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권 ]
섶에 누워 쓸개를 핥다.
오원의 자(字)는 자서다. 오자서는 키가 크고, 허리가 열 아름이나 되고, 두 눈썹 사이가 한 자 남짓하고,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힘은 산이라도 뽑을 만하고, 또 문무를 겸전한 인재였다. 오상은 아버지를 따라 죽고 오자서는 천신만고 끝에 오
나라로 피신했다.
오나라 공자 광이 오자서를 발견하였고 그와 친분을 유지했다. 오자서는 의형제를 맺은 전제를 광에게 소개하였다. 전제는 3개월 동안 왕료가 좋아한다는 생선 굽는 법을 배워서 돌아왔지만 왕료 곁에는 쇠처럼 강인한 아들 공자 경기가 늘 함께 있었고 왕료의 외숙인 엄여와 촉용 두 사람이 병권을 다 잡고 있는 실정이라 접근하여 왕을 죽인다 해도 정권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자서와 공자 광은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 왕실에서도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그러더니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어 주경왕은 동왕, 공자 조는 서왕이라 불리었다. 결국 진나라를 위시한 모든 나라 제후들이 주경왕을 왕실로 모셨다. 공자 조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평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자서는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통곡했다. 기회를 기다리던 공자 광은 엄여, 촉용 두 장수를 초나라로 출정시키고 오왕 왕료의 아들 공자 경기마저 정, 위 두 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는데 성공하고 거사를 진행했다. 왕료는 전제의 비수에 목숨을 잃었다. 전제 또한 왕료
의 군사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했다.
공자 광은 왕위에 올라 스스로를 합려라고 호(號)했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에게 도움을 받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초나라를 탈출한 백극완의 아들 백비는 오자서를 찾아갔다. 관상쟁이 대부 피리가 백비는 욕심이 많고 잔인하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오자서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자 경기가 자신을 노리며 결사대까지 모집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태산이라, 오자서에게 걱정을 말하자 오자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며 천민 요리를 추천한다. 요리는 자진해서 자신의 팔을 끊게 하고 가족을 몰살당하게 한 다음 경기를 찾아가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오자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13편의 병서 『손자(孫子)』를 지은 손무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했다. 오왕은 오자서의 강력한 권고로 손무를 상장으로 삼고
군사로서 대우하며 장차 초나라 칠 일을 맡겼다.
손무는 우선 도망 중인 엄여와 촉용을 잡아 죽였다. 오왕 합려는 딸이 죽자 백성들을 유인하여 남녀 만 명 이상을 생매장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명검 잠로가 초소왕의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알고는 자신의 어진 신하 수십 명을 죽였으며 손무, 오자서, 백비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치게 했다.
초나라의 영윤 낭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채소공의 갖옷과 구슬, 당성공의 숙상마가 욕심이 나서 두 제후를 감금하고 이를 빼앗았다. 채나라가 진(晋)나라에 간청하여 진나라 외에 열일곱 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를 치러갔다. 그런데 연합군 대장인 진나라의 범앙이 채소공이 뇌물을 주지 않자 비가 와서 싸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철수하였고 이를 본 모든 나라 제후들도 뿔뿔이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오나라가 초나라를 치는데 채, 당 두 나라가 동참하게 되었다. 오, 채, 당 세 나라 군사들은 파죽지세로 초나라를 쳐나갔다. 싸움에서 패한 영윤 낭와는 정나라로 달아났고 영성이 함락되기 직전 초소왕은 여동생 계간만 데리고 달아났다. 왕궁을 점령한 오왕 합려는 초왕의 부인을 데리고 잤으며 초왕궁에 머무는 동안 웬만한 초소왕의 잉첩들은 다 한번 씩 데리고 잤다.
한편, 오자서는 각방으로 사람들을 놓아 초소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그는 모든 장수들에게 대가집 부녀를 겁탈하도록 권장했다. 손무와 백비 같은 사람도 이미 초나라 대부들의 집을 압수하고 거처하면서 그 집 처첩들을 마음대로 능욕했다. 당성공과 채소공은 영윤 낭와의 집을 뒤져 빼앗겼던 자기 물건을 찾아 오왕 합려에게 선사했고 그 대신 그들은 많은 보화들을 노략질했다.
오자서는 호수 속에 묻혀있는 초평왕의 시신을 찾아내어 구절편(九節鞭)으로 3백 번이나 치고 발로 배를 밟고 눈을 뽑았다. 그리고는 토막 난 시체를 벌판에 버려 원수를 갚았다.
손무는 오자서에게 백비가 교만하여 반드시 오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니 죽여 버리라고 하지만 오자서는 이를 거부한다. 손무는 은퇴를 결심하고 오왕이 하사한 황금과 비단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표연히 떠나갔다. 오자서가 승상이
되었다.
