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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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들이여, 이 사람에게서 진중권 선생도 울고 갈 독설을 배워라!
 

  침대를 분류한다면 뭐라 말해야 할까? 가구일까? 실제로 몇 년전 한 초등학교에서 시험문제로 낸 적이 있는데, 대부분의 학생이 ‘과학’이라고 표기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해당문제를 출제한 교사는 ‘난이도 하’ 수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는데, 학생 대다수가 떠억하니 ‘과학’이라 답을 했으니...역시 신뢰감가는 중견 탈렌트가 출연한 광고의 힘이라 하기엔 뒷맛이 씁쓸하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침대를 두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침대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이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거기서 사망하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한편으로 꽤 말되는 소리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천국이 어떻고 지옥이 어떻다는 등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양쪽에 다 내 친구가 있거든요.” 웃기는 친구다. 이 친구는 누굴까?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나이가 많은, 아니 너무 많아서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 군데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친구들 만나느라 매일 양쪽을 왔다갔다 할 지도 모른다). 이 친구는 바로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문학적 업적을 이룬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다. 오늘 이 괴짜의 글들이 수록된 책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을 읽었다. 원제목은 Mark Twain's Helpful Hints for Good Living이다.

이미지 출처: Flickr
이미지 출처: http://www.davidicke.com/forum/showthread.php?t=11956&page=974

 

 
  웬만한 수식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대단한 문학가인 마크 트웨인의 글을 만난 것은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이후 세 번째인 것 같다(두 권의 책도 어린이용이었으니 원문과는 많은 차이를 지녔으리라. 그렇게 본다면 온전한 그의 글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뭘 하고 살았던건지, 원...) 이 책은 클레멘스 즉, 마크 트웨인이 겪은 생활 속 일화들과, 제안들, 자신의 생각과 후세에 전하고 싶은 훈계 등 직접 써서 발표되거나 발표되지 않은 글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이 책에는 마크 트웨인의 일상적인 예의범절, 제안과 불평, 미국의 식탁, 여행 예절, 어린이, 옷, 패션, 스타일 등에 관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테마에 맞게 글들을 꿰어 맞춘 이들은 캘리포니아대학 뱅크 로프트 도서관의 ‘마크 트웨인 페이퍼스 앤 프로젝트’ 사람들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팀원 대부분이 마크 트웨인에 매달려 30년도 넘게 일하고 있다 하니, 그가 남긴 글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기에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의 글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길래 그럴까 싶기도 하다. 이미 죽고 없지만 남겨진 글로 인해 마크 트웨인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셈이다.

  마크 트웨인은 타고난 글쟁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글로 쓰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어느 것이 소설인지, 어느 것이 실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도금시대 The Golded Age>처럼 클레멘스의 실제 삶이 마크 트웨인의 소설로 둔갑한 경우가 있고, 실제로 1900년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단다.

“나는 ...소설을 사실로 전하는 매체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대부분의 거짓말쟁이들은 거짓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나는 사실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나는 눈에 띄게 익살스럽고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나의 진실된 관점을 널리 알린다.”(10 쪽)

  물질문명과 종교, 그리고 전쟁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불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신랄한 비평을 했던 마크 트웨인이지만, 비평가라기 보다 소설가로 더욱 잘 알려진 이유는 여기에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의 비평글에 마크 트웨인의 어록을 빌리는 이유는 그의 날카로운 관점에서 비롯된 ‘촌철살인’의 독설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보면 온전한 문장(읽기 쉬운 평이한 문장)은 거의 없다. 거대하고, 지나치게 위장된 표현들은 꼬이고 꼬여 두세 번 거듭 읽지 않으면 온전히 소화시킬 수도 없을 지경이고, 한 단락의 글 속에는 항상 큼지막한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웃음 뒤에는 항상 씁쓸한 무엇이 뭍어있음을 느낀다. 정말 기가 막힌 필력의 소유자. 작가를 사랑하려면 소설이 아닌 ‘수필’을 읽으라 했던가? 마크 트웨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책이었다. 

