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10. 발해여 발해여

  황제의 탄일을 맞아 어화원에 푸짐한 연석이 차려졌다. 장복사가 썩 앞으로 나서 대건진을 포박하게 한다. 삽시에 대건진은 포박당하고 입에 재갈이 물렸다. 무혈반정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려던 대건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황후 양아림이 황제의 밀조를 위조하여 과감히 장복사와 임천중, 김진문을 설득한 게 이번 정변의 골간이었다.

   

  황제 대현석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서둘러 장자 대위해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조정은 사분오열되었다. 적손과 방계손의 대립이 극에 달했고 황제의 근신과 태자를 받드는 신하들 간에 갈등이 첨예해졌다. 태풍을 예고한 것은 황후 양아림의 급서였다.

 

  사도 오윤문, 우윤 나덕구, 황후의 시해를 주도한 태의 임선도가 전면에 나서고 태자 대위해는 가볍게 조정을 장악했다. 대위해는 아우 대봉예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려던 황후를, 용상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독살했다. 갑인(894), 참으로 질긴 목숨, 병석에 누워 7년을 버틴 황제 대현석이 승하했고 대위해가 등극했다.

 

   행궁으로 사냥 행차했던 대위해가 낙마하여 허리와 다리를 쓰지 못하고 병석에 누웠다. 그러자 운칠현이 황제의 병은 황음무치함을 징치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상소를 올리자 황제는 대로하여 그들 모두를 변방으로 유배시켜버린다.

 

  도사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하늘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는 단약을 복용한 대위해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대위해는 그 동안 참았던 욕정을 풀기 위해 미소년들을 불러들이고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들었다.

 

  당나라에서는 주전충이 황제 이엽을 자객을 시켜 주살하고 아들 이축을 옹립했고 거란에서는 야율아보기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나라 한인들은 내란에 휩싸여 곤궁해지자 거란으로 피란했고 야율아보기는 이들을 흔쾌히 받아들여 농경에 힘쓰게 하고 물산을 장려했다.

 

  탐음에 끝이 있을까마는 대위해의 음란은 한이 없었다. 그러자 차츰 정기가 쇠하였고 어린 진녀와 동침하면서 젊은 기운을 섭취한다는 재접술에 빠지기도 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몸에 지니면 늙지 않고 천하장사처럼 힘이 넘친다는 오윤문의 말을 듣고 진신사리를 손에 넣기로 했다.

  황명을 받든 오윤문은 법화사의 석탑을 헐고 사리를 탈취했다. 사리함을 침궁에 안치한 대위해는 대사령을 선포하고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는 조서를 내렸다. 오윤문에게 작위를 내려 객국공으로 삼고 오미랑이 낳은 대한상을 태자로 책봉했다.

 

  황자비 임경의 아버지 임좌진이 정궁인 황후 오승지가 낳은 대인선이 있는데도 후궁의 자손을 책봉함은 천륜을 어긴 것이라 주품하자 대위해는 임좌진을 삭탈하여 유배하고 황자비를 폐했다. 사가로 돌아간 임경은 자결하고 말았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운칠현은 황음무도한 황제를 방벌하여 사직을 바로잡기로 결의한다. 행궁 행차가 있던 밤, 오윤문과 황제의 목이 달아났다. 대인선이 황위에 올랐다. 대인선은 고발규의 딸 고사은을 황후로 맞아들였다. 침궁에 있던 가짜 진신사리는 폐기했다.

 

  정묘(907)4, 주전충은 이축에게 황위 선양을 요구하고 황제를 폐했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양나라를 개국했다.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을 겪으며 혼란에 빠졌던 당나라는 마침내 창업 276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세력이 강성해진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넘보게 되었고 이를 말리던 그의 외숙 야율할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두 아들과 함께 투항했다. 발해 조정에서는 그의 처우에 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인선은 그들에게 벼슬을 제수했다.

  대인선의 신임이 두터워진 야율할저는 군사 조련장을 찾아 훈련 과정을 보며 거란군과 대응할 수 있는 전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수군의 위용을 살펴보겠다며 홀한해로 향했다. 얼마 후 미사건이 군사를 재촉하여 야율할저를 뒤쫓았다.

