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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평점 :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고딕 이야기>는 운명의 굴레에 대한 7편의 단편 이야기로 중세풍의 배경과 어우러지는 저주와 스산한 공포가 스며있는 이야기다.
사람이 사라져도 어찌할 수 없었던 시대상을 그린 <실종>을 시작으로, 영상으로 그려졌던 늙은 보모 이야기, 저주가 잊힐 때쯤 아버지를 죽일 운명을 타고난 아들의 비극을 다룬 대지주 이야기, 딸을 끔찍이 사랑했던 여인이 딸의 부재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타인에게 내린 저주가 딸에게 닿았음을 알고 속죄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빈자 클라라 수녀회, 저주에 의해 파괴되는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그리스피 가문의 저주, 자녀의 타락 앞에 희생하는 부모를 그린 굽은 나뭇가지, 궁금하다 사실 인지로 이어진다.
"아, 슬프다! 슬프다! 젊은 시절 저지른 일은 나이 들어 절대 되돌릴 수가 없구나! 젊은 시절 저지른 일은 나이 들어 절대 되돌릴 수 없구나!" p.64
중세풍의 배경에 마녀와 저주가 녹아있는 <고딕 이야기>는 여성이라는 당시의 사회적인 신분을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며, 시간을 초월해 사람이 제일 무서운 존재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소설에서 서사를 이어가는 저주는 생각보다 섬뜩하다.
"내게 해를 행한 자, 결코 번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홀로 돕는 이도 없이 삽니다. 그러니 하늘의 성자들이 내 기도를 더 들으실 겁니다. 제 말이 들리시나요, 축복받은 이들이여! 들으소서, 이 잔인하고 사악한 인간에게 비에를 내려주소서. 그는 유일하게 나를 사랑한 생명체를 죽였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말 못 하는 짐승을. 그 대가로 이자의 머리에 묵중한 비탄을 던져주소서. 오, 성자들이시여! 그는 내가 고독하고 빈곤한 것을 보고 나를 도울 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군사들은 나 같은 이를 위한 것이 아니 오리까?"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당신을 유일하게 사랑하는 생명체가, 아, 인간이 죽어버린 내 불쌍한 아가만큼 순수하고 다정한 그 인간이, 차라리 죽음이 행복한 것일 정도로 모두에게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바로 이 피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오, 신성한 성자들이여, 아무도 돕지 않는 이들에게 늘 힘을 주소서!" p. 114
"나는 그대에게 살아가라는 저주를 내린다. 나는 안다, 그대가 차라리 죽기를 기도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대는 인간의 타고난 수명을 넘어, 모든 훌륭한 인간의 경멸을 넘어 계속 살 것이다. (중략) 그대는 살아서 그대 집안 모두가, 가문의 약골들을 제외하고는 검에 죽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대의 족속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한 세대가 내려갈 때마다 토지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리라. 그렇고말고, 밤낮으로 일해 금을 쌓아 올려도 부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지상에서 아홉 세대가 지나가면 그대의 피는 더는 어떤 인간의 혈관에서도 흐르지 않으리라. 그날이 오면, 그대 후손의 마지막 사내가 내게 복수하리라. 아들이 아비를 죽이리라." p.195
저주를 내리고 저주가 스며들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고딕 이야기>의 단편들을 통해 저자는 운명의 굴레와 더불어 자신의 행동에 책임과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녹여낸 것이 아닐까. 가족을 떠나 새 삶을 살아도 상속자는 남게 되고, 젊은 시절의 실수를 되돌릴 수 없는 비통함에 젖기도 하며, 자신이 퍼부은 저주가 의도와는 달리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이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기독교적 색채와 페미니즘이 적절히 잘 배합된 소설 <고딕 이야기>는 재미와 동시에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언행을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운명과 굴레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저주와 삶을 보고 있노라니 드라마 <도깨비>가 생각나기도 하고, <호텔 델루나>도 생각나는 걸 보면, 영상미를 자아내는 저자의 필력 덕분인 것 같다. 잘 각색하면 무더운 여름밤을 서늘하게 만들어줄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밤에 펼치면 안 된다고 해서 낮에 읽었는데, <늙은 보모 이야기> 외에는 저녁에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잔상이 많이 남는 분들은 주말 오후에 티타임 하면서 읽으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