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열국지 5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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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주 열국지 제5권] 초장왕은 장차 중원으로 진출하여 주나라와 패권을 다툴 야망을 품고 있었고 진(晋)나라 또한 제위가 진경공, 진도공으로 이어지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하여 다시 한 번 제후들의 맹주가 되어 천하를 제패하고자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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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4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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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東周 列國志

[ 4 ]

이기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

  제효공은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해서 패후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구원이 있는 노나라를 치려하자 노희공은 초성왕을 부추겨 제나라 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초성왕은 제나라보다 송나라에 대한 원한이 더 컸다. 그래서 제후를 규합하여 함께 송나라를 쳤다. 송성공은 급히 진문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송나라를 도우려면 조, 위를 먼저 치고 초나라와 대항하여야 했다.

 

  초성왕은 본국으로 회군하기로 결정했지만 송득신은 자기 재주 만 믿고 송나라를 공격하면서, 진문공은 제와 진()나라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성득신은 완춘을 내세워 이를 역이용하는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실로 제후들 간에 혼전에 혼전을 거듭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진문공은 사로잡아 감금 중이던 조공공과 위성공도 풀어주면서 외교전에 활용하여 성득신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하고 망명 중에 약속했던 3(90)를 물러선 후에 초군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성득신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칼로 스스

로 자기 목을 치고 쓰러졌다.

 

  진문공은 맹회를 소집하고 주양왕을 초청하여 천하의 패권을 잡고 모든 나라의 제후를 규탄할 수 있는 방백의 명칭을 하사 받고 이를 선포하였다.

 

  진문공은 진목공과 함께 정나라를 치러 갔으나 진목공이 정문공이 보낸 책무에게 설득당하여 귀국해 버리자 진문공은 진목공의 배반에 격노했다. 진문공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세자 환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진양공이었다.

 

  진문공이 죽자 진목공은 정나라를 치기로 하였다 건숙과 백리해가 그를 말렸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여 건숙은 칭병하고 농촌으로 돌아갔다.

 

  맹명 등은 행군 도중에 정나라를 기습하고자 했던 계획이 누설되었다고 판단하고는 전리품을 챙겨 귀국하기 위해 조그만 활나라로 쳐들어가 노략질을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 소식을 들은 진양공은 효산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주력군은 진()군의 뒤를 따르게 했다. ()군은 효산에 도착하였고 점점 더 깊숙이 계곡 속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매복해 있던 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후퇴하는 진()군 앞에는 진()나라의 주력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은 대패했고

 

()군 장수 포만자, 맹명, 백을병, 서걸출이 생포되었다

 

  진양공은 포만자는 죽였지만 나머지 장수들은 모부인 영씨의 말을 듣고 풀어주었다. 범을 놓아 산으로 돌려보낸 격이었다. 초성왕은 태자 상신의 모함으로 투발 장군을 자결하게 했는데 진상을 알게 된 후 태자 상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상신은 아버지 초성왕을 목 졸라 살해하였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목왕이었다.

 

  초목왕이 등극하자 신하들 사이에 모함과 살육이 난무하였다. 그리고 몇 해 지나기 전에 초목왕은 군사를 일으켜 강나라, 육나라, 요나라, ()나라, 정나라를 쳤다. 때문에 중국에 혼란이 속출했었다. ()나라 맹명이 설욕을 위해 진()나라를 치러 갔다가 패하였다. 그 뒤 이번에는 진()나라가 진()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때는 맹명은 전장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맹명을 비겁자라고 비난했지만 진

목공만은 맹명을 믿었다. 언젠가 때가 올 것이라고.

 

  드디어 군사를 보충하고 병거를 수리하는 등 충분히 준비를 마친 맹명이 진목공과 함께 진()나라 정벌에 나섰다. 진목공이 재위 39년 만에 69세로 세상을 떠났고 태자 앵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진강공이었다. 진양공이 병이 나서 죽자 신하들 사이에 후계자를 두고 의견이 갈리고 다툼이 일어났다. 결국 어린 태자 이고가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가 진령공이었다. 그 과정에서 진()나라에 있던 공자 옹을 추대하다 다시 이고를 제위에 오르게 한 조돈은 진()나라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아버지 초성왕을 죽이고 제후가 된 초목왕은 중국을 제패하려는 뜻을 늘 품고 있었다. 그래서 정나라와 진()나라를 치게 했다. 정목공은 급히 진()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초군이 워낙 강하여 진나라 원군이 오기도 전에 정나라는 항복하고 말았으며 진()나라는 싸움에 이기고도 초나라가 무서워 항복했다. 채나라와 송나라가 굴복했고 제후와 노후도 초목왕에게 문안 인사를 드렸다. 초목왕은 중국을 제패한 백주(伯主)로서 자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나라의 맹주로 내려오는 진()나라만은 누르지 못했다.

