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황자의 역심
친정에서 돌아온 대조영은 대무예와 대문예, 두 황자를 흑수 말갈 정벌전에 보내 장차 누가 황위를 물려받기에 적당한지를 가늠하고자 했다. 정덕왕 대무예는 맏이답게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웠으며 인상도 관대하고 후덕해 보였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의리가 있었으며 추진력이 강해 어떤 난관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명성왕 대문예는, 외모는 할아버지 대중상을 많이 닮아 눈매에 광채가 서려 있었으며 통이 크고 매사 화통하여 열정이 남달랐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흡인력이 있어서 따르는 자가 많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정은 아버지 대조영을 닮은 듯했다.
고모 대화인이 대무예에게 궁녀로 데리고 있던 돌궐 여인 사사란을 보낸다. 대무예가 그녀를 취하였고 그 밤 이후로 사사란은 대무예의 여자가 되었다. 그런데 사사란은 이전에 이미 대문예와 후일을 약속한 사이였다. 흑수 정벌을 앞둔 어느 날 대문예는 결국 형이 거처하는 동궁의 담을 넘고 형의 여자 사사란을 범하게 된다.
흑수 정벌에 나선 두 아들은 서로 전공을 드높이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대무예가 호랑이와 늑대 떼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자 이에 자극 받은 대문예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공격에 공격을 거듭하여 형과 대등한 전과를 거두었다.
늦가을, 대무예는 천금성에서, 대문예는 영자성에서 겨우살이 준비에 들었고 사사란은 대문예와 위험한 불장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봄이 되어 돌궐의 묵철이 요북으로 회군하자 당군을 이끌고 이해고가 동진하기 시작했다.
천리장성 일대에 전운이 감돌자 대조영은 친정을 결정하고 북정군의 두 아들을 불러들였다. 이해고는 대조영이 당도하기 전에 영주와 요서에 있는 거란과 말갈의 잔당들을 토평하기 시작했다. 싸움에 패한 잔당 중 거란군은 북쪽으로 도망쳤지만 2만에 달하는 말갈족이 발해군에 귀순해 와서 발해군의 사기는 나날이 충천했다.
오랑캐들의 준동에 골머리를 앓던 당제 무측천은 중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리장성 일대에 진을 친 발해군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박작성의 장시에서 교역을 하며 북쪽의 돌궐을 방비해주면 당군이 요동벌로 진격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대조영이 회군하였고 당나라의 사주를 받은 북방의 흑수가 변방을 침노하였다. 대문예는 또 다시 흑수 출병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사사란은 이번에 출정하는 장수가 변고를 당한다는 술사의 예언을 듣는다.
대문예는, 이번 싸움에서는 신무기인 화약을 사용하여 적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승승장구 진군을 계속한다. 명산성을 수복한 대문예는 천금성을 치고 영자성으로 군사를 휘몰았다. 태자위를 노리는 대문예의 야심이 공격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랄까? 너무도 성급하게 영자성으로 가는 지름길로 군사를 끌고 가던 대문예는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아 패퇴하기에 이르렀다. 흑수의 선봉장 옥기가 대문예를 향해 도끼를 흔들며 덮쳐오던 순간 어디선가 비호같이 나타난 사사란이 그 틈을 비집고 달려들어 칼을 뻗는다. 옥기의 도끼를 맞은 사사란과 그녀의 칼을 맞은 옥기가 동시에 쓰러졌다.
영자성은 평정했지만 대문예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조영은, 대무예의 후궁의 몸으로 대문예를 유혹한 사사란보다 대문예의 죄가 더 크다고 보고 그에게 금족령을 내려 명산성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했다. 사실상의 유배나 다름없었다.
을사(705)년 정월, 67세에 황위에 올라 15년 동안 치국하고 82세 고령에 병까지 겹친 무측천이 황위를 빼앗겼다. 새로 황위에 오른 이현이 새삼 발해를 거론하고 화친을 위해 스스로 당나라 황손을 숙위로 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발해는 대문예를 사면하여 숙위로 하고 당나라로 보냈다.
대문예는 해가 바뀌고 장안 사정에 익숙해지자 황제의 신임을 밑천 삼아 권신들와 널리 친교를 맺었다. 특히 황손 이융기와 가까워졌고 그의 호위관노 왕모중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던 중 대무예가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처지가 비슷한 이융기가 천군만마로도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의 자객지변으로 능히 할 수 있다며 듣기 좋은 말로 그를 위로했다.
어지럽던 당나라 황실의 치열한 암투 끝에 아버지 이단에 이어 이융기가 황위에 올랐다. 왕모중이 대단한 활약을 펼쳤고 대문예도 그 뒤를 도왔다. 황제가 된 이융기는 사신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하고 대문예도 돌려보내기로 했다. 왕모중은 물론 대문예의 거병을 도우기로 하고 거금을 내주었다.
당나라의 국서를 어람한 대조영은 크게 노하고 사신 최흔을 하옥시키고 비사성을 비우지 않으면 친정하겠다는 답서를 보냈다. 이에 놀란 이융기는 왕모중의 의견대로 비사성을 돌려주고 훗날을 기약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조영은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비사성을 돌려받아 고구려 멸망 47년 만에 드디어 옛고구려 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비사성 일대를 발해에 내준 이융기는 설인귀의 아들 설눌을 보내 요하 일대를 평정케 했다. 그러나 설눌은 돌궐의 지원을 받은 거란의 복병에게 참패했다. 하지만 이융기는 설눌에게 다시 군사를 주어 만회할 기회를 부여하기로 했다.