 

  추격군이 야율할저의 큰아들 야율무정의 목을 베자 야율할저는 도망쳤고 편전에 엎드려 내막을 대인선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호위 장수 이강국을 문초하여 전모가 밝혀졌다. 태복경 겸 보국대장군 양금당이 배후에 있고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이 공모했단다.

  양금당과 이강국을 즉시 참수하고 두 재상은 귀양을 보냈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황명의 부당함을 주청하자 대인선은 진노하여 유배된 오소도와 대성악을 참하고 배구를 비롯한 강직한 신하들을 모두 삭탈하여 하옥했다.

 

  거란군들이 부여성으로 침공하자 야율할저를 피신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피신한다던 야율할저는 호위 군사들을 모두 죽이고 거란으로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발해의 동량지신들을 많이 죽이고 중요한 군사 정보까지 몽땅 빼내어 거란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대인선은 대노하였고 화를 달래기 위해 호계주를 너무 과하게 마셔 이틀 뒤 깨어났을 때는 사수(邪祟) 증세를 보였다. 총애하던 달시화를 목을 쳐 죽이고 말갈인들이 추앙하던 도사들을 주살했다. 신하들은 성정이 종잡을 수 없는 황제를 여색에 빠져들게 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여색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궁궐이 조용했고 신하들이 평안했다.

 

  대인선은 황자 대광현을 태자로 책봉하고 강역 순무에 나섰다. 그는 비사성에서 호족 왕계희의 딸 왕수량을 취하여 환락경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지난날 왕수량과 은밀히 정을 통했던 장시도가 그녀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대인선은 분노하여 왕수량과 장시도를 고문하여 죽이고 장시도의 아버지도 죽였으며 왕계희와 가솔들도 처형하여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와중에 왕계희의 세 아들은 도망쳤고 사돈 이한걸은 가솔들을 피신시키고 홀로 처형당했다.

 

  대인선은 홀한성에 도착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기 전에 비사성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들불처럼 번져갔고 크고 작은 봉기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대인선은 자신이 주관한 궁술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황자 대광천의 후궁 고명회를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술수를 써서 그녀를 취한다.

 

  추위가 가실 즈음 황친 대진해와 대선덕이 황궁을 점령하고 도성을 장악했으며 거란 사신으로 북방을 향했던 황자 대광천이 급거 환궁해 별궁으로 진병하기 위해 군사를 점고한다는 소식이다. 대인선은 몽진을 결정하고 동경용원부로 향했고 대광현은 반란군 주역들에게 옹립되어 황위에 올랐다.

 

  대진해가 장악한 홀한성과 황제가 파천한 동경성은 비슷한 시각에 각처의 반란군 진영에 밀사를 보내지만 그들을 쉽게 응대하지 않았다. 날이 풀리자 동경성의 고정웅이 군사를 이끌고 홀한성을 향해 진군했고 홀한성의 신주필이 응전했다. 지루한 공방전을 펼치던 가운데 야간 기습으로쫓겨 도성으로 들어온 오광찬이 대진해를 베고 황궁과 도성을 점령했고 신주필은 대광천의 수급을 대인선에게 바치고 항복했다. 하지만 처처에서 우후죽순처럼 반란이 일어 수습할 길이 묘연했다.

 

  당나라를 멸망시켰던 주전충은 아들 주우규에게 살해되었고 주우규는 아우 주우정의 손에 죽었으며 주우정은 끝내 자살하고 말아 양나라도 무너졌다. 다시 당나라의 천지가 되었다.

   

  고명지를 부러워한 고명회가 고명지처럼 몸을 만들기 위해 몸 안을 강하게 수축시킨다는 처방을 받아 노력한 결과 대인선은 밤마다 고명회의 치마폭에 묻혀서 고명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명회가 고명지의 황자를 잠시 보고난 후 황자가 숨을 거두었고 고명회의 집에서 술사의 부적과 저주의 인형이 발견되자 고명회는 그날로 폐출되어 참수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아버지 고정균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집 곳간에 하도 많은 뇌물이 넘쳐나 도성 밖에 곳간을 크게 지었다. 그러면서 사검단(査檢團)을 만들어 백관을 감시하기까지 했다. 고정균은 사검단이 밝혀냈다는 역모 가담 관리들도 무수히 처단했다.

