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부터 23일까지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에어쇼 2005'에서는 비행기만큼이나 눈에 띄는 노천 레스토랑이 있었다.

활주로 한 켠에 대형 천막을 설치해 만든 500석 규모의 식당. 천막에는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붉은 색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정인태(50)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 사장은 이번 에어쇼에 야외 식당을 차린 것은 "맨땅에 헤딩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일주일 장사하자고 각종 장비와 인력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특급 호텔을 비롯, 많은 업체들이 포기한 일이었다.

정사장 스스로 무모한 일이라고 인정한 야외식당 영업에서 에어쇼 기간 올린 매출은 1억 5,000만 원.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의 올해 매출 목표가 2,280억원 인 것을 감안하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장사다.

정사장은 이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돈은 안 남았지만 어려울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며 "브랜드 노출효과도 좋았고, 구성원들에게는 대통령이 참관하는 대형 행사에서 음식을 서비스했다는 경험과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가 너희들 대통령에게 음식 서빙 해봤냐고 묻는다고 치자. 그 때 우리는 해봤다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런 일이냐"고 되물었다.

지난 96년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를 한국에 도입해 9년 만에 패밀리 레스토랑 부문 1위로 올려놓은 정 사장은 "남들 못하는 걸 하는 게 좋다. 나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스타일로 일을 한다"고 말했다.

'철가방'이라고 부르는 중국집 배달원부터 시작해 국내 최대의 패밀리레스토랑 사장이 된 지금까지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정사장으로부터 온 몸으로 체득한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봤다.

# 철가방도 요령이 있더라


-중국집 배달원을 하셨다면서요.

"네 했습니다. 그런데 배달의 생명이 뭔지 알아요. 배달의 생명은 배달을 얼마나 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릇을 얼마나 잘 찾아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시간과 동선을 분석해 손님이 다 먹고 내놓은 그릇을 얼마나 신속히 걷어오느냐가 배달 회수를 늘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요"

그릇을 빨리 걷어오는 요령을 터득해 하루 100군데 이상의 배달을 다녔다는 정사장은 부산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군에서 제대한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방학마다 부산으로 내려가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고 하는데 또 무슨 장사를 해보셨나요.

"트럭에 생선을 싣고 다니며 파는 장사도 해봤어요. 생선 장사의 생명은 뭔지 알아요. 다름아닌 날씨더라고요. 맑은 날은 꽃게나 오징어같이 쉽게 상하는 게 잘 팔리고 흐린 날은 고등어나 삼치같이 살이 단단한 생선이 잘 팔립디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어요.

해보니까 그렇더라고…. 그래서 내가 젊은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지. '해보니까 그렇더라'는 말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거든.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도 일단 부딪혀보자는 게 사업 철학이요"

# 좌절은 변화와 도전의 계기다


-첫 직장이 호텔이셨지요.

"81년 롯데호텔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요.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웨이터 일을 자원했는데 나중에 매스콤에서 나를 두고 '한국 최초의 석사 웨이터'라고 보도하더군요"

이를 계기로 롯데호텔은 정사장에게 해외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는 88년 호텔의 신규 사업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면서 외국의 패밀리 레스토랑 문화를 공부했다. 그 후 92년 롯데호텔을 떠나 미국계 레스토랑인 T.G.I 프라이데이스의 창립멤버로 일을 시작해 5년만에 임원으로 승진한게 패밀리레스토랑을 경영하게 된 동기가 됐다.

-T.G.I에서 일을 하신게 아웃백을 경영하게된 동기가 된거군요.

"그렇지요. 미국 아웃백 본사에서 나를 찾아왔어요. 그 이유가 재밌었는데 국내 외식 업체중 코카콜라를 가장 많이 판매한 업소를 찾아온 거 였어요. 콜라를 많이 판 업체라면 당연히 음식도 많이 팔았을 거라는 거지요. '무모한 도전이다' '안정된 직장, 그것도 임원 자리를 박차고 모험을 하느냐'는 만류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퇴직금에 대출금을 보태 마련한 1억 8,000만원을 가지고 어렵게 점포를 하나 둘씩 늘려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이 터졌어요. IMF외환위기가 온거지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 때는 정리해고 실업자도 많고 소비가 위축됐을 때 였는데.

