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열국지 7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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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 列國志

                                                                   

[ 7 ]

섶에 누워 쓸개를 핥다.

  오원의 자()는 자서다. 오자서는 키가 크고, 허리가 열 아름이나 되고, 두 눈썹 사이가 한 자 남짓하고,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힘은 산이라도 뽑을 만하고, 또 문무를 겸전한 인재였다. 오상은 아버지를 따라 죽고 오자서는 천신만고 끝에 오

나라로 피신했다.

 

 오나라 공자 광이 오자서를 발견하였고 그와 친분을 유지했다. 오자서는 의형제를 맺은 전제를 광에게 소개하였다. 전제는 3개월 동안 왕료가 좋아한다는 생선 굽는 법을 배워서 돌아왔지만 왕료 곁에는 쇠처럼 강인한 아들 공자 경기가 늘 함께 있었고 왕료의 외숙인 엄여와 촉용 두 사람이 병권을 다 잡고 있는 실정이라 접근하여 왕을 죽인다 해도 정권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자서와 공자 광은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 왕실에서도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그러더니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어 주경왕은 동왕, 공자 조는 서왕이라 불리었다. 결국 진나라를 위시한 모든 나라 제후들이 주경왕을 왕실로 모셨다. 공자 조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평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자서는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통곡했다. 기회를 기다리던 공자 광은 엄여, 촉용 두 장수를 초나라로 출정시키고 오왕 왕료의 아들 공자 경기마저 정, 위 두 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는데 성공하고 거사를 진행했다. 왕료는 전제의 비수에 목숨을 잃었다. 전제 또한 왕료

의 군사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했다.

 

  공자 광은 왕위에 올라 스스로를 합려라고 호()했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에게 도움을 받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초나라를 탈출한 백극완의 아들 백비는 오자서를 찾아갔다관상쟁이 대부 피리가 백비는 욕심이 많고 잔인하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오자서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자 경기가 자신을 노리며 결사대까지 모집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태산이라, 오자서에게 걱정을 말하자 오자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며 천민 요리를 추천한다. 요리는 자진해서 자신의 팔을 끊게 하고 가족을 몰살당하게 한 다음 경기를 찾아가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오자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13편의 병서 손자(孫子)를 지은 손무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했다. 오왕은 오자서의 강력한 권고로 손무를 상장으로 삼고

군사로서 대우하며 장차 초나라 칠 일을 맡겼다.

 

  손무는 우선 도망 중인 엄여와 촉용을 잡아 죽였다. 오왕 합려는 딸이 죽자 백성들을 유인하여 남녀 만 명 이상을 생매장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명검 잠로가 초소왕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알고는 자신의 어진 신하 수십 명을 죽였으며 손무, 오자서, 백비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치게 했다.

 

  초나라의 영윤 낭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채소공의 갖옷과 구슬, 당성공의 숙상마가 욕심이 나서 두 제후를 감금하고 이를 빼앗았다. 채나라가 진()나라에 간청하여 진나라 외에 열일곱 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치러갔다. 그런데 연합군 대장인 진나라의 범앙이 채소공이 뇌물을 주지 않자 비가 와서 싸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철수하였고 이를 본 모든 나라 제후들도 뿔뿔이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오나라가 초나라를 치는데 채, 당 두 나라가 동참하게 되었다. , , 당 세 나라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초나라를 쳐나갔다. 싸움에서 패한 영윤 낭와는 정나라로 달아났고 영성이 함락되기 직전 초소왕은 여동생 계간만 데리고 달아났다. 왕궁을 점령한 오왕 합려는 초왕의 부인을 데리고 잤으며 초왕궁에 머무는 동안 웬만한 초소왕의 잉첩들은 다 한번 씩 데리고 잤다.

 

  한편, 오자서는 각방으로 사람들을 놓아 초소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그는 모든 장수들에게 대가집 부녀를 겁탈하도록 권장했다. 손무와 백비 같은 사람도 이미 초나라 대부들의 집을 압수하고 거처하면서 그 집 처첩들을 마음대로 능욕했다. 당성공과 채소공은 영윤 낭와의 집을 뒤져 빼앗겼던 자기 물건을 찾아 오왕 합려에게 선사했고 그 대신 그들은 많은 보화들을 노략질했다.