 

  대인선은 고필진에게 부월을 주어 요주의 거란을 무찌르게 했다.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요동 땅을 시작으로 발해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대인선은 나라 안팎이 불안한데도 피한하기 위해 별궁으로 행차했다가 졸중풍으로 쓰러졌다. 며칠 후에 겨우 정신이 돌아섰고 소리도 알아들을 만큼 좋아졌다.

 

  고정균의 모함으로 폐태자가 되어 별궁에 머물던 대광현은 호계주를 마시고 고명지와 어울렸다. 왕진경을 비롯한 반란군이 비사성을 탈취했다. 대인선이 금군을 보내 대광현을 체포하려 하지만 그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당나라와 연합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배구는 소득없이 돌아왔다.

 

  발해 조정에서는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당나라는 믿을 수 없고, 고려와 신라의 원군은 바랄 수도 없었다. 더욱이 발해 강역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도처에 도적이 들끓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인선은 위무책으로 대사령을 내렸다.

  대광현이 반란군의 주역들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왔고, 조정은 반란을 일으킨 말갈을 먼저 제압하자는 의견과 당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대인선은 드디어 말갈의 토평을 결정하고 군사들을 보냈으나 그들은 처참하게 패배하였고 남은 군사들은 고려에 투항하고 말았다.

 

  을유(925)년 섣달,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는 발해 정복을 위해 출정했다. 대인선이 또 다시 쓰러졌고 부여성이 함락되었다. 노재상 장사진과 군사들이 사력을 다했지만 홀한성이 함락되었고 대인선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하얀 옷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채 양 한 마리를 끌고 야율아보기에게 항복했다.

 

  작가의 수년간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소설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작위적인 기발한(?) 전투 장면의 설정이 거슬리기도 하고 드물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인물의 등장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제10권] 모반의 연속으로 이어지다 대인선이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황음무도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왕조의 멸망은 위정자의 무능과 이로 인한 반란의 결과였다.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9. 모반의 수레바퀴

  도성 홀한성을 점령한 대창해는 태자 대신덕을 동궁에 가두고 서궁을 봉쇄했다. 대가 약한 대신덕은 순순히 국새를 내놓았지만 고태후는 끝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태후와 태자의 교지를 받들어 황위에 오르려 했던 대창해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대창해가 원만한 계위에 골몰하는 동안 대인수의 토평군은 무서운 기세로 도성으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농기구와 사냥무기를 들고 토평군에 자원하자 군사는 갈수록 불어났다.

 

  황제의 친정군과 반란군은 공격과 퇴각을 번갈아 하며 수시로 전투를 벌였다. 대창해는 성 안에 비치된 마초와 군량이 충분하기에 반란군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성 안에 있던 대도만적이 대곤명을 베고 반란군을 압도하자 반란군은 달아나면서 태자를 시해하고 말았다.

  놀란 대창해가 도성을 공격하자 친정군이 반란군의 배후를 짓쳐들었다. 병장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반란군의 수효가 삽시간에 늘었고 대창해는 목이 잘렸다.

 

  을사유신과 북벌, 당나라를 비롯한 신라와 일본과의 다양한 교역, 해를 이은 풍년, 병들고 기궁한 백성들을 나라에서 구휼한 덕에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데 대인수가 병상에 누웠고 병은 점점 깊어갔다. 경술(830)년 섣달 스무닷새, 발해 문자 만들기에 그토록 애쓰며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던 대인수 숨을 거두었다.

  대인수의 뒤를 이어 맏손자 대이진이 계위했으나 그는 나이가 어린데다 성품도 유약했다. 대이진은 어머니 해수련의 뜻에 따라 대내상에 대공정을, 내시감에 해지량을 임명하고 도독과 자사를 비롯하여 장수들을 교체했다. 해지량은 발해 문자인 선문 배우기를 금하고 태사 신작을 서서히 물리치라고 권한다.

