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반다나 싱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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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와 SF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인도 출신의 페미니스트 SF작가는 처음!

지금까지 본 작품들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뭔가를 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한 반다나 싱의 작품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이 공간에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가는 몇 작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인도인지라

낯선 인도식 이름과 인도의 풍경이 자아내는 색다른 공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래서 현재의 인도 자체가 우주의 어느 시공간만큼이나 낯설게도 무한하게도 느껴진다.

그렇기에 반다나 싱의 작품에서 공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 또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존재들.

그녀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자 특징은

그 공간과 그곳에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라는 데 그 함의가 있다.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공간이 갖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다음 세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델리에서 과거와 미래의 델리를 그리고 유령 같은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 '델리',

유년 시절부터 수호천사 파리쉬테를 보고 무한을 보고 싶어하지만,

무슬림과 힌두교의 정치적, 종교적 분쟁에 휘말려 누나를 잃고 친구마저 위험에 빠지게 되는

천재 수학자 압둘의 이야기 '무한',

화성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 다른 존재를 만나고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 '보존 법칙'.

'델리'와 '무한'은 인도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서, 역사, 그리고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보여주고

'보존 법칙'에서는 우주와 우주가 교차하는 곳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중 '무한'은 수학자, 철학자, 시인들의 이론과 철학 그리고 문학 작품이 등장해

단조롭고 추한 세상을 벗어나 수(數)라는 무한을, 우주라는 무한을 꿈꾸는 압둘의 꿈을

아름답게 지지하고 그의 슬픔은 그만큼 더 밀도가 높아진다.

다음 작품들에는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와 차별의 현실에 대해 작가가 페미니스트로서의 발언을 담고 있다.

하인의 시아버지인 노인의 죽음으로 허기지고 잊힌 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는 여자의 이야기 '허기'와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하는 아내와 이를 숨기려는 남편의 이야기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여자의 이야기로 클림트의 물뱀이 떠오르는 작품 '갈증',

뉴델리의 도로 한복판에 나타난 사면체가 일으킨 소동 그리고 그 사면체의 정체를 알고 싶어한 여자의 이야기 '사면체',

이혼을 하고서 아내라는 존재를 벗어가기 시작하며 다른 차원, 다른 공간으로 여행을 시작하려는 여자의 이야기 '아내'.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떠나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뚫고 해결하려고 한다.

현실은 비참하지만 때론 우습고 통쾌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그녀들의 이야기이다.

다음 두 작품에서는 환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드러난다.

은하수에 존재하는 세 행성의 세 가지 신화 이야기, '은하수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성간 여행 시대의 신화들',

우기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특별한 조각가와의 만남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10대 소녀의 이야기 '다락방'.

흙과 돌 그리고 나무.

태초의 시작, 우주의 시작, 생명의 시작에 빠지지 않는 아니 빠질 수 없는 것들.

우리의 시작인 자연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이들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반다나 싱의 작품들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그녀의 작품들이 갖는 차별성은

작가 자신이 인도 출신이라는 점, 여자라는 점, 페미니스트라는 점, 환경운동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매우 불리할 수 있는 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다.

이 작품집의 가장 처음 나오는 '허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이 매우 기이하다는 그녀의 깨달음을 SF는 그 어느 때보다 잘 반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SF 소설은 무척 난해한 방법으로 위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문학에 심취한 속물들을 속이고

무심한 독자들을 불러 세우기 위해 설계된 일종의 암호라는 걸, 그녀는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외계인을 만나기 위해, 혹은 몇 광년 떨어진 사람들 간의 거리를 재기 위해,

구태여 우주로 나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일생을 바쳐 풀어야 할, SF가 말하고자 하는 위대한 진실이었다.(36쪽)"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당신이라면,

반다나 싱이 설계해 놓은 이 SF라는 암호, 위대한 진실을 한번 풀어보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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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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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머리말에 실린 저자의 글을 보면서

시작부터 나는 켄 리우의 팬이 되고 말았다.

