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단의 원리를 좋아한다.

 

올라갈 때도 한 계단, 내려갈 때도 한 계단이다.

 

최근 두 차례 주요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오픈마저 제패했다면 여러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는 것이다.

 

삶에서도 여러 계단을 한꺼번에 오를 수는 없다.

 

그러면 나중에 열 계단씩 한꺼번에 내려앉을 수도 있다.

 

이는 자만심 때문이다.

 

스포츠맨은 계단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프로 골퍼 최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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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출신인 이상기(가명. 40)씨. 상고 출신인 그는 10억원 이상의 자산가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게 취미지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정 형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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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물려 받은 재산은 있을 턱이 없다. 그가 10억을 모으는데 삼은 밑천은 ‘읽고 예측해 타이밍을 잡는 취미’다. 한 마디로 ‘지식’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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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5개 이상 신문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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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하루에 5개 이상의 신문을 읽는다. “종합지 3개에 경제지 2개는 필수죠. 여기에 경제주간지와 부동산 전문지도 꼭 보구요. IT붐이 일기 훨씬 전인 1994년께부터 전자신문도 구독했습니다. 전산 관련 부서에서 일할 때부터 들인 버릇이죠. 그렇게 4∼5년을 했더니 뭔가 트렌드를 보는 눈이 생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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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현재라면 책은 미래다. 그는 신문과 책 읽기를 병행한다. 그가 구입하는 책은 연간 1백여권. 이 가운데 30∼40권은 정독하고 나머지는 통독한다. 신문에서 얻은 현실의 단편적 지식을 책을 통해 종합 정리하고 큰 줄기를 잡는 것이다. 이런 식의 버릇을 들인지가 10여년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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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습관이 당장 돈을 벌어다 준 것은 아니다. 그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경영학)에 대학원(경제학)까지 마치느라 본격적인 재테크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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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근무라는 점을 활용해 빚을 내서 주식투자도 해 봤지만 돈만 날렸다. 증권업계 직원들의 말에 너무 의존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17년이 된 99년까지도 ‘대출 낀’ 수도권 1억7천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전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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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잘 쓰기 위해 번다”는 철학을 가진 그는 마냥 허리띠를 졸라매는 저축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인 나선 것은 99년 초였다. 그해는 이씨에게 여러면에서 잊을 수 없는 해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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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터지고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중소기업 육성이니 벤처기업 지원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신문 등 정보를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정부가 적극적인 중소기업 지원과 벤처 육성책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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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99년 1월 추가 대출을 받았다. 유망 벤처 종목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그래픽(VGA)카드를 만드는 가산전자(현 M플러스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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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산관련 업무를 보다가 가산전자를 알게 됐죠. 매일 컴퓨터를 만지다보니 그래픽 카드 시장이 크게 성장하리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있었지만 대만업체에 지지 않을 만한 경쟁력을 갖춘 회사는 가산전자 정도였어요. 그때 주가는 2백∼3백원 수준이었죠. 이건 확실히 된다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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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출 받은 2천만원으로 이 회사 주식을 샀다. 가산전자 주가는 99년 말 1만원 대를 뛰어넘어 최고 1만4천원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씨가 매각으로 실현한 이익은 약 2억여원. 2000∼2001년에 걸쳐 주당 2천5백∼3천원 수준일 때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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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익률 10배를 넘는 대박이었다. 99년 하반기 그는 장외시장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통신관련 종목들에 총 5천만원을 투자했다. 이듬해 7월과 8월에 걸쳐 회수한 액수는 총 6억여원. 약 11배 이상 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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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집부터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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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그해 말 퇴사를 결심한다. 좀더 본격적으로 벤처 붐 타기를 위해서 였다. 그는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는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무담당 최고책임자(CFO)를 맡았다. 구조조정과 투자 유치가 그의 주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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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은 별로 높지 않지만 스톡옵션을 받아 짤짤한 재미를 봤다. 1년여 지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그는 컨설팅 업체를 차리고 본격적인 ‘중소기업 주치의’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비용은 대부분 스톡옵션으로 대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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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컨설팅을 ‘일’이자 ‘투자’로 활용하고 있다. 내실 있는 중소 업체를 발굴해 재포장한 뒤 투자를 유치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컨설팅 대가로 스톡옵션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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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 대상 업체를 고를 때 보는 기준은 첫째 2∼3년 후 떠오를 업종, 둘째 자질 있는 CEO가 경영하는 기업, 셋째 시장이 너무 급변하지 않는 업종이다. 지난 2년여 동안 그가 컨설팅한 중소기업은 6개. 이가운데 코스닥에 등록시킨 업체도 2곳이다. 그는 재테크에서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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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금리가 오르면 인플레가 실물자산에 반영된다. 또 금리가 낮으면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려서 집값이 오른다. 장기적으로 보면 집값은 어떤 경우에도 오르게 돼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는 꼭 집을 사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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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파트 평수를 늘려 서울에 입성한 시기도 기가 막혔다. 집값이 들썩이던 초기 2002년 1월이었다. 사실 그 무렵 집값 상승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2001년 세계경기 동반 침체로 수출이 막히면서 정부는 내수 진작책을 쏟아냈다. 과열된 소비는 문제를 낳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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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1년 말 전세값 상승에 주목했다. 대개 32평형 이상의 전세값이 집값의 60%를 넘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집값 상승의 전주곡이었다. 