 

  해지량의 사촌 아우로 영원부 염주 자사로 부임한 해무량의 심복 왕가희가 뇌물 심부름을 갔다가 신작에게 곤장을 맞고 퇴짜를 맞는 일이 발생했다. 해무량은 직을 이용하여 어마어마한 재물을 챙겼고 그것을 또 뇌물로 사용했다.

  이에 황제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시어사 고덕술을 염주로 파견했지만 그는 해무량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황제는 태사 신작의 의견에 따라 해동정에게 밀명을 내려 다시 암행 감찰을 명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해무량의 암계에 걸려 아예 그쪽 편으로 돌아섰다.

 

  가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거상 장사경과 율창직이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들이 합류했고 농어민은 물론이고 염전의 역부들과 상인, 삯일꾼들까지 반란 대열에 뛰어들었다. 반란군은 황제의 친정과 해태후 일파의 숙청을 요구하고 해무량과 해지량은 참하라고 주장했다.

 

  해지량은 대이진에게 반간계를 쓰도록 건의한다. 반란군은 해태후가 폐비되어 사가로 내쫓기고 해무량과 해지량이 옥에 갇힌 것을 알았다. 황제가 환궁하여 친정할 채비를 했다는 것도 알았다. 신작과 반란의 주역들이 황제의 칙지를 받들어 성문을 통과하는 순간, 창검궁시로 무장한 금군들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신작의 목이 달아났다.

 

  황후 주신강은 대이진의 행동을 안타까워하며 거사를 궁리한다. 해태후의 생신날 기예를 펼치던 예인들이 태후에게 달려든다. 태후는 비도를 맞고 쓰러졌고 해지량이 시위 군사들을 지휘하여 예인들을 제압했다. 후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사건의 전발이 밝혀졌다. 비도를 던진 무리는 황후 주신강의 사주를 받은 오사마 무리였고 오사마는 황후의 시위로 잠시 서궁에 머물다가 궁성을 떠나 용마사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용마사는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고 오사마를 가르친 승려 석지담은 참살당했다.

 

  해태후는 한시 바삐 황상을 폐하여 태상황으로 삼고 대건황을 보위에 올리고자 노심초사했다. 해지량은 아편을 궁중에 퍼뜨려 황제와 태후, 대건황이 중독되기도 했다.

  대이진이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삶을 마감했고 대건황이 뒤를 이어 등극했다. 해태후는 해지량의 의견에 따라 반란을 일으킬만한 황친들과 이에 동조할 만한 신하들까지 숙청하여 태후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

 

  후궁 선송지가 해태후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건진과 대간정, 선무방과 공모하고 태후의 단약을 만드는 이승겸을 포섭하였다. 그런데 황제의 총애를 받는 선송지를 시기하여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후궁 윤가원이 선송지와 이승겸이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 의아해 하며 선송지를 섬기는 궁녀 달풍기를 문초하다 죽게 만들고 해태후를 찾아가 소문을 부풀려 고자질 한다.

 

  해무량과 승려 의명이 군사를 양성하여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건의 하지만 해지량의 의견을 참고한 해태후는 이를 반대한다. 해무량은 염상들에게 사병을 거느리도록 권고한다.

  태자 대현석의 생일잔치가 열리던 날 용봉탕 속에 독을 넣은 사실이 발각되자 이승겸은 용봉탕을 마시고 자결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건황은 선송지를 후궁에서 폐하여 떠나보냈다. 해태후가 그녀를 쫓았을 때는 선송지와 선무방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역질이 도성에 몰아쳤다. 약도 기도도 굿도 효험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가고 채 묻지 못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소문은 해무량의 지시로 사병을 초모할 때 역질이 만연한 서쪽 변방의 장정들을 불러들였기 때문이라 했다. 역질을 윤행시킨 해무량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수없이 올라왔다.

  해지량이 해태후에게 해무량을 제물로 삼으라고 아뢰었다. 해지량이 보낸 칙서를 받은 해무량은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날 밤 두 번째 황제의 밀지를 들고 온 충무장군 임달선에 의해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역질이 물러나자 곳곳에 많은 술사와 도사들이 우후죽순처럼 기승했다. 자신들이 기도하고 굿을 해서 역질이 물러갔다고 주장했다. 그 동안 끊임없이 승려들을 모아 기도하고 병자를 돌보던 의명선사와 덕산대사를 찾아 절로 모여드는 불자들도 늘어만 갔다. 해태후도 그들의 공적을 인정했다.