 

  진강공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조돈에게 막히자 회군하였다. 조돈은 진()나라 책사 사회를 유인하여 데리고 가버렸고 고국에 돌아온 사회는 진(), () 두 나라의 평화를 간곡히 청했고 두 나라는 그 후로 수십 년 동안 각기 국경을 지키고 싸우지 않았다.

 

  주경왕이 승하하고 주광왕이 등극하였다. 초목왕도 죽었고 세자 여가 뒤를 이어 초장왕이 되었다. 조돈은 초나라의 국상을 이용하여 맹주의 지위를 다시 확고히 하기 위해서 제후들을 초빙하였고 제후들은 다시 진()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제소공이 병으로 죽자 공자 상인이 세자 사를 찔러 죽이고 군위에 올랐다 그가 제의공이었다.

 

  그는 어린 임금인 사를 죽이고 국모인 소희마저 감금하였으며 주 왕실에서 보낸 사신 선백마저 감금해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소희의 친정인 노나라를 침공하기까지 하였다. 노나라가 진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진령군이 일곱 제후들을 모아 제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자 그때서야 제의공은 많은 뇌물을 진나라에 바치고 소희는 노나라에, 선백은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노나라는 후환이 두려워 제의공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화해를 청했다.

 

  송양공의 부인 왕희는 송성공의 어머니이며 송소공의 할머니였다. 왕희는 늙었지만 음탕한 여자였다. 그녀는 송소공의 서동생 포를 사랑하여 정을 나누자고 덤벼들기도 하였는데 송소공이 국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에만 열중하자 그를 내쫓고 포를 임금의 자리에 세우기로 결심했다. 포 또한 제의공을 본받아 제위를 노리기로 작정하고 흉년을 틈타 2년이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칭송했다.

 

  그러자 기회를 잡은 왕희와 포가 반란을 일으켜 송소공을 죽였고 포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송문공이었다. 제나라 제의공은 천성이 간악하고 욕심이 많았다. 그는 공자 시절 마찰을 빚은 고관들에게 앙심을 품어 왔는데 제위에 오르자 그 앙갚음을 했다. 대부 병원의 묘를 파헤쳐 그 아들 병촉이 보는 앞에서 시체의 발목을 잘랐으며 날마다 음탕한 생활을 하면서 대부 염직의 아내를 가로채기까지 하여 원한을 샀다. 그런 일로 하여 그는 낮잠을 즐기다가 병촉과 염직에게 목이 달아났다. 제혜공이 뒤를 이었다.

 

  초장왕은 즉위한 지 3년이 지났으나 술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낼 뿐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죽음을 무릅쓴 충신들의 간언(諫言)이 있었고 다음 날부터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여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다. 마침내 초장왕은 천히 패권을 잡아 백업(伯業)을 성취하기로 했다. 한편, 지금까지 미약하나마 천하 패권을 잡았던 진()나라는 초나라가 강성해지는 걸 보고 ()나라와 우호를 맺고 초나라의 진출을 견제하기로 했다.

 

  진령공은 장성하면서 음탕하고 포악해졌다. 간신 도안가와 어울리면서 탄궁으로 백성들을 쏘기도 하고 영오라는 사나운 개도 길렀으며 궁중 요리사를 토막 내어 죽이기도 했다. 백성들이 진령공을 원망하고 모든 나라들이 진()나라에서 이탈되어 갔다. 조돈과 사회가 잘못을 간해도 고쳐지지 않았고 자객을 보내는 등 조돈을 죽이려고까지 하자 조돈은 아들과 함께 수레를 몰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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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4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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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4권] 각국의 제후들이 중원의 맹주를 노리는 가운데 진(晋)문공이 패권을 잡고 주양왕으로부터 방백의 명칭을 하사받았다. 晋, 秦 두 나라가 반목하게 되고 초나라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부자 간의, 형제 간의 제위 찬탈이 서슴없이 자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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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3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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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 列國志

 

[ 3 ]

영웅이 때를 만나니

 

 백리해는 건숙을 천거하여 진목공이 그를 모셔 왔고 진목공은 건숙을 우서장, 백리해를 좌서장으로 삼았다. 그때 그들은 둘 다 7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한편, 여희는 이극에 대항하기 위해 배우 우시의 계책에 따라 순식을 자신이 낳은 해제와 탁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세자 신생은 여희의 계교에 말려 진헌공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자 목을 매 자살했다. 여희는 공자 중이와 이오도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고 모함했다.

