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 -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이관우 옮김 / 작가와비평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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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프로이트라 불리는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 『어떤 이별』은 연인과의 이별, 사람과 사람의 이별을 넘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죽음'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며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 「구스틀 소위」, 「총각의 죽음」, 「친숙한 여인」 등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 속에 어떤 이는 계단에서 넘어져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어떤 이는 사고사가 나며,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반면에 자살을 생각하던 이가 갑작스러운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갈 희망을 보이기도 하면서 '죽음'이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고통의 크기가 다른 이해타산적인 인간 심리를 녹여낸다.

「안드레아스 타마이어의 마지막 편지」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사람들이 나를 조롱할 것이고,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나의 아내가 나에게 충실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며, 내 죽음을 통해 이것을 증명하겠다.' p.222

타마이어는 독특한 피부색을 띠고 태어난 아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자 자신의 확신과 아내의 명예를 위해 죽기로 결심한다. 작품에는 타마이어가 각종 문헌과 사료들을 조사하며 기록을 남기며 고군분투하는 내적 갈등을 묘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결단이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희생처럼 비치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아내의 정숙을 밝히려고 하는 타마이어는 과연 부인을 위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해 나가기보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의 비겁한 도피가 아닐까.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죽음'의 양상을 목도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 대해 세상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듯한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가 하면,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과오를 덮을 수 있다며 위안을 받는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심리를 가지기도 한다. 문학의 프로이트라 불리는 명성답게 아르투어 슈니출러는 단편 곳곳에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심리묘사를 날카롭게 분석하며 '죽음'앞에 인간의 이기심, 공포, 좌절, 슬픔 등의 감정을 절묘하게 녹여냈다.

슈니츨러의 작품은 처음 접했는데, 이별 그리고 죽음에 대한 주제로 풀어낸 『어떤 이별』은 단편선이라 그런지 초반에는 책장이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작가가 주인공들의 감정선에 녹여낸 인간의 위선적인 단면들을 들춰내며 읽다 보니 마지막 단편까지 호기심이 가는 책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영원한 이별 앞에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의 기로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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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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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이 찬사를 받는 이유는 작품성과 더불어 긴장감 넘치는 복수로 삶이 무너지는 비극의 서사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어부들이었다'라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된 6남매의 넷째 벤저민이, 9살 인생과 세상이 바뀌어버린 시절을 회상하며 형들과 어부가 된 그 강의 기억으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아버지는 독수리였다.

다른 새들 머리 위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왕이 왕좌를 지키듯 어린 독수리들 위를 맴돌면서 그 녀석들을 지켜보는 막강한 새.(중략)

아버지가 아쿠레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우리 집이 약해질 이유도 없었을 테고,

우리에게 닥친 것 같은 역경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p.32

나이지리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식들에게 서구적인 교육을 받도록 애쓰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아이들은 아쿠레 마을의 주민들에게 오래전 버려진 저주 받은 강 오미알라에서 낚시를 하며 어부가 되어간다. 아버지가 타지역으로 발령받아 아쿠레를 떠나면서 첫째 이켄나에게 동생들을 잘 이끌라고 당부하지만, 형제들은 몰래 낚시하다 광인 이불라와 마주치고 '이켄나가 어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라는 비극의 예언을 들으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모습은 좋은 꿈을 낚는 어부,

가장 큰 고기를 잡기 전까지는 쉬지 않는 어부들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거대 조직이 되기를, 위협적이고 막을 수 없는 어부들이 되기를 바란다.'p.52

 

나이지리아의 불안정한 치안 상황 속에 공존하고 있는 기독교와 이보족의 문화는 위태로운 벤저민 가족의 실상과 닮았다. 자신의 둥지를 지켜야하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견고하던 가족의 믿음이 흔들려 끈끈한 형제애에 금이 가면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불과 광인의 세 치 혀에서 비롯된 예언이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첫째 이켄나와 둘째 보자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고 셋째 오벰베가 형들의 복수를 하겠다며 거머리 같은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벤저민과 함께 광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군인들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오벰베는 마을을 떠나고, 화자인 벤저민은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는 광기 어린 예언에 사로잡히면 인간의 운명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처절하게 그려냄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원수를 심판하겠다는 복수의 결말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세계 5대 문학상 수상, 맨부커상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어부들>은 '아버지는 독수리다'를 시작으로 이켄나는 비단뱀, 어머니는 매부리에 비유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메타포 수사법 덕분에 등장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를 그려내기 수월했고, 가족들에게 닥칠 운명을 암시할 수 있었다.

