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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12월
평점 :
가와무라 겐키 감독의 영화 <백화>의 원작 소설 《백화》는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휴먼 소설로, 아픔 속에서 마주한 행복한 기억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백화 百花
하얀 배경에 만개한 꽃 커버라 하얀 꽃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했는데, 한자를 보니 일백 백이다. 즉, 백 개의 꽃. 유리코가 아프기 전에 늘 예쁜 꽃이 있던 유리코의 식탁을 떠오르게 하며 유리코와 이즈미의 수많은 추억들을 '백화'로 표현한 것 같다.
어느덧 일흔이 된 피아노 선생님 유리코는 홀로 아들 이즈미를 키운 싱글맘이다. 인생의 나침반이 아들에게 향해 있는 듯 보이지만, 이즈미에게는 어릴 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다. 어린 시절 유리코가 1년간 사라지면서 엄마에게 거절당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그때의 1년이라는 시간을 통 편집하고 살아왔으나, 유리코가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고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유리코와 이즈미의 균형이 또다시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엄마가 또 멀리 떠나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유리코의 묘연했던 1년의 기록을 마주한 이즈미는 유리코가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데...
잃는 게
곧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유리코는 아들을 얻었으나 가족을 잃었고, 이즈미는 결혼해 아들을 얻는 동시에 엄마를 잃게 된다.
이 아이러니한 인생의 여정을 보니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 한다'라던 가와무라 겐키의 전작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 떠올랐다. 당연하다 여기던 것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이야기하던 저자는 내게 주어진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고 이야기했었다.
《백화》에서는 인간이 암을 정복해 나가자, 치매 환자가 늘어났으며 미래에 치매가 정복된다 할지라도 인간은 무언가와 싸워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네 인생사가 그렇듯 무언가 하나를 해결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니까. 저자는 잃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억'에 대해 파고들어 엄마와 아들이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리코는 절반 불꽃이 보고 싶다고 하지만 이즈미는 절반 불꽃의 의미를 도통 생각해 내지 못하고 불꽃놀이를 관람한다.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살려내는 유리코와는 달리 현재의 상황에만 몰두하는 이즈미의 모습은 기억의 단편을 보여준다. 결국 유리코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이즈미는 절반 불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이즈미는 잊어버릴 거라고 했던 유리코의 말과 함께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차례차례 올라오는 절반 불꽃.
이즈미와 유리코가 살던 집에서 피었던
수백 송이의 꽃처럼,
불꽃은 아름다웠다는 것만을
기억에 남기고 이윽고 사라진다.
백화, p376
치매에 걸린 엄마는 계속 기억하고 있었으나 자신이 잃어버렸던 '절반 불꽃'의 추억에 전율하는 이즈미의 장면은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바뀌는 치매가 뇌를 점령해올지라도 행복했던 추억이 깃든 기억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는 울림을 준다.
유리코가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을 보며 백화요란이 따로 없다는 대목이 있다.
'백화요란'
온갖 꽃이 불이 타오르듯 피어 매우 화려함을 나타내는 뜻으로 인생 역시 수많은 기억들이 수놓은 불꽃 축제와 같은 게 아닐까. 행복과 슬픔 등 여러 추억이 교차되어 화려하게 피어나다 사그라드는 불꽃처럼.
무언가를 잃어가는 게 인간의 필연이라면, 소중한 존재를 사랑하고 화려하게 수놓으며 살아가는 것. 이를 기억하는 것 또한 인간의 몫이 아닐는지. 비록 잊혀질 인생이라 할지라도 행복한 기억으로 화려하게 수놓는 인생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
순식간에 책장이 넘어가는 눈물과 감동의 드라마 소설 《백화》는 식구가 적은 요즘 아픈 가족을 돌보며 세상을 살아가기 쉽지 않기에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유리코의 모습이나 뒤늦게 엄마와의 추억이 떠오른 이즈미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소중한 사람은 곁에 있을 때 더 잘하자 다짐해 보며, 가족에게 상처받아 소원해졌거나, 가족을 간호하느라 지친 분들에게 《백화》를 일독하시기를 추천한다.
그 뒤엔 관계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얼른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 안에서 행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번외로 분문에 ˙ ˙ ˙ 강조된 표기를 따라 다시 읽어 보아도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다.
그때 > 연기 > 상정된 미래 > 또다시 > 망가진다 >일부러 미아가 되었다 등등 따라가다 보면 이즈미의 심경 변화가 도드라져 책의 여운이 짙어진다. (편집에 신경쓴 부분은 이유가 있는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