오군이 떠나자 초소왕이 돌아왔다. 오나라를 적으로 선포한 월왕 자윤은 딸을 초소왕에게 보내 혼인하게 하였다. 이후 초나라는 부흥기를 맞았다. 한편, 제경공은 진(晋)나라가 감히 초나라를 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진나라를 대신해서 천
하의 패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즈음, 노나라는 임금을 국외로 추방할 정도로 신하들의 세력이 컸다. 특히 계손, 맹손, 숙손 3가가 노나라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가신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러니 노나라는 임금보다 3가의 권력이 더 컸고 3가보다 그들 가신들의 세력이 날로 팽창했다. 그런데 그들 3가들은 서로 반
목하고 있었다.
그런 노나라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났다. 공자의 어머니 징재는 태몽으로 온 몸에 용비늘 같은 무늬가 있고 뿔이 하나뿐인 송아지만 한 기린 꿈을 꾸었고, 해산 때는 하늘에서 창룡 두 마리가 내려와 산 좌우를 지키는 가운데 동굴 속에서 태어났
다. 아버지 숙량홀은 아이의 이름을 구(邱), 자를 중니(仲尼)라고 지었다.
공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공자는 장성하자 키가 9척 6촌이나 되었고 성덕(聖德)이 있는 데다 워낙 학문을 좋아했다. 공자는 두루 모든 나라를 다니며 보았고 그래서 그의 제자가 천하에 가득했다. 모든 나라 제후는 다 공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사모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권력과 부귀만을 아는 세상이라 어느 나라에도 공자를 써주지 않았다.
공자는 여러 이상한 일들을 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하여 그의 박학(博學)이 온 천하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다 공자를 성인(聖人)이라고 했다. 제경공은 노나라를 약화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처녀 80여 명을 뽑아서 노래와 춤을 가르쳐 노나라에 보냈다. 노정공과 계손 사는 여색에 빠져 국정을 팽개치고 낮이면 노래와 춤으로 소일하고 밥이면 미인을 끼고 즐기었다. 견디다 못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다. 그 후 공자는 송 → 정 → 진(晋) → 위 → 진(陳) → 채나라를 전전하다가 노나라로 돌아갔다.
한편, 초나라를 쳐부순 후 기고만장해진 오왕 합려는 장락궁이라는 큰 궁을 짓고 매일 환락에 빠져 있다가 옛날 일을 보복하기 위해 월나라를 치기로 했다. 오왕은 죽은 태자 파의 아들 부차를 태자로 책봉하였고 월왕 윤상이 죽은 틈을 이용해 월나라로 쳐들어갔다. 윤상의 아들 구천이 월왕이 되어 오왕과 전투를 벌였다. 오왕
합려는 이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부차가 오왕이 되어 3년 상이 끝나면 월나라로 쳐들어가 원수를 갚을 작정이었다. 드디어 오왕 부차가 월나라로 쳐들어갔고 월나라는 전투에 패하고 항복했다. 오자서는 월왕 구천을 죽이자고 간하지만 오왕 부차는 뇌물을 먹은 태재 백비의
의견을 좇아 월왕 구천 부부를 노예로 부리기로 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로 떠나기 전 신하들에게 일일이 각자 할 일을 확인 하고 지시한 다음 월나라를 떠났다. 월왕 부부는 합려의 무덤 곁 석실에 기거하면서 말을 기르는 신세가 되었고 오왕 부차가 수레를 타고 행차할 때는 언제나 말고삐를 잡고 걸었다. 오나라 백성들은 그를 조롱했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에도 오자서는 수차에 걸쳐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간하지만 백비가 반대하여 구천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오왕 부차가 병이 나자 구천을 따르는 신하 범여가 점을 쳐 보고 그가 죽지 않을 것임을 먼저 알았고 병문안을 간 월왕 구천은 부차의 변을 핥으며 그가 완쾌할 것임을 아뢰었다. 부차는 구천의 행동을 보며 감동했다.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이 딴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를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왕 구천은 귀국한 후부터 오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자기 자신부터 가혹하게 다루었다. 잠도 오래 자지 않고 편안한 침상을 쓰지도 않았으며 쓰디쓴 쓸개를 달아놓고 수시로 그것을 핥으며 자신을 격려했다. 이리하여 그는 7년 동안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았고, 고기를 먹지 않았고,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오나라로 사자를 보내어 오왕 부차에게 문안을 드렸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가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믿고 많은 땅을 하사했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망하게 할 여러 계책들을 하나하나 실행하기 시작했다. 궁실을 짓는데 쓰일 나무를 공급하고, 2천여 명의 미녀 가운데서 선발한 두 여자 서
시와 정단을 부차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