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이곳은 어디일까요?

 

  ① 놀이방  ② 노래방  ③ 찜질방  ④ 피씨방  ⑤ 정답없음

 

  사진의 한자는 "충청남도 미소방"이라고 읽어요. 충청남도는 설명드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미소방만 설명드리면 되겠네요. 美는 아름다울미, 小는 작을소, 房은 방방, 美小房은 "아름다운 작은 방"이란 뜻이에요. 중의적 의미로 小를 笑(웃을소)로 풀이하여 "미소짓게 하는 방"이란 의미로도 사용하죠. 무슨 의미일까요?

 

네, 짐작하신대로(?) "화장실"의 별칭이에요. 충청남도에서 깨끗하고 위생적인 공공화장실에 부여하는 특별한 명칭이에요. 이 명칭을 부여받은 공공화장실에서는 편안하고 즐겁게 볼 일을 볼 수 있지요.

 

房이 좀 낯설어 뵈는군요. 자세히 알아 볼까요?

 

은 戶(집호)와 方(모방)의 합자예요. 戶는 집이란 의미를 나타내고 方은 배가 나란히 있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에요. 본채의 좌우에 있는 곁채란 뜻이에요. '방'이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에요. 방은 집에 있는 것이니까요. 房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福德房(복덕방), 山房(산방)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오늘은 정리 문제를 아니내도 될 것 같군요. 대신에 윤오영 선생의 "측상락(厠上樂, 화장실에서의 행복)"을 읽어 보도록 하시죠. 미소방에서라면 더없는 측상락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안정이 그립다. 하도 숨가쁜 세상인 흰구름 뭉게뭉게 일어나는 깊은 산, 고요한 절에서 목탁을 울리며 사는 승려의 생활도 이 세상에서는 벌써 신화가 되고 말았다. 강낭콩같이 푸르고 맑은 호숫가에 일간죽(一竿竹)을 드리우고 고기와 벗을 삼아 짙어가는 저녁노을에 물들어보는 것도 태고의 꿈인 양싶다. 구태라 생생한 현실을 등지고 도피의 생활을 추구하랴마는 진실로 너무나 몸둘 곳이 없이 숨가쁘기 때문이다.

제집 대문간을 나설 때도 무슨 불안이 문밖에 기다리고 서 있는것만 같고 제집 문간에 다 와서도 안에서 무슨 괴상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만 같다. 이 초조한 심경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제집 방구석이라고 그리 안락한 자유성(自由城)은 아니다. 소란과 추악과 야비의 속취(俗臭)는 구석구석 스미어들고 무미와 건조와 침울과 공포는 염통에 쉬파리떼처럼 들어붙는다.

<이유없는 반항>이란 10대 소년의 행태를 그린 영화의 제목이라거니와 '이유없는 초조'는 노경에 가까워가도 면할 수 없는 현대인의 생태라고나 할까, 백팔번뇌에 시달리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라고 초연히 비웃는 석가모니는 대체 이 세상에 누구냐? 그러나 나에게는 한 복지(福地)가 남아 있다. 변소에 문을 닫고 용변하는 시간만은 완전히 이 세상과 절연된 특권을 향유한다. 겨우 두 다리를 오그리고 앉을 수 있는 좁은 우주. 그러나 자유가 확보되어 있는 우주요, 나에게만 주권이 부여되어 있는 왕국이다. 이 우주 안에 들어있는 동안만은 완전히 치외법권에 속하는 지역으로 할애받고 있다. 그 시간만은 아무도 내 절대권을 침해하려 들지 않는다.

영원히 연결되어 있는 시간선상에서도 나에게만 완전히 포기해준 은총의 시간이다. 큰기침을 하건 가래침을 뱉건 바지춤을 끄르고 하반부의 둔육(臀肉)을 노출하건, 수륙병진(水陸竝進)으로 배출을 하건, 악취를 마음대로 분산시키건, 아무 시비도 체면도 없다. 법률이야 물론이지만 도덕도, 예의도, 인습도, 전통도, 아무것도 ─ 모든 사회적인 간섭, 인간적인 관련에서 오는 시비훼예(是非毁譽)도 없다.