"높아진 환율로 인한 식자재 비용이 상승하고, 턱없이 올라간 이자비용, 갈수록 적어지는 고객에 어음 만기는 매일 닥쳐오고….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직원들 몰래 엉엉 울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기대와 신념이 무너진 순간이었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셨나요.

"미국 아웃백 본사의 투자를 이끌어 내 합작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한국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는 시점이라 신규 투자를 얻기 위한 설득이 쉽지 않았지요. 그런데 미국 아웃백과의 협상은 30분만에 끝났어요. 1,3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거지요. 그래서 2000년에 탄생한 회사가 ㈜오지정 이오"

이 회사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한 정사장은 2000년에 8개 점포를 열고 이듬해에 8개 점을 더 오픈 했다. 2002년에는 582억 원 매출을 달성하고, 2003년에는 859억 원 매출을 올렸다. 올해 매출 목표는 2280억원, 현재 점포 수는 70개다. 기록적인 성장을 이뤄낸 셈이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돌아오신거군요.

"지금 말로 하니까 재미있는데, 그 때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였어요. 좌절도 연습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 더 큰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죠. 좌절은 변화와 도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 성공하려면 마음을 바꿔라


정 사장은 최근의 취업난과 청년 실업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다. 인기 있는 직업으로만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취업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대학 레벨이 가려지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대학 못나왔다고 해서 꼴찌는 아니잖아요. 눈높이를 낮춰보세요. 특정 분야의 1인자가 되는 게 더 빠릅니다. 우리 회사의 매니저들도 일류 회사만 고집했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겁니다"

실제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의 매니징 파트너(점장급) 70명 중 3분의 1 이상이 1억 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70명의 평균 연봉은 8,000만 원 정도. 입사 후 서빙부터 시작해 5년만에, 28살의 나이에 억대 연봉의 꿈을 이룬 사람도 있다. 정 사장은 졸지에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직장을 못찾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직장생활이 아니더라도 밥 먹고 살 방법이 내 눈엔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 때는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옛날 생각하고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은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퇴직 후 음식장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베푸는 덕을 가져야 합니다. 손님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아야죠. 손님이 '이래도 망하지 않느냐'고 걱정할 정도로 퍼줘야 합니다. 식당은 퍼줘서 망하는 게 아니라 손님이 안 와서 망하거든요"

정 사장은 마지막으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꼬인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적이고 나쁜 사람입니다. 물론 부모 잘 만나서 부자가 되고 CEO가 된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삶을 일궈온 사람들입니다. 노력하면 표시가 납디다. 그게 세상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가 '나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고…. 이게 우리가 가야 할 길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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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전문가인 봉준호(44) 닥스플랜 대표. 이 사람 만나기 참 힘들다. 부동산 개인 컨설팅 한 번 받으려면 최고 500만원, 강연에 초빙하려면 시간당 300만원의 강연료를 줘야 한다. 한 재테크 강의에선 3시간에 2500만원을 받고 강연을 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를 만나려고 줄을 섰다.




지난 3월 중순 인터뷰를 요청하고 나서 한 달 반이 지난 4월 27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봉씨를 만났다. 인기의 비결을 물었다. 봉씨는 “왜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땅을 보고 집을 구경하는 게 태어날 때부터 좋았다”며 “좋아하는 걸 맘껏 하니 경쟁력이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봉씨는 하루에 10가구씩 1년에 3650가구의 집을 둘러본다. 봉씨는 자신이 본 집 숫자로 계절을 안다. 그는 “3000가구쯤 보면 가을이구나 한다”라며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만나 분위기를 느끼고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아파트 단지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눈에 들어오는 경지가 됐다”고 말했다.

