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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2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7월
평점 :
절판
東周 列國志
[ 제 2 권 ]
관중(管仲)과 포숙(鮑叔)
제나라로 시집온 왕희는 제양공이 음탕무도하며 문강과도 관계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속을 썩이다 병이 나서, 시집 온 지 불과 1년이 못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강은 아들 노장공을 불러 제양공의 갓난 딸과 혼인하도록 명했고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노장공은 정혼을 했다. 그러고 보니 노장공과 제양공의 사이는 외삼촌과 생질 사이일 뿐만 아니라 장인과 사위 사이가 되어 그 후 고금에 보기 드문 친한 사이가 되었다. 부친이 원통하게 죽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섬긴 노장공을 후세 사람들은 비웃었다.
제양공은 사냥을 나갔다가 귀신을 보고 쓰러졌는데 마침 오랜 변방 근무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 앙심을 품은 연칭이 반란을 일으켜 제양공을 살해하였다. 연칭과 관지부는 제나라로 돌아와 공손 무지를 군위에 올렸고 각자 벼슬을 차지하였다. 특히 관지부는 관이오를 천거했는데 관이오는 후세 제갈공명이 자기를 관이오에 비교했을 만큼 사상(史上)에 유명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
관이오(管夷吾)의 자(字)는 중(仲)이니 그는 나면서부터 용모가 걸출하고 총명이 출중했다. 널리 고금 서적에 통달하고 경천위지의 재능과 세상을 바로잡고 시대를 구제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다. 그런데 장사가 끝나면 하루의 수입을 항상 포숙아보다 배 이상을 가지고 갔다. 포숙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항상 불평했다. 게다가 함께 전쟁에 나가서도 싸움터에서는 뒤에 숨었고 돌아갈 때는 항상 맨 앞에 서서 걸었다. 사람들은 관중을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럴 때마다 포숙은 관중은 노모를 모시기 때문이라며 항상 그를 두둔했다.
관이오는 이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깊이 탄식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이다’라고. 이 유명한 말은 후세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마침내 그들은 생사를 함께하자는 교우의 의를 맺었고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하였다.
관중과 포숙아는 제양공의 공자 규와 소백을 각각 맡아 그들의 스승이 되면서 나중에 둘 중에 누구든 군위에 오르면 서로 천거하여 한 임금 밑에서 일하기로 약속했다. 공손 무지가 군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옹름에 의해 피살되었고 규와 소백
이 제후의 자리를 놓고 각축하다 소백이 군위에 올랐다. 그가 제환공이었다.
공자 규는 노장공의 도움을 받았으나 제환공과의 전투에서까지 패하였고 포숙아의 편지를 받은 노장공은 규를 죽였다. 이때 관중 또한 잡혀서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포숙아가 목숨을 구해주고 제환공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제환공은 격식을 갖춰 그를 맞아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한편 이때, 초나라는 바야흐로 강성했고 항상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주리왕 원년 봄에 제환공은 관중의 의견을 좇아 왕명을 받고 제후들의 회합을 소집하였다. 제환공은 왕명으로써 송, 노, 진, 채, 위, 정, 조, 주 등 모든 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드디어 제, 송, 진, 채, 주 다섯 나라가 모였고 한 사람의 수장을 추대하기로 하여 제환공이 맹주가 되었다. 하지만 불만을 가진 나라도 없지않았다. 제환공은 이들도 모두 제압하고 드디어 모든 나라들을 불러 모아 삽혈동맹하고 비로소 맹주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오패(五霸) 중에 첫 번째 패후로 손꼽히게 되었다.
주나라 왕실은 난이 일어나 매우 시끄러웠다. 정여공은 망명 중인 주혜왕을 도와 복위시켰다. 정여공이 죽고 정문공이 뒤를 이었다. 노부인 문강은 제양공이 참살당한 후에도 음탕한 마음을 참지 못하였고 늙을수록 더욱 음욕을 즐겼다. 그러나 문강은 제양공만큼 자기를 만족시켜 주는 남성이 없음을 항상 탄식했다. 노장공은 문강의 유언을 따라 정혼했던 제양공의 딸과 혼인하였다. 제환공은 주혜왕의 명을
받아 위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진(晋)나라는 익과 곡옥으로 분열되어 대대로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곡옥이 익을 통합하여 진무공이 등극하였고 그 후 진헌공이 뒤를 이었다. 진헌공이 세자로 있을 때 그는 3명의 처첩이 있었다. 아버지 진무공도 아들만큼 여색을 좋아하여 만년에 제환공의 장녀 제강을 얻었다. 하지만 진무공은 생각만 간절할 뿐 남자 구실을 못했다. 나이 어리고 아름다운 사춘기의 제강이 늙은 진무공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을 눈치 챈 진헌공이 서모(庶母)되는 제강에게 눈독을 들이다 마침내 통정을 하여 아들까지 낳게 되었고 그 아이 신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군위에 오른 지 15년 후 진헌공이 여융을 치자 그는 두 딸 여희와 소희를 진헌공에게 바쳤다. 여희는 절세미인이었다. 진헌공은 이제 지난날의 제강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렸다. 진헌공은 사소를 불러 점을 쳤다. 사소는 ‘옛날 하나라의 걸왕은 말희를 총애하다 나라를 망쳤고, 은나라 주왕은 달기를 사랑하다 은나라를 망쳤으며, 주유왕은 포사를 총애하다 서주를 망쳤으니 주공도 여희를 지나치게 사랑하니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헌공은 미소년 배우 시를 무척 사랑하여 잠자리까지 같이 하였는데 시는 마침내 여희와도 간통을 하게 되었다. 여희는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기 위해 시를 통하여 양오와 동관오를 매수하였고 세자들을 변방으로 쫓아 버렸다. 그런데 세자 신생이 싸움에 나가 공을 세우고 백성들 사이에 이름을 날리자 여희는 그를 특히
시기하고 미워했으며 세자에 대한 모략도 점점 흉측해져 갔다.
제환공의 칭송이 퍼지자 초성왕은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 우선 정나라를 정복하기로 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제환공은 일곱 제후와 협력하여 초나라를 치러 갔다. 초성왕은 굴완을 보냈고 결국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진(秦)나라의 진목공은 진헌공의 딸과 혼인하기로 했다. 그때 백리해는 신부 백희의 종으로 진나라를 향해 가다가 초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백리해는 원래 우나라 태생이었는데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여러 나라를 떠돌고 있었는데 진목공의 눈에 띄었고 염소 가죽 다섯 장을 초왕에게 주고 그를 데리고 와서 상경 벼슬을 주고 정사를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중원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와 초나라가 각축하는 가운데 각 나라들은 군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자들의 권모술수가 끊임없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