  만약 마크 트웨인이 이 시대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는 ‘초 특급 울트라 파워블로거’가 됐을지도 모른다. 우선 글로 말하기를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였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모저모에 깊은 관심을 뒀을 뿐 아니라, 시설이나 행정에 개선이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시나 정부에 직접 제안하기도 했고, 때로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만약 그랬다면 주로 침대에 누워 글을 썼었기에 노트북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Baroque in Hackney

   그는 경제학자에 버금가는 경제학적 지식도 가지고 있다. 도표와 숫자를 들이대며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요소인 ’희소성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내뱉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어떤 물건을 몹시 탐내도록 만들려면, 그것을 손에 넣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면 된다.” 또한 공맹孔孟을 부르지 않고도 인간의 훌륭한 삶에 대해 한마디 한다. “우리들의 죽음 앞에서는 장의사마저도 우리의 죽음을 슬퍼해 줄만큼 훌륭한 삶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가 블로거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도둑을 맞은 마크 트웨인은 며칠 후에 집 대문에 [다음에 찾아오는 도둑에게 알림]이라는 공고문을 붙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이 집에는 도금된 물건밖에 없습니다. 고양이 바구니 옆에 있는 모퉁이 너머의 응접실에 있는 놋쇠그릇 안에서 그 물건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고양이 바구니를 가져가고 싶으면, 고양이들은 놋쇠그릇 안에 집어넣으세요. 소란 피우지 마시고 - 가족들한테 방해되니까요. 고무 제품들은 현관 홀에, 우산 꽂이 옆에 있어요. 서랍장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런 걸 페르골라였나 뭐 그 비슷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던데. 그리고 나갈 때 문 좀 닫고 가세요.

S.L. 클레멘스 백“ (72 쪽)

  마크 트웨인이 ‘초 특급 울트라 파워 블로거’가 될 여지는 그 밖에도 많다. 그는 흰 양복을 입는 멋을 아는 최고의 패셔니스트이자 스타일리스트였고, 미국음식과 유럽음식의 맛을 비교할 줄 아는 미식가였으며, 여행을 즐기는 방랑객이었다. 70세까지 담배를 피우면서도 건강을 챙기는 웰빙족이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행동가였다. 다소 까칠한 성격에, 삐딱한 시선, 타고난 잘난 척, 양쪽으로 뻗어내린 콧수염의 캐릭터 역시 범상치 않았으니 어디 하나 빠질 것이 있겠는가? 



이미지 출처: Flickr 

  그가 갖춘 블로거로서의 자질 중 최고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이 뭔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세상을 향해 쓴 문장들은 ‘익살로 버무려진 독설의 총합’이다. 절대로 전투적이고, 혁명적으로 쓰지 않는다. 그가 입을 열면 짜증나는 일도, 갑갑한 현실도, 암울한 미래도 한바탕 웃음꺼리로 만든다.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절대로 염장지르지 않고, 비아냥대지 않으며, 상대로 하여금 억하심정이 생기도록 막말 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를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독설을 듣고는 떠들며 웃게 만들고, 그 속에 담긴 의미에 놀라 깨닫고 스스로 변화하게 만든다. 그는 ‘재치있고 신랄하게, 지혜롭고 날카롭게’ 말하는 법을 알았다. 무엇보다 말과 글로서 사람을 행동하게 만들고, 변화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네티즌적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약간 뜬금없지만 미국 MIT공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학생들이 학원문제로 인해 학교 측과 협상을 했지만 결렬이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려야 하는 문제와 협상을 성사시키는 문제로 고민하던 학생회는 한가지 꾀를 냈다. 협상 다음 날 아침 학생회관 본관에 ‘경비행기 한 대’ 가 오도카니 로비를 점령했다. 학생들이 경비행기를 분해해 좁은 현관으로 들여와 밤을 새워 다시 조립을 해둔 것이다. 일종의 침묵시위인 셈이다. 학생회관을 드나드는 학생들이 학생회의 기가 막힌 시위에 적극 환영하며 뜻을 같이 하자, 며칠 후 결국 학교 측은 학생회 측의 조건에 맞게 협상을 타결했다. 몇 해 후에 또 다른 ‘학원문제’로 학교 측과 실랑이를 벌이자, 어느 날 아침엔 대운동장 한 가운데 네모진 칸막이를 설치해서는 그 안에 총장실의 집기들을 있던 그대로 옮겨놓았더란다. 휴지통까지, 벽에 있는 책꽂이까지. 혹시 학생회 임원중에 마크 트웨인의 자손이 숨어있었던 건 아닐까, 그들의 지혜롭고 재치있는 시위는 마크 트웨인을 닮지 않았나? 

  소년소녀동화 몇 편 쓴 줄만 알았던 작가 마크 트웨인을 미국이 그토록 칭송하는 이유를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의 위대함을 강조하며 독자에게 세뇌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가 보낸 하루 하루가 한 편의 소설이고, 코미디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도 훌륭했지만, 먼저 인물이 이 세상에 다시 없을 독특한 인물이었다. 불세출의 재담꾼 마크 트웨인이 궁금하다면, 그의 독설을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일독하시길...그리고 절대로 대중교통수단에서는 읽지 마시길. 미친 사람 취급을 받던가, 바지에 오줌을 지리던가 둘 중 하나를 경험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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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by 북
마이클 더다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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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년 내공의 베테랑 서평가가 버무린 名文들의 비빔밥!

