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학교 공예디자인과를 다닐 때만 해도 오선희 씨의 꿈은 학교를 졸업한 후 원하는 디자인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숍 마스터라는 직업은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직업을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런 직업이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용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대학 시절, 선희 씨는 방학이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규 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로 하던 일은 일반 매장이 아닌 그 옆 판매대에서 옷을 파는 것.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일하는 판매대는 유난히 매출이 좋았다. 정규 매장도 아닌 판매대에서 제품 하나당 6백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파는 옷을 직접 입고 손님에게 권한다거나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그녀의 성실함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모델처럼 늘씬한 외모와 붙임성 있는 태도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활달하고 성실한 그녀는 어느 날 한 의류회사 간부의 눈에 띄었고, 그것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회장님이 저를 일주일이나 조용히 지켜보셨대요. 손님을 대하거나 물건을 파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신 거죠. 그리고는 저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해주셨어요.”
결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희 씨는 베네통의 숍 마스터로 채용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4살짜리 여자가 일반 사원을 관리하는 매니저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니, 이만저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니었다.
그녀가 입사했던 94년 당시의 연봉이 2천만원 정도였으니 일반 대기업 사원보다도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숍 마스터라는 직업이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백화점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기만 했다.
전공 교수님들과 선배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계속하라’며 말렸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숍 마스터가 백화점 점원과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실 처음엔 선희 씨 자신도 1년 정도 할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일해서 돈을 번 다음, 그 이후엔 공부를 계속하리라는 계획이 있었던 것.
그렇게 부담 없이 시작한 일이 1년을 훌쩍 넘기고 어느덧 3년에 다달았다.
“일을 시작한 지 3년쯤 되니까 슬슬 한계가 오더군요. 일단 매일 12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했구요. 그래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죠.”
이번에는 전공을 살려 광고 회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1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늘 사람들을 접하던 숍 마스터에 비하면 그녀가 피부로 느끼는 보람이 너무 적었던 것.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에게서 느끼던 보람도 그 못지않게 컸던 탓이다. 그림을 그리며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숍 마스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결국, 1년 만에 그녀는 다시 백화점 매장으로 돌아왔다.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매장에서 일할 때는 고생한다며 부침개를 부쳐다주신 아주머니도 계셨고, 여자 친구에게 줄 옷을 대신 입어보라며 그녀에게 옷을 6벌이나 갈아입게 한 남자 손님도 있었다.
“솔직히 그 당시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죠. 제가 입어본 6벌 중에서 그 분이 4벌이나 사 가셨지만, 왠지 제가 상품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분이 여자친구와 함께 매장을 찾으셨더라구요. 그때 여자친구가 외국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옷을 입게 했다,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이 직업의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서 얻는 기쁨 같은 것.”
이제 숍 마스터 8년차인 그녀의 연봉은 무려 1억에 달한다. 약 2년 전, 파격적인 조건으로 에고이스트에 스카웃되면서 그녀도 억대 연봉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 물론 매장의 책임자이다 보니 매출액에 따라서 연봉이 좀더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1억이 아닌가. 평범한 샐러리맨은 그 정확한 액수조차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큰돈. 이쯤 되면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럽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웨딩드레스와 한복을 포함한 웨딩 토털숍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에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패션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앞으로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꼭 그 꿈을 이루고 싶어요.”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패기도 1억원짜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