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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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살다 간 '맏이'들을 위한 훌륭한 진혼곡 

  죽음을 대함은 하루만에 다섯 살의 나이를 먹는 것과 같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고, 희로애락이 거짓같다. 태어나면 죽을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익히 알아 왔건만 이를 목격함은 이미 알던 것과 생판 다름이다. 죽음을 대하면 누구나 훌쩍 늙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슬프게도 무척이나 어른스러워진다. 단순한 죽음이 이정도인데 피를 나누고, 정을 나눈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대할 때라면 어떨까? 하늘이 무너짐이 이보다 더 할까? 하늘이 무너진다면야 함께 세상을 마감하니 차라리 다행이다. 이승에 남겨져 이미 없고 난 사람을 기억함은 '천벌'만큼 힘들다. 그런 죽음을 대한 이들이 그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쩌면 아픈 자들의 세상인지 모른다. 없고 난 이를 내가 애절하게 추억하는 만큼 내가 없는 세상에 날 추억할 사람들과 부대낌이 무엇보다 소중한 줄 알았음이리라.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아픈 자들은 불쌍한 자들이다. 그리고 독하디 독한 자들이다. 

  소설가 김정현은 참 독한 사람이다. 둘도 없이 친한 친구의 죽음을 대하고 난 후 한없이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을 풀을 길이 없어 글로써 그를 살려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죽였다. 그 과정은 그리 쉬웠을까?  "술 먹고 컴퓨터에 써놓은 원고를 지워버린 게 7번. 친구의 영혼도 방해한 책을 꼬박 1년이 걸려서 완성했다. 너무 힘들어서 이제 다시는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라며 쓴웃음을 졌다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를 보면 그의 괴로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낱 인세를 생각하고 이 괴로움을 담당했을 리 만무하다. 단지 김정현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도 아니다. 고향 영주에서 '고향 사진관'을 운영했던 친구 서용준은 사랑많은 아들이었다. 가슴 가득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김정현은 아들의 사랑, 대한민국 자식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장편소설 <고향 사진관>을 읽었다.  

 

  소설가 김정현은 얄미운 사람이다. 10년을 거슬러 IMF 때에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 이 땅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그 시절의 아버지를 대변했었는데, 이번엔 50대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뇌졸증을 앓아 수족도 못 쓰고, 정신을 놓은 아버지를 17년간 병간호한 이 땅의 '아들'을 그렸다. 전도유망한 청년이 제대와 동시에 병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며 시절 지난 사진관과 가족을 떠 맡다가 아버지를 보낸 후 그 역시 간암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삶을 추적하는 내내 아리고 먹먹해 지는 가슴을 쓸을 새가 없도록 만들었다. 소설가 김정현은 얄밉고 독한 사내였다. 동시에 책을 읽는 독자가 이럴진대 글을 그린 저 사내는 오죽했을까 싶어 손이라도 잡고 쳐진 어깨를 토닥이고 싶어졌다.
 

  한편으로 얄궃게도 이 책을 왜 썼을까, 어떻게 써나갔을까 작가를 추론해 본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강력계 형사였던 그인지라 말없고,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성격인 친구 서용준을 그리기 위해 용의자를 보듯 추억했을 테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과 만나 탐문하듯 그와의 일들을 더듬었을 것이다.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이제는 없고 난 친구를 불러 눈에 보듯, 이야기듯 하듯 그렸을 테니 이게 어디 소설인가 싶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이 글을 마칠 때까지 작가에게 이승은 저승만 못한 나날이었으리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 역시 그리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자신은 아버지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고 모든 것은 아버지가 일군 것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오직 지켜가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가 김정현이 보는 친구 서용준의 모습은 '아버지의 대리인'이었다. 동안인 탓도 있지만 좀처럼 나이들지 않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좀처럼 대답하지 않다가 뱉어내는 비결이란게 '아버지가 깨어났을 때 늙으면 못알아볼까봐 스스로 늙음을 멈추었다'고 말한다. 동생의 문제로 서울에 가서도 '혹시'라도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 늦은 밤기차를 타고 내려오고, 친구와 술한잔 마실라치면 단란주점의 아가씨와 앉아 있을 때 조차도 아내에게 자신의 거처를 밝히는 친구 서용준, 그는 천상 아버지를 위한 '대리인'이었다. 