 

  오자서는 호수 속에 묻혀있는 초평왕의 시신을 찾아내어 구절편(九節鞭)으로 3백 번이나 치고 발로 배를 밟고 눈을 뽑았다. 그리고는 토막 난 시체를 벌판에 버려 원수를 갚았다.

 

  손무는 오자서에게 백비가 교만하여 반드시 오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니 죽여 버리라고 하지만 오자서는 이를 거부한다. 손무는 은퇴를 결심하고 오왕이 하사한 황금과 비단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표연히 떠나갔다. 오자서가 승상이

되었다.

 

 오군이 떠나자 초소왕이 돌아왔다. 오나라를 적으로 선포한 월왕 자윤은 딸을 초소왕에게 보내 혼인하게 하였다. 이후 초나라는 부흥기를 맞았다. 한편, 제경공은 진()나라가 감히 초나라를 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진나라를 대신해서 천

하의 패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즈음, 노나라는 임금을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신하들의 세력이 컸다. 특히 계손, 맹손, 숙손 3가가 노나라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신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러니 노나라는 임금보다 3가의 권력이 더 컸고 3가보다 그들 가신들의 세력이 날로 팽창했다. 그런데 그들 3가들은 서로 반

목하고 있었다.

 

  그런 노나라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났다. 공자의 어머니 징재는 태몽으로 온 몸에 용비늘 같은 무늬가 있고 뿔이 하나뿐인 송아지만 한 기린 꿈을 꾸었고, 해산 때는 하늘에서 창룡 두 마리가 내려와 산 좌우를 지키는 가운데 동굴 속에서 태어났

. 아버지 숙량홀은 아이의 이름을 구(), 자를 중니(仲尼)라고 지었다.

 

  공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공자는 장성하자 키가 96촌이나 되었고 성덕(聖德)이 있는 데다 워낙 학문을 좋아했다. 공자는 두루 모든 나라를 다니며 보았고 그래서 그의 제자가 천하에 가득했다. 모든 나라 제후는 다 공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사모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권력과 부귀만을 아는 세상이라 어느 나라에도 공자를 써주지 않았다.

 

  공자는 여러 이상한 일들을 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하여 그의 박학(博學)이 온 천하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다 공자를 성인(聖人)이라고 했다. 제경공은 노나라를 약화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처녀 80여 명을 뽑아서 노래와 춤을 가르쳐 노나라에 보냈다. 노정공과 계손 사는 여색에 빠져 국정을 팽개치고 낮이면 노래와 춤으로 소일하고 밥이면 미인을 끼고 즐기었다. 견디다 못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그 후 공자는 송 () () 채나라를 전전하다가 노나라로 돌아갔다.

 

  한편, 초나라를 쳐부순 후 기고만장해진 오왕 합려는 장락궁이라는 큰 궁을 짓고 매일 환락에 빠져 있다가 옛날 일을 보복하기 위해 월나라를 치기로 했다. 오왕은 죽은 태자 파의 아들 부차를 태자로 책봉하였고 월왕 윤상이 죽은 틈을 이용해 월나라로 쳐들어갔다. 윤상의 아들 구천이 월왕이 되어 오왕과 전투를 벌였다. 오왕

합려는 이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부차가 오왕이 되어 3년 상이 끝나면 월나라로 쳐들어가 원수를 갚을 작정이었다. 드디어 오왕 부차가 월나라로 쳐들어갔고 월나라는 전투에 패하고 항복했다. 오자서는 월왕 구천을 죽이자고 간하지만 오왕 부차는 뇌물을 먹은 태재 백비의