글에서 문장에서 작가의 어떠함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작가라니 그의 작품 자체도 그러하지만

켄 리우란 사람 자체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이 책을 만날 수 있었음에, 켄 리우를 알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그의 단편집 <종이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머리말부터 나를 감동시키더니

첫번째 단편이자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종이 동물원'은 눈물을 쏙 빼놓는다.

이 어머니의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종이 동물원'에서 시작된 부모와 자식 같의 혹은 전 세대와 다음 세대의 사랑과 갈등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마 변화의 흐름 안에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겪어나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보그화 되는 구미호와 과학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퇴마사가 등장하는 SF판 전설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퇴마사인 아버지와 아들, 구미호인 어머니와 딸이 등장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뮬라크럼'에서는 증강현실의 발전된 형태를 개발한 아버지와 딸의 갈등이

실제와 상상, 그리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문제로 확장된다.

SF버전의 창세기이자 인류 진화의 미래를 보여주는 '파(波)'에서도

'부자연'스러운 금속 인류가 되어가는 아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매기가 나온다.

'옛것이 다시 새것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파(波), 358쪽]'라는 문장에서 읽히듯이

켄 리우는 이 단편에서 다양한 창세 설화와 신화라는 옛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전통과 현대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순환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켄 리우가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개인과 역사라는 이야기다.

센틸리언이라는 거대 기업이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축적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조정하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천생연분',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우리가 보인다.

딸을 잃고 감정 조절 장치인 레귤러 없이는 생활이 힘든 사립 탐정 루스 로가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레귤러'.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 뿐이다.[레귤러, 305쪽]'

개인이 살아가는 정상적인 세상의 모습이란 이렇다.

선택되어 살아남은 1021명의 지구인이 타고 있는 호프풀(희망)호에 문제가 생기고

이를 해결하려는 유일한 일본인인 히로토의 선택을 그리고 있는 '모노노아와레'.

한 개인의 선택은 역사를 바꾼다.

이와는 다르게 역사 속의 한없이 힘없는 개개인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과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 같은 역사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작품도 있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상대로 벌인 합동 비밀 작전을 모티브로 한 '파자점술사',

만주족이 중국 정벌 과정에서 벌인 양주 대학살을 담고 있는 '송사와 원숭이 왕',

731부대와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국민 개개인은 희생자의 고통을 공감하지도, 기억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라는 함정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우리 개개인이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개인화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531쪽]'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런 이유로 작가는 역사라는 이야기를 작품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에서는 횡단 터널을 만들기 위해 끌려 온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던 선택으로 인해 고통 받는 한 개인이 그 비밀을 깨려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를 그로 인해 여전히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고 있는

작가의 뜨거운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마지막 작가의 관심사, 책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파(波)'의 온갖 종류의 창세 신화와 설화,

개개인마다 양상이 다른 몸의 상태 변호가 시와 소설 그리고 전설집을 만나

하나의 러브 스토리가 되는 '상태 변화',

우주의 모든 지적 생물종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이야기인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중국의 고사와 서유기가 등장하는 '송사와 원숭이 왕',

그리고 역사 속의 참혹한 면면들을 담아낸 '파자점술사', '송사와 원숭이 왕',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 환상과 SF를 만나 말 그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신화와 귀신 그리고 과학과 법률,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켄 리우의 단편들.

그는 글로 표현하는 시각 이미지와 정보 그러니까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그 둘을 돋보이게 하는지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시종일관 언어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소설이 갖는 힘이자 특징으로 보인다.

어쩌면 가장 진보된 형태의 소설인 SF에서 이야기의 힘을,

그 가능성과 미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렇게 세련되고 지적인 옷을 입을 인간적인 SF라니

게다가 그 안에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우주의 별들처럼 아름답게 펼쳐있다.

'켄 리우' 이 작가의 이름을 꼭 기억해 두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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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손님
히라이데 다카시 지음, 양윤옥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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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분홍 고양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맞아주는

<고양이 손님>

고양이가 손님인 건지 내가 손님인 건지

잠시 헤깔렸지만 책장을 넘기자

이내 번개골목에 있는 작가의 집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작가 부부가 세들어 사는 집 주변 골목은 번개형상으로

이들은 장난삼아 번개골목이라 부릅니다.