 문득 어디 '병환중인 아버지를 둔 그'만 그럴까 싶어졌다. 제 뜻을 펼치기 전에 부모를 먼저 생각하고, 가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이 땅에 숱하게 존재하는 '맏이'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싶다. 경중輕重의 차이야 있겠지만, 제 뜻을 펼치느라 앞만 보기에 앞서 나도 모르게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고 먼저 생각하는 이 땅의 '맏이'들 역시 서용준을 닮았다. 작가 김정현은 오롯이 아버지의 아들이자 또 자식들의 아버지였던 친구 서용준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 땅의 '맏이'의 전형이었다. 맏이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변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사람의 일생을 다시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글 쓰는 동안 추억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힘들지도 모를 것 같아서다. 서용준에게 늦게 나마 수고했다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작가에게도 애썼다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이 땅에 살다 간 '맏이'들을 위한 훌륭한 진혼곡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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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찾아낸 행동경제학
다치바나 아키라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Biz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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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의 재미있는 경제소설

   표준 경제학(주류경제학)과 인간본성에 대해 지극히 이성적이라는 낙관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은 행동경제학이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아서 의사결정에 있어 빈번하게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이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얼토당토 않는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개연성 없는 감정과 근시안적 생각등 여러 형태의 비이성적 행동을 곧잘 저지른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인간의 그러한 비이성적 행동에 착안하여 많은 기업이 이를 이용해 소비자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마케팅에 속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경제학의 대안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학문영역인 이 '행동경제학'은 경제주체인 소비자가 오늘까지 저지르고 있는 경제적 선택의 오류를 짚어주고 있어 소비자들로 하여금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 <골목에서 찾아낸 행동경제학> 행동경제학등 최신 경제 이론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설명한 책이다. 신주쿠 가부키초 뒷골목의 유흥가 건물의 허름한 연구실에 골룸과 비슷한 외모의 아쿠무 미타로 박사는 철학, 정치경제학, 수학,물리학, 생물학 등 자신의 학식을 무기로 어두운 사회 속에서 시름을 앓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다. 원제목 亜玖夢博士の経済入門 - 아쿠무박사의 경제입문이다. 저자 다치바나 아키라는 <돈세탁>과 <부자가 되는 황금 깃털을 줍는 법>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빚에 허덕이며 사채업자에 쫓기는 슈카이에게는 인간의 비이성이 신용위기를 몰고 온다는 것을 '행동경제학'을 통해 알려주고, 야쿠자의 세력다툼에 빠져든 헤비누마에게는 '죄수의 딜레마'를 적용해 윈윈 전략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려준다. 왕따 초등학생 겐타를 통해서는 인간관계의 불평등을 만드는 네트워크 경제학을, 피라미드 판매에는 사회심리학이 들어있음을, 삶의 의미를 찾는 가출소녀에게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적용해 고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사무실을 찾을 때 손에 들린 전단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상담무료, 지옥을 보았다면 아쿠무(박사이름)을 찾으라" 상담자 스스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말하도록 유도하는 아쿠무 박사의 조언은 냉정하고 섬뜩하기까지 한데, 미국 드라마 <하우스>의 닥터 그레고리와 <CSI 라스베가스>의 길 그리섬 반장을 떠올리게 했다. 비교적 탄탄한 스토리와 재미까지 더하고 있어 소설적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그들만의 리그'로 생각되는 경제학 원론을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에 맞는 사회문제와 법률등이 결합되어 있어 한 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문제점의 해결책 또한 과장되어 있어 환타지 소설에 버금간다. 재미있는 시도의 경제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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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 한 초보 부부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의 가족 만들기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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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와는 모양 다른 친구 이야기