 

  중이는 구사일생으로 책나라로 도망쳤고 이오는 양나라로 달아났다. 진헌공이 운명하자 여희파들이죽임을 당했고 여희는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극은 여희의 시체를 끌어올려 여러 토막으로 참했다.

 

  중이는 귀국하기를 사양했고 이오는 진()나라의 도움을 배경으로 하여 귀국하기 위해 이극에게 백만평, 비정부에게 70만 평의 밭을 주고 진나라에 다섯 성을 바치겠다는 문서를 내놓았다. 진목공은 공자 칩을 보내 두 사람을 평가했다. 공자 칩은, 중이는 어질지만 진목공이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자 한다면 어리석은 이오를 택하라고 조언했다. 진목공은 이오를 군위에 올려 세웠다.

 

  제환공도 혼란에 빠진 진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몰고 왔다가 이오를 군위에 앉히기로 합의하고 돌아갔다. 그가 진혜공이었다. 그러나 진나라 백성들은 중이 대신 이오가 군위에 오르자 매우 실망했다. 군위에 오른 진혜공은 진나라와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이극과 비정부에게 주기로 했던 땅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불만스러워하자 오히려 이극을 죽여 버렸다. 많은 신하들이 분노하자 그들마저 모두 없애버리기로 했다. 또한 진부인(秦夫人)이 잘 대우하라는 어머니뻘 되는 가군을 겁탈하였다. 비정부 일당이 반란을 모의하다 적발되어 모두 처형을 당했다.

 

  비정부의 아들 비표는 진나라로 달아나 진목공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고했고 백리해는 진목공에게 진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날 때를 기다려 일을 도모하도록 조언

하였다.

 

  관중이 병으로 눕게 되자 제환공은 나라 정사를 누구에게 맡겨야겠는지 물었다. 포숙아는 너무 선악이 분명한 군자라 정치는 못하고 습붕에게 맡기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며 역아, 수초, 개방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아뢴다. 관중이 죽고 습붕이 뒤를 이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역아 등 세 사람을 밖으로 내쫓고 포숙아를 기용하였다.

 

  한편, 진혜공은 즉위한 뒤로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은 다섯 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진목공에게 곡식을 꿔 달라는 요청을 했다. 진목공은 불쾌했지만 건숙과 백리해의 조언대로 곡식을 꿔 주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는 반대로 진()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그러나 진혜공은 경정 및 한간의 말은 듣지 않고 곡식을 꿔 주지도 않았고 극예와 여이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빼앗아 가보라고

조롱까지 하였다.

 

  진목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로 쳐들어가서 진혜공과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진혜공은 목희의 목숨을 건 구명 활동 덕분에 죽음을 면했고 결국 약속했던 다섯 성을 진목공에게 바치고 세자 어를 볼모로 진나라에 보낸 다음 풀려날 수 있었다.

 

 제환공이 관중의 유언을 저버리고 역아 등 세 사람을 다시 등용하자 포숙아는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세 사람은 늙고 힘없는 제환공을 마음대로 속이며 모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흥하였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죽지 않으면 내쫓겼다. 제환공이 병이나자 역아와 수초는 침실 주위에 3장이나 되는 담을 둘러싸고 담 밑에 개구멍 하나를 뚫었으며 조석으로 어린 내시가 제환공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러 들락거렸다. 제환공은 그렇게 죽 한 그릇,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위에 있은 지 43, 73세에 죽어 갔다.

 

  선군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네 명의 공자가 자리다툼을 하면서 대치하기 2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결국 고호와 국의중이 모든 신하들을 이끌고 가서 무휴를 세우고 장례를 치르게 했다.

 

  송양공은 위, , 주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로 쳐들어갔다. 수초와 무휴가 죽고 역아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세 공자의 저항이 있었지만 소는 송나라의 힘을 빌어 군위에 올랐으니 그가 제효공이었다. 송양공은 제나라를 치고 태자 소를 군위에 올려 준 것을 무슨 천하에 큰 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만족해 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나라 제후들은 소집하고 제환공이 맡아 본 그 맹주의 자리를 자기가 맡아서 하기로 결심했다.

 

  송양공은 우선 조그만 나라들을 불러 동맹을 맺기로 하였지만 증나라와 등나라 임금이 늦게 도착하자 그 죄를 엄중히 다스린다면서 증나라 임금을 펄펄 끓는 가마솥에 잡아넣고 삶아 버렸고 이에 놀란 등나라 임금으로부터는 많은 뇌물을 받고 그를 풀어 주었다. 이 상황을 본 조공공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조나라를 치겠다고 한다. 공자 목이가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한 지 3개월이 지나도 승리하지를 못했다.

