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열국지 10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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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10권] 천하는 최강의 진나라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이 연합하고 배신하면서 투쟁하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드디어 진왕 정이 등극하여 무력에 의한 천하 통일을 달성하였으나 진나라 역시 멸망하고 열국의 시대는 끝을 맺었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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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9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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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東周 列國志

                                                                   

[ 9 ]

합종연횡(合從連衡)

  귀곡 선생 문하에 있던 소진과 장의도 벼슬 욕심에 산에서 내려왔다. 소진은 한, , , , , 조 등 여섯 나라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게 했고 그는 그 육국의 정승이 되었다이후 진나라는 6국의 동맹을 깨기 위해 여러 나라들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장의가 이를 만류했다소진이 죽고 나자 장의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고 진나라로 돌아가 정승이 되어 부귀를 누렸다.

 

  한편, 연나라 정승 자지(子之)는 키가 8척에 나는 새도 능히 잡고, 달리는 말도 붙드는 장사였다. 그런데 연왕 쾌가 주색을 좋아하고 나라일에는 몹시 게을러 조회에도 나오지 않자 측근들을 이용하여 왕을 구슬려 연나라를 양도받았다반란 소식을 들은 제민왕이 연나라로 쳐들어갔다. 연왕 쾌는 목을 매고 자살했으며 자지는 사로잡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후 제나라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장의는 지난날 소진이 이루어 놓았던 육국의 합종을 일일이 분리 시켰으며 새로 등극한 진무왕이 장의를 미워하고 자신을 시기하는 신하들이 많음을 알고는 위나라로 피해 갔다가 그곳에서 병이 나서 죽었다.

 

 진무왕은 한나라를 치러 갔다가 크게 이기고 돌아오면서 주나라의 구정(九鼎)을 보고 힘자랑을 하다가 솥에 오른 발이 깔려 잘렸고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새로 등극한 진소양왕은 초회왕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진나라 함양으로 끌고 가서 검중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이에 초나라는 왕을 바꿔버리고 진나라의 요구를 거부하여 진나라가 초나라의 땅을 한 조각도 얻지 못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침범하여 성 열다섯 곳을 빼앗았고 초회왕은 조나라로 달아났다.

 

  이때 조나라의 조무령왕은 진나라를 집어 삼키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세자 하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전해 받은 세자는 조혜왕이 되었고 조부령왕은 스스로 주부(主父)라고 칭했다주부의 큰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큰아들을 숨겨주었던 주부는 궁문이 폐쇄되어 굶어 죽었다.

 

 진소양왕은 제나라의 맹상군을 초청하여 진나라의 승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현 승상 저이질이 반대하자 맹상군을 죽일 마음을 품는다. 이에 맹상군은 진소양왕에게 바쳤던 백호구를 훔쳐 다시 진소양왕의 애첩 연희에게 바치고 목숨을 구해 탈출에

성공하였다.

 

  진소양왕은 맹상군을 없애버릴 계책으로 맹상군이 왕위를 노린다는 요언을 퍼뜨리게 했다. 마침내 제민왕이 유언비어와 요언을 믿고 맹상군으로부터 정승의 인을 거두고 설읍으로 그를 추방했다.

 

  송강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특출했는데 장성하자 키가 94촌이나 되었고 힘이 장사였다. 그는 10만 대군을 양성하여 제, , 위나라의 성들을 빼앗고 등나라를 무찔러 아주 없애버리는 등 활약이 눈부셨다. 그러나 그는 여염의 여자까지 넘보다 그들 부부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며 곁에 활을 놓아두고 그에게 간하는 신하가 있으면 활로 쏘아 죽일 만큼 포악한 폭군이었다.

 

  이에 제, , 위나라가 송나라를 치기로 하였다. 제나라의 유인 작전에 휘말린 송나라는 여지없이 패퇴하였다. 송강왕은 뛰어내린 물 속에서 건져내져 갖은 수모를 받고 살해되었다. 세 나라가 송나라의 땅을 나눠 갖고 돌아가자 제민왕은 그 뒤를 쫓아 초나라와 위나라를 크게 무찔러 넓은 땅을 독차지하였다. 배신당한 위, 초나라는 제나라에 대해 이를 갈았다.

 

 제민왕은 맹상군이 위나라로 가버린 후 더욱 교만하고 거칠어져서 자기가 천자가 되려고 궁리했다. 그러자 제나라에 여러 가지 괴상한 일들이 나타났고 명신(名臣)들은 칭병하고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했다. 연나라 연소왕은 지난날 제나라에 압제 받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어서 보복할 일만 궁리하면서 군사들을 키우고 있었다.