의견을 좇아 월왕 구천 부부를 노예로 부리기로 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로 떠나기 전 신하들에게 일일이 각자 할 일을 확인 하고 지시한 다음 월나라를 떠났다. 월왕 부부는 합려의 무덤 곁 석실에 기거하면서 말을 기르는 신세가 되었고 오왕 부차가 수레를 타고 행차할 때는 언제나 말고삐를 잡고 걸었다. 오나라 백성들은 그를 조롱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에도 오자서는 수차에 걸쳐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간하지만 백비가 반대하여 구천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오왕 부차가 병이 나자 구천을 따르는 신하 범여가 점을 쳐 보고 그가 죽지 않을 것임을 먼저 알았고 병문안을 간 월왕 구천은 부차의 변을 핥으며 그가 완쾌할 것임을 아뢰었다. 부차는 구천의 행동을 보며 감동했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이 딴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를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왕 구천은 귀국한 후부터 오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 자신부터 가혹하게 다루었다. 잠도 오래 자지 않고 편안한 침상을 쓰지도 않았으며 쓰디쓴 쓸개를 달아놓고 수시로 그것을 핥으며 자신을 격려했다. 이리하여 그는 7년 동안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았고, 고기를 먹지 않았고,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오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오왕 부차에게 문안을 드렸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가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믿고 많은 땅을 하사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망하게 할 여러 계책들을 하나하나 실행하기 시작했다. 궁실을 짓는데 쓰일 나무를 공급하고, 2천여 명의 미녀 가운데서 선발한 두 여자 서

시와 정단을 부차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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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7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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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7권] 복수의 한을 품고 오나라로 도망친 오자서는 드디어 초나라를 정복하고 초왕을 부관참시하여 원수를 갚는다. 초나라와 진(晋)나라가 힘을 잃었고 강성해진 오나라가 이웃하고 있는 월나라를 쳐서 월왕 구천을 노예로 삼았다. 월왕 구천은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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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6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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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 列國志

                                                                   

[ 6 ]

패왕(霸王)의 길

 제령공은 태자 광을 폐하고 애첩 중자의 아들 공자 아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후환이 없도록 아주 공자 광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진평공은 여러 나라 제후에게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치자 제령공은 뒤를 식작과 곽최 두 사람에게 맡기고 도망을 간다. 그런데 두 사람을 시기한 내시 숙사위가 석문산의 매우 좁고 험한 산길을 막아버리고 가버리자 두 장수는 진군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진군에 붙들려가던 식작과 곽최는 쇠사슬을 끊고 탈출했다. 제령공이 병이 나자 공자 광은 공자 아를 태자로 세우게 한 서모 융자를 먼저 죽이고 태자로 선 아를 쳐죽였다. 병상에서 이를 보고 받은 제령공은 피를 두 말 가량 쏟고 침상 밑으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 이리하여 공자 관이 즉위했다. 그가 제장공이었다. 지난날 태자 광을 몰아내는데 공적을 세웠던 내시 숙사위는 대항하다 참수 당하였고 제장공은 그의 시체를 칼로 썰어서 젓을 담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나라는 진나라와 동맹하고 오래도록 싸우지 않았다.

 

  진()나라 하군부장 난영은 난염의 아들이고 난염은 범개의 사위다. 난염에게 출가한 범개의 딸은 난기였는데 난염이 죽었을 때 그녀는 나이가 40세로 한참 사내 맛을 알 나이였다. 그녀는 난씨 부중에 자주 드나들던 주빈과 교정을 했다. 그러던 중 난영이 진평공과 제나라를 치러가자 두 사람은 공공연히 교정을 했다. 난영

은 전쟁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난기는 친정아버지 범개에게 난영이 난을 일으키려한다고 모함했다. 난영은 성을 쌓도록 변방으로 쫓겨 가고 난씨 일문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범개는 자기 딸 난기가 서방질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역사를 보내 주빈을 찔러 죽였다. 난영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장공은 최저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의 부인 당강과 사통했고 최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장공에 대한 원한을 품었다.

