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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뿌리 깊은 나무>,<바람의 화원> 등 너무나도 유명한 믿고 보는 작가 이정명의 신간 <부서진 여름>은 프레임을 들고 웅크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이며 호기심을 자아낸다.
쐐기화로 성공한 작가 한조는 자신의 아내와 평온한 오후를 보내다 식어가는 햇살 속에 자신의 지위, 그가 이룬 업적, 그가 확보한 영향력을 돌아보며 "지금, 이곳이 완벽한 순간과 장소라는 생각. 이 순간이 우리에게 속해 있고 우리가 이 공간에 속해 있어. 완벽한 하루야."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 문장을 보면서 부부의 세계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했다.'라던 김희애 씨의 대사가 떠오르며 그의 여름이, 삶이 어떻게 산산이 부서지게 될지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 순간, 완벽한 순간은 결코 알아챌 수 없고 알아차리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그렇더라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행복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그의 것이었다.라며 마치 독자의 머릿속을 읽고 있는 듯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완벽하다고 느꼈던 순간 사라진다고 했듯, 어느 날 한조의 아내는 출간을 앞둔 원고를 남기고 사라진다. 누구에게 한 적도 없고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아내와 공유했는데, 그녀는 소설에서 주인공인 화가가 본인 의사에 반하여 미성년자를 유린한 파렴치한이고, 명성을 얻기 위해 아내의 재능을 훔치고도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긴 도둑이며, 십 대 시절 이웃 여인을 살해한 살인자라고 묘사하며 현실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한조가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진실과 더불어 아내와의 사랑, 작가라는 위상까지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뜨리기 충분한 소설인 것이다.
고등학생이던 한조는 주인집 큰 딸 지수를 짝사랑하고, 지수는 한조의 형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수가 강변에 변사체로 발견되고, 한조의 아버지가 범인으로 사건은 종결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지수의 부모는 사고로 사망한다. 한조의 아내 해리는 언니의 석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진실이 필요한 소녀였다. 맥락을 찾지 못한 기억의 작은 조각을 모으고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사실들을 재구성해 어긋난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싶었던 것이다. 설령 기억을 재구성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하고자 한조가 필요했다.
해리는 밤이 깊어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드러난 것과 감춰진 것, 보이는 것과 숨어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말하지 못한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부서진 여름>은 짝사랑하는 소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한 소년의 거짓말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가정을 무너뜨리며 또 다른 복수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뢰를 무시한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작품에 이용한 그의 이기심에 분노를 느낌에도 언니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이 고통스러운 해리, 가정이 파멸될 위기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몸부림, 가려진 진실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살인자라고 자백하는 아버지, 사회적인 압박 속에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기 보다 정황에 맞춰 수사 종결한 경찰 등 저자는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가혹해 그 사람을 위해 하지 않은 말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진실이란 없음을 이야기한다. 진실을 마주했다면 잘못된 퍼즐이 맞춰지지는 않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는 한편, 우리가 지탱하고 있는 삶은 진실한 삶인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책을 덮으며 표지의 여인의 눈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면, 언젠가 삶이 부서질지 모른다는 암시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