이씨는 3억원에 43평형 아파트를 매입했다. 현재 시가는 3억9천만원정도다. 9천만원 정도의 차익을 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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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곳엔 손 안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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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달러 환율 1천1백60원대에 달러를 사들여 1천3백원대에서 매각했다. 총 2억원정도 였다. 덕분에 약 12%, 1천2백만원정도의 수익을 올렸다. 골프 회원권도 이씨가 애용하는 투자대상. 최근에는 지난 2000년 11월에 매입해서 이듬해 5월에 매각하면서 약 3천만원의 차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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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귀뜸한 골프회원권 투자법은 이렇다. 대개 11월부터는 골프 회원권 시장도 동면이 들어간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이 떨어지게 돼 있다. 이때 구입하면 싸게 살 수 있다. 반면 성수기는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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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4월쯤 되면 골프회원권 시장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파란 잔디가 돋아나면 ‘나도 골프회원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게 마련. 그래서 수요가 늘어난다. 이때 내다 팔면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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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환율·부동산·골프회원권 등은 현실투자, 즉 단기운용에 속한다고 말한다. 반면 벤처투자는 2∼3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투자다. 그가 주로 투자하는 벤처 업체는 미래형 산업. IT업종과 엔터테인먼트 업체로 제한돼 있다. 소프트웨어 업종 역시 투자수익률은 높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다. 제대로 아는 업종 2∼3종목에만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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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낡은 ‘아이디어 북’이 있다. 10여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그 노트에는 온갖 아이디어가 다 적혀 있다. 트렌드를 예측한 메모에서 경제분석 노트, 책을 읽고 난 후의 독후감, 나이대 별로 해야 할 일을 그린 그래프,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까지 꿴 10여년을 하루 5시간 이상씩 읽고 생각하고 분석한 흔적이다. 10억원은 절대로 그냥 벌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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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씨의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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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취직. 수입의 10%는 책 구입 등 자기개발에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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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분당 32평형 아파트 2억원에 매입 (1억원 은행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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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주식투자로 3천만원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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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 IMF여파로 이자 감당 못해 분당 아파트 1억6천만원에 매각. 4천만원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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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 가산전자 주식에 2천만원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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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시장에서 서두인칩등 IT관련주 매입. 중소기업 CFO로 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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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산전자 매각으로 2억원 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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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인칩 등 장외시장 투자주식으로 6억원 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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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중소기업 컨설팅 본격적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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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업체 구조조정 및 자금조달 컨설팅 수주. 일부 스톡옵션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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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개 업체 코스닥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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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업체 컨설팅 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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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43평형 아파트 1채, 73평형 빌라 1채 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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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현재?총 자산 약 13 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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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약 1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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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회원권 약 1억1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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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43평형) 약 3억9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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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73평형) 약 7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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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학교 공예디자인과를 다닐 때만 해도 오선희 씨의 꿈은 학교를 졸업한 후 원하는 디자인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숍 마스터라는 직업은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직업을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런 직업이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용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대학 시절, 선희 씨는 방학이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규 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로 하던 일은 일반 매장이 아닌 그 옆 판매대에서 옷을 파는 것.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일하는 판매대는 유난히 매출이 좋았다. 정규 매장도 아닌 판매대에서 제품 하나당 6백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파는 옷을 직접 입고 손님에게 권한다거나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그녀의 성실함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모델처럼 늘씬한 외모와 붙임성 있는 태도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활달하고 성실한 그녀는 어느 날 한 의류회사 간부의 눈에 띄었고, 그것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회장님이 저를 일주일이나 조용히 지켜보셨대요. 손님을 대하거나 물건을 파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신 거죠. 그리고는 저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해주셨어요.”

