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있게 먹고 갑니다! ㅇㅇㅇ"
이따금 음식점에서 유명인의 싸인을 보게 될 때가 있어요. 워낙 가짜가 판을 치는지라 "진짜 그 사람의 싸인이 맞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대체로는 "아, 이 음식점 괜찮은 음식점인가 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돼요. 유명인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단지 그의 필적만 본 것인데도 그것이 붙은 집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후광 효과가 크긴 큰가 봐요.
이따금 이와 유사한 경험을 유적지에서도 하게 돼요. 얼마 전 장성의 백양사를 찾았다가 쌍계루에 올랐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옛 분들의 시가 여러 개 걸려 있더군요. 시의 내용은 차치하고 우선 그 분들의 이름을 대하니 쌍계루가 남다르게 느껴지더군요. 왠지 쌍계루 주변의 풍광이 더 멋있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이 역시 후광 효과겠죠?
사진은 쌍계루에 걸려 있는 옛 분들의 시 중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시와 하서 김인후 선생의 시를 찍은 거예요. 고려 말과 조선 중기를 살았던 두 분은 쌍계루에서 무엇을 느끼셨을까요?
求詩今見白巖僧 구시금견백암승 백암사 스님 시를 구하나
把筆沈吟愧不能 파필침음괴불능 붓 잡고 쩔쩔매니 부끄럽기 가없네
淸叟起樓名始重 청수기루명시중 청수 스님 중창하며 이름나기 시작했고
牧翁作記價還增 목옹작기가환증 목옹 기문 덧보태어 더더욱 이름났지
煙光縹緲暮山紫 연광표묘모산자 노을 지니 저물 녘 산 자색으로 젖어들고
月影徘徊秋水澄 월영배회추수징 달 그림자 배회 속에 가을 물이 맑아라
久向人間煩熱惱 구향인간번열뇌 오랫동안 세속 번뇌 시달렸거니
拂衣何日共君登 불의하일공군등 언제나 다 잊고 함께 오를 것인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시예요. 제목은 '쌍계루에 부치다[寄題雙溪樓]'예요. 백양사 스님의 요청을 받고 시를 짓게 됐다고 운을 뗐어요. 스님의 요청은 무엇이었을까요? 쌍계루를 돋보이게 해달라는 것 아닐까요? 그러자면 쌍계루의 두드러진 내력과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야 겠지요. 선생은 그 요청을 기꺼이 수용했어요. 청수 스님의 중창과 대문호 이색의 기문을 받은 일로 쌍계루의 두드러진 이력을 드러내고 여기에 몽환적이고 탈속적인 풍경을 덧붙였지요.
마지막 결구는 쌍계루에서 느끼는 선생의 마음을 담았는데, 범상치 않아요. 얼핏보면 상투적인 글귀처럼 보이지만 선생이 현실 정치에 몸담았던 인물이란 것을 생각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내용이에요. 복잡다단한 현실에 눈을 감고 싶지만 눈을 감아서는 안되는 지성인의 자의식이 강하게 느껴져요. 선생은 쌍계루의 아름다운 풍광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어요.
조선 중기를 살았던 하서 김인후 선생은 어떤 느낌으로 쌍계루를 찾았을까요?
樓頭識面兩三僧 누두식면양삼승 누각에 오르니 낯 익은 두 세 스님
持守前規喜爾能 지수전규희이능 전대의 전통을 아름답게 잇고 있다네
絶澗言因淸叟懇 절간언인청수간 청수 스님 부탁을 절간공이 전하여 목옹 기문 얻었고
烏川句爲牧翁增 오천구위목옹증 오천공의 시를 얻어 목옹 기문에 덧붙였네
曾聞寫記菴爲幻 증문사기암위환 듣자니 기문 적은 이 아호가 환이라는데
今見隨行號偶澄 금견수행호우징 살펴보니 따른 이는 아호가 징이었네
扶病懶經頑石路 부병나경완석로 지병이라 돌길을 천천히 거니는데
春風不負少年登 춘풍불부소년등 춘풍은 소싯적과 다름 없어라
시 제목은 '삼가 포은 선생의 쌍계루 시에 차운하다[雙溪樓敬次圃隱韻]'예요. 동일한 운을 밟으면서 선생은 어떤 느낌을 노래했을까요? 낯익은 스님을 만나는 것으로 운을 뗐어요. 그런데 이 시 역시 쌍계루를 돋보이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쌍계루에 얽힌 독특한 내력을 그리고 있어요. 포은 선생의 시와 다른 점은 풍경 묘사가 빠졌다는 점이에요. 이미 포은 선생이 풍경을 핍진하게 그렸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고 여기지 않았나 싶어요. 대신 독특한 내력을 드러내는데 중점을 뒀지요. 쌍계루의 독특한 내력은 시문과 관계된 이들의 아호에 '물[水]'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에요. 목옹[이색]에게 기문을 요청했던 절간(絶澗), 그리고 스님의 요청으로 시를 지은 오천(烏川, 정몽주를 지칭. 오천은 정몽주의 출신지), 현암에게 쌍계루기 글씨를 부탁한 징공(澄公, 청수 스님)의 아호에는 공통으로 '물'이 들어가 있어요. 이런 우연의 일치는 쉽지 않기에 의미를 부여할만 한 가치가 있지요. 선생은 이런 사실을 통해 쌍계루의 남다른 점을 드러냈어요.
