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자』에 보면 네 종류의 성인이 나와요. 성지청(聖之淸), 성지화(聖之和), 성지임(聖之任), 성지시(聖之時). 성지청은 깨끗한 지조를 중시한 성인, 성지화는 어울림을 중시한 성인, 성지임은 책임감을 중시한 성인, 성지시는 진퇴의 상황을 중시한 성인이에요. 맹자는 이 중에서 성지시를 가장 높은 경지로 보고, 그 대상으로 공자를 들고 있지요.
맹자의 이 성인 분류는 일반인들의 삶의 방식을 분류하는 기준으로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깨끗한 처신을 우선시하는 삶, 남과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삶, 책임과 의무를 우선시하는 삶, 상황에 맞는 처신을 우선시하는 삶의 방식으로 말이지요.
선초, 세조의 부당한 권력 찬탈에 비분강개하여 세상을 등진 이들 중에 생육신이 있지요. 아마도 이들은 성지청에 해당하는 삶의 방식을 택했던 사람들일 거예요. 불의한 정권과는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지조를 우선시했으니까요.
생육신 중에 널리 알려진 이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죠. 사진은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詩碑)예요.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에 있어요. 무량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생애 마지막에 머물렀던 장소예요. 세조의 부당한 권력 찬탈이후 반유반승(半儒半僧)의 생활을 하며 전국을 떠돌았던 김시습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엘리트였지요. 그러나 부당한 정권에 아유하지 않겠다는 지조를 우선시했기에 평생을 방외인으로 살았죠. 한 때는 세조의 묘법법화경 언해 사업에 참여한 적도 있고 환속하여 가정을 꾸린 적도 있지만, 그것은 잠깐의 외도였을 뿐, 결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저버리지 않았죠.
매월당 김시습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서있는 나무에 시를 새겨 놓고 한동안 읊고 난 뒤 통곡을 한 후 깎아 버리거나 종이에 써서 한참 바라보다가 물에 던져 버리곤 했다 해요. 쓰고 싶지 않지만, 넘쳐나는 시상을 주체할 길 없어, 어쩔 수 없이 썼다가 뒤늦은 후회로 내버렸던 것 아니었나 싶어요. '왜 내게 부질없이 문재(文才)가 넘쳐나서 시를 쏟아냈단 말인가!' 이런 후회의 행동이었겠지요. 일종의 자학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예요. 문장보국(文章報國)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능력이 있지만 불의한 시대와 타협할 수 없기에 그 재주를 사장시켜야만 했으니 말이에요.
사진의 시를 한 번 읽어 볼까요?
半輪新月上林梢 반륜신월상림초 새로 돋은 반달이 나무가지 위에 뜨니
山寺昏鍾第一高 산사혼종제일고 산사의 저녁 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淸影漸移風露下 청영점이풍로하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 이슬에 젖는데
一庭凉氣透窓凹 일정야기투창요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반달, 나무 가지, 산사, 저녁 종, 달 그림자, 찬 이슬, 서늘한 기운, 모두가 외지고 한적한 상황을 나타내는 시어들이에요. 그리고 이런 외지고 한적한 상황들을 나타내는 시어들은 '창 틈'이라는 마지막 시어로 모아지고 있어요. 창 틈은 물리적 공간일수도 있지만 시인의 내면일수도 있어요. 흔히 마음을 '창'에 비유하니까요. 이렇게 보면 이 시는 늦가을 - 3, 4구의 내용으로 보건데 절기는 늦가을이지 않나 싶어요 - 고즈넉한 산사의 밤 풍경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더없이 서늘한 시인의 내면 풍경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어요. 불의의 시대에 아유하지 않고 깨끗한 지조를 지켰던 매월당다운 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시비는 정한모씨가 번역하고 - 국문학자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분이죠. 부여 출신이고요. 그래서 이 분이 번역을 담당하지 않았나 싶어요 - 저명한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시비의 글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시의 내용과 글씨가 어울리지 않거든요. 매월당의 시는 담박 청아하기에 경쾌한 행서체로 써야 어울리는데, 이 글씨는 전아 장중한 내용에 어울리는 중후한 예서체로 썼거든요. 글씨란 모름지기 내용과 어룰려야 제 빛을 발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는 이 시비의 글씨는 실패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글씨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할지 몰라도요.
한시에 나온 한자 중에서 낯선 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할까요?
輪는 車(수레 거)와 兪(마상이 유, 통나무 배)의 합자예요. 재화를 실어 나른다는 의미예요. 車로 뜻을 표현했어요. 兪는 음을 담당하면서(유→수)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배에 사람을 실어 나르듯 재화를 실어 다른 곳으로 나른다는 의미로요. 실어보낼 수. 輸수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輸出(수출), 空輸(공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梢는 木(나무 목)과 肖(닮을 초)의 합자예요. 나무가지 끝이란 의미예요. 木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肖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나무가지 끝은 본 나무가지와 다르지 않고 닮았다란 의미로요. 梢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末梢(말초), 梢梢(초초, 나무 끝이 바람에 움직이는 소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昏은 氏(氐의 약자, 근본 저)와 日(날 일)의 합자예요. 氏는 식물의 뿌리가 땅 밑으로 깊숙히 들어간 모양을 그린 거예요. 그렇듯 해가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는 뜻이에요. 날이 저물었다는 의미지요. 저물(어두울) 혼. 昏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黃昏(황혼), 昏愚(혼우, 매우 어리석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鼓는 북을 그린 거예요. 士는 북의 장식물, 口는 북, ㅛ는 북 받침대, 支는 손에 북채를 든 모습을 그린 거예요. 북 고. 鼓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鼓動(고동), 鼓吹(고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漸은 氵(물 수)와 斬(벨 참)의 합자예요. 물 이름이에요. 지금의 안휘성 이현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물을 가리켜요. 氵로 뜻을 표현했고, 斬은 음을 담당해요(참→점). 물이름 점. '차차(조금씩)'라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에요. 점수는 천천히 흐른다는 의미로요. 차차 점. 漸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漸進(점진), 漸層(점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凉은 冫(氵의 약자, 물 수)와 京(높을 경)의 합자예요. 서늘하다란 의미예요. 날이 서늘하면 물이 차갑기에 冫로 뜻을 표현했어요. 京은 음을 담당하면서(경→량)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높은 곳은 낮은 곳에 비해 기온이 낮아 서늘하다란 의미로요. 서늘할 량. 凉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納凉(납량), 凉扇(양선, 부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透는 辶(걸을 착)과 秀(빼어날 수)의 합자예요. 뛰어 오르다란 의미예요. 辶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秀는 음을 담당하면서(수→투)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보통보다 우월한 것이 빼어난 것이듯 뛰어 오르는 것은 일반적인 걸음걸이보다 빼어난 것이란 의미로요. 통하다(꿰뚫다)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통할 투. 透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透過(투과), 透明(투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凹은 아래로 움푹 패인 물건을 그린 거에요. 오목할 요. 凹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凹凸(요철), 凹處(요처, 오목하게 들어간 곳)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김시습의 시를 대하니 절로 우리 시대의 김시습은 누구일까 생각하게 돼요. 누구일까요?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김시습이 적을수록 행복한 시대요, 많을수록 불행한 시대라는 거요. 우리 시대는 행복한 시대일까요, 불행한 시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