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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정원
아나톨 프랑스 지음, 이민주 옮김 / B612 / 2021년 7월
평점 :
프랑스의 혁명부터 프랑스의 격변기를 살아낸 아나톨 프랑스는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싸운 소설가다. 그의 19세기 프랑스 사회상이 녹아있는 작품 <펭귄의 섬>의 노벨문학상 수상 100주년을 기념하며 아나톨 프랑스의 명상록 <에피쿠로스 정원> 국내 최초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향긋한 숨을 내쉬는 그리스 정원은 꽃피우는 지혜의 초록빛 그늘로 나를 감싸네."
-베르길리우스 별록 중 『시리스』 제3구와 제4구
베르길리우스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그리스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철학을 논하며 지혜의 향연을 펼치던 에피쿠로스 정원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저자 아나톨 프랑스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많이 얻는 삶을 추구했던 금욕하는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의 소박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철학 공동체를 흠모했던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소설가답게 정치, 사회, 과학, 종교, 철학, 여성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플라톤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헤겔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소환하여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재현해냈다.
"예술가는 삶을 사랑해야 하고,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p.33
여성이 세상의 주권자이며 여성은 남성에게 위대한 교육자와 같다고 말하는 저자는 당시 남성 우월주의의 시대상과는 다른 여성관, 우리는 책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읽고, 책은 모든 것을 상상에 맡기기 때문에 세련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은 독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지만, 연극은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여지를 남기지 않기에 많은 이가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책이란, 작은 기호들이 늘어서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형태와 색채,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영감이 충만한 예술가의 손길에서 지혜를 담아낸다 할지라도 영혼의 음은 독자의 내면의 악기에 달렸다는 그의 해석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과학은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쾌락을 외면하게 만든다고 한다. 미지의 세계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해서 우리의 무지를 깨닫게 하며, 도무지 만족이 불가능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절망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아파한다는 것, 이 얼마나 신비롭고 신성한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고통이다.
고통이 있기에 자비의 마음이 있고
용기가 존재하며 모든 미덕이 있을 수 있다." p.47
저자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자'라는 볼테르의 명문장을 인용하면서도 기저에 깔린 인간의 본능적인 필요를 채우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다소 모순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가슴 아파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격변의 시기를 살아온 저자의 인생관이 녹아있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아나톨 프랑스는 어느 정도의 무지가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