나는 굳이 내 결백을 수식할 필요도, 내 단정한 품격을 조작할 필요도, 시간에 분망(奔忙)할 필요도 없다. 우선 조여매었던 혁대를 끄르고 켜켜로 입었던 바지며 내의, 속내의에서부터 하반부의 둔육을 해방시키고 양족(兩足)을 고여 전신을 편안히 내려앉히면 위로 충만했던 모든 들뜬 기운이 가라앉으며 평온한 희황시대(羲皇時代)로 돌아온다. 향기롭지 못한 냄새도 어느덧 잊어버리고 만다. 마치 이 세상에 오래살아 이 세상 냄새를 모르고 배기듯이. 아무도 이 문을 열 사람은 없다. 아무 일도, 내 스스로가 나가기 전에는 부를 리도 없다. 찾을 리도 없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은 나의 이 작업으로 말미암아 권위있게 스톱당하고 만다. 지구조차 이 속에서는 돌지 않는다. 외계에서 수소탄이 터지든 태양이 물구나무를 서든 나는 결코 개의하지 아니해도 좋다. 내가 이 작업을 하고 있는 한, 이런 무관심과 태만에 대해서도 아무도 문책하는 사람은 없다. 잠시 가쁜 숨을 그치고 유유자적한 세계에서 기상천외의 꿈속을 헤매며 오유(遨遊)하는 것도 나의 자유일 것이다. 이 지상에서 자유 해탈의 시간은 이 시간뿐이고 소부(巢父) · 허유(許由)가 놀던 기산(箕山) · 영수(穎水)는 남아 있는 곳이 이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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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열린책들' 서가라고 하기엔... 많이 부끄럽네요. 빈 공간에 집 나간 책이 다시 돌아오면 그나마 좀 나으련만...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썼다> · <푸코의 추> · <전날의 섬> · <죄와 벌> ·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아, 어디가서 소식이 없는거니? 흑흑흑.

 

<장미의 이름>은 제가 산 것이고, 여타의 책들은 딸 아이가 산 것이에요. <장미의 이름> 뒷면을 보니 93년 9월 22일(화)에 산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산 것 이에요. 딸 아이의 책과 나란히 놓고 보니 뭔가 유대감이 느껴지네요. 딸 아이는 베르베르의 작품을 무척 좋아했어요. 아이가 프랑스로 유학을 간데는 베르베르의 영향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솔아, 그렇지 않니?

 

* 이 페이퍼는 존경하는 블로거 Cyrus님의 조언 덕분에 작성하게 됐어요. Cyrus님, 덕분에 재미있는(?) 페이퍼 작성했네요. 고마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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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1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찔레꽃님. 감사의 말 대신에 “열린책들 이벤트에 참여하게 될 cyrus님을 뽑아주세요!”라고 쓰셔야죠. ㅎㅎㅎㅎ

찔레꽃 2016-02-1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이 얕은 센스를 용서하시옵소서! ^ ^
 

 "얘, 그건 네가 읽을만한 책이 아니야!"

 "누나 수준으로 나를 생각하지마!"

 

 80년대 초 서울 종로 서적. 김은국씨의 소설 '순교자' 영문판인 'The martyred'를 사달라고 하자 누나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어요. 당시 누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저는 중학생이었지요. 그러나 저도 지지 않고 한 마디 했지요. 결국 누나는 그 책을 사줬어요.

 

그러나 누나의 말이 맞았어요. 그 때 산 책을 완독한 것은 10년이 지나서였으니까요. 누님한테 언젠가 이 이야기를 하니, 웃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하시더군요.

 

사진의 한자는 '정초'라고 읽어요. 정할정, 주춧돌초. 주춧돌을 놓다란 의미지요. 건물을 완공한 후 첫 삽 뜬 날을 기념하여 세우는 표지석이에요. 이 사진의 건물은 15년 전에 첫 삽을 떴군요. 어느 분야인들 기초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만, 건축은 유달리 기초를 중시하죠. 기초가 없으면 건물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막연한 사견입니다. 죄송).

 

어느 분야인들 기초가 중요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어학도 그 중의 한 분야가 아닌가 싶어요. 제 경우 이런 기초를 무시하고 갑자기 엽등(躐等)하려 해서 문제가 생겼던 것 같아요. 중학생 수준에 맞는 원서를 꾸준히 읽었더라면 적어도 10년은 걸리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당시 누님이 속으로 얼마나 저를 가당치 않게 생각했을까요? 하하하.

 

한자를 좀 자세히 알아 볼까요?

 

은 宀(집면)과 正(바를정)의 합자예요. 집을 바르게 지어 붕괴의 염려가 없기에 편안하다란 의미예요. 안정되다란 의미지요. '정하다'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에요. 안정되려면 사태가 결정되야 한다는 의미로요. 定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確定(확정), 定石(정석)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石(돌석)과 楚(아플초, 보통은 나라이름초로 사용하죠)의 합자예요. 기둥 떠받치는 고통을 감내하는 돌이란 의미에요. 이런 돌을 '주춧돌'이라고 부르죠. 礎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礎石(초석), 基礎(기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보실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정할정   주춧돌초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   (   )

 

3. 기초 부실로 겪었던 힘든 경험이 있으면 소개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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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근본은 어쩔 수 없구만!"

"아무렴, 어찌 내 근본을 저버릴 수 있겠나!"