 

  신묘(871)년 봄, 대건황은 사냥 행차에 나섰다가 사슴 고기를 먹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고 다음 날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태자 대현석이 등극하였고 황친을 비롯한 구신들과 의명선사가 선제의 승하에 의혹을 품고 검시를 주품했다. 황제는 태후의 눈치를 살피며 검시를 반대했.

  선제를 검시했던 태의를 통해 독살임을 알게 된 의명은 성각사로 덕산을 찾아갔다. 영인 중 기예를 제대로 익힌 연소강과 오사명이 황상의 밀지라는 임달선의 명을 받고 의명과 덕산을 암살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두 사람은 태복경 고재정을 만나 전말을 실토했고 고재정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금군을 점고하고 경기군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해지량과 임달선을 처치하였다.

 

  해태후는 급히 태후궁을 빠져나가 황제의 침궁으로 달려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의명이 잘 벼린 칼 한 자루를 들고 침궁 안으로 들어갔다. 한식경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의명선사가 나서고 뒤따라 삭발한 소복차림의 여인이 나섰다. 태후는 죽었고 바구니가 될 여자라며 의명이 태후를 데리고 나갔다.

 

  대현석은 황숙 대건진에게 대내상 자리를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겁에 질려 그를 권지국사로 봉하는 조서를 내렸다. 대권이 황친 대건진 수중에 떨어지자 백관들은 대건진에게 충성을 맹약했다. 그해 늦가을 해태후가 서거했다.

  장례를 마친 후 군사 양성 문제로 덕산과 말다툼을 한 대건진은 심복들에게 모든 사찰을 파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폐불 단행의 결심을 밝혔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덕산은 참화가 이어질 것이니 참회하라며 정진을 위해 토굴로 들어갔다.

 

  사리를 친견하면 대운이 든다고 생각한 대건진은 장자인 대진윤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그런데 일행은 폭풍을 만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 사원을 폐하고 승려를 환속시킨 뒤 처형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젊고 의분에 찬 승려들이 패를 나누어 덕산대사가 정진하는 성각사와 의명선사가 정진하는 법화사로 몰려들었다. 공주 대미현이 가솔들을 이끌고 성각사로 들어갔고 옹주 대혜진은 법화사로 달려갔다. 백성들도 스스로 몸을 살라 죽겠다며 사원으로 모여들었다.

 

  한사코 사찰을 불태우고 두 승려를 치죄하자고 주장한 고재정이 명을 받아 장복사에게 공주는 압송하여 옥에 가두고 옹주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참하고 자신의 주장를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대장군 장복사는 성각사, 장수 미소긍은 법화사로 진병하였다.

  공주는 떠났고 덕산은 불타는 성각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법화사도 의명과 옹주가 법당에 불을 지르고 문을 잠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두 절을 폐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권지국사가 군사를 보내 두 승려와 공주, 옹주를 태워 죽였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대건진이 새 첩 정수향을 총애하자 오미랑은 시기심에 정수향에게 살을 놓는 비방굿을 하다 발각되었지만 대건진은 이를 별 문제 삼지 않는다. 오미랑은 무예를 연마하면서 황자 대위해와 자주 만날 수 있었고 남색을 좋아하는 그의 성적취향을 잘 맞춰주어 친해지게 되었다.

 

  고재정은 대건진이 오랜만에 사냥행차를 나가는 날을 거사일로 택일했다. 오래 전부터 궁리한 정변으로 대건진을 주살하고 황제 대현석을 폐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로 작정했었다. 장복사는 꿈속에서 덕산과 의명이 현몽을 하자 마음을 고쳐먹고 대건진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대건진을 독화살로 주살했다는 보고를 받은 고재정은 황궁으로 진입하여 황제를 붙잡았다. 그런데 장복사가 배신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고재정은 장복사의 큰 아들 장군석을 죽이며 저항했지만 피투성이가 되었고 결국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권지국사가 입성하고 반란군이 항복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대건진은 황제가 스스로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나기를 청했다. 대현석은 망설임 없이 선위를 약조했다. 그런데 대위해의 아이를 가진 오미랑이 도주한 사실이 알려지자 대건진은 분기탱천하여 대위해를 압송하고 오미랑을 사로잡으라고 명했다.