오벰베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는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터,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예고한다. 그러나 저자는 <어부들>을 예언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삶을 무너뜨린 가족 이야기로 끝내지 않는다. 비록 권위적인 아버지의 부재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그린 꿈 역시 허공에 날아갔지만, 두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에게 돌아오면서 무너진 세계를 바로 세우는 것 역시 사람임을 강조한다. 아버지가 두 아들의 이름으로 새로운 터전을 재구축하며 가장의 자리를 지키면서 아픔을 딛고 극복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에 있음을 이로써 희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한다. 정신적 지주의 부재가 사람에게 미치는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인간의 무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나의 믿음, 그리고 가족의 사랑과 지지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지금의 나는 사람이 뭔가를 믿으면

그것이 종종 영구적인 존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구적인 존재로 변한 것들은

파괴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도.'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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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신세계 - 국내 최고 경제 전문가들이 말하는 부의 확장 전략
김영익 외 지음 / 리치캠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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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 투자에는 공부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투자의 신세계>는 그 부분을 역사, 경제 시황, 투자 원칙, 미래 유망 투자섹터로 압축하여 투자에 필요한 핵심요소들을 짚어주는 책이다. 5년 연속 베스트 애널리스트에 선정된 김영익 교수가 경제 시황 편을 다루었고 대한민국 가장 신뢰받는 애널리스트로 선정된 홍춘욱 박사와 KTB투자증권 베스트 애널리스트 김한진 연구원이 각각 역사 편과 투자 원칙 편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유튜브 채널 삼프로 TV에서 맹활약 중인 이베스트 증권 염승환 이사가 미래 유망 투자섹터 편을 마무리했다. 한국 주식투자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어벤저스가 뭉친 것이다.

역사 편 중요한 부분이다. 과거의 주식시장의 지난 100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을 뽑으라면 제2차 세계대전을 꼽는다. 그 이유는 금본위제가 무력화되고 각국의 금리가 자유롭게 조정되는 화폐 시스템 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과거 1871년에서 1939년의 국채와 주식의 연평균 수익률이 3.97%와 3.6%로 채권 수익률이 높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0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국채와 주식의 연평균 수익률은 5.19%와 8.26%로 주식투자가 채권 투자의 수익을 넘어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본 주식투자를 해야 할 이유 중 하나이다.

다음은 경제 시황 편이다. 현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부터 코로나19 위기까지 각국은 강력한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사용했다. 장기간의 정책은 제로 금리에 가까운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해 일부 자산에 거품이 끼는 금융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높아지고 금리인상,테이퍼링같은 긴축 통화정책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불균형 해소를 위해서는 달러 가치 자산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며 국가별 자산 배분에서 미국보다는 중국 등, 아시아 비중을 높일 것을 추천하고 있다.

투자 원칙 편이다. 주가는 장기로는 적어도 경제성장률과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오르도록 설계되어 있기에 충분히 인플레이션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또한 강세장이 약세장보다 길기 때문에 시장 판단보다는 종목 발굴에 집중하는 것이 더 우수한 수익률을 거둘 것이다. 특히 인플레이션 상승 기간에는 종목별 차별화와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기이기에 종목 선택이 더 중요한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미래 유망섹터이다. 다가올 미래에는 5N에 투자하라고 한다.


1. NEW ENERGY

2. NEW EU

3. NEW SPACE

4. NEW UNIVERCE

5. NEW CONSUMPTION


친환경, 새로운 유럽,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소비이다. 각 섹터에는 염 블리라고 불리우는 염승환이사의 미래의 유망한 추천종목과 추천 이유가 실려있어서 눈길이 간다.

<투자의 신세계>는 국내 최고 주식투자 전문가들답게 투자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주식투자를 통해 부를 확장하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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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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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가에게 같은 책을 두 번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도 단기간에 말이다. <완전한 행복>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따끈따끈한 신간이 수북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읽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빠져들었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라고 말하는 나르시시스트 신유나의 사이코 패스적 행동이 변태적 살인의 쾌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잊고 싶은 절규였다면.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살아내기 위한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사건을 단순한 범죄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녀의 살인 이유에 대해 짚어봄으로써 끔찍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이코패스도 '사랑'에 갈급했던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고사, 옛 연인들 역시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 석연치 않은 이야기가 과연 우연일까? 자신을 버린 사람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림으로써 완전한 행복을 완성한다는 나르시시스트 사이코패스 신유나의 인생은 모순 덩어리다. 두 명의 딸을 보살필 여력이 안되었던 아버지가 손이 많이 가는 막내 유나를 부모님께 맡겼지만, 유나는 재인 때문에 부모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재인에 대해 증오심을 품고 살아간다. 승자와 패자, 아군과 적군이라는 이분법적인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주변인들의 삶을 악몽으로 바꾸는 나르시시스트, 이 세상에서 완전함을 바라는 것 자체가 행복과는 멀어지고 있음을 모른채 말이다.

