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Voina i Mir)
L. N. 톨스토이
L. N.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 9. 9 ∼ 1910. 11. 20) 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이 있다.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속이는 책’ 중 상위에 랭크 된 것 중의 하나가 ‘전쟁과 평화’란다. 이유는?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읽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오래 전 나의 경험이다. 재미가 없었거나, 읽기가 힘들었거나, 아니면 둘 모두이거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서 벗어난 지금 독서에 푹 파묻히고 싶어서 다시 읽었다.
혹자는 이 소설을 높은 예술성을 가진 세계 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기도 하나 나의 부족한 문학적 인식에는 이 이야기는 단지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상류사회 귀족들 간의 사랑을 그린데 불과하다고 느끼는 부족함을 탄식한다.
1805년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 페테르스부르크의 상류사회 사람들이 줄줄이 참석한다. 바실리 공작과 그의 딸 엘렌, 안드레이 공작과 볼콘스키 공작 부인, 피에르 등이 참석하여 나폴레옹과 전쟁, 프랑스 혁명 등에 관한 갑론을박과 잡담들을 한다.
안드레이의 집을 나온 피에르는 그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오늘도 트럼프 모임에 술잔치가 벌어질 아나톨리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곳에는 돌로호프의 술 마시기 내기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후 그들은 곰을 잡아 장난을 쳐서 돌로호프는 강등되고, 피에르는 모스크바로 추방당하고, 아나톨리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추방당하는 벌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백작부인 로스토프의 대저택에서 축하파티가 열린다. 백작부인의 딸 나타샤, 장교 보리스, 대학생 니콜라이, 백작의 조카뻘인 소냐 등이 등장한다. 보리스는 나타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소냐는 니콜라이를 생각하며 괴로워 한다.
베주호프 백작이 임종하고 피에르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 받아 혼사를 앞둔 딸을 가진 어머니들과 그 아가씨들이 그분에 대한 태도가 돌변하였다고 한다. 볼콘스키 공작의 딸 마리야는 ‘사교계의 대부’로 통하는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극비리에 바실리 공작의 아들 아나톨리와 결혼을 성사시키려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안드레이는 노공작에게 임신한 아내를 맡기고 전선으로 떠난다.
전선의 양상은 쌍방이 간헐적으로 포격을 주고받다가 점점 가열되고 있다. 다리를 가운데 놓고 양측이 대치하기도 하였으나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십만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고 삼만 오천의 러시아군은 쿠투조프의 지휘 하에 허둥지둥 퇴각을 계속했다. 쿠투조프는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안드레이 공작은 이 전투의 승전보를 가지고 오스트리아 궁정에 파견되어 프란츠 황제를 만난다. 그러나 그 동안 빈은 함락되었다. 안드레이는 전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돌아가는 길은 아비규환이다. 군대, 수송차, 짐마차, 포병대 뒤섞여 진흙길을 꽉 메운다. 낙오병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하기도 한다. 십오만의 나폴레옹군은 빈 다리를 건너 원군과 쿠투조프군과의 연락지점으로 돌진하고 있다고 한다. 휴전 제안을 받은 쿠투조프는 항복의 조건까지 제출했으나 나폴레옹은 속지 않는다.
드디어 프랑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열심히 전투에 임하던 러시아군에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마침내 러시아군이 격퇴된 것이다.
바실리 공작은 자기 계획을 두고두고 재검토하는 법이 없었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쳐도 된다는 생각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을 사람을 만나면 순식간에 아첨하여 차차 필요한 용건을 이야기하였다. 바실리는 피에르를 자기 딸과 결혼시킬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베주호프 백작 신분이 된 피에르는 갖가지 용무에 쫓기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상냥하고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외교단에 편입되어 시종보가 되었다.
피에르는 엘렌과의 결혼이 불행해 질 것이므로 그것을 피하기 위해 현재 머무르고 있는 바실리 공작의 집에서 나가기로 결심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엘렌과 결혼했다.
바실리 공작과 아나톨리가 볼콘스키 노공작을 방문했다. 그런데 아나톨리가 브리엔에게 흑심을 품는 바람에 마리야는 청혼을 거절한다.
안드레이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나폴레옹에 의해 발견되어 의무실로 보내지지만 회복될 가망이 없는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그 지방 사람들에게 남겨져 보호 받는 몸이 되었다.