마지막 결구는 쌍계루를 찾은 소회를 그렸는데, 포은 선생의 결구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에요. 처사의 여유로운 마음이 느껴져요. 병든 몸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소싯적 느꼈던 온화한 봄바람을 다시 느낀다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거든요. 현실 정치에서 한 발 비껴섰던 선생인지라 포은 선생과는 다른 느낌으로 쌍계루를 대했던 것 같아요. 쌍계루의 풍광을 노래하진 않았지만 선생은 이미 풍광의 일부분이 돼있어요.
동일한 대상과 동일한 운으로 시를 지었지만 처한 시대가 다르고 선택한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시의 풍모도 확실히 달라요. 이 시대 어느 유명한 문인이 이 쌍계루에서 시를 짓는다면 그는 어떤 풍모의 시를 지을지 궁금해지네요.
※ 하서 김인후 선생의 시는 해석이 어렵더군요. 인터넷을 참고해도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많아 결국 자의적으로 해석을 했어요. 혹 눈 밝은 분께서 시의 해석을 보고 이상하다고 지적하면, 위에서 이야기했던 김인후 선생 관련 내용은 모두 구라가 돼요. ㅠㅠ 자신없는 글을 게재해셔 죄송해요. ㅠㅠ
낯선 한자를 몇 자 좀 자세히 알아 볼까요?
縹는 糸(실 사)와 票(漂의 약자, 떠다닐 표)의 합자예요. 공중으로 튀어 이리저리 날리는 불똥의 색깔과 흡사한 옷감의 색깔이란 의미예요. 본뜻의 일부를 취해 휘날리다란 뜻으로도 사용해요. 옥색 표. 휘날릴 표. 縹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縹瓦(표와, 옥색의 기와), 縹縹(표표, 휘날리는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緲는 糸(실 사)와 眇(작을 묘)의 합자예요. 지극히 작다란 의미예요. 일상의 물건 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작은 물체가 실이기에 糸로 뜻을 표현했어요. 眇는 음을 담당하면서 그 자체의 의미로 본뜻을 보충하고 있어요. 작을 묘. 아득하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지극히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을 지극히 작아 대상을 파악하기 힘든 것과 유사하게 본 것이지요. 아득할 묘. 緲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緲然(묘연, 지극히 작은 모양), 緲緲(묘묘, 한없이 넓은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緲는 渺와 통용해요.
紫는 糸(실 사)와 此(이 차)의 합자예요. 옷감의 색깔이 자줏빛이란 의미예요. 糸로 의미를 나타냈고 此는 음을 담당해요(차→자). 자줏빛 자. 紫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紫霞(자하, 자줏빛의 구름 기운. 신선이 사는 곳에 떠돈다는 구름 기운), 紫氣(자기, 자줏빛의 상서로운 기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拂은 扌(손 수)와 弗의 합자예요. 부정한 것을 털어 제거한다는 의미예요. 扌로 뜻을 표현했어요. 弗은 음을 담당하면서[불]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이 글자는 본래 구부러진 화살을 펴는 교정 장치를 의미하는 글자인데, 이 교정 장치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 주고 있어요. 교정 장치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인데, 그렇듯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바르게 한다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털 불. 떨칠 불. 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拂拭(불식), 拂去(불거, 털어 버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圃는 口(에워쌀 위)와 甫(씨 보, 남자의 미칭)의 합자예요. 남자의 미칭(美稱)처럼 맛있고 색깔 좋은 채소가 자라는 밭[口, 밭의 테두리를 의미]이란 의미예요. 채마밭 포. 圃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圃翁(포옹, 밭농사 짓는 노인), 圃囿(포유, 채마밭 혹은 궁중의 동산이란 뜻)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懇은 心(마음 심)과 貇(돼지 간)의 합자예요. 돼지가 먹이를 밝히며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잡념없이 한 가지 일에 전념한다는 의미예요. 정성 간. 간절할 간. 懇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懇切(간절), 懇願(간원, 간절히 원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澄은 氵(물 수)와 登(오를 등)의 합자예요. 물이 고요하고 맑다란 의미예요. 氵로 뜻을 표현했지요. 登은 음을 담당하면서(등→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흐린 물이 정화되면 맑고 깨끗한 물은 위로 올라오고 탁한 이물질은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의미로요. 맑을 징. 澄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澄淸(징청, 맑고 깨끗함), 澄高(징고, 맑고 높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懶는 忄(마음 심)과 賴(힘입을 뢰)의 합자예요. 남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마음이란 뜻이에요. 나약할 라. 나약한 사람은 대개 게으르기 쉽다는 의미로도 쓰여요. 게으를 라. 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懶怠(나태), 懶性(나성, 게으른 성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頑은 頁(머리 혈)과 元(으뜸 원)의 합자예요. 머리가 둔하다는 의미예요. 元은 음을 담당해요(운→완). 무딜 완. 완고할 완. 頑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頑强(완강), 頑固(완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縹 옥색 표 緲 아득할 묘 紫 자줏빛 자 拂 떨칠 불 圃 채마밭 포 懇 간절할 간
澄 맑을 징 懶 게으를 라 頑 완고할 완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怠 ( )切 ( )固 ( )拭 ( )縹 ( )淸 ( )霞 ( )囿 ( )然
3. 다음을 읽고 풀이해 보시오.
煙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