  우리집에는 개가 한 마리 있다. 엄연한 '찌비'라는 이름과 가족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시츄종의 이 개와 5년 째 함께 동거를 하고있다. 어느 친절한 수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엄연히 개이기에 애완견답게 키워야 할 것을 버릇을 잘못 들여놔 베개가 없으면 잠을 자지 않고, 밥과 물을 달라고 냉장고 앞에서 의사표시를 하고, 용변을 볼라 치면 사람 개똥 피하듯 식겁을 하고 도망가는 녀석이다. 제가 사람인 줄 아는 개. 더 이상 애완동물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개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찌비' 또는 '요년, 조년'으로 불린다. 남들 눈에는 그냥 개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안보면 보고싶은 가족과 다름없다.

영화와 책이 동시에 나와 회를 동하게 한 책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물의 주인공으로 자주 나오는 오웬 웰슨과 제니퍼 애니스톤이 나와 중박의 흥행은 보장된 것 같은 영화보다는 책에 관심이 더 갔다. 실화라는 사실이 그 이유였다. 존 그로건의 <말리와 나>다. 원제는 Marley & Me: Life and Love with the World's Worst Dog 다.  



 
  제목부터 말썽쟁이 개의 이름 ‘말리’가 먼저 등장한다. 가족의 심오한 뜻을 알아서 라기 보다는 서로가 너무 좋아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된 초보부부 존과 제니는 우연한 기회에 신문광고에 나온 강아지(말리)를 사게 된다. 즉흥적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말리’는 맹인안내견으로 쓰일 만큼 사람들과 친화력이 강하고 온순한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이었기에 둘은 안심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천만의 말씀. ‘말리’는 집안의 모든 물건을 물어뜯고, 먹어버리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말썽쟁이 그 자체, 심지어 애견학교 교관도 포기한 그런 개였던 것. 사고뭉치 말리와 티격태격하면서 존과 제인은 인내심과 애정으로 말리를 돌보며 가족이 점차 가족이 되어갔다. 제인이 아이를 가지면서 한 두 차례 가족에게 위기가 찾아오지만 비온 뒤 땅이 단단해 지듯 말리를 포함한 그들의 가족애는 더 깊어간다. 불행히도 인간과 개의 삶의 시계가 같지 않으므로 점점 ‘말리’가 가족들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서 지켜주는 말리의 죽음은 생각보다 슬프지만은 않으리라. 누구보다 행복한 죽음인지 모른다. 



 
   2009년 한국에도 애완견에게 인식표나 마이크로칩 같은 일종의 애완견 주민등록증이 생겨났고 이제는 애완견이라는 표현보다는 가족의 의미를 지닌 반려견이라는 말이 퍼지고 있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개는 그저 된장국에 남은 밥이나 말아주면 먹고, 마당에서 꼬리나 흔들다가 복날 조용히 사라지는 서글픈 존재였었지만 이제 이 땅에 존재하는 개는 그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엄연히 가족인 것이다.

  집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어김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애완견을 보면 ‘이 세상 어디에 저 개만큼 평생 배신하지 않고 날 반겨주는 이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내가 아는 어떤 분이 말했다. 가족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가는 요즘 현대인들에게 애완견은 단순한 개 이상의 의미를 넘어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재확인하게 해주는 어쩌면 가족보다 나은 동반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나라의 개주인들은 자신들이 아이를 가지면 기르던 애완견을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천덕꾸러기 유기견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의 정서함양을 위해 일부러 임신 중 또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계획적으로 애완견을 입양한다. 특히 최소 10년은 같이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종별 특성, 환경, 자신들의 상황 등을 꼼꼼히 따져서 입양한다. 말 그대로 가족이 되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다. 어리고 귀여울 때 예뻐하다가 나이 들어 병들었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 우리에게 웃음을 주고 사랑을 주었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 가족이 되어 그 곁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제사상이라도 차려줄 사람'으로 자식을 보고 그의 일생에 간섭하는 한국의 부모와 성년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안겨준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가도록 독려하는 서양의 부모가 차이가 있음과 다름없다. 필요에 의한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인간과 개의 삶이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가족으로 동일시하며 서로 위로받고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평생 꼬리를 흔들며 '귀여움'을 받아야 밥을 얻어먹는 개. 인간보다 백만배의 후각을 지니고, 흑백의 컬러만을 볼 수 있는 개는 인간들의 가장 친한 동물이다. 아니 친구다. 가슴 훈훈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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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오피스쿠스의 최후
조슈아 페리스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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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가 달라 동조하기 힘든 호모오피스쿠스들의 이야기  
 