  황후는 임재미에게 은밀하게 밀지를 전했고, 아홉 사원을 돌며 부처님께 작별을 고하는 황후를 옹위하던 그녀의 품속에 있던 밀서가 둘째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제9권] 대인수가 숨을 거두었고 어린 손자 대이진을 대신해 해태후가 섭정을 한다. 그녀는 간신을 옆에 두고 권력을 전횡하다 반란으로 쫓겨난다. 황숙 대건진이 권력을 휘두르고 황제는 그에게 양위를 결정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8. 오태후의 야망

  반란군이 옥죄어오고 황명을 거역하는 변방이 늘어나면서 대원의는 극도로 몸을 사렸다. 그러다 고잉이 배반한 사실을 알고 그를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으러 갔던 장수만 머리 없는 귀신이 되었고 고잉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을 탈출했다는 비보만 들을 수 있었다.

 

  황궁을 포위했던 반란군의 함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시위장수 대한무가 피를 흘리며 침궁 앞에 쓰러졌다. 도망가려는 대언의 앞에 여태껏 미친 줄 알았던 대화여가 용포를 입고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 나섰다. 대사루가 대원의를 베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대화여는 세 황자 대숭린, 대청윤, 대성진이 옹립하여 용상에 올랐다. 때는 계유(793)년 칠월 열사흘이었다. 그러나 본디 강건한 용체가 아닌데다 강제로 독물을 마셔 허약해진 탓으로 오래 살 것 같지가 않았다. 그해 동경을 버리고 상경으로 천도하였으나 재위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갑술(794)7, 몸소 쓴 신한(宸翰) 한 통을 남기고 붕어했다.

 

  유조이자 계위를 선포한 신한에는 후사를 숙부인 대숭린에게 맡겼다. 당연히 황위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장자 대선해는 불만이 많았지만 군권을 장악하고 섭정을 하다시피 한 대숭린이 모반할 것을 염려한 대화여의 고육지책이었다.

  황위에 오른 황제 대숭린은 대내상 고건과 태사 신사랑을 파직하고 무명선사는 아예 국사의 관작을 없애버렸다. 무명을 비롯한 신사랑 형제와 난씨 일가, 고원을 비롯한 옛 고구려 왕족들이 도성을 떠나자 민심이 또 한 번 출렁거렸다. 강직한 선비들은 관작을 지푸라기처럼 던져버리고 사직상소를 올린 뒤 하나 둘 도성을 빠져나갔다.

 

  대숭린은 속앓이를 하던 끝에 천하 현승 운문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선사는, 훌륭한 황제는 백성들이 황제가 있다는 것만 알고, 그보다 못한 황제는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기고 따르며, 그보다 못한 황제는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그보다 더 못한 황제는 백성들이 업신여긴다, 지금 백성들은 황제를 업신여긴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대숭린은 운문의 뜻을 좇아 각종 제도를 고치고 농경과 수렵을 장려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끝내 무명, 신사랑 형제, 난씨 및 고씨 일가는 중용하지 않았다.

 

  홍수에 이어 가뭄까지 겹치고 먹는 물이 귀하여 지자 황제가 마시는 용천수를 가지고 백성들과 실랑이가 있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배고픈 백성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도적이 되거나 강도질을 했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대청린이 반란을 일으킨다.

 

  기우제의 제물로 쓸 동남동녀를 구하는 방이 나붙자 대숭린이 내쫓았던 신사랑의 아우 신사문이 쌍둥이 남매를 바친다. 그는 대숭린이 내린다는 재화와 식읍과 관직을 모두를 거부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쌍둥이 남매가 홀한해로 몸을 날린 그날 밤 비가 내렸고 메말랐던 산하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가뭄이 해소되자 관고를 열어 양곡을 나눠주고 죄인들을 방면하자 민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그러자 대숭린은 복속한 말갈 군사를 앞세워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에 동조한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가담한 자의 가솔들은 씨가 말랐다. 달아나던 대청윤은 결국 측근에 의해 목이 잘렸고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축(809)년 초여름, 대숭린이 급환으로 세상을 뜨고 장자 대원유가 황위를 계위했다. 대원유는 즉위할 때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단 위에 오를 만큼 비대했다. 그는 식탐으로 몸무게가 2백 근이나 되었다. 그의 아우 대언의와 대명충도 못지않게 비대했다.