결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희 씨는 베네통의 숍 마스터로 채용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4살짜리 여자가 일반 사원을 관리하는 매니저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니, 이만저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니었다.

그녀가 입사했던 94년 당시의 연봉이 2천만원 정도였으니 일반 대기업 사원보다도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숍 마스터라는 직업이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백화점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기만 했다.

전공 교수님들과 선배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계속하라’며 말렸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숍 마스터가 백화점 점원과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실 처음엔 선희 씨 자신도 1년 정도 할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일해서 돈을 번 다음, 그 이후엔 공부를 계속하리라는 계획이 있었던 것.

그렇게 부담 없이 시작한 일이 1년을 훌쩍 넘기고 어느덧 3년에 다달았다.

“일을 시작한 지 3년쯤 되니까 슬슬 한계가 오더군요. 일단 매일 12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했구요. 그래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죠.”


이번에는 전공을 살려 광고 회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1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늘 사람들을 접하던 숍 마스터에 비하면 그녀가 피부로 느끼는 보람이 너무 적었던 것.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에게서 느끼던 보람도 그 못지않게 컸던 탓이다. 그림을 그리며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숍 마스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결국, 1년 만에 그녀는 다시 백화점 매장으로 돌아왔다.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매장에서 일할 때는 고생한다며 부침개를 부쳐다주신 아주머니도 계셨고, 여자 친구에게 줄 옷을 대신 입어보라며 그녀에게 옷을 6벌이나 갈아입게 한 남자 손님도 있었다.

“솔직히 그 당시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죠. 제가 입어본 6벌 중에서 그 분이 4벌이나 사 가셨지만, 왠지 제가 상품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분이 여자친구와 함께 매장을 찾으셨더라구요. 그때 여자친구가 외국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옷을 입게 했다,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이 직업의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서 얻는 기쁨 같은 것.”