1806년 초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휴가를 얻어 귀향했다. 소냐, 나타샤, 페챠, 안나 미하일로브나, 베라, 노백작이 그를 끌어안았다. 니콜라이는 소냐의 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였지만 짧은 모스크바 체제기간 바쁜 사교계 생활에 휘말려 그녀와 가까이 지내기는커녕 도리어 멀어지고 말았다. 피에르는 아내 엘렌이 돌로호프를 따르자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아우스테를리츠 싸움에 패하고 쿠투조프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과 모멸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클럽에서 피에르는 무례함을 참지 못하고 돌로호프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돌로호프는 피에르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피에르는 야비하고 바람둥이인 엘렌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와는 재산의 절반을 주고 이혼하고 혼자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났다.
안드레이의 전사 통지를 받고 마리야는 차마 임신 중인 올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출산일이 되자 그가 산부인과 의사와 함께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고 죽고 만다.
돌로호프는 소냐에게 청혼하지만 소냐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딱 잘라서 거절한다. 니콜라이는 카드게임에서 져 돌로호프에게 사만 삼천 루블리를 빚진다. 니콜라이는 부득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데니소프의 청혼을 받은 나타샤는 난처해하며, 백작부인이 그 청을 거절한다. 니콜라이는 폴란드에 주둔 중인 연대로 복귀한다.
아내와 깨끗이 갈라선 피에르는 페테르스부르크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프리 메이슨’에 가입한다. 1806년 안나 파블로브나의 무도회에서 보리스는 베주호프 백작부인과 가장 친한 사람이 되었다.
전쟁은 치열해 지고 싸움터는 차츰 러시아 국경으로 다가왔다. 피에르는 메이슨에 가입한 뒤 개혁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타산적이고 교활한 총관리인에 의해 실행되지는 못했다. 피에르는 안드레이 공작을 만나 ‘프리 메이슨’ 가르침을 역설하고 마리야도 만난다. 안드레이 가족은 모두 피에르를 칭찬한다.
데니소프 소령은 수송차를 약탈하고 보급장교를 구타, 위협한 사건으로 국법회의에 회부될 상황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입원한다. 로스토프는 그를 위해 황제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프랑스와 러시아, 두 황제의 회담이 있던 날 니콜라이는 보리스에게 데니소프의 청원을 도움 받고자 했으나 거절 당하고 어느 장군을 통해 전달된 청원을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1808년 양국의 황제는 재차 회견을 갖기로 하여 두 군주의 친교는 깊어졌다. 그래서 러시아는 이전의 동맹관계였던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어 맹렬히 전진했다.
안드레이는 2년 동안 전원생활에 묻혀 살면서 피에르에게 결여되어 있는 실천력을 과감히 보여 준다. 그는 한 소유지에서 러시아 최초로 약 3백 명의 농노를 자유농으로 전환시키는 등 개혁을 추진했고 군규제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피에르는 메이슨 활동을 계속했으며 아내와 재결합했다. 보리스는 군대 입대한지 4년만에 로스토프네를 찾아왔다. 보리스는 엘렌을 만나는 일을 중단하고 로스토프네를 자주 들렀으나 백작부인과 얘기를 나눈 후 방문하는 일이 없어졌다.
안드레이는 나타샤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의 허락을 구했으나 아버지는 일년 후에나 생각해 보자고 한다. 노인은 둘 중 어느 쪽이든 일년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타샤는 안드레이의 청혼을 수락하지만 일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둘은 약혼식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는 나타샤를 구속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그녀의 마음이 변한다면 이 혼담을 없던 일로 하는 것도 그녀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만류에도 안드레이는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났다.
여름도 중반에 접어들 무렵 공작 딸 마리야는 오빠 안드레이가 나타샤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니콜라이 로스토프는 파블로그라드 연대에 근무하면서 누구에게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어머니로부터 악화된 가계의 재정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편지를 받고 휴가를 받아 집으로 왔으나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어느 듯 첫 겨울이 다가왔다. 니콜라이는 노백작과 나타샤와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즐긴다. 나타샤는 안드레이의 편지를 받고 그를 그리워 한다.
니콜라이는 소냐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하지만 노백작과 부인은 이를 반대한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부잣집 딸과 결혼에 실패한 보리스는 같은 목적으로 모스크바로 와서 가장 부유한 두 아가씨, 줄리와 마리야 중 누구를 정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보리스는 재산을 상속받아 큰 부자가 된 줄리와 약혼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한다.