 

  제장공과 함께 거나라를 치러 갔다가 전사한 기량의 아내 맹강은 3일 동안 밤낮없이 통곡하다 눈물이 마르자 마침내 두 눈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자 제나라 성이 크게 진동하며 무너졌다. 제나라 사람들은 성이 무너진 것이 맹강

의 기막힌 슬픔과 정성과 한 때문이라고 말했다. 후세 사람들인 진()나라 사람 범기량이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다가 죽었는데 그 아내 맹강이 남편을 찾아갔다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서 하도 슬피 울어서 성이 무너졌다고 전하는데 이 만리장성의 애화는 실은 제나라 장수 기량의 고사가 잘못 전해진 것이었다.

 

  최저가 거짓 병이 났다. 자나깨나 당강을 잊지 못한 제장공이 최저를 문병한다는 핑계로 당강을 만나러 왔다가 최저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하와 노포계는 훗날을 기약하며 거나라와 진()나라로 각각 달아나면서 동생 노포별에게 최저, 경봉에게 신임을 얻어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으라는 부탁을 하였다.

 

  최저는 태사 백에게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고 실록에 기록하라고 강요하지만 태사 백이 이를 거부하자 그를 죽였고 동생 중과 숙까지 그렇게 죽였다. 막내 동생 계도 똑 같이 사실을 기록하였지만 차마 계까지는 죽이지 못했다.

 

  한편, 손림부와 함께 위헌공을 국외로 몰아낸 영식은 아들 영희에게 위헌공을 복위 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희는, 위헌공으로부터 자신은 나라 일에 대해서 일체 간섭하지 않고 모든 결정을 영희에게 맡긴다는 조건으로, 위헌공을 도와 손씨 일족을 타도하였고 위상공을 태묘에 가두고 독주를 먹여 죽였으며 그의 궁속과 식구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쫓고 실권을 장악하였다권력을 전횡하던 영희는 공손 면여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마침내 진, 초 양 대국이 맹약을 하였고 이때부터 두 나라 간에는 싸움이 없어졌다. 한편, 제나라 우상 최저는 제장공을 죽이고 제경공을 군위에 세운 이후로 그 위세가 나날이 높아졌다. 그러자 후계 자리를 놓고 아들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경봉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저의 아들들을 죽이자 최저는 목을 매고 자살했다.

 

  어느 날 노포별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던 경봉은 노포별의 아내와 교정을 했다. 그 후로 나라 정사(政事)를 아들 경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처첩과 재물을 가지고 노포별의 집으로 아주 이사를 가서 밤마다 노포별의 아내와 동침했다. 그런가 하면 노포별도 아주 터놓고 경봉의 아내와 첩들과 예사로 교정했다. 그들은 한 집에 살면서 아내를 서로 바꾸어 데리고 잤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사이가 절친해졌다. 노포별은 노나라에 망명 중인 형님 노포계를 불러들였고 경사는 노포계와 딸을 결혼시켰다. 드디어 노포계가 거사를 하여 경사를 죽이자 경봉은 외국으로 달아났. 노포별 형제도 대부들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외방으로 쫓겨났다.

 

  초왕 웅미가 병이 나자 공자 위가 관끈을 풀어 그를 목 졸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령왕이었다. 초령왕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제후들의 회합을 주선하고 오나라를 쳐서 경봉을 잡아 참하였다. 그리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장화궁은 건설하였다. 진평공이 또한 이를 본받아 사기궁을 건설하였다. 돌 무더기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있었고 진평공은 병이 재발하여 죽었다. 진평공은 일시적인 사치 때문에 백성들을 가난으로 몰아넣고 병들어 죽은 것이었다. 진소공이 뒤를 이었다.