이제 숍 마스터 8년차인 그녀의 연봉은 무려 1억에 달한다. 약 2년 전, 파격적인 조건으로 에고이스트에 스카웃되면서 그녀도 억대 연봉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 물론 매장의 책임자이다 보니 매출액에 따라서 연봉이 좀더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1억이 아닌가. 평범한 샐러리맨은 그 정확한 액수조차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큰돈. 이쯤 되면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럽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웨딩드레스와 한복을 포함한 웨딩 토털숍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에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패션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앞으로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꼭 그 꿈을 이루고 싶어요.”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패기도 1억원짜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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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흐름을 아는 것이 장사의 요체다. 그 흐름을 모르면 남보다 뒤쳐지게 마련, 난세에 때만 기다림은 흐름을 잡아 결단을 내리는 것만 못하다. 어려운 일들이 의외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짐은 현실을 바로 파악하고 순발력 있게 적응을 잘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항상 야린스키 처세정신 10조 연마를 게을리 하지 말라."
19세기 말엽에 조선 최고의 부호였던 최봉준이 남긴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 은행들의 총자본금이 다 합쳐서 10만원도 채 되지 않았던 시절에 5, 6백만원을 움직일 정도의 거상이었다. 소설가 이강선 씨가 집필한 <조선최강상인 3불세출>이란 책에는 최봉준을 두고 조선 최대의 국제 무역왕이요, 최대의 현금왕이라 부른다.
12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가까운 친척 하나 없게 되자, 그는 계절 노동자들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이리떼에 내몰려 거의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 이 때 러시아 귀족인 야린스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눈이 깊이 쌓인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목숨을 구한 최봉준은 야린스키가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7년 동안 양아들 겸 별장지기로 지내게 된다. 그 사이에 12살에 불과하였던 어린 소년은 19살의 청년으로 자라게 된다. 야린스키는 최봉준에게 별장과 농장 그리고 '처세 10조'를 남기게 된다. 최봉준은 야린스키 유훈 처세 10조를 만들어 평생 동안 머리맡에 두고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첫째,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둘째, 명확한 목표를 세워라
셋째,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해낼 수 있다.
넷째, 상대의 입장에서 행동하라.
다섯째, 자기계발에 힘써라.
여섯째, 기회는 역경의 시기에 찾아온다.
일곱째, 성공은 냉철한 자기 분석에서부터 시작된다.
여덟째, 경쟁보다는 협력을 하라.
아홉재, 실패를 귀중한 교훈으로 삼아라.
열번째, 하루 하루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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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꼭 벌어야 하는데 방법이 없는 분에게 경매를 해보라고 권하겠어요. 하지만 만만하게 보면 큰일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분석하고 발품 팔아야죠. 1년 내내 고생스레 직장 다녀서 연봉 2천만∼3천만원 받는 것처럼 경매도 노력을 기울여야 그만큼 버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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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가명·41) 사장은 경매 예찬론자다. 그녀에게 경매는 그냥 ‘재테크 수단’이 아니다. 회사를 부도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 자금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그래서 정사장은 경매를 ‘자기 방어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무슨 스토리길래 경매를 이렇게 얘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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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려면 경매를 공부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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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위기 때였어요. 원청업체들이 줄줄이 쓰러지니 하청업체들도 대금을 못 받아 연쇄부도 위기에 놓였죠. 우리 회사도 당장 어음이 안 도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서 채권을 행사하려고 보니 경매를 넣으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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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가 싶어서 법원 담당과를 찾아가 봤더니 찬바람만 쌩쌩 불더군요.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어떻게 하겠어요, 모르는데. 배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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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당장 모 대학 부설 경매강좌에 등록했다. 3시간씩 1주일에 3번, 만만찮은 수업이었다. 낮에는 회사 꾸리느라 동분서주하고, 밤에는 강의 듣고, 주말에는 과제물 준비로 정신없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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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거의 끝나가는데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수강 동기생 중 10여명을 추려봤다.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골랐다. 전문 분야도 안배했다. 법무사·세무사·회계사·은행·교수 그리고 ‘○○연구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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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성 경매학생들은 매주 한 차례 세미나도 열고, 각자 골라온 경매물건을 서로 점검해 줬다. 말하자면 ‘정보 품앗이’였다.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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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실전 경매물건은 연구소 사무실이었어요. 8천5백만원에 샀는데 지금 시가는 1억5천∼2억원쯤 가죠.” 정사장은 강의가 끝날 무렵 배운 지식을 이용해 첫 경매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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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 복잡하지 않고 아주 쉬운 물건부터 시작했어요.연립주택이었는데, 한 번 유찰돼 7천8백만원이었어요. 7천5백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는 세입자가 있었는데 확정일자를 받아둬서 채권 1순위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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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할 게 없는 단순한 물건이었던 셈이죠. 세입자 돈 내주고 내보내면 되니까요.” 쉬운 물건이라 경쟁자가 많을 것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8천만원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8천5백만원을 써서 낙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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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답사를 가서 세입자도 만나보고 시세도 알아봤거든요. 시세는 1억2천만원이더군요. 세입자는 더 살고 싶다고 하고요. 8천5백만원에 사도 실제 내 돈은 1천만원이면 되잖아요. 더욱이 지하에 세를 줄 수 있도록 화장실과 부엌이 달린 독채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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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지하를 1천5백만원에 세 놓았다. 결국 ‘내 돈’은 한푼도 안 든 셈이다. 1년 후 팔았으니 양도세도 안 물었다. 판 가격은 1억5천만원. 무려 6천5백만원의 차익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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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처럼 쉽게 되는 건 아니다. 