베주호바 백작부인의 야회에서 아나톨리는 나타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유혹한다. 나타샤는 완전히 그에게 빠져 소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마리야의 편지에 답한다. 아나톨리는 돌로호프와 함께 나타샤의 납치를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피에르는 아나톨리의 결혼 사실을 나타샤에게 알리고 그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쫓아낸다.
1812. 6. 12 서유럽의 병력들이 로시아 국경을 넘으면서 전쟁이 발발되었다. 나폴레옹은 직접 출어(出御)하여 군을 지휘하였으나 러시아 황제는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는 발라셰프를 통해 친서를 보냈지만 황제의 친서도 발라셰프의 말도 나폴레옹을 움직이지 못하고 전쟁은 그 막을 열었다.
안드레이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나타샤는 아나톨리의 일로 크게 상심하여 병이 났다. 하지만 조금씩 회복하였다. 그러나 명랑하지는 않고 남과 행동을 갈이 하는 일은 일체 피하였으며 거의 외출도 하지 않았다. 피에르는 여전히 사교계를 드나들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무절제하고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타샤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되었다. 피에르는 자주 로스토프 가에 들른다.
나폴레옹은 더욱더 전진하고 러시아군은 퇴각했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은 패배의 원인이 되는 사태 쪽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로부터 퇴각했고 적군은 그 뒤를 계속 쫓아 모스크바로 점점 가까이 진군하고 있었다.
마리야의 아버지 노공작은 별세했다. 피에르는 참전하기 위해 전선을 기웃거린다. 혼전을 거듭하던 보로지노는 프랑스군이 점령한다. 안드레이는 포격으로 큰 부상을 당한다. 그는 부상병 막사에서 아나톨리가 부상으로 다리가 잘려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스몰렌스크로부터 시작하여 러시아의 모든 도시, 촌락에서 민중은 태연한 얼굴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동도 발생하지 않았고 동요도 하지 않았으며 또 누구를 학살하지도 않았다. 적이 가까이 오자 부유한 자는 재산을 팽개치고 떠났고 가난한 사람은 뒤에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불사르고 부수었다.
엘렌은 또다시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피에르는 자신의 처남과 안드레이 공작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에르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로스토프네 사람들은 9월 1일 적이 모스크바를 침입하기 전날까지 시내를 떠나지 않았고 부상자들에게 저택을 내어 주었다. 나타샤는 마차의 짐들을 모두 내리고 짐마차를 부상병들에게 모두 내어 주었다. 소냐는 부상병 속에서 안드레이를 발견한다.
러시아군은 모스크바에서 퇴각하고 나폴레옹이 입성한다. 사람들이 피란을 떠난 모스크바는 빈 껍질뿐이었다. 모스크바는 연일 화재로 불탔다. 피에르는 나폴레옹의 암살을 계획한다. 나타샤는 부상당한 안드레이 공작을 만난다. 그들은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나타샤는 온 정성을 다하여 안드레이를 간호한다. 나폴레옹을 암살하려고 거리에 나온 피에르는 다른 일에 휘말려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감금되고 만다. 그는 방화범으로 의심을 받지만 다행이 처형은 받지 않고 방화범들의 처형장에 입회만 하게 된다. 그는 포로로 수용된다.
마리야는 니콜라이로부터 오빠의 소식을 듣자 그를 찾아 가고 나타샤와 함께 그의 임종을 지켜 본다.
러시아군은 반격을 준비하고 프랑스군은 퇴각을 개시한다. 모스크바 점령 이후 이렇다 할 새로운 전투 없이 프랑스군이 패주했다. 데니소프, 돌로호프와 함께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쫓던 페차가 전사한다. 포로가 되었던 피에르는 그들에게 구출되었다.
혹한이 시작되면서 프랑스군의 패주는 점차 비극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모닥불 옆에서 타 죽기도 하였다. 프랑스군의 후퇴가 매우 신속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그 뒤를 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라스노예 전투 후 프랑스군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피에르는 1월 하순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마리야와 함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던 나타샤를 만난다. 1813년 피에르와 나타샤는 결혼한다. 1814년 가을에는 니콜라이와 마리야가 결혼한다. 니콜라이가 결혼한 후에도 소냐는 그의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수도가 적군에 의해 함락되는 중에도 연회는 계속 열리고 하는 시대적, 사회적 괴리감과 위대한 사상가 톨스토이의 잔소리(?)가 이 작품을 읽기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