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태후의 야망
반란군이 옥죄어오고 황명을 거역하는 변방이 늘어나면서 대원의는 극도로 몸을 사렸다. 그러다 고잉이 배반한 사실을 알고 그를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으러 갔던 장수만 머리 없는 귀신이 되었고 고잉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을 탈출했다는 비보만 들을 수 있었다.
황궁을 포위했던 반란군의 함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시위장수 대한무가 피를 흘리며 침궁 앞에 쓰러졌다. 도망가려는 대언의 앞에 여태껏 미친 줄 알았던 대화여가 용포를 입고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 나섰다. 대사루가 대원의를 베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대화여는 세 황자 대숭린, 대청윤, 대성진이 옹립하여 용상에 올랐다. 때는 계유(793)년 칠월 열사흘이었다. 그러나 본디 강건한 용체가 아닌데다 강제로 독물을 마셔 허약해진 탓으로 오래 살 것 같지가 않았다. 그해 동경을 버리고 상경으로 천도하였으나 재위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갑술(794)년 7월, 몸소 쓴 신한(宸翰) 한 통을 남기고 붕어했다.
유조이자 계위를 선포한 신한에는 후사를 숙부인 대숭린에게 맡겼다. 당연히 황위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장자 대선해는 불만이 많았지만 군권을 장악하고 섭정을 하다시피 한 대숭린이 모반할 것을 염려한 대화여의 고육지책이었다.
황위에 오른 황제 대숭린은 대내상 고건과 태사 신사랑을 파직하고 무명선사는 아예 국사의 관작을 없애버렸다. 무명을 비롯한 신사랑 형제와 난씨 일가, 고원을 비롯한 옛 고구려 왕족들이 도성을 떠나자 민심이 또 한 번 출렁거렸다. 강직한 선비들은 관작을 지푸라기처럼 던져버리고 사직상소를 올린 뒤 하나 둘 도성을 빠져나갔다.
대숭린은 속앓이를 하던 끝에 천하 현승 운문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선사는, 훌륭한 황제는 백성들이 황제가 있다는 것만 알고, 그보다 못한 황제는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기고 따르며, 그보다 못한 황제는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그보다 더 못한 황제는 백성들이 업신여긴다며, 지금 백성들은 황제를 업신여긴다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대숭린은 운문의 뜻을 좇아 각종 제도를 고치고 농경과 수렵을 장려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끝내 무명, 신사랑 형제, 난씨 및 고씨 일가는 중용하지 않았다.
홍수에 이어 가뭄까지 겹치고 먹는 물이 귀하여 지자 황제가 마시는 용천수를 가지고 백성들과 실랑이가 있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배고픈 백성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도적이 되거나 강도질을 했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대청린이 반란을 일으킨다.
기우제의 제물로 쓸 동남동녀를 구하는 방이 나붙자 대숭린이 내쫓았던 신사랑의 아우 신사문이 쌍둥이 남매를 바친다. 그는 대숭린이 내린다는 재화와 식읍과 관직을 모두를 거부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쌍둥이 남매가 홀한해로 몸을 날린 그날 밤 비가 내렸고 메말랐던 산하가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가뭄이 해소되자 관고를 열어 양곡을 나눠주고 죄인들을 방면하자 민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그러자 대숭린은 복속한 말갈 군사를 앞세워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에 동조한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가담한 자의 가솔들은 씨가 말랐다. 달아나던 대청윤은 결국 측근에 의해 목이 잘렸고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축(809)년 초여름, 대숭린이 급환으로 세상을 뜨고 장자 대원유가 황위를 계위했다. 대원유는 즉위할 때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단 위에 오를 만큼 비대했다. 그는 식탐으로 몸무게가 2백 근이나 되었다. 그의 아우 대언의와 대명충도 못지않게 비대했다.