우선 낙찰되기가 힘들다. “입찰에서 2등은 꼴등이나 똑같아요. 1등 해서 낙찰되지 않으면 다 소용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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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벌어도 만족할 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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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10건이면 3건 이상은 낙찰된다. 어려서부터 숫자 감각이 뛰어나 현장에 온 사람들을 보면 대개 ‘감’이 온단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10건이면 1건 되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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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건 하다가 한번도 낙찰 안 되니까 쓸데없이 그동안 돈과 시간만 버렸다며 다시는 안 한다고 분해하는 분들도 봤어요.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중도에 포기하게 돼죠. 끈기와 인내심 없이는 경매로 성공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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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를 잘 하려면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옆에서 보니까 쉽게 돈 버는 것 같아 뛰어들었다간 큰코 다친다. 작게 벌어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없이 무조건 가격을 짜게만 쓰면 낙찰은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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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지금까지 25건 정도의 경매를 했다. 이 가운데 10억원이 넘는 물건은 연구소 회원들과 공동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그런 공동 건수가 3∼4건을 넘는다. 회사 사무실도 경매로 사서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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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억4천만원에 샀는데 지금 시세는 2억5천만원이다. 또 8천2백만원에 산 사무실도 현재 1억3천만원에 달한다. 지금까지 경매로 얻은 차익을 얼추 계산해 봐도 10억원을 훨씬 넘는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은 대부분 회사 자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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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에게 경매는 돈 버는 목적이 아니라 사업의 보조 수단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돈을 벌어도 사업으로 버는 쪽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직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거잖아요. 훨씬 다이내믹하고 보람도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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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직원들에게 경매 정보를 알려줘 내집마련을 도와줄 때가 기쁘다고 한다. “사실 작은 회사라 월급을 많이 주진 못하거든요. 대신 내집마련을 원하는 직원들에게 경매를 가르쳐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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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도 골라주고, 입찰 때 얼마 쓰라고 액수도 알려주고. 차익이 크진 않지만 시세보다 2천만원만 싸게 사도 그게 어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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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를 배워서 또 좋은 게 있다. 받을 대금 못 받았을 때 법을 어떻게 이용하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지 훤해졌다. 그래서 정사장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꼭 경매 배우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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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를 하려면 관련 법을 다 알아야 해요. 그러면 나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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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주말이면 물류센터로 쓸 경매물건을 찾느라 바쁘다. 법원 사이트와 지지옥션(GGI)·인포뱅크(infobank) 등 경매전문사이트에도 들어가 물건을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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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어요. 법원사이트에 들어가면 모든 게 다 있죠. 집에 앉아서 등기 열람도 가능하고, 부동산 정보망을 통해 시세 확인도 가능하죠. 그렇게 확인 가능한 정보를 다 모은 뒤 그 지역에 사는 지인들에게 정보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나서 확신이 서면 현장 답사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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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장은 한번도 주식이나 다른 재테크를 해본 적이 없다. 한국 증시는 아직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도박 같기 때문이란다. 그럼 부동산은 뭐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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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고 담백하잖아요. 강남 개발 붐 때처럼 그냥 앉아서 돈방석에 앉던 시대는 지나갔어요.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죠. 땀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것, 그게 부동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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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경 사장 10억 만들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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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대학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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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부친의 약국 경영하면서 일식집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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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대학 졸업. 독서실과 음식 체인점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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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사업 청산. 가정주부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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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회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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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연쇄부도 위기. 모 대학 부설 경매강의 과정 등록. 경매공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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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과정 이수. 동기들과 연구소 설립. 첫 경매로 6천5백만원 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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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경매를 통해 회사 사무실 1억4천만원에 매입. 현재 시가 2억5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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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새 법인 설립. 2개 회사 동시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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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지난 5년간 25건의 경매로 10억원 이상 차익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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