  2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리뷰Review'란 걸 몰랐다. 존재를 몰랐으니 당연히 리뷰를 쓰지도 않았다. 5년 전부터 블로그를 했던 터라 책 속에서 만나는 황금보다 소중한 구절들을 베껴서 옮겨놓은 적은 종종 있었다. 4년 전인가...는 공책에 필사한 글귀들을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린 적도 있었다(너무나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몇 번하다가 말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들었던 소감이야 왜 없었겠냐마는 ’내 주제에‘ 감히 책에 대해 논論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만행이라고 여긴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짧게라도 적으려고 해도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가 참으로 고통스러운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잘 썼건, 못썼건 간에 지금은 5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니 스스로가 신퉁방퉁하다. 그것참...

  우연히 책에 대한 소감을 쓰게 된 것은 온라인 서점 덕분이다. 줄곧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었는데, 업무로 출장이 잦아지자 단골로 가던 서점에 직접 가질 못해 온라인에서 구입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검색을 하다가 독자들의 ‘리뷰’를 읽게 되었다. 딱히 책을 사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 혹은 이 책은 절대로 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독자들의 리뷰에 빠져 한참을 머물렀던 기억. 그 후로 나도 책을 읽은 후엔 리뷰를 쓰게 되었다. 지금도 리뷰를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리뷰를 쓴다는 것은 책을 읽는 것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다. 

  난 ‘서평’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주로 문학이 아닌 경제경영서와 같은 실용서를 읽는 편이라, 평론을 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아직도 ‘감히 내 주제에’ 책을 평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읽었는데 참 좋더라, 그저 그렇더라고 말할 정도일 뿐, 반박하거나 논쟁을 걸을 깜량은 못된다. 그래서 말 그대로 다시 보기, ‘리뷰Review’를 하고 있다. 온라인엔(오프라인엔 수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수많은 강호의 책리뷰 고수들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에서 만큼은 여느 평론가 못지 않을 만큼 내공과 필력을 갖춘 고수들이 즐비하다(그런 고수들의 블로그에서 리뷰를 살펴본 후 책을 구입하는 것도 좋은 책을 고르는 한 방법이 된다). 고수들의 리뷰는 ‘서평’이라 할 만하다. 가끔 그들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찾아가 놀기도 하는데, 돌아올 땐 항상 부러움과 질투에 뒤범벅이 되어 돌아온다. 오늘 읽은 책은 ‘서평쓰기 30년 내공의 고수’가 쓴 책이다. 서문에서부터 “지난 오십 년 동안 나는 많은 시간을 책과 함께 보냈다...”로 시작해 나를 기죽이게 하는 책, 마이클 더다Michael Diarda의 <북 BY 북>이다. 원제목은 Book by Book - Notes on Reading And Life, 2005년에 쓰여졌다.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책이다. 지금껏 저자가 책을 읽을 때마다 눈에 띄는 구절과 인용구를 노트에 적어놓았던 것을 한데 모은 일종의 사화집(詞華集,anthology;아름다운 글들을 모은 책)이다. 배움, 일, 여가, 사랑, 집, 인생, 감각, 종교, 죽음 등 인생에서 만나는 중요한 삶의 화두에 관련된 책들의 구절을 한데 모아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계절감이 듬뿍 담긴 채소들을 한데 모은 ‘비빔밥’이라고 할까? 그런데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그런 ‘금가루가 잔뜩 뿌려진 고급의 비빔밥’이었다. 저자는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표현을 빌려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해서 천천히 읽고, 아무데나 내키는 대로 읽으며, 되돌아서 또 읽는 책’이길 바란다고 했는데, 유익했을지 모르지만, 재미는 없었다. 오히려 겁만 잔뜩 집어먹기만 했다.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 모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책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더다가 분야별로 생각하는 고전(난 고전엔 정말 문외한이다)을 소개한 책이고, 우리나라에서 변역된 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책이 태반이라지만 “이 세상엔 내가 매일 책을 읽는다 해도 평생 다 읽을 수 없을 만큼의 좋은 책이 있다”는 그 누구의 말이 떠올랐다. 괴테가 자신이 죽을 때 즈음 채 읽지 못한 책들을 아까워 했던 이유를 알 듯 했다. 

  이 책을 읽으려면 펜을 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저자의 서문 때문이다.