 

  초령왕은 진나라에서 사기궁을 짓자 모든 나라의 제후들이 축하를 한 반면 자신이 지은 장화궁에 대해서는 반응이 없자 크게 분노하여 진()나라와 채나라를 치기로 했다. ()나라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이 의견을 규합하여 초나라에 침략을 하지 말도록 서신을 보냈으나 초나라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두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진, 채 두나라를 초나라의 영토로 만든 초령왕은 주변의 허, , , , , 신 등 조그만 나라들의 임금들도 몰아내었다. 그런 초령왕도 서나라와의 전쟁을 하면서 오랫동안 궁성을 비우고 있다가 반란이 일어나 몰리게 되자 자결하고 말았다. 공자 간이 왕위에 올랐지만 공자 기질의 간계에 빠져 자살하고 기질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평왕이었다. 이후 초평왕은 빼앗았던 진, 채 두 나라와 주변 소국들을 모두 돌려주었다.

 

  진나라가 사기궁을 지은 후부터 모든 나라 제후들은 진나라의 속뜻이 그저 무사안일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자 각기 딴 뜻을 품게 되었다. 진소공은 주나라의 왕신 한 사람을 초빙하고 제후들을 소집했다. 대회가 열렸지만 진나라는 모든 나라의

맹주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진나라는 더욱 신임을 잃었다.

 

  제경공은 어떻게든 옛 제환공의 패업을 다시 한 번 일으켜 보려고 결심하고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자 백성들은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주변 나라들과 동맹을 맞고 하여 나날이 강대해져 마침내 진나라와 함께 천하 패권을 잡았

.

 

  그때 제나라 삼걸이라 자칭하는 공손첩, 전개강, 고야자 세 장수가 있었는데 결의형제를 맺은 세 사람은 그들의 공로와 용기만 믿고 시정과 여염 간을 횡행하며 못된 짓만 하고, 공경, 대부를 깔보고, 심지어 제경공 앞에서도 너, 내 하며 버릇없이 굴었다. 그러나 제경공은 그들의 용기를 사랑한 나머지 내버려 두었다.

 

  정승 안영은 근심 끝에 제경공이 내리는 복숭아 두 개로 세 사람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제나라 삼걸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진(), 연 두 나라가 쳐들어와서 제경공이 걱정하자 안영은 전양저를 추천하였고 그는 전쟁에서 두 나라 군사 목 만여 급을 참하고 개선하였으며 사마 벼슬을 받아 제나라 전 병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모든 나라의 제후들은 사마 양저의 소문만 듣고도 제나라를 두려워했다. 제경공은 국내 일은 안영에게 맡겼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날로 부강하고 사방이 무사했다.

 

  그래서 제경공은 날마다 사냥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마치 그 옛날에 제환공이 관중에게 모든 일을 쓸어 맡기고 놀 듯이 놀았다. 어느 날 밤 늦게 술 취한 제경공이 안영과 양저에게 차례로 술을 마시자고 청하지만 그들은 이를 긴급한 국사가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사신(史臣), 안영과 양저의 공로는 두 기둥이 하늘을 지탱한 것과 같았다고 시를 읊었다.

 

  초평왕은 태자를 진()애공의 여동생 무상공주 맹영과 혼인시키려다 맹영의 인물이 빼어난 것을 알고는 간신 비무극에게 꼬여 태자에게는 맹영의 시녀를 보내 혼인하게 하고 자신은 자부로 내정되었던 맹영을 첩으로 삼았다. 이 사실이 소문이 날것을 두려워 한 비무극은 태자 건을 변방으로 보냈고 후에 그가 반란을 도모한다고 모함했다.

 

  태자 건은 누명을 쓰고 송나라로 달아났다. 초평왕은 맹영의 소생인 진을 태자로 봉했다. 그 과정에서 초평왕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태자 건의 참모였던 태사 오사를 옥에 가두었고 후환이 두려워 그와 두 아들 오상과 오원을 함께 죽일 계획을 세워 오사에게 두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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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6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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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 6권] 초나라와 진(晋)나라가 중원의 맹주 자리를 놓고 패권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제나라가 급 성장하여 진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강대국들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 무상으로 이루어지고, 권력을 놓고 형제 간, 부자 간의 패륜적인 다툼이 계속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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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5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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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 列國志

                                                                   

[ 5 ]

열국(列國)의 군웅(群雄)

 초나라 초장왕은 군사를 일으켜 육혼 땅 오랑캐를 치고 마침내 낙수를 건너 군사를 주나라 경계로 상륙시켰다. 초장왕은 장차 천자를 위협하고 주나라와 함께 중

국 천하를 나누어 가질 배짱이었다. 주정왕은 초장왕이 괘씸했으나 힘이 없었다.