  애초의 생각과는 조금 엇나갔다. 물질만능주의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희생자가 되어버린 윌리 로먼의 이야기를 그린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생각하고 책을 집어들었는데, 차이는 시공간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사람이 달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잘 나가던 광고회사 직원들이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는다. 격분한 해고자들의 뜻하지 않은 행동들, 그리고 자신들도 해고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회사생활을 하는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야기, <호모오피스쿠스의 최후>. 떠오로는 신예 조슈아 페리스의 처녀작이고, 원제는 Then we came to the End 다.  


 

  세계금융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작금의 경제상황에 이 책을 펼치는 의미는 남달랐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 계속 엇나가고 있었다. 닷컴 붕괴로 실직되는 광고회사의 직원들은 보통 샐러리맨들과는 차이를 갖는다. 그들에게 닥친 해고통지는 패배를 모르는 엘리트들에 대한 사형선고다. 그래서 그들의 광기는 소설속 허구라는 인정하에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한편으로는 회사측의 '해고통지'가 마치 의사의 '정신이상판정'을 내리는 순간과 닮아 동조하기가 여러웠다.  

  특별한 대우와 월등한 보수는 엘리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그들의 근무태만은 창작을 위한 소일이라 여기는 그들에게 꺼져가는 닷컴의 거품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마치 오늘날의 월가처럼. 월가의 신참내기 직장인이 IT의 떠오르는 강국 한국에 와서 밤에는 육지주림에 빠져 있다가 낮에는 산해진미로 해장하며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수억의 연봉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호강을 세상에 알렸다. "난 지금 한국에서 왕처럼 생활하고 있다"고. 그 또래들의 이야기인듯 해서 그들을 수발하고, 보좌했던 한국인으로서 읽는 내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들의 광기와 몰락에 조금은 고소함을 느꼈다. 나도 미쳐가는 걸까? 

  서두에 던진 말처럼 <세일즈맨의 죽음> 속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몰락과는 차원이 달랐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보험금 몇 푼을 건지려 목숨을 던지는 그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서운하다 하겠다. 파산 위기에 있는 월가의 기업들을 구제하려고 노력하는 정부에 그들은 '벌만큼 번 사람'이고, 이번 위기 또한 그들의 '얕은 윤리관'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며 구제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이 책에 등장하는 호모오피스쿠스들의 발버둥을 어떻게 소화할 지 궁금하다. 거품은 붕괴를 예고한 인간재해다. 어쩔 수 없다면 차라리 일찍 무너지는 것이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거품붕괴의 피해가 고스란히 신의성실에 입각해 열심히 근무했던 선량한 샐러리맨에게만 전가되는 것이 안타깝다.  

  "난...열심히 노력해 이곳에 취직했을 뿐이고, 상사들의 눈치보며 열심히 근무했을 뿐" 이라고 항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책에 없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안타까운 처지를 과장하고, 분노하며 광분하고 있었다. 그 책임이 과연 회사에만 있었을까? 스토리의 복잡한 전개와 자잘한 사건과 에피소드의 혼재는 호모오피스쿠스들이 처한 위기와 불안감의 정신없는 역동성과 닮았다. 애초에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곱지 못한 내게 이 책은 가독성 제로의 답답함을 제공했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눈으로 보는 듯 옮겨 놓은 저자의 묘사와 세밀한 서술은 인정해야 했다. 호好시절에 읽는다면 쓴웃음지을 추억꺼리가 되겠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가 읽기엔 '강제해고시 행동강령'같아 자꾸만 눈감아지게 만들었다. 시절을 못만난 소설, 제자리도 잘못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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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
성석제 엮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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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성석제가 내놓은 인간풍경 가득한 소설들의 잔치상