“당신은 연필을 옆에 두고 마음에 드는 구절에 표시를 하거나, 여백에 뭐라고 끼적대고 싶을지도 모른다. 당신만의 사색으로 ‘개인화’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서 가치를 더해 당신만의 특별한 책으로 꾸며가야 할 책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도 독자를 위한 독서 안내서를 서보겠다는 의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15 쪽)

  그렇다.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은 좋은 글을 만나면 여한없이 밑줄을 치거나, 책장 끝을 작거나 큰 삼각모양으로 접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 놓치기가 아까워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지난 해 초에도 한 적이 있는데 정혜윤의 관능적 책읽기로 알려진 <침대와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노트에 필사를 할까, 블로그에 옮겨 적을까’ 책 진도는 나아가야 할텐데 ‘놓쳐버리면 다시는 못만날 것 같은 글들’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기억,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 서평가의 책인 만큼 좋은 서평의 조건을 말한 H. L. 맹켄의 글을 보자(이글 또한 절대로 서평이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독자서평란에 퍼담을 것이 아닌가?).

“서평은 무엇보다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서평은 깔끔하게 쓰여 흥미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안에 담긴 비평의 정당성은 차후의 문제이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 나쁜 책이냐를 명확히 결정하기는 대체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판단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불완전한 지성인의 착각이다. 그런 섣부른 판단에는 언제나 도덕적 열정이 개입된다. 그러나 평론가는 독자에게 세련된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박식하고 품위 있게 글을 쓸 수 있는 평론가라면 어떤 주제에 대해 어떤 글을 쓰더라도 독자를 즐겁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185 쪽)

  그 무슨 책을 말하든 독자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선명하다. 나의 리뷰가 한낱 두서없는 개인적 푸념의 덩어리는 아닐지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지금껏 써온 리뷰들이 잘못 기술되어 나의 리뷰가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독자가 읽었을 수도 있는 기회를 빼앗지는 않았던가 고민하게 만들었다. 좋은 글은 읽고, 읽고 또 읽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명문名文들이 가득했다.

  “심판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읽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고 말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로 끝을 맺었다. 서평가의 독서안내서의 마지막으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문장이다. 독서는 한 곳에 앉아 두 눈을 굴려 종이 위의 활자를 읽어내려가는 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활자가 그려낸 글을 눈으로 읽고, 마음과 머리에 새겨 오늘보다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한 밑거름으로 마련하고자 함이다. 아는 만큼 보이듯, 아는 만큼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달랑 세 권을 읽고 책을 읽고 내 삶에 변화가 없다고 말하지 말자. 몇 권을 읽었는지 아련할 만큼 책 읽기를 습관으로 만들었다면, 책을 읽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각을 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읽었거든 움직여서 삶에 변화를 주어라” 50년 독서내공을 지닌 30년 서평가의 충고였다. 책벌레들을 위한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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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고노스케, 길을 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경영의 지혜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음, 남상진.김상규 옮김 / 청림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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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상황의 경영은 술수와 책략이 아니다. 원칙과 신념이다!

  “대한민국은 내 나라다.“ 여기는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은 네 나라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부르는 데야 무슨 상관이랴(발음마저 비슷하거늘). 무슨 말을 하건 ”대한민국은 우리나라다.“는 생각은 먼저 해야 하겠다. 내 나라다, 내 나라다 쉬이 여기다 보니 ‘온전히’ 제 나라인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땅덩어리만 제 나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제 사람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말 큰일이다. 

  스스로 ‘이 나라 국민들의 머슴’이 되기를 자처 하던 나라님이, ‘깨끗한 정치’만을 하겠다고 외치던 나라님이 국민 몰래 뒷돈을 받아 놓고는 이젠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구설에 오른 것만도 ‘치욕’일 터인데, ‘얼마나 잘 잡는지 두고보자’는 속셈들이다. 매번 믿고 5년을 맡기건만 매번 속는다. 믿고 표를 던진 국민의 가슴에 멍울이 한웅큼 잡힌다. 믿고 존경받아야 할 자리이거늘, 자리만 앉았을 뿐 그런 깜량은 아니었나보다.

  정치인은 논외로 두자(말 해봐야 입만 아픈 직업군들이니까). 그 뿐만 아니다. 국민 건강을 책임지고,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고 소비자에게 봉사하겠다는 기업이념은 접어두고, 아이들의 코뭍은 돈을 훔쳐가는 기업가들이 판친다. 가격과 모양은 그대로인데,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모르고 조카녀석은 “삼촌, 내 손이 커졌나봐?” 묻는다. 할 말도, 해 줄 말도 없다. 