 

  그러나 문제는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오태후의 섭정이었다. 대원유는 등극하자마자 정사를 멀리한 채 오태후의 섭정을 좇았다. 대원유는 칙서를 내려 오태후의 섭정을 선포하고 오태후의 오라버니 오작분을 대내상에 명하고 손아래 오라비 오작근을 백관을 감찰하는 대중정을 제수했으며 또 다른 오라비 오작촌은 군권을 장악하는 지부경으로 봉했다. 그리고 오태후의 심복들을 대신과 근신으로 삼으니 조정 대소사는 오씨의 수중에 들었다.

 

  태후 오귀담은 발해 제일의 미인이라 불렸으나 질투가 심하고 표독하여 오랫동안 대숭린의 성은을 입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시종으로 발탁된 미사천은 가까이서 즐겁게 해주고 있었으며 황위에 오르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오태후는 물감옥을 만들어 자신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켰으며 18명의 젊고 건장하며 용모가 수려한 자들을 뽑아 주홍빛 관복을 입혀 주홍신이라 칭하고 밤마다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비구니 사도봉을 도교 도사로 명하여 태후궁 안에 머물게 하면서 그녀의 의견대로 조세 제도를 개선하는 등 친 서민 정책을 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원을 비롯한 고씨들과 신사랑을 비롯한 신씨들, 그리고 난강을 비롯한 난씨 일가들은 오태후의 청을 거절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자 저잣거리에 오태후를 비리를 알리는 괴이한 격문이 나돌았고 오태후는 그것이 고언, 신사랑, 난강 일족이 저지른 짓이라 생각하고 현상금을 걸고 그들을 주살하게 했지만 공을 세운 사람은 없었다.

 

  태후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허울뿐인 황제 대원유는 스스로 몸무게도 줄이고 황후 임사향에게 밀지를 내려 그녀의 아버지 임창조가 충역을 뛰어넘는 거사를 실행할 것을 당부한다. 신묘(811)년 봄, 황후는 황자를 낳았고 이름을 태성이라 지었다. 그런데 황자는 백일잔치를 치른 날 밤 갑자기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문무백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태후를 황제로 추대키로 했으니 제위를 양위하라는 진신소를 올린다. 진신들을 부추긴 것은 주홍신이었고, 주홍신을 다스리는 것은 사도봉이었다. 대원유는 진신소를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세상사를 잊으려는지 매일 사냥에 열중한다.

 

  사도봉의 권유로 통천동에서 제를 지내려던 태후를 10여 명의 자객들을 거느린 부마도위 고경진이 습격하지만 실패하였고 공주는 황제의 밀지가 임창조에게 전달되어 부마가 가담하게 된 내막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공주는 폐서인되고 고경진은 궁형에 처해 졌으며 황제는 석고대죄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창조 일당은 도성을 탈출해 종적을 찾을 수 없었고 황제는 석고대죄를 위한 입궁을 거부했다. 그러자 오태후는 황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대원유를 도성 밖 별궁으로 내쫓았다. 대원유는 유배자와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임진(812)3, 대원유가 별궁에서 급서했다. 그의 성수 이제 겨우 스물여섯으로 황위에 올랐으나 천하를 경략하지 못한 채 짧은 생애를 마쳤. 진신소가 공개되니 오태후가 계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오태후가 등극하기로 한 4월 초하루, 반란군이 홀한성 내성을 에워싸고 황궁을 포위했다. 선제 정황제의 종부 대인수가 반란의 주모자였다. 다음날 오태후는 대인수의 청을 받아들였고 둘째 아들 대언의가 황위에 올랐다. 대언의는 대인수에게 권지국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대소신료들을 감동시켰다.

