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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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발해(大渤海)

                                                                                               김홍신

5. 등주와 장성을 정벌하다

  반란군의 저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부 신승이 탈출에 성공하고 반란군이 황제의 밀지를 가짜로 만들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군사들이 투항하기 시작했다. 대문예는 당나라로 도망쳤다. 당나라 황제 이융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모중의 주청을 받아 들여 대문예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하고 그를 환대했다.

 

  대무예는 국서를 보내 대문예의 참살을 요청했다. 이융기는 투항한 자를 죽일 수 없어 대문예를 왕모중의 집에 숨겨두고 변방인 영남으로 보냈다고 거짓 답신을 보낸다. 발해는 이 사실까지 언급하며 당나라를 압박하였고 후일 당나라를 침공하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대야발이 대조영의 명을 받아 집필을 시작했던 단기고사(檀奇古史)13년 만에 완성했고 7년 전 보내 온 사신에 대한 답빙으로 일본으로 사신단을 파견했다.

  무진(728)4, 당나라 장안에서 유학하던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이 죽었다는 부고가 발해 조정에 당도했다. 대문예와 왕모중이나 이융기가 꾸민 치밀한 흉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무예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우선은 신중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당나라 군권을 장악하고 황실 재정을 뒷받침하는 왕모중은 명실상부한 당나라의 2인자였다. 고구려 출신 노예 신분으로 대국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랐으니 누군들 그를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환관의 무리들이 그를 모함하기 시작했고 이융기 또한 그의 세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왕모중을 우려한 상소가 있었고 그가 병부상서가 되어야 한다는 주청이 있자 위기의식을 느낀 이융기는 조서를 내려 왕모중과 그의 심복 장수들을 모조리 좌천시켜 버린다. 완모중에게는 귀양지 양주로 가는 도중 목을 매달아 죽이라는 교서가 다시 내려졌다. 중원을 경략하려던 한 고구려인의 꿈이 이렇게 일장춘몽으로 끝나 버렸다.

 

  거란의 가돌가한이 발해와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하고 싶다는 간청이 있었다. 대무예는 겉으로는 이 제의를 반대하고 나서 은밀히 등주를 정벌할 계획에 착수한다. 등주의 수로와 강역도를 입수한 발해군은 임신(732)9, 백암성과 비사성에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켰다. 황제 대무예가 직접 이끄는 육로군은 요하를 건너 영주로 들이치고, 수군대장 장문휴의 해군은 비사성과 박작구에서 출병하여 등주로 짓쳐들기로 했다.

 

  수군의 선봉장 양소화는 화공으로 당나라의 군선들을 여지없이 쳐부수었고 대장군 장문휴는 공격 한 나절 만에 등주성을 함락시켰다. 주력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던 대무예도 삽시간에 영주성을 점령하였다.

 

  등주를 빼앗기고 영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에 당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황제 이융기는 분노를 참지 못했고 토벌군을 편성한다. 왕모중 사건으로 좌천되었던 갈복순에게 군사를 주어 출정시키고 신라가 발해의 남쪽 국경을 공략토록 요청하는 한편, 대문예에게 유주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겨울이 깊어가는 시기에 신라왕 김흥광은 김윤중과 그의 아우 김윤문을 시켜 발해를 공격하도록 했다. 북녘의 몰아치는 한파를 뚫고 나아가는 진군은 너무도 힘들었다.

 

  발해는 당나라를 침공하기 전 이미 신라의 공격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지난 날 대문예를 쫓아 당나라로 망명한 역신 난일의 아우 난이와 난삼을 방어군 통수로 삼고 신라의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신라군가 발해군이 조우했다. 발해군이 밀리는 척 퇴각하자 사기 충천한 신라군이 추격을 독려하며 뒤쫓았다. 그러나 그것은 발해의 유인책이었다.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고 신라군은 눈에 파묻혀 사방을 분간할 수도 없이 고립되었다. 눈이 그치자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왔다. 추위는 갈수록 맹위를 떨쳤고 군사들은 얼어 죽어 갔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몇날 며칠을 남쪽으로 내려 와 진을 쳤는데 돌연 발해군이 기습 공격을 해 왔다. 신라군들은 패배하여 경황없이 도주했다.