 

  한편, 초나라 영윤 벼슬에 있는 투월초는 초장왕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세도가 줄어들자 반란을 일으키자만 제압되었고 반군들은 모두 멸족을 당했다.

 

  초장왕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벌이고 허희에게 술을 따르고 권하게 했다. 그때 괴상한 바람이 불어 촛불들이 일시에 꺼지자 누군가가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허희는 그의 관() 끈을 잡아 끊고 초장왕에게 일렀다. 그러자 초장왕은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모든 신하들의 관 끈을 끊게 한 후 불을 밝히

게 하였다.

 

  ()나라에서는 진령공이 임금이 된 후 전혀 나라를 돌보지 않고 공녕, 의행부 두 간신과 더불어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 이때 하어숙이라는 공족의 부인이었던 정목공의 딸 하희가 있었다. 그녀는 절세미인이었고, 겸하여 달기와 문강같이 요염하고 음탕하였다. 그녀는 15살 때 꿈 속에서 하늘나라의 신선과 교정(交情)을 하면서 남자의 정액을 빨아들이는 법과 남자의 기운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꿈을 깬 후 그녀의 성적 기교는 대단해졌고 교정을 할 때마다 남자의 양기를 충분히 흡수해서 자기의 음을 보충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늙어갈수록 도리어 젊어졌다. 그녀는 자기 성교비법을 소녀채전지술(素女採戰之術)이라고 말했다. 출가하기 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정령공의 서형(庶兄) 만을 3년 만에 요사(夭死)시키기도 하였는데 하어숙은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 징서 하나를 낳고 기운이 빠져 죽고 말았다. 그녀는 아들을 성내에 공부하러 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가끔 서방질을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공녕과 이행부가 차례로 그녀와 상간하더니 드디어 진령공까지 합세하여 셋이서 함께 그녀와 음탕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 하징서가 참지 못하고 어머니와 놀아난 진령공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때 초나라에 풍신도 좋으려니와 문무를 겸비한 한 공족 대부가 있었는데 성은 굴씨요 이름은 무였다. 그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그것은 여자를 몹시 좋아하는 호색한이라는 것이었다. 굴무는 중국 고대 인물로서 8백여 년을 살았다는 팽조가 지은 남녀교접술에 관한 책만 늘 연구했다. 그는 여러 해 전에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하희를 본 적이 있었고 그녀가 남녀 교접의 특수한 비법을 알고 더욱 젊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초장공을 부추겨 진()나라로 쳐들어가게 했다.

 

  하징서는 붙잡혀 오체가 찢겨져 죽었고 하희는 초장왕과 공자 측이 서로 갖고자 하였으나 굴무가 이를 반대하였다. 초장왕은 그녀를 요즘 상처한 양로의 후처로 주어버렸다. 공자는 분하고 원통했고 굴무는 하희가 또 과부가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초나라는 다시 정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고 진()나라와도 전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진나라와 친한 송나라를 쳤다. ()나라는 노나라를 두고 진()나라와 각축하였다. 그때 진()나라에 두회라는 장사가 있었다. 그는 하루에 호랑이 다섯 마리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만큼 강하고 용맹하였다. 그런데 진()나라 장수 위과 형제와의 청초파(靑草坡) 전투에서 맥을 못 추고 비틀거리다 넘어져 생포되어 죽었는데 그때 위과의 눈에 한 노인이 풀을 양 손에 들고 두회가 움직일 때마다 풀로 발을 묶는 것이 보였었다.

 

  그날 밤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은, 자신이 위과 형제의 아버지 위주의 첩 조희의 아버지인데 위주가 죽고 나서 위과가 자신의 딸을 좋은 곳으로 개가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 보은을 위해 오늘 전투에서 풀로 두회의 발을 묶었다고 했다. 위과의 음덕에 조희의 아버지 혼령이 은혜를 갚은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도 사람들은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다는 말을 곧잘 쓴다.