  비즈니스맨으로서 믿고 존경할 기업인이 없다는 건 참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업실적과 경영실적이 좋아서 관심을 두면 며칠 되지 않아 분식회계를 했거나, 로비를 펼쳐 따 냈다 하고, 불법경영승계를 했거나, 탈세를 주도 했다 소리를 듣는다. 세상에 알려지면 소비자와 국민에게 석고사죄를 해도 모자를 판에 없던 일로 덮으로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재수가 없어 걸린거다. 나만 그런게 아니다.” 염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들이 “대한민국은 내 나라다.” 여겨서 그러는 모양이다. 국민으로서, 소비자로서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나라에서 널 버리고 싶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길을 열다>을 읽고 난 후 더욱 화가 났다. 

 



 이미지 출처: panasonic.co.jp/founder/story/1-1.html

plaza.rakuten.co.jp/HEAT666/diary/200605070000/

 
  이 책은 1968년에 초판이 발행된 40년이나 된 ‘고전’격인 책이다. 그가 경영을 하면서 틈틈이 쓴 단문집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무쌍한 경제상황에서 경영 현장의 최일선에서 변치 않는 절대적 원칙으로 활용된 마쓰시타 특유의 경영 철학과 인생의 지혜가 담긴 책이다. 원제목은 道を開(ひら)く; 길을 열다. 이 책은 1978년에 발행된 속편과 합해져서 만들어졌다. 

  1894년에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그가 1918년 마쓰시타 전기제작소를 설립해 1973년 은퇴하기까지 기업을 경영했으니 거의 70여 년을 비즈니스를 한 셈이다. 경영자로 있으면서 ‘세계 대공황’과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뤘으니 산전수전은 모두 겪은 셈. 그래서일까? ‘뉴욕발 금융위기’의 기운이 남아 있는 지금 마쓰시타 경영의 근간이 된 모든 것을 담았고, 마쓰시타 사상의 원전(原典)으로 통하며, 마쓰시타의 저서중 최고라고 하는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살아있는 왕회장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는 위기상황을 빗대어 “바람이 강하게 불 때야말로 연을 날리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쓴다. 우산이 없으면 비를 막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집어서 뒤집어쓴다. 그나마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면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 때 비를 맞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여기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비오는 날 우산이 없는 까닭은, 화창한 날에 방심하여 비올 때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더불어 다음번에는 비를 맞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49 쪽)

  인생에서 고저의 순환이 있는 것처럼, 경제의 국면에서 침체기는 항상 오기 마련이다. 미래를 예측해서 아무리 준비한다고 해도 밀려오는 현실에는 부족함이 따르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다. 바닥을 쳤다고 기뻐하기 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살피고, 부족함을 배워야 그 다음 침체기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준비를 할 수 있다. ‘다음에는 피해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경영이요, 기업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힘이라는 걸 알게 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원칙과 신념’, 그리고 이것을 지키고 실천하는 힘과 낙관적 긍정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반드시 길은 있다고 강조했다. 사소하다고 여기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에도 새로운 길이 존재하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또한 “원칙을 지키니 두려울 것이 없고, 신념이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목이 말하듯 비즈니스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장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하는가를 알려줌으로써 ‘막힌 곳을 뚫고, 길을 여는 지혜’를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만나는 지혜들은 순간 순간을 모면하는 책략이나 꼼수가 아니라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원칙을 통한 지혜들이다. 업종을 불문하고 모든 비즈니스맨들이 만나게 되는 화두와 고민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선의의 책략이든 악의의 책략이든 결국 책략은 책략일 뿐이다. 악의로 가득 찬 책략은 말할 것도 없지만, 좋은 의도라고 해도 그것이 술수로 타락한다면 악의의 책략과 다를 바 없다. 옛말에 ‘술수를 부리지 않는 것이 술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진짜 좋은 방법은 원리 원칙을 따르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116 쪽)

  제품의 원가가 높아져 크기를 줄여야 했다면 이를 정당하게 고지하고 소비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옳았다. 마케팅이라는 이름 아래 ‘눈가리고 아웅’하는 제조업체들의 판매방식은 소비자를 업신여겼거나, 차마 모를 것이라는 얕은 생각에서 한 것일까.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관행같은 판매방식’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조업체를 신뢰하고 제품을 믿는 소비자에게 이렇게 술수를 부린다면 소비자의 사랑은 ‘한시적’일 수 밖에 없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어려움은 곧 지나간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조금 더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어려운 때일수록 놓치기 쉬운 도리와 원칙을 보여주는 한편 우리가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출간된 이후 지금껏 500만 부가 팔릴 정도로 많은 비즈니스맨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를 알 듯 하다. 