 

  영주가 함락되고 평주마저 발해의 수중에 들어가자 당나라 조정은 대문예를 출병시켰다. 대문예는 역신 임청의 의견에 따라 발해군 깊숙이 정진대를 침투시켜 대무예를 살해하고 여세를 몰아 발해군을 깨뜨리고 천통성을 함락하면 황위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정진대는 침투에 실패했고 대문예는 전투에 패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대무예는 천천히 군사를 몰아 당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장벽을 쌓고 있는 마도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연일 추위가 맹위를 떨쳐 얼어 죽는 군사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전장에 나가는 것 자체가 무모했다.

 

  당제 이융기가 화의를 원하는 사신을 보냈고 대무예는 이를 받아들여 회군을 명하였다. 발해로 보면 이번의 전쟁은 대승리였고 천하대국이라 고 큰소리치던 당나라로 보면 치욕의 전쟁이었다.

  도성에 돌아 온 대무예는 거란의 가돌가한에게 은밀히 국서를 보내 날이 풀려 마도산 일대를 진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군자금을 보내겠다고 했다.

 

  대문예를 처단해야 한다는 조정공론을 거스르지 못한 대무예가 그들의 뜻을 가납하였고 역적을 주살하기 위한 계획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날이 풀리자 돌궐과 거란이 발해와의 밀약을 지켜 당나라 지경을 공격했다. 당제 이융기는 다급하게 발해에게 거란의 배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고 대무예는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들에게 요하를 건너게 했다.

  그 틈에 섞인 세 명의 자객이 대문예가 은거하고 있는 낙양에 침투했다. 어느 날 거리에 나온 대문예를 자객들이 공격하지만 사살에 실패하였고 그를 따르던 호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자결하였. 대문예는 짐을 꾸려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자 대흠무는 열여덟이 되어 세상 순람에 나섰다가 돌아와 태자로 책립되었다. 대무예는 대흠무를 축성 중인 새 도읍지 중경으로 내려 보냈. 중경의 축성이 마무리되자 대무예는 천도의 뜻을 천하에 알렸다.

  대무예는 동방 경략을 위해 장문휴를 불러 의견을 묻자 그는 신라 공략을 주장한다. 하지만 대무예는 의견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장문휴는 대장군 공진방의 딸 공사량과의 혼인을 약조했다. 그런데 사냥을 갔던 대흠무가 공사량을 발견하고 그녀를 취하고 만다.

 

  황제 대무예의 병은 호전의 기미가 없이 깊어 갔고 그는 불사약을 찾기를 원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발해 황제 대무예는 정축(737)진월(3)에 기어이 붕어했다.

  대흠무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양 대해를 평정하러 갔던 북정군대총관 겸 보국대장군 장문휴가 신라를 정복하자는 상소문을 보내왔다. 대흠무는 황명을 따르지 않으려는 장문휴를 문죄하기 위하여 그를 입시케 했다.

 

  그러나 그는 입시하지 않고 인편으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불충하기 짝이 없는 기군망상이었다. 대흠무는 진노하여 그를 체포하여 참하고자 하였으나 태사 신승이 설득하여 이를 말렸다.

  흑수를 제압하기 위해 양소화가 자진하여 나섰고 장문휴는 스승 법연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흑수 지경으로 가서 의병을 초모하여 살신성인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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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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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대문예는 반란에 실패하여 당나라로 도망쳤고 발해는 요하를 건너 등주와 영주를 점령한다. 당나라의 요청으로 출병했던 신라를 격파했다. 대무예가 붕어하고 대흠무가 그 뒤를 이었으며 장문휴와 갈등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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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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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발해(大渤海)

                                                                                              김홍신

4. 황자의 역심

  친정에서 돌아온 대조영은 대무예와 대문예, 두 황자를 흑수 말갈 정벌전에 보내 장차 누가 황위를 물려받기에 적당한지를 가늠하고자 했다. 정덕왕 대무예는 맏이답게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웠으며 인상도 관대하고 후덕해 보였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의리가 있었으며 추진력이 강해 어떤 난관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명성왕 대문예는, 외모는 할아버지 대중상을 많이 닮아 눈매에 광채가 서려 있었으며 통이 크고 매사 화통하여 열정이 남달랐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흡인력이 있어서 따르는 자가 많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성정은 아버지 대조영을 닮은 듯했다.