 

  진()군은 크게 패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진()경공은 다시 천하를 제패하고 백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래서 제, 노 두나라와 친선을 맺고자 사신을 보냈다. 마침, , , , 조 네 나라의 사신이 함께 제경공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각각 애꾸눈에, 대머리에, 절름발이에, 꼽추였다. 이 모습을 본 제경공은 어머니 소태부인을 웃겨주기 위해 그들의 수레를 모는 사람들도 똑 같은 모습의 사람들을 골랐었다. 소태부인은 웃었지만 네 사신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고 반드시 제나라를 쳐서 복수를 하겠다고 별렀다.

 

  드디어 진(), , , 조 네 나라 연합군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중군 원수 극극은 중상을 입은 가운데서도 북을 치며 군사들을 독려하여 싸움에서 크게 이겼고 제경공은 본국으로 도망쳤다. 연합군은 관문마다 불을 지르며 제나라 서울로 행군했다. 하지만 제나라가 굴욕적인 화의를 청하였고 연합군이 이를 수락하였다. 제경공은 언제고 진나라를 쳐서 이번 싸움에 진 분풀이를 할 작정이었다.

 

  진나라 음녀 하희는 초나라로 붙들려가서 양로와 함께 산 지 1년이 못되어 양로가 전쟁에 나가자 그 동안을 참지 못하고 양로의 아들 흑요와 교정했다. 양로가 전쟁에서 죽었는데도 흑요는 아버지 시체도 찾으러 가지 않고 하희에게 미쳐 있었다. 서모와 자식이 배가 맞았다는 소문이 나자 하희는 부끄러워 정나라로 갈 작정이었다.

 

  굴무는 이때를 노려 하희를 정나라로 빼돌렸다. 그리고 사명(使命)을 팽개치고 그녀와 혼인을 한 후 진나라로 옮겨 성과 이름을 바꾸어 무신으로 행세하였고 초장왕에게는 이 사실을 서신으로 알려 주었다. 초장왕은 대로하여 무신의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이에 무신은 저주를 퍼부었으며 진경공으로 하여금 오나라와 우호를 맞게 하였고 오나라 군대를 도와 초나라를 침략하게 하였다. 이후 초나라는 오나라의 침략 때문에 한 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 무렵 진경공은 도안가를 더욱 신임했으며 지난날 진령공이 했던 것처럼 날마다 술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양산이 무너져 내리자 도안가는 이를 핑계로 진경공에게 무고하여 조씨 혈족을 모조리 씨를 말려 버린다. 다행히 만삭이던 조삭의 아내 장희만이 궁으로 피해 죽음을 모면하고 아들을 낳았다. 정영은 공손 저구와 의논 끝에 자신의 아이를 공손 저구와 함께 죽게 하고 조삭의 아이를 유모와 함께 데리고 맹산으로 들어가 깊이 숨었다. 3년 후 진경공은 꿈 속에서 봉두난발을 한 8척이나 되는 조씨 귀신의 구리 쇠망치를 얻어맞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진려공이 뒤를 이었다.

 

  초나라와 진()나라가 우호를 맺었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또 다시 전쟁을 벌였다. 초공왕이 전투 중 화살을 눈에 맞고 눈 한쪽을 잃고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와중에 중군 원수 공자 측이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여 작전을 망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초공왕은 그를 용서하였으나 공자 영제는 술책으로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염옹이 시로써 읊었다 술이 일만 가지 근심을 없앤다고 말하지 마

.

 

  초나라와 진나라는 중원의 패권을 두고 주변의 여러 나라를 복속하고 이용하면서 세력을 극대화하기에 진력을 다한다. 그들 사이에 끼인 진()나라 정나라 등은 양 강대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때에 따라 적절하게 화의와 배반을 계

속하게 된다. 약소국의 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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