 
  Web 2.0은 누구도 지나칠 수 없는가 봅니다. 작가들이 탈고하기 전까지는 가족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원고를 매일 매일 블로그에 올려서 Webzine이라는 개인미디어로 거듭나더니, 그들이 즐겨 읽은 책의 리뷰를 엮어 책을 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좋아하는 소설가 성석제님의 책을 소개합니다. 이 분은 이번에 스스로를 '문학집배원'이라 칭하고 자신이 읽은 문학 속에서 즐거움을 준 소설들을 모았고, 그 속에서 정수(자신이 생각한)를 뽑아 소개하고 살짜기 멘트를 넣었습니다. 책 제목은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입니다.  

  성석제님은 책의 시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장에는 아름답고 슬프고 즐겁고 힘찬, 인생 희로애락애오욕의 모든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문장이 냇물과 도랑을 따라 흘러갈 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냇가를 따라 달리셔도 좋고 도랑에 발을 담그셔도 좋습니다. 문장으로 푸르러진 마음의 풀밭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시든가요." 말씀처럼 감성가득한 글들이 가득합니다. 도시의 매연보다는 소똥 내음 그윽한 시골의 한적함을 느끼게 하는 성석제님의 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개하시는 소설가들은 과거와 지금, 동양과 서양을 에둘러 등장합니다. 현진스님과 채만식 선생, 루쉰과 빠블로 네루다가 눈에 띕니다. 영원한 어머니 박원서님과 유일무이한 애국자 김구선생님, 황순원님의 백미 '별'도 보이고, 결혼관을 흐려준 박현욱님의 '아내가 결혼했다'도 보이네요. 반갑고, 새롭고 흥미로운 글을 만드신 쉰 두 분을 모두 만났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봄이 올 듯 기분을 붕붕거리게 만드는 글들이었습니다. 소설 하나 속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의 두 세페이지 글을 하나 둘 씩 모아 하나로 엮었습니다.

  글 말미에 던지는 성석제님의 해서 역시 프로이트의 꿈해몽을 능가합니다. 인간세상의 모든 상념을 담은 글들에 저마다 어울리는 해설을 놓았습니다. 껍질채 쪄 내놓은 자리돔 이야기를 적은 한창훈님의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에서 성석제님은 내면이 중요하다면서도 껍데기에 절대적으로 가치를 둔 우리 현실을 꼬집습니다. '껍데기를 째고 찢고 올려붙이고 꿰매고 깎고 빛을 쪼이고 점을 빼고 주름을 제거하고 향수를 뿌리고 동물성, 식물성, 기능성,한방, 산삼 성분 화장품을 바르고 때로 남의 껍데기를 먹어서' 껍데기와 그 뒤쪽, 안과 밖의 차이가 나날이 커져 표리부동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존재, 바로 우리들 모습을 꼬집었습니다. 

  이런 책을 앞으로 자주 만날 것 같습니다. 저자의 서재를 소개하는 듯, 좋은 책의 일부를 맛뵈기로 보여주는 듯 한 '책속의 책', 문학에 있어 문외한인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작은 선물입니다. 하지만 성석제님 필력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 작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작품에 대한 예의일지는 모르지만, 거침없이 투덜대고 쏴대는 성석제표 '해설'이 더 맛깔지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제가 뭘 압니까? 그렇다는 거죠. 그래도 즐겁게 읽으며 즐겼습니다. 그럼 된 것 아닌가요? 늦은 금요일 밤에 미친 아헤처럼  낄낄깔깔 대가 시무룩했다가 심각해진 몇 시간을 이 책에서 얻었습니다. 산해진미 그득한 잔치상을 한~상 받은 느낌, 이 책을 덮으면서 받은 포만감입니다. 잘 먹었...아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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