 

수만은 그간 잊고 지내던 서월을 찾았다. 당골이란 신분이 싫어 고향을 떠난 서월이었다. 수만은 그가 모처에서 큰 음식점을 열고 성업중이란 풍문을 들었다. 모처럼만에 휴가를 내어 그가 운영한다는 음식점을 찾았다. 음식점은 생각보다 꽤 큰 규모였다. 그런데 음식점의 간판이 특이했다. 眞松圣, 참진 · 소나무송 · 성인성, 진송성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한자 밑의 한글은 진송성이 아니라 '진송골'이라 적혀 있었다. 왜 圣을 '성'이라 쓰지 않고 '골'이라 쓴 것 일까? 수만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수만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골은 당골의 준말이었다. 당골은 세습 무당으로, 한자로는 巫(무당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圣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圣에는 신과 교통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월은 당골에 해당하는 한자로 圣을 쓰고 그 글자 밑에 한글로 당골의 '골'을 표기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간판에 드러냈던 것이다.

 

사진의 한자는 진송성이라고 읽어요. 음식점 간판이에요. 眞은 참진, 松은 소나무송, 圣은 성인성이에요. 圣은 聖의 약자지요. 그런데 밑의 한글을 보면 圣을 '성'으로 표기하지 않고 '골'로 표기하고 있어요. 이상해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골'로 읽는 한자중에 圣이란 한자는 없더군요. 혹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한국 한자인가 싶어 자료를 찾아 봤더니 골로 읽는 한국 한자 중에 圣이란 글자는 없더군요. 그런데 왜 圣을 한글로 뚜렷하게 '골'이라고 적어놓은 것일까요?

 

한동안 생각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여기 골은 당골의 골이란 의미이고 이것에 해당하는 한자로 圣을 택한 것 같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왜 음식점의 간판을 이렇게 지은 것일까요?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더니 바쁘다며 전화를 끊더군요. 해서 제 나름의 상상으로 썰을 풀어 봤어요. 언제 시간이 나면 직접 음식점을 방문해서 연유를 물어볼 생각이에요. 圣을 당골의 의미로 풀이한다면 위 음식점의 숨겨진 의미는 '진짜 무당집'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소나무에는 변치 않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眞이나 松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죠).

 

오늘은 圣의 원글자인 聖을 좀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죠.

 

은 耳(귀이)와 呈(逞의 약자, 왕성할령)의 합자에요. 소리를 들으면 실정을 훤히 아는 뭇 사람 중에서 우뚝 솟은 존재란 의미예요. 聖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聖人(성인), 神聖(신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오늘은 정리 문제를 아니내도 될 것 같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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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나!"

 

일제치하에서 친일행위를 했던 기업인이 김구 선생에게 정치자금을 들고 찾아왔어요. 해방 후 임정에서 귀국했던 무렵이죠. 선생은 들어볼 것 없이 거절했죠. 무안했던 그 기업인이 이번엔 이승만을 찾아 갔어요. 이승만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환영했어요.

 

언젠가 리영희씨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이 일화 끝에 리씨는 김구 선생은 지사로서는 훌륭한 분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감각이 다소 부족했던 분이라고 평을 했어요.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너무 견결하게 행동하여 우군을 만들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던 것이지요.

 

사진은 "양심 건국"이라고 읽어요. 김구 선생의 글씨예요. 마곡사 한 부분에 걸어 놓았더군요(영인본).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씨를 보면 말 그대로 양심과 굳은 의지를 느끼게 돼요. 낙관을 보니 73세에 썼다고 돼있더군요.1948년에 쓰신 거에요(1949년에 서거). 정부 수립 즈음하여 쓰신 것으로 보여요. 이 글씨에서도 리씨가 평한 김구 선생의 면모를 읽을 수 있어요. 어질고 선한 마음으로 나라를 세운다 --- 정치적 면모보다는 지사적 면모를 느끼게 하는 내용이거든요. 이런 지사적 면모가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북의 김일성을 만나러 가게 한거겠죠. 그리고 그런 순결한 마음은 남과 북의 두 노회한 정치인에게 이용만 당한 셈이 됐구요.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현실을 대할 때면 그 무의미한 가정을 해보게 되죠. 무슨 소리냐구요? 만일 김구 선생의 바램대로 이 나라가 "양심 건국"이 됐다면 지금처럼 돈 몇 푼(?)에 양심을 팔아먹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에요.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오늘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집회가 열렸어요. 1217차예요.

 

한자를 읽어 볼까요? 良은 어질양, 心은 마음심, 建은 세울건, 國은 나라국. 良이 좀 낯설어 보이는군요. 자세히 살펴 보죠.

 

은 畐(가득할복)의 약자와 亡(망할망)의 합자예요. 좋은 점이 가득하다란 의미예요. 亡은 음을 담당하는데 소리값이 변했죠(망-->양). 중앙과 좌우에서 양을 잴 수 있는 도량형 그릇을 그린 것이라는 설도 있어요. 곡식의 양을 잘 헤아린다란 의미에서 '좋다'란 의미를 갖게 됐다고 설명해요. 良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良好(양호), 善良(선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오늘은 정리 문제를 아니내도 될 것 같군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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