 

  고모 대화인이 대무예에게 궁녀로 데리고 있던 돌궐 여인 사사란을 보낸다. 대무예가 그녀를 취하였고 그 밤 이후로 사사란은 대무예의 여자가 되었다. 그런데 사사란은 이전에 이미 대문예와 후일을 약속한 사이였다. 흑수 정벌을 앞둔 어느 날 대문예는 결국 형이 거처하는 동궁의 담을 넘고 형의 여자 사사란을 범하게 된다.

 

  흑수 정벌에 나선 두 아들은 서로 전공을 드높이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대무예가 호랑이와 늑대 떼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자 이에 자극 받은 대문예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공격에 공격을 거듭하여 형과 대등한 전과를 거두었다.

  늦가을, 대무예는 천금성에서, 대문예는 영자성에서 겨우살이 준비에 들었고 사사란은 대문예와 위험한 불장난을 계속하고 있었다. 봄이 되어 돌궐의 묵철이 요북으로 회군하자 당군을 이끌고 이해고가 동진하기 시작했다.

 

  천리장성 일대에 전운이 감돌자 대조영은 친정을 결정하고 북정군의 두 아들을 불러들였다. 이해고는 대조영이 당도하기 전에 영주와 요서에 있는 거란과 말갈의 잔당들을 토평하기 시작했다. 싸움에 패한 잔당 중 거란군은 북쪽으로 도망쳤지만 2만에 달하는 말갈족이 발해군에 귀순해 와서 발해군의 사기는 나날이 충천했다.

 

  오랑캐들의 준동에 골머리를 앓던 당제 무측천은 중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리장성 일대에 진을 친 발해군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박작성의 장시에서 교역을 하며 북쪽의 돌궐을 방비해주면 당군이 요동벌로 진격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대조영이 회군하였고 당나라의 사주를 받은 북방의 흑수가 변방을 침노하였다. 대문예는 또 다시 흑수 출병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사사란은 이번에 출정하는 장수가 변고를 당한다는 술사의 예언을 듣는다.

 

  대문예는, 이번 싸움에서는 신무기인 화약을 사용하여 적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승승장구 진군을 계속한다. 명산성을 수복한 대문예는 천금성을 치고 영자성으로 군사를 휘몰았다. 태자위를 노리는 대문예의 야심이 공격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랄까? 너무도 성급하게 영자성으로 가는 지름길로 군사를 끌고 가던 대문예는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아 패퇴하기에 이르렀다. 흑수의 선봉장 옥기가 대문예를 향해 도끼를 흔들며 덮쳐오던 순간 어디선가 비호같이 나타난 사사란이 그 틈을 비집고 달려들어 칼을 뻗는다. 옥기의 도끼를 맞은 사사란과 그녀의 칼을 맞은 옥기가 동시에 쓰러졌.

 

  영자성은 평정했지만 대문예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조영은, 대무예의 후궁의 몸으로 대문예를 유혹한 사사란보다 대문예의 죄가 더 크다고 보고 그에게 금족령을 내려 명산성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했다. 사실상의 유배나 다름없었다.

 

  을사(705)년 정월, 67세에 황위에 올라 15년 동안 치국하고 82세 고령에 병까지 겹친 무측천이 황위를 빼앗겼다. 새로 황위에 오른 이현이 새삼 발해를 거론하고 화친을 위해 스스로 당나라 황손을 숙위로 보내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발해는 대문예를 사면하여 숙위로 하고 당나라로 보냈다.

 

  대문예는 해가 바뀌고 장안 사정에 익숙해지자 황제의 신임을 밑천 삼아 권신들와 널리 친교를 맺었다. 특히 황손 이융기와 가까워졌고 그의 호위관노 왕모중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러던 중 대무예가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처지가 비슷한 이융기가 천군만마로도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의 자객지변으로 능히 할 수 있다며 듣기 좋은 말로 그를 위로했다.