 

  드디어 연소왕은 진, , , 한 네 나라와 연합하고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제나라를 침공했다. 결국 제민왕은 크게 패하여 임치성으로 달아나고 연합군들은 점령지를 마음껏 노략질했다그 동안 악의는 제나라 고을 70여 성을 함몰하고 그 땅을 모두 연나라에 편입시켰다. 요치는 연나라의 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악의와 협력하기로 하고 제민왕을 죽여 버렸지만 그 역시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제나라 장수 전단은 연나라 군사들을 방심하게 해 놓고 꼬리에 불 붙인 소를 앞세워 연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기겁이 죽고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연나라에 함몰되었던 제나라 70여 성이 모두 해방되었다.

 

  진소양왕은 화씨의 옥이 탐나서 조혜문왕에게 유양 땅 열여섯 성과 옥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진나라를 신뢰할 수 없었지만 인상여가 옥을 가지고 진나라로 향했다. 하지만 결국 진나라는 땅을 주지 않아 옥을 얻지 못했다.

 

  진소양왕이 다시 조혜문왕에게 회견을 요청하여 만났지만 조왕을 누르려는 진왕에 대해 인상여의 적절한 맞대응으로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맺고 헤어졌다. 왕은 인상여에게 최고 벼슬인 상상을 제수했다. 그러자 정승 염파가 불만을 품었으나 나라를 위한 인상여의 생각에 감복하여 두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변하지 않을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 되기로 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란 바로 인상여와 염파의 우정에서 비롯된 말이다.

 

  진나라는 초나라를 치고, 위나라를 치고, 한나라를 침범하였다. 조나라 군사들은 진군을 크게 무찔러 한나라를 도왔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물리치자 난처한 상황에 빠진 위나라는 지난날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쳤던 일을 사과하러 수가와 범저를 사절로 보냈다. 제양왕의 추궁에 도도하게 대응한 범저를 보고 욕심이 난 제양왕이 그에게 벼슬을 주어 제나라로 모시려했다.

 

  그런데 수가가 이를 의심하여 정승 위제에게 고자질을 했고 위제는 범저에게 곤장질을 하여 죽었다고 내다버렸다. 그런데 범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변성명하여 이름을 장녹이라 했다. 장녹은 진나라 사신 왕계를 따라 진나라로 갔다. 그리고 진소양왕을 만나 구세력들을 몰아내게 하였고 자신은 승상이 되어 응후라는 작호를 받았다.

 

  위나라에서 사신으로 수가가 왔다. 장녹은 자신이 범저임을 밝히고 수가에게 복수를 하려 했으나 하도 비는 꼴이 불쌍해서 살려주었고 자신이 범저임을 진소양왕에게도 실토하였다. 범저는 수가에게 정승 위제의 목을 끊어서 진나라로 보내라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이 소문을 들은 위제는 그날 밤으로 정승의 인을 버리고 조나라 평원군에게로 가서 숨었다.

 

  진소양왕은 구원(舊怨)도 갚고 승상 범저의 원수도 갚기 위하여 20만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평원군은 끝까지 잡아떼며 위제를 내놓지 않았다. 귀국한 조소양왕은 평원군을 진나라로 초청하고 그 틈을 이용하여 조효성왕에게 위제의 목을 요구했다. 위제는 도망쳐 위나라로 갔다. 하지만 신릉군에게 환대

받지 못하자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조효성왕은 위안리왕으로부터 위제의 목을 받아 진소양왕에게 보냈고 조왕은 이를 범저에게 내주었다. 범저는 위제의 목에서 살과 가죽을 벗겨내고 해골에 옻칠을 하여 요강으로 사용했다. 옛날 범저를 죽도록 매질하여 빈객들에게 오줌을 누게 했던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단단히 한 셈이었다.

 

  진소양왕은 범저의 계책인 원교근공(遠交近攻)에 따라 제, 초와 우호를 맺고 한나라로 쳐들어갔고 한나라는 조나라를 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 일대의 성 열일곱 곳을 조나라에 바쳤다. 조효성왕은 평양군 조표의 말을 듣지 않고 평원군을

보내 그 성들을 접수하였다.

 

  진나라 장수 왕흘과 조나라 장수 염파 간의 대치가 오래되자 범저는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염파 대신 조괄을 상장군으로 삼게 하였고 조나라는 백기를 상장군으로 삼게 했다. 조괄은 대패하여 전사했고 항복한 조나라 군사 40여만 명은 모조리 살해당했으며 돌아간 군사는 불과 240명이었다고 한다.

