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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3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7월
평점 :
절판
東周 列國志
[ 제 3 권 ]
영웅이 때를 만나니
백리해는 건숙을 천거하여 진목공이 그를 모셔 왔고 진목공은 건숙을 우서장, 백리해를 좌서장으로 삼았다. 그때 그들은 둘 다 7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한편, 여희는 이극에 대항하기 위해 배우 우시의 계책에 따라 순식을 자신이 낳은 해제와 탁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세자 신생은 여희의 계교에 말려 진헌공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자 목을 매 자살했다. 여희는 공자 중이와 이오도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고 모함했다.
중이는 구사일생으로 책나라로 도망쳤고 이오는 양나라로 달아났다. 진헌공이 운명하자 여희파들이죽임을 당했고 여희는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극은 여희의 시체를 끌어올려 여러 토막으로 참했다.
중이는 귀국하기를 사양했고 이오는 진(秦)나라의 도움을 배경으로 하여 귀국하기 위해 이극에게 백만평, 비정부에게 70만 평의 밭을 주고 진나라에 다섯 성을 바치겠다는 문서를 내놓았다. 진목공은 공자 칩을 보내 두 사람을 평가했다. 공자 칩은, 중이는 어질지만 진목공이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자 한다면 어리석은 이오를 택하라고 조언했다. 진목공은 이오를 군위에 올려 세웠다.
제환공도 혼란에 빠진 진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몰고 왔다가 이오를 군위에 앉히기로 합의하고 돌아갔다. 그가 진혜공이었다. 그러나 진나라 백성들은 중이 대신 이오가 군위에 오르자 매우 실망했다. 군위에 오른 진혜공은 진나라와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이극과 비정부에게 주기로 했던 땅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불만스러워하자 오히려 이극을 죽여 버렸다. 많은 신하들이 분노하자 그들마저 모두 없애버리기로 했다. 또한 진부인(秦夫人)이 잘 대우하라는 어머니뻘 되는 가군을 겁탈하였다. 비정부 일당이 반란을 모의하다 적발되어 모두 처형을 당했다.
비정부의 아들 비표는 진나라로 달아나 진목공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고했고 백리해는 진목공에게 진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날 때를 기다려 일을 도모하도록 조언
하였다.
관중이 병으로 눕게 되자 제환공은 나라 정사를 누구에게 맡겨야겠는지 물었다. 포숙아는 너무 선악이 분명한 군자라 정치는 못하고 습붕에게 맡기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며 역아, 수초, 개방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아뢴다. 관중이 죽고 습붕이 뒤를 이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역아 등 세 사람을 밖으로 내쫓고 포숙아를 기용하였다.
한편, 진혜공은 즉위한 뒤로 해마다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은 다섯 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진목공에게 곡식을 꿔 달라는 요청을 했다. 진목공은 불쾌했지만 건숙과 백리해의 조언대로 곡식을 꿔 주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는 반대로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그러나 진혜공은 경정 및 한간의 말은 듣지 않고 곡식을 꿔 주지도 않았고 극예와 여이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빼앗아 가보라고
조롱까지 하였다.
진목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로 쳐들어가서 진혜공과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진혜공은 목희의 목숨을 건 구명 활동 덕분에 죽음을 면했고 결국 약속했던 다섯 성을 진목공에게 바치고 세자 어를 볼모로 진나라에 보낸 다음 풀려날 수 있었다.
제환공이 관중의 유언을 저버리고 역아 등 세 사람을 다시 등용하자 포숙아는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세 사람은 늙고 힘없는 제환공을 마음대로 속이며 모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복종하는 사람은 흥하였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죽지 않으면 내쫓겼다. 제환공이 병이나자 역아와 수초는 침실 주위에 3장이나 되는 담을 둘러싸고 담 밑에 개구멍 하나를 뚫었으며 조석으로 어린 내시가 제환공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러 들락거렸다. 제환공은 그렇게 죽 한 그릇,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위에 있은 지 43년, 수 73세에 죽어 갔다.
선군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네 명의 공자가 자리다툼을 하면서 대치하기 2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결국 고호와 국의중이 모든 신하들을 이끌고 가서 무휴를 세우고 장례를 치르게 했다.
송양공은 위, 조, 주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로 쳐들어갔다. 수초와 무휴가 죽고 역아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세 공자의 저항이 있었지만 소는 송나라의 힘을 빌어 군위에 올랐으니 그가 제효공이었다. 송양공은 제나라를 치고 태자 소를 군위에 올려 준 것을 무슨 천하에 큰 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만족해 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나라 제후들은 소집하고 제환공이 맡아 본 그 맹주의 자리를 자기가 맡아서 하기로 결심했다.