  어지럽던 당나라 황실의 치열한 암투 끝에 아버지 이단에 이어 이융기가 황위에 올랐다. 왕모중이 대단한 활약을 펼쳤고 대문예도 그 뒤를 도왔다. 황제가 된 이융기는 사신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에 봉하고 대문예도 돌려보내기로 했다. 왕모중은 물론 대문예의 거병을 도우기로 하고 거금을 내주었다.

 

  당나라의 국서를 어람한 대조영은 크게 노하고 사신 최흔을 하옥시키고 비사성을 비우지 않으면 친정하겠다는 답서를 보냈다. 이에 놀란 이융기는 왕모중의 의견대로 비사성을 돌려주고 훗날을 기약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조영은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비사성을 돌려받아 고구려 멸망 47년 만에 드디어 옛고구려 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비사성 일대를 발해에 내준 이융기는 설인귀의 아들 설눌을 보내 요하 일대를 평정케 했다. 그러나 설눌은 돌궐의 지원을 받은 거란의 복병에게 참패했다. 하지만 이융기는 설눌에게 다시 군사를 주어 만회할 기회를 부여하기로 했다.

 

  대조영은 아우인 대야발에게 당나라의 침입으로 소실된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 기록하기를 지시한다. 대조영은 발해의 백성들이 스스로 위대한 백성임을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무예를 독살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시위 문성간이 사라진 이틀 만에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나 배

후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 즈음 돌궐의 묵철가한은 가렴주구를 일삼아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특히 거란과 해족은 묵철이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자 불평이 늘어 갔다. 당나라의 왕모중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이융기에게 건의하여 발해와 돌궐에게 동시에 국서를 보낸다. 당나라의 국서를 받은 발해 또한 양쪽 모두에게 군사를 동원하겠다고 통고하고 대문예에게 3만의 군사의 주어 아주 느리게 진군하도록 지시했다. 양쪽 모두에게 자신을 위하여 출병한다는 것을 믿게 하면서 양쪽이 먼저 전투를 벌이면 어부지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설욕을 다짐하며 당나라 대군을 이끈 설눌의 군대가 진격하자 거란 대수령 이실활과 해족의 여러 수령들은 지레 겁을 먹고 당나라에 투항했고 돌궐의 묵철은 당나라의 사주를 받은 힐질략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 선봉인 발야고를 쫓다가 힐질략의 계략에 걸려 무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

  가한을 잃은 돌궐은 내홍으로 들끓었지만 비가가한이 묵철의 뒤를 이었다. 그는 즉시 사신을 보내 당나라와 화친했다. 묵철의 사위 고임무는발해의 귀순 요청을 거절하고 당나라에 귀순했다.

 

  요하 일대를 막아주던 돌궐, 거란, , 습이 물러나자 발해가 당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대치해야 했다. 병진(716)년 가을, 태자 대무예가 7만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천리장성을 넘어 요하 일대를 장악했다. 당제 이융기는 노발대발하면서 영주도독부를 설치하고 대군을 주둔시켜 이에 대응하였다.

 

  대조영이 친정하여 흑수부를 토평하고 북방을 안돈하겠다며 출정하지만 중도에 쓰러져 환궁하여 위독해지자 대무예는 군사들을 되돌려 급히 회군하였다. 결국 대조영은 예순아홉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였고 그해 기미(719)6월 황태자 대무예가 황위에 올랐으니 그의 보령 마흔둘이었.

 

  당나라 사절은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은밀히 군사 고징우를 찾아 오랑캐 잔당을 토평하고 돌궐을 징치하자고 제안한다. 고징우는 완곡히 이를 거부했고 사신은 다시 대문예를 만나 왕모중의 밀서를 전달했다.

  당나라 조문이 다녀가고 난 후 대문예는 곧바로 황제를 알현하고 흑수 정복을 위한 5만 군사를 요구한다. 하지만 중신들이 모두 이에 반대하였다. 예상 밖으로 일본이 통교를 요청해 왔으며 당나라 조정은 계속하여 오랑캐들의 토평을 위한 동맹을 요구해 왔다.