  일과 인생에서 시련은 있는 법. 하지만 이를 보다 더 현명하게 헤쳐나가는 데는 선배나 선인으로부터 위로만한 것이 없는데 본인들도 힘들어 해서 소리를 청하기가 어렵다. 이 책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사람,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던지는 위로이고 격려여서 더욱 힘이 난다. 오늘을 사는 비즈니스맨들에게 자리를 물려 조용한 곳에서 둘 만의 대화를 나누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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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틱한 일곱 개의 단편. 단, 한꺼번에 읽지 말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못됐다. 뉴스나 신문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교통사고와 자연재해을 접하면 ‘저런 쯔쯧쯧~’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유독 살인사건, 다시 말해 ‘사람이 죽은 사건’에 대해서는 ‘오~ 무슨 일이고?’ 하며 관심을 둔다. ‘왜 죽었을까?’에 흥미를 느낀다는 말이다. 남의 일같지 않아서 일까? 살인자적 측면일까, 피해자일까 알 수 없다. 이런 관심도 부족해서 사람들은 추리소설을 읽는다. 살인사건은 왜 일어났고, 범인은 누굴까?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을 잡았다면 어떻게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 

  물론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가족의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잡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일이고, 가장 우선적인 해결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관심을 두는 것이겠지만, 독자가 모두 형사가 되고 싶을 리 만무한데 왜 그렇게 있지도 않은 소설을 쓰고, 읽으면서까지 살인사건에 집착해야겠냐는 말이다. 그런 이유는 이런 사건은 좀처럼 만나 보기 힘들고, 또한 죽은 사람을 놓고 벌이는 범인과 형사의 머리싸움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풀어야 할 해답’ 중에 가장 ‘스릴’이 있는 싸움이기 때문은 아닐까?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끔찍한 스릴’을 즐긴다니 그게 못됐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든 이야기를 즐기니 더 못됐다. 

  요즘 내가 못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늦은 밤 조용히 홀로 앉아 잠을 잊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 읽고 나면 항상 ‘피해자의 억울함’과 ‘범인의 잔인함’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면서도 전혀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실마리가 잡히고 서서히 풀려가는 매력에 사로잡혀 책을 놓질 못한다.원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 지난 토요일 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 원제목 犯人のいない殺人の夜 이다. 

 



 

  살인사건은 일어났다. 하지만 범인이 없다? 말 그대로라면 자연사나 자살이 아닌가? 하지만 자연사도, 자살도 아니다. 과연 범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를 범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일곱 편을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은 일본에는 19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작품다운 트릭과 의외성이 숨어있는 단편 미스터리물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장편소설이고 ‘놀라운 지능의 범인’과 ‘ 더 놀라운 지능의 해결사(형사, 물리학 박사)’의 승부였다면, 이 소설은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다반사’의 사건과 ‘평범한 인물’들이 가해자라는 점이 특별했다. 그의 장편에서 느꼈던 길고 긴 숨과 최고 꼭지까지 고조되는 긴장감은 없지만, ‘평범한 사건 속에 숨은 의외성’은 장편의 그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짙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에서 말이 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 글을 쓴다면 ’개연성도 없고, 현실성없는 말도 안되는 소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이 현실이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들이 들어 있다. 길고 짧은 한 편 한 편의 스토리마다 임펙트가 강했다. 

  <작은 고의故意에 관한 이야기>는 말그대로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을 말한 단편이다. 이는 ‘과실치사’ 즉 고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주의의무위반이나 발생한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과 회피가능성을 문제삼는 과실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고의성故意性을 지닌 우발적 살인을 이야기했다. 사춘기 시절에 겪는 연인의 버려짐, 즉 실연失戀의 가능성에 일어난 사건인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과적 사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어둠 속 두 사람> 역시 청춘시절 겪는 사랑으로 빚어진 사건을 담았다. 사랑과 욕정을 누가 함부로 구분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욕망 앞에서 있는 인간은 누구나 나약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춤추는 아이>는 소년의 안타까운 사랑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3미터 거리 만큼 떨어진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다. 짝사랑이 그것이다. 답을 알 수 없기에 한없이 순수하고, 뜨거울 수 있는 이 사랑은, 알려지는 순간 불쾌한 집착으로 보여지거나 혹은 오해를 사는 아픔을 낳는다. 내가 던졌던 짝사랑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내 마음을 알았을까? 그래서 그들도 인생이 변했을까?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끝없는 밤>은 형사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했다. 용의자 선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범인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 형사들은 자신이 찍은 용의자가 범인인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기뻐하기에 앞서 왜 그래야 했을지를 알아야 하기에 범인의 입장에서 다시 추적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끝내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하지 말아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시각을 잃어 자신이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항상 오감을 깃세워야 하는 그들의 직업에 경의를 표하게 했다. 