 

  무안군 백기는 군사를 시켜 조나라 포로의 두골만 거두어 영루 앞에 쌓게 했는데 그것이 산을 이루었고 그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 위에 으

리으리한 대()를 세워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백기대라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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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9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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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9권] 귀곡 선생의 문하에 있던 소진과 장의, 소진은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6국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을 꾀하고 장의는 소진이 죽자 육국의 합종을 일일이 분리 시키려 한다. 세력이 커진 진나라는 범저의 계책인 원교근공(遠交近攻)을 받아들여 이웃 나라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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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8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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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 列國志

                                                                   

[ 8 ]

戰國時代, 스스로 왕이 되니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이 보낸 두 여자를 보자 한 쌍의 선녀가 하강한 듯하여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넋을 빼앗겼다. 서시는 요염하고 비위를 잘 맞추기는 정단보다 월등하여 부차의 사랑을 독점했다. 부차는 서시를 위하여 별궁을 짓고 흥이 나는 대로 그녀와 놀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고 오자서가 찾아와도 바쁘다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월왕 구천이 이번에는 흉년을 핑계로 곡식 만 석을 빌려가서는 다음 해에 갚을 때 곡식 상등품만 골라 솥에 약간 쪄서 보냈다. 오나라에서는 이 좋은 상등품의 곡식으로 파종을 했으니 농사가 잘 될 수가 없어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리고 월왕은 칼 잘 쓰는 처녀와 활 잘 쏘는 진음을 초빙하여 군사들을 조련하였다.

 

   오왕 부차는 사사건건 자신을 반대하는 오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살하게 하였다. 오자서는 자신이 죽으면 눈을 뽑아 월나라 군사가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동문에 걸어두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다. 오왕은 오자서의 목을 끊어 반문성루에 걸어 두었다.

 

 오왕 부차가 진()나라와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떠나가자 월왕 구천은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오왕 부차는 대회에서 맹주가 되어 오나라로 돌아갔지만 먼 길을 갔다가 와서 지친 군사들은 월나라 군사에게 여지없이 대패했다. 월나라는 지난날 월나라가 오나라에 복종했던 것과 똑 같이 복종하겠다는 오나라의 항복을 받고 귀국했다.

 

  ()나라는 초나라에 흉년이 든 걸 기회로 알고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러갔다가 대패하였고 초나라는 진나라까지 쳐들어가서 진민공을 잡아 죽이고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그 해에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가 주색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고 있음을 알고 군사를 일으켰다. 오성이 함락되기 전날 밤 성 위에 죽은 오자서의 머리가 나타났다. 오왕 부차는 싸움에 패하여 결국 자살했고 백비는 죽임을 당했다.

 

  월왕 구천은 드디어 제, (), , 노 네 나라 군후와 대회를 열었고 동방의 백주가 되어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월왕의 패업을 도왔던 범여는 신하들을 의심하고 모든 공로를 독차지 하려는 월왕의 속 마음을 알고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문종에게 월왕은 고생은 함께할 수 있으나 함께 부귀를 누릴 인물은 못 된다는 서신을 남겼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켰건만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한 치 땅의 상도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신하들을 경원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점점 월왕 구천을 만나 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월왕은 그 뒤 문종조차 자진케 했다. 월왕 구천은 왕위에 있은 지 27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손은 대대로 패후로서 자처했다.

 

  진()나라는 원래 6경이 서로 권세를 다투다가 지씨, 조씨, 위씨, 한씨의 4가가 국권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진나라 땅을 각기 나눠 가져 임금인 진출공보다 많은 땅을 차지하였. 진출공은 강성한 4가를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사실상 진나라의 국권을 가진 지백이 3가의 땅을 뺏으려고 하다가 조씨가와 전쟁이 일어나 자신은 칼에 맞아 죽고 지씨는 몰락하고 말았다. 졍권을 잡은 조양자가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서 아들 조완을 불러 한씨, 위씨와 진나라를 세 쪽으로 나누어 나라를 세우라고 유언한다. 드디어 3가는 각각 나라를 세우고 진정공을 몰아내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29대 만에 망하고 위, 한 조의 3진이 들어섰다.

 

  제위왕은 왕이 된 이후로 날마다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한, , , 조 등 여러 나라들이 심심하면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장수들은 여러 번 싸웠지만 늘 지기만 했다. 어느 날 거문고를 잘 안다는 선비 추기가 찾아와 제위왕을 일깨워 주었고 왕은 추기를 정승으로 삼았다.

 

  제위왕은 탐관오리들을 숙정하고 어진 인재를 뽑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나라 제후들도 제위왕을 두려워하고 제나라에 복종했다. 이 당시 천하는 제, , (), , , , ()의 일곱 개의 큰 나라가 있었고 서로 실력이 비등했다. 그런 가운데 제위왕이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제 천하 이곳저곳에서 신흥 세력이 일어나고 많은 영웅과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3(三振)정립한 이후로 이미 사실상 전국시대는 시작된 것이었다.