그러나 문제는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오태후의 섭정이었다. 대원유는 등극하자마자 정사를 멀리한 채 오태후의 섭정을 좇았다. 대원유는 칙서를 내려 오태후의 섭정을 선포하고 오태후의 오라버니 오작분을 대내상에 명하고 손아래 오라비 오작근을 백관을 감찰하는 대중정을 제수했으며 또 다른 오라비 오작촌은 군권을 장악하는 지부경으로 봉했다. 그리고 오태후의 심복들을 대신과 근신으로 삼으니 조정 대소사는 오씨의 수중에 들었다.
태후 오귀담은 발해 제일의 미인이라 불렸으나 질투가 심하고 표독하여 오랫동안 대숭린의 성은을 입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시종으로 발탁된 미사천은 가까이서 즐겁게 해주고 있었으며 황위에 오르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오태후는 물감옥을 만들어 자신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켰으며 18명의 젊고 건장하며 용모가 수려한 자들을 뽑아 주홍빛 관복을 입혀 주홍신이라 칭하고 밤마다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비구니 사도봉을 도교 도사로 명하여 태후궁 안에 머물게 하면서 그녀의 의견대로 조세 제도를 개선하는 등 친 서민 정책을 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원을 비롯한 고씨들과 신사랑을 비롯한 신씨들, 그리고 난강을 비롯한 난씨 일가들은 오태후의 청을 거절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자 저잣거리에 오태후를 비리를 알리는 괴이한 격문이 나돌았고 오태후는 그것이 고언, 신사랑, 난강 일족이 저지른 짓이라 생각하고 현상금을 걸고 그들을 주살하게 했지만 공을 세운 사람은 없었다.
태후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허울뿐인 황제 대원유는 스스로 몸무게도 줄이고 황후 임사향에게 밀지를 내려 그녀의 아버지 임창조가 충역을 뛰어넘는 거사를 실행할 것을 당부한다. 신묘(811)년 봄, 황후는 황자를 낳았고 이름을 태성이라 지었다. 그런데 황자는 백일잔치를 치른 날 밤 갑자기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문무백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오태후를 황제로 추대키로 했으니 제위를 양위하라는 진신소를 올린다. 진신들을 부추긴 것은 주홍신이었고, 주홍신을 다스리는 것은 사도봉이었다. 대원유는 진신소를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세상사를 잊으려는지 매일 사냥에 열중한다.
사도봉의 권유로 통천동에서 제를 지내려던 태후를 10여 명의 자객들을 거느린 부마도위 고경진이 습격하지만 실패하였고 공주는 황제의 밀지가 임창조에게 전달되어 부마가 가담하게 된 내막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공주는 폐서인되고 고경진은 궁형에 처해 졌으며 황제는 석고대죄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창조 일당은 도성을 탈출해 종적을 찾을 수 없었고 황제는 석고대죄를 위한 입궁을 거부했다. 그러자 오태후는 황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대원유를 도성 밖 별궁으로 내쫓았다. 대원유는 유배자와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임진(812)년 3월, 대원유가 별궁에서 급서했다. 그의 성수 이제 겨우 스물여섯으로 황위에 올랐으나 천하를 경략하지 못한 채 짧은 생애를 마쳤다. 진신소가 공개되니 오태후가 계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오태후가 등극하기로 한 4월 초하루, 반란군이 홀한성 내성을 에워싸고 황궁을 포위했다. 선제 정황제의 종부 대인수가 반란의 주모자였다. 다음날 오태후는 대인수의 청을 받아들였고 둘째 아들 대언의가 황위에 올랐다. 대언의는 대인수에게 권지국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대소신료들을 감동시켰다.
심성이 워낙 유약한 황제는 유폐된 태후에게 미사천을 보내 시종케 하고 국부인을 복작하여 적적함을 달래게 했다. 그런데 황제 대언의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오태후는 사도봉을 궁궐로 불러들이고 미사천을 내시감에 앉혔다. 대언의의 아우 대명충도 중풍으로 쓰러졌다.