 

  대무예가 당나라와의 동맹을 거부하자 당 조정은 흑수의 대수령을 포섭하는 등의 음계(陰計)를 드러냈고 이에 미발계가 사신을 자청하고 나서 해동청 쉰다섯 마리만을 가지고 이융기를 만난다. 미발계의 당당한 모습이 이융기를 탄복시키자 이융기는 재화와 비단을 듬뿍 하사하고 그에게 운휘장군을 제수했다.

  미발계는 그때 장안에 있던 대문예와 함께 도성으로 돌아왔는데 대문예는 백제 출신의 영인들과 기예를 익힌 예인들을 수십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미발계는 대문예가 왕모중을 만나기 위해 북장 오지인 삭방도까지 다녀왔다는 걸 알고 가슴이 섬뜩해지는 걸 애써 감추었다.

 

  상경길에 수군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 미발계는 풍랑을 피해 들어선 섬에서 수군의 무리를 통솔하고 있던 양만춘 장군의 손녀 양소화를 만난. 후일 양소화는 수군에 편입되었다.

  임술(722)년 가을, 황후의 생신날 열린 연회에 불려온 대문예가 데려온 영인과 예인들의 기예가 무르익어 검무가 시작되자 남녀 검무잡이들이 갑자기 황제를 겨냥하여 화살과 비수를 연속하여 날리는 사건이 발생했.

  주위의 장수들이 이를 막고 대문예가 그들을 베어 황제의 시해는 막았지만 몸으로 황제를 보호했던 개국공신이자 황제의 스승이었던 신재용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황제는 이번에도 배후를 밝히자는 신하들을 무마시켰다.

 

  당나라는 날이 갈수록 벼슬과 은사를 베풀어 말갈 제부의 수령과 대수령, 북방 흑수부의 수령들을 차례로 포섭해 갔고 이런 상황은 대무예를 분노케 했다. 대무예의 흑수 정벌 결정을 대문예가 반대하지만 대무예는 오히려 그에게 정병 3만을 주어 출병토록 명했다.

 

  대문예는 든든한 후원자인 외숙 임아와 자신을 따르는 신하 및 무예가 출중한 젊은 장수들을 선발하였고 신재용의 유일한 혈육인 신승과 난중경의 큰 아들 난일까지 데리고 출병하였다가 모반을 꾀하고 도처에 격문을 뿌리며 말머리를 돌려 회군하는 한편, 당나라 왕모중에게도 밀서를 보내 대무예를 처단하고 정권을 잡으면 기꺼이 당나라에 복속하고 조공을 바치겠다며 10만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황제의 종형되는 대일하가 명을 받고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일진일퇴하던 반군의 장수들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장수들이 옥에 갇힌 신승에게 설득당한 결과였다. 반군은 쫓기면서도 당나라의 원군을 기다리며 느린 속도로 서진했고 관군 역시 진격을 늦추며 그 뒤를 따랐다. 반군은 드디어 천문령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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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대조영이 죽고 대무예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대문예가 반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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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발해(大渤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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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국 황제 대조영

  당나라 사신 이걸명은 말갈 진영에서도 고구려 진영에서와 똑같은 수모를 당했다. 이걸명의 진언에 진노한 무측천은 항장 이해고와 낙무정, 구에게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토평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해고 일행은 30만 대군으로 대조영을 추격한다. 고구려군은 노약자와 부녀자들만도 수만 명이나 되는 가솔을 데리고 가니 자연 진군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한 이해고는 강을 가로지르기 위해 부교를 설치하지만 고구려군의 기습 화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강을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토평군이 가솔들을 따라잡아 그들을 공격하려는 순간, , 우에서 고구려군이 달려들고 달아나던 가솔들도 변복을 벗고 정예군으로 돌변하여 그들을 압박한다. 하지만 일시적으로는 토평군의 진군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앞으로의 일이 더 큰 걱정이었다. 말갈도 마찬가지였 고구려군보다 한 발 앞서 가던 걸사비우는 자신들의 가솔들이 기습을 받는다는 봉화를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니 적군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사비우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살아남은 말갈의 군사들이 대조영에게 소식을 전했다. 한파가 휘몰아치고 폭설이 내려 전진이 어려워졌고 결국 수십만의 당나라 군사와 맞닥뜨려졌다. 군사들을 재편하여 적진으로 뛰어들던 고구려군의 뒤편 저 멀리에 무수한 인마가 먹장구름처럼 달려온다. 완전히 포위된 것이었다. 앞에는 이해고가 공격하고 뒤에는 손만영의 군사를 궤멸시켰던 양현기가 옥죄고 들었다.