 

  심성이 워낙 유약한 황제는 유폐된 태후에게 미사천을 보내 시종케 하고 국부인을 복작하여 적적함을 달래게 했다. 그런데 황제 대언의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오태후는 사도봉을 궁궐로 불러들이고 미사천을 내시감에 앉혔다. 대언의의 아우 대명충도 중풍으로 쓰러졌다.

 

  정유(817)년 봄, 대언의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붕어했다. 공개된 유조는 대명충에게 계위한다는 것이었다. 반신불수 대명충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용상에 올랐다. 당나라의 간계와 말갈 제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지자 발해의 북방이 어지러워졌다.

 

  긴장감이 감돌던 궁중에서는 대언의의 황후 이채복이 밤사이에 피를 토하며 죽는 일이 발생했다. 마침내 대인수가 잡혀 옥에 갇혔다. 이채복이 급서하자 위기를 느낀 황후 고운목이 오라버니 고진목에게 밀서를 내렸고 고진목은 아버지 고송목을 찾아가 밀서를 내밀었다. 개운사 승려 석다정은 가짜 옥새와 유조를 만들었다.

  어느 날 대명충이 승하하자 오태후는 여황제로 등극할 준비를 한다. 그 밤에 대인수가 탈옥했다. 황후 고운목이 오태후 앞에 칼을 들고 나섰고 갑옷을 차려 입은 대인수가 나타났다. 날이 밝자 대인수에게 계위한다는 선제의 유조가 공개되었다. 석다정이 만든 가짜였지만 진품과 같았다. 무술(818)7, 대인수는 황위에 올랐다.

 

  대인수가 황위에 오르자 사직은 안정되고 민심은 빠르게 안돈되었다. 부하 장수 유오가 반란을 일으켜 산동의 맹주 이사도의 목을 베어 위박절도사 전홍정에게 바치니, 당나라 요충지를 50여 년 동안 지배한 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구려 후손이 세운 제나라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

  대인수는 말갈 제부를 친정하기로 하고 군사들을 조련하였다. 기해(819)3, 대인수는 장자 대신덕을 태자로 봉했고 드디어 북벌에 나섰다. 발해의 군사들은 싸우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변방을 어지럽히던 말갈족들을 복속하고 환궁하였다.

 

  대인수는 개국공신 신재용의 직계손 신작을 태보로 난중경의 후선 난타를 태의로 삼았다. 대인수는 신작의 의견을 따라 군사를 조련하여 흑수와 월희도 복속시켜 사방 5천리의 강역을 확보하였다.

  대인수는 이어서 당나라로 친정하여 등주를 점령하고 영주를 거쳐 장성으로 향했다. 기세에 놀란 당제 이항은 부여성 북방의 옛 거란 땅을 화의의 표시로 발해에게 양도하였다.

 

  대인수는 신작의 권유로 민심을 살피기 위한 순행에 들어가 곽자륜의 의견을 반영한 검소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대인수는 황실이 안돈하고 사직이 평온해지자 뭇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을사(825)년 가을에 을사유신을 선포했다.

  유신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발해 도성은 마치 천하대란이 일어난 듯 시끄러웠다.

  첫째, 과거제도 개혁. 둘째, 나라에서 노비를 사들여 군역에 편제. 셋째, 조세 개혁의 단행. 넷째, 농지 개혁. 다섯째, 여인의 관리 등용. 여섯

, 발해 문자 제정이었다.

 

  이것은 느닷없이 선포한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거론되었던 것이며 대소신료들이 억척스럽게 반대해 온 것들이었다. 상소와 진신소가 끊이지 않았다. 대인수는 신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를 태백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유배 동안 가림토를 지니고 가서 발해 문자를 창제해 주기를 부탁하면서.

 

  문무대신과 황친, 구신들과 국척들의 저항 속에서 을사유신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그러자 대인수는 하늘과 선제들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태백산으로 향했고 그 사이 반란이 일어났다.

 

  대청윤의 아들 대창해가 반란의 주역이었고 황손 대능신과 대연진, 대창경이 각기 사병을 이끌고 반란의 대열에 섰다. 시위와 도성을 지키는 금군들은 사로잡히고 경기군은 역모에 가담했단다. 대인수는 신작을 군사로 명하고 을지후문을 대총관으로 삼아 부월을 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