대조영은 아우인 대야발에게 당나라의 침입으로 소실된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기를 지시한다. 대조영은 발해의 백성들이 스스로 위대한 백성임을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무예를 독살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시위 문성간이 사라진 이틀 만에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나 배
후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 즈음 돌궐의 묵철가한은 가렴주구를 일삼아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특히 거란과 해족은 묵철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자 불평이 늘어 갔다. 당나라의 왕모중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융기에게 건의하여 발해와 돌궐에게 동시에 국서를 보낸다. 당나라의 국서를 받은 발해 또한 양쪽 모두에게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통고하고 대문예에게 3만의 군사의 주어 아주 느리게 진군하도록 지시했다. 양쪽 모두에게 자신을 위하여 출병한다는 것을 믿게 하면서 양쪽이 먼저 전투를 벌이면 어부지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설욕을 다짐하며 당나라 대군을 이끈 설눌의 군대가 진격하자 거란 대수령 이실활과 해족의 여러 수령들은 지레 겁을 먹고 당나라에 투항했고 돌궐의 묵철은 당나라의 사주를 받은 힐질략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 선봉인 발야고를 쫓다가 힐질략의 계략에 걸려 무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가한을 잃은 돌궐은 내홍으로 들끓었지만 비가가한이 묵철의 뒤를 이었다. 그는 즉시 사신을 보내 당나라와 화친했다. 묵철의 사위 고임무는발해의 귀순 요청을 거절하고 당나라에 귀순했다.
요하 일대를 막아주던 돌궐, 거란, 해, 습이 물러나자 발해가 당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대치해야 했다. 병진(716)년 가을, 태자 대무예가 7만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천리장성을 넘어 요하 일대를 장악했다. 당제 이융기는 노발대발하면서 영주도독부를 설치하고 대군을 주둔시켜 이에 대응하였다.
대조영이 친정하여 흑수부를 토평하고 북방을 안돈하겠다며 출정하지만 중도에 쓰러져 환궁하여 위독해지자 대무예는 군사들을 되돌려 급히 회군하였다. 결국 대조영은 예순아홉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고 그해 기미(719)년 6월 황태자 대무예가 황위에 올랐으니 그의 보령 마흔둘이었다.
당나라 사절은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은밀히 군사 고징우를 찾아 오랑캐 잔당을 토평하고 돌궐을 징치하자고 제안한다. 고징우는 완곡히 이를 거부했고 사신은 다시 대문예를 만나 왕모중의 밀서를 전달했다.
당나라 조문이 다녀가고 난 후 대문예는 곧바로 황제를 알현하고 흑수 정복을 위한 5만 군사를 요구한다. 하지만 중신들이 모두 이에 반대하였다. 예상 밖으로 일본이 통교를 요청해 왔으며 당나라 조정은 계속하여 오랑캐들의 토평을 위한 동맹을 요구해 왔다.
대무예가 당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하자 당 조정은 흑수의 대수령을 포섭하는 등의 음계(陰計)를 드러냈고 이에 미발계가 사신을 자청하고 나서 해동청 쉰다섯 마리만을 가지고 이융기를 만난다. 미발계의 당당한 모습이 이융기를 탄복시키자 이융기는 재화와 비단을 듬뿍 하사하고 그에게 운휘장군을 제수했다.
미발계는 그때 장안에 있던 대문예와 함께 도성으로 돌아왔는데 대문예는 백제 출신의 영인들과 기예를 익힌 예인들을 수십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미발계는 대문예가 왕모중을 만나기 위해 북장 오지인 삭방도까지 다녀왔다는 걸 알고 가슴이 섬뜩해지는 걸 애써 감추었다.
상경길에 수군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 미발계는 풍랑을 피해 들어선 섬에서 수군의 무리를 통솔하고 있던 양만춘 장군의 손녀 양소화를 만난다. 후일 양소화는 수군에 편입되었다.
임술(722)년 가을, 황후의 생신날 열린 연회에 불려온 대문예가 데려온 영인과 예인들의 기예가 무르익어 검무가 시작되자 남녀 검무잡이들이 갑자기 황제를 겨냥하여 화살과 비수를 연속하여 날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위의 장수들이 이를 막고 대문예가 그들을 베어 황제의 시해는 막았지만 몸으로 황제를 보호했던 개국공신이자 황제의 스승이었던 신재용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황제는 이번에도 배후를 밝히자는 신하들을 무마시켰다.
당나라는 날이 갈수록 벼슬과 은사를 베풀어 말갈 제부의 수령과 대수령, 북방 흑수부의 수령들을 차례로 포섭해 갔고 이런 상황은 대무예를 분노케 했다. 대무예의 흑수 정벌 결정을 대문예가 반대하지만 대무예는 오히려 그에게 정병 3만을 주어 출병토록 명했다.
대문예는 든든한 후원자인 외숙 임아와 자신을 따르는 신하 및 무예가 출중한 젊은 장수들을 선발하였고 신재용의 유일한 혈육인 신승과 난중경의 큰 아들 난일까지 데리고 출병하였다가 모반을 꾀하고 도처에 격문을 뿌리며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는 한편, 당나라 왕모중에게도 밀서를 보내 대무예를 처단하고 정권을 잡으면 기꺼이 당나라에 복속하고 조공을 바치겠다며 10만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황제의 종형되는 대일하가 명을 받고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일진일퇴하던 반군의 장수들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장수들이 옥에 갇힌 신승에게 설득당한 결과였다. 반군은 쫓기면서도 당나라의 원군을 기다리며 느린 속도로 서진했고 관군 역시 진격을 늦추며 그 뒤를 따랐다. 반군은 드디어 천문령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