 

  대조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산을 타고 넘던 연충인이 능선을 타고 내려왔고 강을 따라 공격하던 검연각도 기수를 돌렸다. 마침내 달신의 군사들이 혈로를 뚫었다. 북녘으로부터 아련하게 함성이 들리더니 원군이 도착했다.

골사각과 걸초비우가 이끄는 말갈군과 역밀이 이끄는 거란군, 대중상과 송채륜 이끄는 고구려 군사에 대화인의 낭자군까지 합세했다. 적장 등원호가 쓰러지고 원군의 기병대가 적을 마구 짓밟자 당나라 군사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거의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행군하여 산악으로 들어섰다. 대조영은 거란의 장졸들과 백성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대조영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통수권을 내놓고 초막으로 들어가 속죄의 나날을 보냈고 병든 몸으로 아들을 따라 참선하던 대중상이 쓰러지자 비로소 초막에서 나왔다. 대중상은 해가 다가기 전에,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운명했.

 

  대조영은 그의 유지에 따라 그를 화장하여 뼈를 사방으로 뿌렸다. 겨울이 다가기 전 그들은 또 다시 이동하여 천생만사 끝에 천문령에 당도했다. 최문천이 홀한해 지하삼림에서 조련이 잘 된 군사와 군마, 양곡을 챙겨왔다. 고구려군은 군진을 넓게 잡고 진법과 병법을 익히고 군기를 엄격히 하는 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패하면 도망 갈 곳도, 잃은 군사를 보충할 수도 없었다.

 

  무술(698)년 춘삼월, 이해고는 조정의 성화를 받으며 40만 대군을 진발할 채비를 서둘렀고 세작으로 심어 놓은 돌치를 통해서 적의 기밀을 탐지하고자 했다.

  적의 후방을 교란할 유격군으로 돌치가 임명되자 그는 군령을 어겨 가족을 잃었다는 두만호와 윤수명을 포섭하여 은밀히 계책을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만호와 윤수명의 가족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과 같이 돌치도 그 사실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돌치는 윤수명을 죽이고 당나라 행영으로 달려가다 목이 잘리고 말았다. 고구려군 중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 것일까?

 

  이해고의 40만 대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이해고의 머릿속에는 전황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밀어붙여 날이 어두워지면 반란이 일어나고 횃불이 대조영의 퇴각로를 알려주면 밤사이 대조영을 잡고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해고는 전각과 북으로 당나라 군사들을 더욱 독려하여 더 깊숙이 삼림 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군은 쫓기는 고구려군을 계속 몰아붙이며 선봉대가 대조영이 기다리고 있는 천문령 봉우리를 향해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랐다. 고구려 진영에서 북소리가 들리고 깃발이 흔들리며 불시에 사방에서 복병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바윗돌이 구르고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해고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퇴각을 명했다. 대조영을 잡게 해 주겠다는 대조영의 사촌 아우 대사달의 간계에 속은 것이었다. 계곡으로 퇴각한 당나라군에게 이번에는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사달이 바위와 통나무로 막아 만든 저수조를 터뜨린 것이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삽시간에 뒤엉켜 계곡으로 쳐박혔고 능선을 기어오르던 자들은 고구려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도망치는 당나라 군사들은 서로 걸려 넘어지고, 부딪혀 자빠지고, 먼저 도망치려고 아우성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단숨에 고구려 진영을 무너뜨릴 기세였던 당군은 무참히 패한 채 퇴각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당군은 전군을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일제히 총공세를 감행했고 대조영은 배수의 진을 치고 이에 대항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했고 쫓기고 쫓는 전투가 연일 이어졌다. 대승과 대패가 교차했다. 결국 이해고는 수만의 군사만을 이끌고 퇴각하고 말았다. 불과 7만의 군사로 40만 대군을 깨뜨린 천문령 대첩이었다.