송양공은 우선 조그만 나라들을 불러 동맹을 맺기로 하였지만 증나라와 등나라 임금이 늦게 도착하자 그 죄를 엄중히 다스린다면서 증나라 임금을 펄펄 끓는 가마솥에 잡아넣고 삶아 버렸고 이에 놀란 등나라 임금으로부터는 많은 뇌물을 받고 그를 풀어 주었다. 이 상황을 본 조공공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조나라를 치겠다고 한다. 공자 목이가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한 지 3개월이 지나도 승리하지를 못했다.
송양공은 제나라와 초나라를 이용하여 맹주가 되려고 잔머리를 굴리다가 제후들이 모인 회합에서 오히려 초성왕의 포로가 되었고 초나라 군사들은 송나라로 쳐들어갔다. 우 땅 맹단에서 송양공과 같이 있다가 탈출한 공자 목이는 초성왕을 구하기 위해 제위에 올랐다. 임금을 볼모로 잡아 송나라를 함락하려던 초성왕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초성왕이 맹주들의 제후가 되었고 송양궁은 풀려나 송나라로 돌아가서 다시 제후가 되었다.
송양공은 천하 패권을 잡으려다 도리어 초나라에 붙들려가서 갖은 곤욕을 당하고 원한이 골수에 스몄다. 그런데 정문공이 초나라에 가서 조례를 했다는 소문을 듣자 부아통이 터져 정나라를 치러 출발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초나라는 송양공이 떠나고 없는 송나라를 향했다. 송양공은 하는 수 없이 회군하였고 초나라와 목숨을 건 결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공손 고가 강한 초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간하자 송양공은 인의(仁義)로 초나라를 쳐부수겠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공격 시기를 놓쳐 크게 패하였고 자신은 넓적다리에 큰 부상까지 당했다. 초성왕은 정나라의 잔치 초대에 응
했고 두 생질녀를 후궁으로 삼는 파렴치한 작태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진(晋)나라 공자 중이는 제강에게 빠져 매일 술과 환락에 지냈다. 이 꼴을 본 신하들이 제강의 도움으로 그를 모시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다가 초나라로 갔다. 초성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간 송양공이 죽고 세자 왕신이 즉위했다. 그가 송성공이었다. 염선은 송양공이 덕도 힘도 없었으니 춘추시대 5패의 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시로 읊기도 했다.
진혜공이 죽고 어가 군위에 올랐으니 그가 진회공이었다. 중이는 진목공에게서 군사를 빌어 드디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진(晋)나라 군사들은 물러나고 성문을 열어주고 하는 등으로 중이를 반겨 주었고 진회공은 고량 땅으로 달아났다. 중이가 제위에 올랐다 그가 진문공이었다. 43세의 나이로 고국을 떠나 19년 후인 62세에 제후에 등극하였던 것이다. 진문공은 고량 땅에 숨어 있던 진회공을 암살하였다.
모든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주유 시절 허벅지 살을 도려 진문공에게 먹인 천성이 청렴결백한 선비 개자추는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라며 칭병하고 집안에서 노모를 모시고 있다가 면산으로 들어갔다. 뒤 늦게 논공행상에서 개자추가 빠진 것을 안 진문공이 그를 찾으러 면산까지 갔으나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산에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불이 꺼지고 확인 결과 모자는 서로 안고 버드나무 밑에서 타 죽어 있었다. 불을 지른 날이 절후로 청명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사람들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3월이 되면 해마다 일절 불을 피우지 않고 한 달 동안 찬 음식을 먹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찬 음식을 먹는 일수가 점점 줄어들었으며 청명 바로 하루 앞날이 한식일(寒食節)이 되었다. 한식날엔 집집마다 문에다 버들을 꽂는데 이는 버드나무 밑에서 죽은 개자추의 영혼을 초혼한다는 뜻이며 들에서 제사를 지내고 지전(紙錢)을 태우기도 하는 것 또한 개자추를 사모하는 뜻이라는 것이다. 진문공은 그 후로도 나라 다스리는 데 힘 써 진나라는 크게 번성했다.
주양왕은 정문공이 초나라를 섬기며 중국과 거래를 하지 않자 책나라로 하여금 정나라를 치게 했다. 정나라는 함몰되었고 주양왕은 책나라 임금의 딸 후숙외를 중궁으로 삼았다. 그런데 숙외가 주양왕의 서동생 태숙 대와 간통을 하고 그것이 탄로나자 책나라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고 주양왕은 정나라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나라 제후들께 서신을 보내 태숙의 무도함을 알렸다. 모든 나라의 사신들이 와서 그를 위로해 주었고 진문공과 진목공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도와
주러 왔었다. 진문공은 주양왕을 복위시키고 네 고을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