직접 방문한 아파트에 대한 정보는 수첩, 일지에 꼼꼼하게 적어 놓는다. 강남의 한 초고층 아파트는 건물 입주 15일 전에 모든 집에 다 들어가 보고 창 밖 경치까지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 놨다. 이런 정보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국의 모든 아파트를 둘러보는 것은 아니다. 강남 등 20여개 핵심 지역만 꾸준하게 돌아다닌다. 그리고 부동산 공인중개사를 사귄다. 봉씨가 가깝게 지내는 공인중개사만 1100여명이다. 봉씨는 “지역 시장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공인중개사들”이라며 “미리 쌓아둔 친분으로 아파트를 시세보다 2000만원은 싸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바닥부터 정보를 훑는 게 봉씨의 숨은 경쟁력이었다.

봉씨는 1985년 400만원짜리 월세 단칸방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것도 동생 둘과 할머니를 모시고 말이다.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설사에 취직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1988년 월급을 저축해 모은 1350만원으로 서울 시흥동의 16평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하려다 50만원이 모자라 다음 기회를 노렸다. 대신 1350만원을 종자돈으로 삼아 주식투자에 나섰다. 주가 폭락으로 2개월 만에 손에 쥔 돈은 550만원으로 줄었다. 봉씨가 사려던 아파트는 그 후 수직 상승해 4년 만에 5500만원이 됐다.

내집 마련에 실패한 봉씨는 ‘도대체 아파트가 뭐기에’라는 생각에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전세를 전전하며 전셋값을 올려주다 보니 ‘월급을 절반씩 저축해서 20년을 모아도 33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사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부동산 관련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봉씨는 1993년 4월 전셋집의 방 하나를 비워 1인 기업인 ‘닥터봉 부동산 연구소’를 차렸다. 집 근처 대학 도서관에 오전 6시 출근, 오후 11시 퇴근하는 생활을 하면서 부동산 관련 법 공부를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부동산 관련 서적, 카탈로그, 자료 등이 쌓여갔다.

봉씨가 돈을 버는 방법으로 세운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어느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 자신의 쓰임새를 보여준다. 둘째, 남이 신경 쓰지 않는 일, 생각하지 않는 일을 찾아서 한다.

그렇게 찾아낸 분야가 재개발·재건축 조합에 대한 컨설팅이었다. 건설사에서 일한 경험도 살릴 수 있었다. 봉씨는 “당시는 조합이 정보를 많이 가진 시공사(건설사)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분위기였다”며 “조합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단번에 상한가를 쳤다”고 말했다. 80여개 조합을 컨설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웬만한 신규 아파트 단지의 장·단점을 훤히 알게 됐다.

봉씨는 차츰 조합 컨설팅뿐 아니라 조합원 컨설팅도 하게 됐고 결국 입소문이 나자 부자들이 개인 컨설팅을 해달라고 줄을 서게 됐다. 컨설팅을 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돈을 벌 기회도 생겼다. 1995년엔 한 조합 아파트의 단지 상가를 통째로 사서 쪼개 파는 프로젝트가 맡겨졌다. 30억원에 매입해서 25개 상권으로 쪼개 파는 데 성공하면 60억원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홍보비 6억원을 계산하면 60%만 분양에 성공해도 본전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종자돈은 3억원밖에 없었다.

봉씨는 당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데이타베이스(DB) 마케팅을 실험하게 된다. 우선 3억원을 계약금으로 해서 3개월 후에 잔금 27억원을 주기로 계약한 후에 컨설팅을 하며 알게 된 사람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봉씨는 수첩에 적힌 DB를 이용해 별다른 홍보비를 쓰지 않고도 한 달 반 만에 100% 분양에 성공했다.