 

<완전한 행복>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한 재인은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유나에게 맞선다. 그녀의 용기는 사건을 클라이맥스로 끌어올리고, 지유가 엄마의 세계에서로부터 독립된 선택을 하면서 신유나의 완전한 행복은 미완성으로 끝난다.

 

불행과 행복의 대비 속에서 자신의 완벽한 행복을 만들기위해 자기에게 집착하는 그녀의 모습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우리의 이면일지도 모르겠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나의 행복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의 행복이 타인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결국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귀결되는 게 아닐런지.

 

만약 신유나가 부모의 온전한 사랑으로 자랐다면 그녀의 가치관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완전한 행복>은 단순한 범죄자의 서사가 아닌,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했던 '고유정 사건'을 모티브로 남편을 살해하고 의붓아들마저 살해하는 범죄 양상이 비슷하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가 몸서리치는 진짜 이유는 죄의식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기는 커녕 우리 곁에서 평범하게 살고있는 이들 중에 누가 사이코패스인지도 모른채 함께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후관리도 중요하지만 사이코패스라는 범죄자가 줄어들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지유 같은 범죄자의 자녀가 제대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무튼, <완전한 행복>은 현재 자신에 중요한 사람을 온전히 지키고 소소한 행복을 즐기지 않은 이에게 행복은 가당치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진리를 곱씹어 보며 일상을 되돌아본다.

 

https://blog.naver.com/tesoro88/222492766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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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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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아픔과 인생의 방황 앞에 놓인 30대의 성장통을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에서 김혜나 작가는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절절하면서도 담담하게 써내려가 독자의 감정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어떤 게 진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인지 모르겠어"

여여하고 싶은데 그 마음도 제 마음대로 되지가 않으니까요.. 끊임없이 무언가를 비교하고 판단하고 일일이 반응하는 제 마음을 조절할 수가 없고, 화내고 슬퍼하는 마음도 조절할 수가 없어요. 무기력하고 우울한 마음도 조절할 수가 없는 제 자신이 한심해서, 화가 계……속 나요." p.38

어린 시절부터 사랑과 관계의 허기를 먹는 것으로 해소하며 살아오던 윤희는 아이러니하게도 요가 강사가 되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살갑게 다가온 요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 요한은 건강이 온전치 못한 남자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윤희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그가 퍼붓는 욕설에 상처받으면서도 그의 육체적 고통을 해소하는 거라며 연민과 사랑으로 덮으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던 요한의 부모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요한의 입은 더 험해지고 결국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던 요한과 이별의 수순을 밟는다.

 

윤희는 자신으로부터, 자신이 속했던 삶으로부터 도망쳐 인도로 떠나오고, 케이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속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비록 또 다른 아픔을 안기고 떠나버린 사람이지만, 그와의 짧은 시간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도 이 삶에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말이야,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이 다 쉬워질 줄만 알았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 답답해하는 것, 어려워하는 것이 모두 해결될 줄만 알았어. 나이가 들면서 육체는 노화하지만 이성은 발달하고 경험과 지혜는 쌓이는 거잖아. 그러면, 사는 게 좀 쉬워질 줄 알았어.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거야. 아니, 사실은 어릴 적보다 훨씬 더, 모든 게 다 어려워." p.80

아무리 가고 또 가도 어차피 출구는 없는데 어떻게든 그 출구를 찾아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나 자신 때문에 더 괴롭고 숨이 막히는 거야. 나는 나 자신을 바꿀 수도 내려놓을 수도 없고, 이 미궁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살아갈 수도 없어. 나는 그냥 좀 쉬고 싶은데, 쉬어지지가 않아. 어떻게 하는 게 쉬는 건지,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 잠재우고 내려놓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아무리 열심히 요가를 하고, 아무리 오래 명상을 해도……어느 것 하나 내려놓아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p.83

차문디 언덕을 오르는 순간 고모가 자신의 상처를, 절망을 이야기할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유서도 없이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며 결국 윤희도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답장이 없을지라도 상처가 아물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겠다는 윤희의 다짐은 그녀가 한 단계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인도 사람들은 카스트제도에 의한 불평등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 자체에도 화가 난다는 윤희는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어릴 때부터 금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월세방을 전전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울분이 녹아있는 듯하다. 속사포같이 쏟아지는 그녀의 절규는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불안함에 흔들리고 방황하는 30대를 대변하며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녀의 강렬한 서사는 머리가 클수록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나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마주하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 수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며 세상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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