 

  송양공은 제나라와 초나라를 이용하여 맹주가 되려고 잔머리를 굴리다가 제후들이 모인 회합에서 오히려 초성왕의 포로가 되었고 초나라 군사들은 송나라로 쳐들어갔다. 우 땅 맹단에서 송양공과 같이 있다가 탈출한 공자 목이는 초성왕을 구하기 위해 제위에 올랐다. 임금을 볼모로 잡아 송나라를 함락하려던 초성왕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초성왕이 맹주들의 제후가 되었고 송양궁은 풀려나 송나라로 돌아가서 다시 제후가 되었다.

 

  송양공은 천하 패권을 잡으려다 도리어 초나라에 붙들려가서 갖은 곤욕을 당하고 원한이 골수에 스몄다. 그런데 정문공이 초나라에 가서 조례를 했다는 소문을 듣자 부아통이 터져 정나라를 치러 출발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초나라는 송양공이 떠나고 없는 송나라를 향했다. 송양공은 하는 수 없이 회군하였고 초나라와 목숨을 건 결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공손 고가 강한 초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간하자 송양공은 인의(仁義)로 초나라를 쳐부수겠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공격 시기를 놓쳐 크게 패하였고 자신은 넓적다리에 큰 부상까지 당했다. 초성왕은 정나라의 잔치 초대에 응

했고 두 생질녀를 후궁으로 삼는 파렴치한 작태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나라 공자 중이는 제강에게 빠져 매일 술과 환락에 지냈다. 이 꼴을 본 신하들이 제강의 도움으로 그를 모시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다가 초나라로 갔다. 초성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간 송양공이 죽고 세자 왕신이 즉위했다. 그가 송성공이었다. 염선은 송양공이 덕도 힘도 없었으니 춘추시대 5패의 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시로 읊기도 했다.

 

  진혜공이 죽고 어가 군위에 올랐으니 그가 진회공이었다. 중이는 진목공에게서 군사를 빌어 드디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나라 군사들은 물러나고 성문을 열어주고 하는 등으로 중이를 반겨 주었고 진회공은 고량 땅으로 달아났다. 중이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진문공이었다. 43세의 나이로 고국을 떠나 19년 후인 62세에 제후에 등극하였던 것이다. 진문공은 고량 땅에 숨어 있던 진회공을 암살하였다.

 

  모든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주유 시절 허벅지 살을 도려 진문공에게 먹인 천성이 청렴결백한 선비 개자추는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칭병하고 집안에서 노모를 모시고 있다가 면산으로 들어갔다. 뒤 늦게 논공행상에서 개자추가 빠진 것을 안 진문공이 그를 찾으러 면산까지 갔으나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산에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불이 꺼지고 확인 결과 모자는 서로 안고 버드나무 밑에서 타 죽어 있었다. 불을 지른 날이 절후로 청명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사람들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3월이 되면 해마다 일절 불을 피우지 않고 한 달 동안 찬 음식을 먹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찬 음식을 먹는 일수가 점점 줄어들었으며 청명 바로 하루 앞날이 한식일(寒食節)이 되었다. 한식날엔 집집마다 문에다 버들을 꽂는데 이는 버드나무 밑에서 죽은 개자추의 영혼을 초혼한다는 뜻이며 들에서 제사를 지내고 지전(紙錢)을 태우기도 하는 것 또한 개자추를 사모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진문공은 그 후로도 나라 다스리는 데 힘 써 진나라는 크게 번성했다.

 

  주양왕은 정문공이 초나라를 섬기며 중국과 거래를 하지 않자 책나라로 하여금 정나라를 치게 했다. 정나라는 함몰되었고 주양왕은 책나라 임금의 딸 후숙외를 중궁으로 삼았다. 그런데 숙외가 주양왕의 서동생 태숙 대와 간통을 하고 그것이 탄로나자 책나라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고 주양왕은 정나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나라 제후들께 서신을 보내 태숙의 무도함을 알렸다. 모든 나라의 사신들이 와서 그를 위로해 주었고 진문공과 진목공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도와

주러 왔었다. 진문공은 주양왕을 복위시키고 네 고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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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3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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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제3권] 백리해와 건숙을 얻은 진(秦)목공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배반을 일 삼는 진(晋)혜공에게 실망하였다. 진(晋)나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진문공이 제위에 올라 나라가 융성해졌다. 천하의 패권을 잡으려던 송양공은 욕심이 지나쳐 초성왕에게 체포되어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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