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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 - 현대 요리책의 시초가 된 일라이저 액턴의 맛있는 인생
애너벨 앱스 지음, 공경희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4월
평점 :
183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은 빅토리아 시대에 '음식'과 '꿈'을 향한 두 여성의 멋진 도약을 맛깔나게 요리한 실화 배경 소설이다.
"영국의 젊은 주부들에게 바칩니다."
여류 시인을 꿈꾸는 일라이저는 출판사로부터 더 이상 시를 읽는 사람이 없다며 요리책을 써보라고 제안받았으나 거절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파산하고 야반도주하며 운명이 달라진다. 액턴 가의 맞딸인 일라이저는 어머니와 '보다이크 하우스'라는 하숙집을 운영하며 비밀리에 요리사를 담당한다. 한편, '결혼과 돈만이 자유를 가져온다'라고 믿는 속물근성이 강한 어머니는 어떻게든 일라이저를 부유한 남편을 만나 집안의 재기를 꾀하지만, 일라이저는 꿈과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며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신여성의 면모를 보여준다.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은 당대 런던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재미는 물론이고 현대 레시피북의 시초가 바로 일라이저의 요리책에서 탄생되었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다. 당대 영국 귀족 여성들은 요리를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여성들도 적었기에 당시 요리책은 쉽게 읽히지도 않을뿐더러 정량화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일라이저는 개인 가정에서도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간단하지만 엄격한 시험을 거친 정확한 레시피를 소개하기로 마음먹는다.
우리의 인생사가 혼자 힘으로 완성될 수는 없는 법이듯, 일라이저의 주방에 가난하지만 요리사 꿈을 지닌 앤 커비를 보조로 들이며 요리의 영감을 얻는다. 하숙객을 상대로 다섯 코스의 정찬 요리를 테스트해보고, 다른 레시피들과 비교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레시피를 구현하기도 한다.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하녀를 친구로 여기는 일라이저의 사람 됨됨이에서 이미 난 여성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라이저와 앤은 10년 이란 시간 동안 함께 요리하며 576페이지의 요리책을 만든다. 하지만 일라이저는 자신의 비밀을 끝내 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오해를 낳아 앤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며 두 여성의 끈끈한 우정은 끝나고 만다. 일라이저 액턴이 왜 그리 시에 몰두하며 남몰래 아픔을 삼켜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나니 남다른 눈길로 앤을 바라보던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더 안타깝기도 하다.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는 사실에 기반한 픽션으로 요리하는 즐거움과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다만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에서 다마스크 식탁보에 웨지우드 식기, 가장 좋은 크리스털과 은도금 커트러리로 차린 5코스 정찬 요리를, 주방에서 식재료를 손질하고 갖은 향신료로 풍미를 돋우는 생생한 요리 향연을 글로만 봐야 한다는 점아 아쉬웠다면 아쉬운 소설이다. 일라이저의 레시피가 요리로 완성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고 싶어진다. 물론 맛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부록에 수록된 일라이저의 복숭아 피클, 세이지에 싼 장어, 초콜릿 커스터드 등 레시피를 참고해 도전해 봐야겠다.
"오로지 결혼과 돈만이 자유를 가져온단다, 일라이저.
두 가지가 없으면 외롭고 비참하게 늙을 거야." p.238
"주방에서 제대로 요리된 음식처럼 영양가 있고 건강한 것은 없거든."p.307
메모와 레시피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려니 책에 생명을 주는 것 같다.
그 핵심에 맥박이나 영혼 같은 게 깃든 느낌이 꽤 독특하다.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