봉씨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집이 투자 대상으로 바뀌는 흐름에 주목하고 어떤 아파트 가격이 오르는지 연구해왔다. 봉씨는 “우연과 시류에 휩쓸려 오르는 게 아니라 질서와 원리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말했다. 예컨대 1000세대 이상의 대단지, 평지에 세워진 아파트 등이 오른다는 것이다. 봉씨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모든 아파트의 가격이 올랐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위치가 좋고 집의 상태가 좋은 우량 주택의 값이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즉 아무 데다 묻어두면 오르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1999년 봉씨는 전환기를 맡게 됐다. DB 마케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닥스클럽’이라는 결혼정보회사를 차렸다. 봉씨는 “현재 100만명의 DB를 확보해 중매, 구직, 헤드헌팅 등에 활용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회원들에게 좋은 부동산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대신 봉씨는 조합 컨설팅에서 강연과 칼럼 쓰기로 주무대를 옮겼다. 2004년부터는 강연에 미국식의 부동산 쇼(show) 개념을 도입했다.

봉씨의 부동산 쇼는 3시간 동안 진행되는데 딱딱한 강연만 하는 게 아니라 음악감상 시간을 갖거나 한국의 아파트 변화사(史) 등에 관한 동영상을 상영하기도 하면서 오락적 요소를 가미했다. 봉씨의 부동산 쇼는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진행된다. 초기엔 1000명을 모으는 데 2개월이 걸렸지만 최근엔 1주일이면 예약이 전부 찬다.

봉씨는 그 사이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거쳐 시가 30억원대의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 50평대에 입성했다. 보증금 400만원짜리 월세 단칸방에서 살던 직장인이 20년 만에 30억원대 이상의 재산가가 된 것이다.

봉씨는 작년 7월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월세 단칸방에서 삼성동 아이파크로’라는 책을 펴냈다. 봉씨의 글은 상당히 쉽게 읽힌다. 봉씨는 “대학 때 꿈이 작가로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봉씨는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돈 많은 사람보다는 봉급 생활자, 영세 사업자 등 돈을 굴리는 데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라며 “이들에게 쉬운 정보를 주기 위해서 인터넷에 무료 칼럼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또 향후 자산운용사를 인수하거나 제휴해서 ‘봉준호’ 또는 ‘닥터봉’이라는 브랜드를 내세운 부동산 펀드를 출시할 예정이다. 자신의 현장 경험과 이론을 살려 누구의 돈이라도 불려주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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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끝에 있는 느낌이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철창에 갇힌 느낌이다.

찰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골짜기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늪속에 빠져있다.

발목 정도일 뿐이다.   지금 당장 살짝만 힘을 준다면,  한발만 들어도  빠져 나올수있는  거리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빠져 나올 수 없으니 어서 발을 들어야한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야 !  편한길로 가자...   빠져나와 !   비겁한 것이 아니야...

다른 누구라도 이해 해줄거야...   사고가 난 지역이 아니냐...  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변명을 하여도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하든지, 회사에서 책임을 질 것이 아니냐...

야 !  편한 길로가자  빠져나와 .   비겁한게 아니야...

 

선택!

편한 길과 가시밭길..    도전이냐 ?   아니면 다음 기회를 노리느냐 ?

아니면 현명한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뒷짐지고 휘파람을 부는 길이냐 ?

내 자신속에서  살벌하게 싸우고있다.

기회는 위기 라는 포장을 하고 나타 난다고 믿고 있었다. 

내 자신에게 항상 준비된 사람이 되자.  기회가 언제든 온다면 독수리처럼 채갈 수있는 실력을 항상  준비해두자.    깊이 생각하고 , 냉정하게 판단하고, 판단한 결심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실천이라는 행동으로 세상에  비상하라...

내안의 그  준비한 한 자루의 갈고 닦은 그 소중한 날카로운 울고 있는 칼을 꺼내야 하느냐?

아니면 또한번 준비 라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잠재워야 하느냐?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속에서 나는 깊이 또 깊이 생각하여 보았다.