정유(817)년 봄, 대언의는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붕어했다. 공개된 유조는 대명충에게 계위한다는 것이었다. 반신불수 대명충은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용상에 올랐다. 당나라의 간계와 말갈 제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지자 발해의 북방이 어지러워졌다.
긴장감이 감돌던 궁중에서는 대언의의 황후 이채복이 밤사이에 피를 토하며 죽는 일이 발생했다. 마침내 대인수가 잡혀 옥에 갇혔다. 이채복이 급서하자 위기를 느낀 황후 고운목이 오라버니 고진목에게 밀서를 내렸고 고진목은 아버지 고송목을 찾아가 밀서를 내밀었다. 개운사 승려 석다정은 가짜 옥새와 유조를 만들었다.
어느 날 대명충이 승하하자 오태후는 여황제로 등극할 준비를 한다. 그 밤에 대인수가 탈옥했다. 황후 고운목이 오태후 앞에 칼을 들고 나섰고 갑옷을 차려 입은 대인수가 나타났다. 날이 밝자 대인수에게 계위한다는 선제의 유조가 공개되었다. 석다정이 만든 가짜였지만 진품과 같았다. 무술(818)년 7월, 대인수는 황위에 올랐다.
대인수가 황위에 오르자 사직은 안정되고 민심은 빠르게 안돈되었다. 부하 장수 유오가 반란을 일으켜 산동의 맹주 이사도의 목을 베어 위박절도사 전홍정에게 바치니, 당나라 요충지를 50여 년 동안 지배한 채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구려 후손이 세운 제나라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대인수는 말갈 제부를 친정하기로 하고 군사들을 조련하였다. 기해(819)년 3월, 대인수는 장자 대신덕을 태자로 봉했고 드디어 북벌에 나섰다. 발해의 군사들은 싸우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변방을 어지럽히던 말갈족들을 복속하고 환궁하였다.
대인수는 개국공신 신재용의 직계손 신작을 태보로 난중경의 후선 난타를 태의로 삼았다. 대인수는 신작의 의견을 따라 군사를 조련하여 흑수와 월희도 복속시켜 사방 5천리의 강역을 확보하였다.
대인수는 이어서 당나라로 친정하여 등주를 점령하고 영주를 거쳐 장성으로 향했다. 기세에 놀란 당제 이항은 부여성 북방의 옛 거란 땅을 화의의 표시로 발해에게 양도하였다.
대인수는 신작의 권유로 민심을 살피기 위한 순행에 들어가 곽자륜의 의견을 반영한 검소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대인수는 황실이 안돈하고 사직이 평온해지자 뭇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을사(825)년 가을에 을사유신을 선포했다.
유신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발해 도성은 마치 천하대란이 일어난 듯 시끄러웠다.
첫째, 과거제도 개혁. 둘째, 나라에서 노비를 사들여 군역에 편제. 셋째, 조세 개혁의 단행. 넷째, 농지 개혁. 다섯째, 여인의 관리 등용. 여섯
째, 발해 문자 제정이었다.
이것은 느닷없이 선포한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거론되었던 것이며 대소신료들이 억척스럽게 반대해 온 것들이었다. 상소와 진신소가 끊이지 않았다. 대인수는 신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를 태백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유배 동안 가림토를 지니고 가서 발해 문자를 창제해 주기를 부탁하면서.
문무대신과 황친, 구신들과 국척들의 저항 속에서 을사유신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갔다. 그러자 대인수는 하늘과 선제들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태백산으로 향했고 그 사이 반란이 일어났다.
대청윤의 아들 대창해가 반란의 주역이었고 황손 대능신과 대연진, 대창경이 각기 사병을 이끌고 반란의 대열에 섰다. 시위와 도성을 지키는 금군들은 사로잡히고 경기군은 역모에 가담했단다. 대인수는 신작을 군사로 명하고 을지후문을 대총관으로 삼아 부월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