 

  공손 앙은 ()효공을 찾아 갔다. 진효공은 여러 번 시험 끝에 그를 좌서장으로 발탁했다. 위앙은 마침내 모든 법령을 뜯어고치고 진효공의 인준을 받아 이를 시행하기 시작하자 백성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고 법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자 위앙은 그들을 잡아들여 모두 벌하였고 불평을 늘어놓는 태자까지도 그 스승들을 코를 베고 얼굴에 문신을 새겼을 만큼 엄격한 법 집행으로 나라를 개혁하였다. 이리하여 함양으로 서울을 옮긴 진나라는 천하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

 

  주()나라 귀곡이란 곳에 한 은자(隱者)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지난날 제자백가 중의 한 사람인 묵자와 함께 운몽산에서 약초를 캐며 수도를 한 일이 있기도 했다. 그는 세상을 등지고 자취를 감추고 살아서 사람들은 그를 귀곡선생이라 불렀다. 그는 천문, 지리, 수학과 병학, 유세법, 출세학에 통달하였으며 선가의 비법까지 정통했다.

 

  그의 제자들 중에 손빈과 방연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결의형제를 맺고 선생 밑에서 병법을 배웠다. 그러던 중 방연이 먼저 출세를 위해 위나라로 떠났고 떠나면서 그는, 자신이 출세하면 반드시 손빈을 임금에게 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손빈은 그 후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조부 손무가 지은 병법 13을 얻어 공부를 하고 방연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우수한 손빈에 대한 시기심으로 방연은 그를 위혜왕에게 천거하지 않았고 묵자가 이를 보고 위혜왕에게 손빈을 천거했다. 그때서야 방연은 마지못해 편지를 보내면서 마치 자기가 힘을 쓴 것처럼 생색을 냈다. 하지만 천성이 오만하고 질투심이 강한 방연은 계속 손빈을 모함하고, 손빈이 제나라와 내통한 것처럼 간계를 꾸며 그의 두 다리를 절단하는 형벌을 받게 만들었다. 하지만 손빈은 방연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방연의 사악함을 알게 된 손빈은 간질병을 가장하여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제나라로 탈출에 성공하였고 제위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위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방연이 조나라로 쳐들어가자 손빈을 군사로 삼은 제나라가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제군을 만난 위군은 대패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에 손빈이 있는 것을 안 방연은 제나라 정승 추기에게 천금의 뇌물을 주어 손빈을 모함하게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고 제선왕이 등극한 후 방연이 한나라를 치러가자 손빈이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방연은 급히 회군하여 제군과 맞서지만 손빈의 계략에 걸려 계곡에서 무수히 화살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손빈은 원수를 갚고 대승하였다. 그 후 손빈은 귀곡 선생에게 전해 받은 할아버지의 저서 손무병서 13편을 써서 제선왕에게 바치고 은퇴했다.

 

  이리하여 제선왕은 천하에 위엄을 크게 떨쳤다. 그 후 제선왕은 제나라가 강한 것만 믿고 술과 여색에 빠졌고 선비란 것들과 날마다 황당무계한 토론을 하거나 궤변만을 일삼을 뿐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때 종리춘이라는 못 생긴 여자가 나타나 제선왕에게 충고하고 왕후가 되었으며 제선왕은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크게 다스렸다.

 

  한편, 방연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진()효공은 위나라로 쳐들어갔다. 위나라 공자 앙이 진나라 위앙의 간계에 넘어가 생포되었고 위앙은 이를 이용하여 오성을 함락시켰다.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서하 땅을 양도하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진효공은 위앙에게 상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상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효공이 죽고 진혜문공이 제위에 올라 자신의 스승들에게 벌을 내렸던 상앙의 정승 직을 빼앗았다. 나라를 개혁한다고 남에게 못할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던 그는 결국 오우분시(五牛分屍)의 형을 받았고 성난 백성들은 달려들어 그의 시체를 씹었다. 일족들도 다 죽음을 당했다. 진혜문공은 스스로 왕이라 자칭하고 모든 나라에 사신을 보내 땅을 진나라에 바치라고 분부했다.

 

  모든 나라의 군주들은 이 분부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초나라 초위왕은 사신을 쳐서 반죽음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이에 낙양에 있던 소진이 겸병지책(兼倂之策)을 주장하고 나와서 진혜문왕을 설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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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8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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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8권] 중원의 오래된 나라들이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이곳저곳에서 신흥세력들이 일어나고 많은 영웅과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晋)나라가 망하고 3진이 정립한 이후 사실상 춘추시대는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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