 

" 아침까지 시간을 주십시오.    결정을 내릴 수있는 시간은 아침 까지면 됩니다. "

 

 

말들이 많았다.    많은 사수들과  여러 부사수 들까지...

너 맡으면 골치 아프다.  아무나 사수 하는것도 아닌데, 이것은 무모하다.  너 피박쓴다.

고참사수가 맡아도 못할 일이다.  그냥 못한다고 해라.  욕좀 먹고 말지...

그많은 사고금액 중 잘못하면 너한테 조금 이라도 전가되거나, 인수인계도 안한 곳인데

여러 불똥이 많이 튈 것이다...  무모한 도전이야...

맡으면  미친놈 이다 ! 할게 따로있지 그런걸 뭐하러 하냐?

죽으려면 해라.     지뢰밭이다  언제어떻게 터질지모른다...

나도 그런것 같았다.  이것은 결코 무모한 도전이고 결과가 나와있는 싸움 같았다...

 

 

 

 

제일 중요한 내 자신에게 또 한번  솔직하게 물어본다.

너   갈고 닦은게 있다면서..?      한자루의 칼을 무섭도록 갈고 닦았다 면서....

비겁하게  내 자신을 합리화 시켜 피할래,  아니면 갈았다는그 칼로  무우라도 자를래...

아니면 무우 아니라 칼날이 부러지고 깨지고 휘어져도  바위며 나무며 쇠라 할지라도  죽기살기로  휘두르고, 휘둘러 휘회없이  살아볼래.

피하면 내 자신에게 죽는 것이다.

내 자신에게 죽는놈이 세상 무엇을 할 수있다는 말인가?  내 안의 모든 것을 걸고 한판 싸울 수 있는 상대같지가 않느냐...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꼭 이루어진다.

간절함과 절실함을  정열이라는  불꽃으로 한번 불살라 보자.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라는 것이 올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이제는 그 어떤 것에도 피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한번 부딛치고 , 엉켜서 싸워보자.  죽지는 않을 것 아니냐...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니  선택할 수있는 것은 내 자유이지만, 나는 험한 가시밭길을 택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도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검투사 이다 ! 

지면 죽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을 하는 검투사일 뿐이다.

나를 내 몰고 가자...   약한 정신과  마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기에 마음부터 다시 한번  진하게  검투사로 몰고 나가자...

 

이렇게 나는  밤을 거의 꼬박 새운 나의 결정에 후회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자신이  결정한 것에는 후회는 결코 없다.    쉽게 얻고 싶지도 않다.

댓가를 분명히 치루어 내겠다...      그리고 그 댓가를 위하여 나는 희생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솔직하고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그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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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도 살아서 숨쉬는 글과 죽어서 쓰러져 있는 글이 있다.

살아있는 글이란 내가 옆사람과 대화하듯이 말하는 글이다.말과 같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글이다.

남을 의식하지않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을 상식과 기본적인 생각에서 말하되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남이 만족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간혹 악플이 달리는 것도 감내하여야 한다.

악플로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저 나에게 관심이 많거니 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다들 개성과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그저 그러려니 하다 보면 인내의 마음도 생길 것이다.

왜려 악플을 다는 사람이 내 최고의 관심자임으로 애독자라고 생각하자.

 

 

좋은 글은 쓰고 또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와 같이 가는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일단 오늘 써보고 내일도 쓰는 것이다...

 

 

2008년 1월 8일 밤11시30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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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늘           -안정효-
 

내가 이 작가에게 빠지긴 빠졌나 보다.

 

10.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안정효-

 

 

11. 하얀전쟁 2                         -안정효-

 

 

1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먼 옛날에 읽었던 책이지만 잃어버려서 또 한권을 주문하게 되었다.

솔직히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대목이 멋지지 않은가?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13.축제                  -이청준-

 

영화로도 나왔지만 나는 이청준 작가의 책인 줄 몰랐다.

장례를 축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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