 

  당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무측천은 이해고를 죽이려 하였으나 유극량의 간곡한 주청으로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계속해서 반란의 잔당들을 토평하라는 명을 내렸다.

  동남쪽으로 행군로를 틀어잡은 대조영 앞에 최해가 5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의탁해 왔다. 가는 길에 보현사에 들러 원오선사를 만난 대조영은 그로부터 복국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고 도읍은 우선 동모산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듣는다. 대조영은 먼 길, 난관을 헤치며 동모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세는 연합군이 요서에서 준동하지 않으면 돌궐이 요북으로 돌아갈 것이고 요서가 조용하면 당조는 반드시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짓밟을 것이라 걱정스러웠다.

 

  대조영은 즉시 역밀과 측고를 보내 요서를 경계토록하고 환도성에 있는 을사성을 요서 쪽으로 진병케 했으며 대사달을 통정진 쪽으로 출병시켜 요서 일대를 흔들게 했다.

 

  대조영은 창업을 선포하기에 앞서 중신이 될 자들과 각 부의 수령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올라 제를 올렸고, 드디어 무술(698)8월 초하루, 고구려의 혼을 계승한 나라 발해의 시황으로 등극하고 만방에 발해를 선포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되었으며 영주에서 반당의 기치를 올린 지 3년 만의 대업이었다. 관제를 정하고 관작을 부여하였으며 미흡하나마 서서히 나라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발해 황제 대조영이 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돌궐의 묵철가한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숭주와 귀주를 공격하게 한다. 이어서 규주와 단주를 점령하고 영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는 낙양을 공략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당나라의 요서와 요동 출병을 막기 위한 계책이었다.

  묵철의 생각이 옳았다. 요서와 요동으로 출병하려던 당나라군은 돌궐을 막기 위하여 등주와 유주에 각각 10만 군사를 집결시켰다. 요서의 급변한 전황을 보고받은 대조영은 옛 고구려 땅인 신성과 요동성, 안시성과 오골성을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

 

  약조한 대로 묵철이 요서를 공략한 덕에 대조영의 친정군은 신성을 깨뜨리고 천리장성을 따라 현도성과 개모성을 취하고 백암성까지 수복했다. 돌궐은 해족과 연합하여 당나라의 요충지 유주를 손에 넣었고 대조영은 손담의 활약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요동성을 얻었다.

 

 당나라 조정을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오랑케들을 달래기로 하고 돌궐과 발해에 사신을 급파했다. 우선 달래 놓고 나중에 두 나라를 부추겨 싸우게 하든지 아니면 차례로 토평하든지 할 계획이었다.

 

  당나라의 사신은 맞은 대조영은 무측천에게 고구려 고지인 박작성과 비사성을 요구했다. 당나라는 우선 돌궐의 요구를 가납하여 압송했던 포로들과 막대한 재화를 돌려보냈고 묵철은 장성 밖으로 군사들을 회군하였. 당나라가 돌궐의 요구를 들어주고 난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이 소식을 들은 대조영은 묵철에게 국서를 보낸다. 대조영의 국서를 받은 묵철은 미소를 짓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서 오는 이득을 즐기며 당나라에 군사를 일으키지 말라는 국서를 보냈다. 당나라 조정은 한 동안 쟁론을 벌였지만 화의책을 펼치기로 하고 당분간 정세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곳곳의 말갈의 수령들이 동모산으로 와서 복속을 맹약했다. 긴 겨울이 지나자 원오선사가 세상을 떠났고 대조영은 원오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수제자 혜명을 국사로 삼았다.

 

  대조영은 마자수(압록강) 하류의 요충지 박작성을 수복하러 친정을 결행했다. 당나라 수성장 이개명은 군사의 수효를 믿고 무모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다 패하여 성 안으로 도망쳤고 원군을 끌고 온 당장 증색은 발해군의 수효를 보고 놀라 항복하고 말았다. 항장 증색은 당군으로 변복한 발해군을 이끌고 박작성으로 입성했고 수성군 장수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박작구 확보에 나선 달신은 화공을 펼쳐 당나라 군선과 그들의 진영을 삽시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박작구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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