   <하얀 흉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지 않게 ‘호러물 같은 공포심’을 불렀다. 자식을 잃고 ‘싸이코’가 되어버린 여성을 보면서 가늠할 수 없는 모성애의 깊이와 넓이를 만나게 된다. 또한 상심의 원인을 찾아 복수하는 원초적인 인간성을 목격한다. 섬뜩한 소설이었다. <굿바이, 코치>는 무서운 살인사건 이야기다.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 남에게 불행을 부르는 인간과 자신의 영원한 사랑은 자신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인간이 빚어낸 살인이었다.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사건의 정황을 비출 때 ‘일본인답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처럼 잔인하도록 섬세한 사건을 만나면 ‘과연~’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작품의 백미였다. 쇼프로에서 ‘조용필’은 맨 나중에 나와 대미를 장식하듯 이 작품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반전에 반전, 마지막 대반전은 어의를 잃게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코멘트는 불가하다. 느낌도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읽어야 한다. 서점을 찾아 서서라도 이 작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이 ‘완전무결한 사건’을 만들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가장 크게 단죄해야 할 ‘살인’을 해놓고,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악심惡心은 과연 그들만의 소유물일까? 그리고 불완전하기에 그 자리에서 ‘범인’을 벌할 수 없는 형사는 어떤 심정으로 범인을 추적하고 대할까? 이것이 내가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찾는 ‘행간의 의미’다. 만약 우리가 제목처럼 ‘범인없는 살인 이야기’를 읽는다면, 아마도 그 책을 읽고 ‘범인 없는 추리소설이 말이 되는가?’ , ‘추리소설가는 직무태만을 한 것 아닌가?’ 외치며 재미없는 책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화성연쇄살인사건’처럼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뭍혀가는 수많은 사건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말이 되는 사건인가?’ 소설같지 않은 사건들이 현실에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범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범인이 잡히지 않는 한 스토리는 진행중이다.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으면 범인의 지능과 형사의 사건해결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작가’의 필력에 얼만큼의 찬사를 던질지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얼른 잊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다르다. 무려 일곱 건의 살인사건이 아니던가? 게다가 주위에서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어서 작가의 필력을 운운하기에 앞서 피해자와 살인자의 면면에 사로잡혀 미망을 떨치지 못하게 된다. 늦은 새벽에 한 권을 모두 읽고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았다면 말을 말아라. 과거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성을 발견할 수 있는 책, 하지만 편한 밤을 보내려거든 하루에 한 편씩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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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의 슬픔
테즈카 오사무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아톰! 2009년 가을, 지구를 지키기 위해로 돌아온다!  
 

  “푸른 하늘 저 멀-리 날아라 힘차게 나-는 우주소년~아-톰~...” 초등학생 시절의 한동안, 내 손엔 엄마가 일곱 살 때 생일선물로 사 주신 아톰인형이 들려 있었다. 조그마한 손이지만 힘을 줘 꽉 쥐면 ‘삐~이~익“소리가 나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약간은 말랑해서 사람 피부같은(어림도 없겠지만) 플라스틱 재질의 아톰은 오른손을 쭉 펴고 왼손은 허리에 붙인 채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 오를 것 같은 표정을 한 모습이었다. 물에 젖을 염려도 없고, 녹도 슬지 않아 목욕을 할 때면 꼭 필요한 절친한 친구, 그래서 가물에 콩나듯 동네 목욕탕이라도 갈라치면 손바닥이 할머니 손처럼 쭈글쭈글해 질 때까지, 몸통이 허옇게 불어터질 때까지 몇 시간동안 아톰과 함께 한 편의 모험영화를 찍었더랬다. 2학년을 마무리 할 때 즈음 악당괴수, 옆 집 리트리버와 한 판 붙다가 물려서 얼굴이 일그러진 이후엔 다락방 장난감 바구니에 모셔져 영구폐기 되긴 했지만, 초합금(악당괴수가 물어도 상관없는) 로버트 태권V를 입양할 때까지는 내 소중한 히어로였다.

  그런 기억이 남았던 터라 얼마 전 <아톰의 슬픔>이라는 책 제목에 눈이 번쩍했다(현재의 나이는 때로 추억에 지배당한다). 아톰이 부활했나? 이제와 무엇이 슬프다는 건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아련한 추억에 밀려 냉큼 집어 들었다. 아톰은 아무 말도 없었다, 대실망. 그를 만든 아버지, 데츠카 오사무手塚 治虫가 주인공이었다. 이 책은 1946년에 태어나 1989년 위암으로 투병중 사망할 때까지 약 43년간 그의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하게 한 원동력이었던 어린이, 자연, 환경, 과학기술, 아톰, 그리고 지구에 대해 고민한 기록들을 한데 모아 유족들이 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수많은 만화작품들을 통해 정작 그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무엇이며, 그가 창작하는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에피소드와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일개 만화가가 만화책이 아닌 아닌 수필집으로(그것도 유작으로) 책을 내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책장을 덮은 후에는 만화대국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만화가가 ‘데츠카 오사무手塚 治虫’ 인 이유를 알 듯 했다. 그는 만화가 이면서, 환경운동가였고, 과학자였으며, 사상가였다. 원제목은 ガラスの地球を救え―二十一世紀の君たちへ ;유리같은 지구를 구하라 - 21세기의 제군들에게.. . 꽤나 장중한 원제목이다.

