌였다. 미국에 올 때 1달러당 800원이었던 환율이 IMF(98년)가 터진 뒤 1달러당 2200원까지 치솟은 것. 유학 자금으로 가져왔던 14만 달러와 집 안의 가구들, 고가로 구입한 벤츠 자동차까지 팔아서 한국으로 달러를 송금했다.

 한 달 만에 2배 이상의 환차익을 볼 수 있었고, 그 이익금을 뉴욕에서 콘도 분양받는 데 투자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타이밍을 잘 잡으니까 돈이 불어나더라고요. 미국에 있는 동안 환율의 힘이 꽤 무서운 거구나 느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재테크 공부를 했어요.” 뉴욕 부동산 시장을 누비다 생활력은 강했지만 수입과 지출 관리를 잘 못했던 어머니, 노름의 유혹에 빠졌던 아버지로 인해 부유하게 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그녀를 악착같이 만들었다. 가수 데뷔하기 전까지 줄곧 네 식구가 방 한 칸에서 함께 지냈단다. 그렇다 보니 아껴 쓰는 생활이 몸에 배었고, 돈 모으는 재미에 주파수를 맞추게 된 것이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꾸준히 부동산 전문 서적들을 읽으며 공부했다. LA와 뉴욕을 오가면서 지내다 작년 1년 동안은 뉴욕에 머물며 콘도를 사기 위해 수없이 집을 보러 다녔다. 가는 분양 하우스마다 한국인들이 있었고, 어떤 날은 아침 예약 다섯 팀 모두가 한국 사람인 날도 있었다. 뉴욕의 부동산에 동양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부동산에 관심 많은 사람들과도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년 전에 맨해튼72가 리버사이드 쪽에 있는 30달러짜리 콘도를 샀어요. 맨해튼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죠. 그리고 몇 달 만에 60만 달러에 팔았어요. 일명 ‘치고 빠지기 작전’이라고 하잖아요.” 집을 살 때는 분양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분양 값과 감정가는 다르기 때문에 시세 파악을 정확하게 하고 나서 집을 사야 한다는 것. 특히 미국은 담보금을 50% 내고, 나머지는 대출을 받아 상환하는 방식으로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융자 상품도 이자율을 꼼꼼히 따져서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도 가수 데뷔하면서부터 아파트 재테크를 줄곧 해왔다. 데뷔 당시 그녀의 재산은 한 달 월급 9만원. 비과세 정기적금 4개와 일반예금 통장 1개가 전부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밥값도 아껴 알뜰히 모으는 정도였다. 그러다 80년대 초반에 옴니버스 앨범 중 ‘One night two days’가 히트하면서 1200만원의 목돈이 생겼다. 그녀는 그 돈에 4개의 적금을 해약한 돈까지 보태 아파트를 계약했다. 방 한 칸에서 월세로 살던 처지를 청산하고 신반포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한 것. 아파트가 살기에 편하고 좋다는 걸 이십대 초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신반포 아파트를 내놓고 방배동 아파트를 매입, 10개월 만에 300만원의 차익을 봤다. 다시 여의도, 방배동에 있는 아파트를 옮겨가며 6개월~1년 주기로 매매와 매도를 했다. 1억원으로 샀던 여의도의 아파트가 2년 사이에 5억5000만원까지 치솟는 등 이익금도 커졌고, 평수도 조금씩 넓혀 갔다. “20년 동안 서른 번을 이사했어요. 부동산, 그것도 주택으로 재테크하려는 사람들은 집을 사서 평생 살겠다는 마인드를 바꿔야 해요. 재건축에 들어갈 집이나 꾸준히 집값이 오르는 아파트 등은 차익 실현을 하는 대로 치고 빠지는 거예요.” 현재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주택은 강남의 아파트 한 채, UN빌리지의 100평대 빌라, 논현동의 빌딩 한 채다. 100억원을 호가하는 자산이다. 그녀는 집을 살 때 반드시 대출을 받는다. “평수를 늘리거나 목이 좋은 데로 옮길 때마다 대출을 받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금이 그만큼 있으면서 뭐 하러 대출 받느냐고 해요. 아니 왜 은행 좋은 일을 시켜요?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곳이지, 우리가 돈을 갖다주는 곳이 되면 안 되죠.” 그녀의 은행 거래는 통장 2개가 전부다. 한 개는 3개월 동안 쓸 생활비가 들어 있는 저축통장이고, 또 하나는 대출 통장이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 전에 임대료 수익률을 미리 계산해 봐야 한다. 임대료로 대출 이자를 갚고도 돈이 남는지 따져보는 손익 계산은 필수 사항이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꿈꾸는 파워 우먼

 

 행복의 기준이 뭐냐는 물음에 그녀는 서슴지 않고 ‘경제적 여유’라고 말한다.

 

“돈에 혈안이 돼서 안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돈이 있다면 분명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거죠. 그런데 그 돈이라는 걸 좋아해야 사방 천지에 돈 벌 거리가 보인다니까요. 돈을 사랑하고, 돈 벌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금융 교육을 하고 싶어요.”

재테크는 이론 공부만으로는 안 된다. 실전 투자와 이론 공부를 병행해야 재테크 공식을 터득하게 되는 것. 아파트 부동산 투자와 뉴욕에서의 콘도 분양 투자 등 높은 실적의 포트폴리오를 구상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그녀에게는 꿈이 있다. “맨해튼 중심에 큰 콘도를 살 거예요. FTA도 체결이 됐고, 조만간 미국 가는 데 비자가 필요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동남아 여행을 가겠어요. 비자 받는 게 까다로웠던 미국을 대거 여행이나 공부하러 올 테고, 특히 뉴욕에 엄청난 한국인이 들어올 거예요. 한국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사서 운영하고 싶어요.”

 

뉴욕 하면 방미가 떠올랐으면 좋겠단다. 그것이 그녀의 사업 컨셉트다. 맨해튼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타임스퀘어와 록펠러센터 곳곳에 집과 빌딩을 갖고 있는 21세기 재벌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처럼 되고 싶다는 것. 부를 거머쥐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막 뉴욕 생활을 시작한 유학생들이나 여행객들에게 뉴욕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벌써 2년 전부터 좋은 콘도의 자리와 투자 가치가 있는 매물을 찾고 있다는 그녀. 올가을쯤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듯싶다. 외롭지는 않을까.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 같이 운동도 하고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만나고 싶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네요. 결혼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나요. 제가 요리를 정말 못하는데 남자랑 맛있는 밥 사 먹을 돈은 있잖아요(웃음). 하루 세 끼 즐곧 사 먹자고 하면 남자가 도망갈까요? 하하.” 아직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혼자 지내고 싶다는 그녀. 8월에는 두 달 동안 토론토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바쁜 일상이 휘몰아치기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달콤한 시간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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