“지구의 죽음. 그것은 우리의 자손들과 그것은 우리의 자손들과 이웃의 아이들, 오늘은 활기차게 웃고 울고 장난을 치며 어른들을 성가시게 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더없이 소중한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이 자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나도 참혹한 일인 것입니다.

지구는 이제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인류는 어디서부터 항로를 이탈한 것일까요?“ (14 쪽)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성장에만 관심을 두던 1980년대에 그는 과학발전에 놀라기에 앞서 자연과 지구 그 속에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염려했다. 과학이란 본래 인류의 행복을 위해 생긴 것, 하지만 점점 지구를 파괴하는 원흉이 되고 있는 현실을 두려워했다. 나의 영웅이기도 했던 10만 마력의 힘을 지닌 정의의 사자 ‘우주소년 아톰(일본의 만화 제목은 철완 아톰이고, 미국에서는 애스트로 보이Astro Boy로 불렸다)’ 역시 과학지상주의를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분별한 지구환경 파괴에 맞서 지구의 멸망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어릴 때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이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아톰은 늘 인간들에게 내내 ‘과학이 낳은 생명체’로만 여겨졌다. 아톰이란 작품이 인간과 소통할 수 없듯, 지금 인류는 지구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 책에서 여러 부분을 통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한 정보화 시대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에서 마치 홍수가 범람하듯 쏟아지는 정보들에 우려를 표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도 역시 인류의 미래인 어린이를 먼저 생각했다.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폭력과 비행, 부모 자식 간의 단절, 생명 경시 풍조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지금껏 흡수하고 축적한 정보들이 그렇게 만든 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란 ‘생명의 존엄을 전하는 메시지’이고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가치를 어린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지금같은 고도 정보화 사회에 우리 어른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임을 강조했다. 

  SF 즉, 공상과학을 토대로 만화를 무수히 제작했고, ‘밀림의 왕 레오’와 같이 동물과 자연을 주제로 한 만화도 만들었던 그인 만큼 ‘미래’에 대한 고민에 대한 그의 수준은 철학자를 버금갔다. 이것은 어쩌면 오늘날의 컨텐츠 제공자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적인 고민이다. 어쩌면 당연한 그의 생각에 새삼 놀라고 배우게 되는 것은 오늘날 ‘흥행몰이와 인기, 시청률’에 급급하며 만들어지는 컨텐츠들 속에서 그와 같은 고민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소년 아톰>은 이제껏 수많은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고 있고, 컴퓨터게임과 영화, 만화책등으로 제작되고 있다. 특히 올해, 그러니까 2009년 가을에 개봉을 예정으로 3D 애니메이션으로 미국 헐리우드에서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데츠카 오사무의 생각은 아직 왕성한 생명력을 지녔고, 오히려 ‘기후온난화’로 지구종말에 대한 위기감을 갖고 있는 요즘에 더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컨텐츠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이미지 출처 : http://www.slashfilm.com/2007/10/05/first-look-astroboy/

http://splashpage.mtv.com/2009/01/05/new-astro-boy-character-concept-art-hit-the-net/ 

 
이 책은 일반적인 ‘인터뷰 풍의 기사 모음’이 아니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를 만드는 창작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가로서 ‘진심’이 담긴 고민과 조언들이 들어 있었다. ‘데츠카의 만화는 휴머니즘Humanism 이다’ 라는 세인들의 평가를 실감하게 했다. 스토리텔링과 컨텐츠가 세상을 주름잡는 지식정보화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야기’는 재미에 앞서 생각이 앞서고, 그 생각은 ‘진심이 담긴 인간성’을 지녀야 함을 새삼 일깨워줬다. 일본에서 만화(그들은 ‘망가’라고 부르겠지만)는 이제 예술의 한 장르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만화의 중심에 데츠카 오사무가 있고, 그는 이미 없지만, 그의 생각을 닮은 작품, 아톰은 아직 이 세상을 살고 있다. 휴머니즘의 대표작 ‘아톰’의 행보가 주목된다. 그의 통찰력은 앞으로 한동안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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