어느날 이 번개골목에 나타난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옆집에서 기르기 시작하고,

이 제멋대로인 작은 고양이는 작가 부부의 집에 불쑥 찾아오지요.

그러다 어느새 물이 스며들듯이 이 집에서 밥도 얻어 먹고 잠도 자고 가기 시작하며

이들 부부는 비록 고양이 길들이기에 실패했지만, 고양이 치비는 이들 부부를 길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주인집 정원과 부부의 별채 뜰로 나들이를 나와 노니는 치비는

번개골목에 어울리는 번개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고양이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지요.

주인집 할머니가 남편이 죽자 큰 집을 정리하고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들 부부도 이사를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땅값 급등으로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갑작스러운 치비와의 이별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한편

주인집 할머니의 부탁으로 집과 정원 관리를 하면서

그곳에서 마음을 정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 정원도 분할매각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어쨌든 다행히 번개골목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 아니 묘연을 만나게 되며 이야기는 끝이 나지요.

<고양이 손님>을 읽기 시작하는 동시에

나는 번개골목에 자리한 작가의 집에 초대된 손님이며 주인이었습니다.

그가 사는 집의 면면을 소개받는 기분이었으며,

동시에 이 집이 내 집인 것만 같고 그의 고양이 손님이 내 손님인 것만 같았지요.

작가는 그가 겪는 시간의 흐름을 - 친구인 시인 Y의 암투병과 죽음, 주인집 할아버지의 죽음, 세들어 살던 곳과의 이별, 고양이 치비와의 이별 그리고 연립주택의 새 보금자리와 고양이 나나와의 만남 - 통해 만남과 이별, 생과 사의 흐름을 고양이의 몸짓을 닮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운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불쑥 찾아온 고양이 손님.

그 고양이가 몰고 온 어떤 흐름을 잔잔하게 기록한 책 <고양이 손님>

자연 만물의 흘러가는 그대로의 흐름을 따라 자연의 섭리와 그 아름다움, 생과 사

그리고 관계와 소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으로,

자연의 일부인 내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라질 내가 감히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있기나 한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하네요.

인간인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주인이 되고자 애쓰며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손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는 번개를 잡으려는 번개잡기를 하는 번개잡이 손님이라고나 할까요?

(무슨 말인지 궁금하면 책을 보셔야 합니다.ㅎㅎㅎ)

그러나 저러나 고양이 손님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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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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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5도살장>의 작가로, 제2의 마크 트웨인으로, 반전(反戰) 작가로

알고 있는 커트 보니것.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비참한 포로 생활을 거친 그이기에

그가 쓴 소설이 가진 무게감이 나를 짓누를 것 같아

여지껏 그의 책을 읽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의 초기 단편 모음집인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

건네는 환영 인사에 서둘러 커트 보니것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그의 단편 25개가 실려 있는 모음집으로

책을 읽는 과정이 마치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구현해 놓은 25개의 방을 방문하는 것 같았다.

작가가 사는 케이프코드를 소재로 쓴 '내가 사는 곳'

커트 보니것 표 여행 책자를 보는 기분이 드는 작품으로,

케이프코드에 가게 된다면 이 작품을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느 여행 책자의 소개를 기대하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은 명심하시기를.

케이프코드는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배경이기도 한데

그래서 이 작품이 제일 처음에 위치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다음으로 그의 SF 장르의 단편들을 모아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2081년 모두가 평등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 '해리슨 버저론'

평등이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이루어져야 할 이상이라 생각하며

평등을 위해 핸디캡을 부여하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는

평등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인구과잉으로 인해 윤리적 자살을 장려하고, 윤리적 산아 제한을

강제적으로 실시하는 미래 사회가 등장하는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끊임없이 논의될 윤리적 죽음의 문제는

어쩌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인 빌리는 구세주의 또 다른 형태인지도.

'입을 준비가 되지 않은'에는 양서류처럼 탈피하는 '양서인(兩棲人)'이라는 인류가 등장한다.

양서인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전쟁 중인 양서인들의 뼈아픈 일침에 들어 있는 메세지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에 등장하는

의학의 발달로 늙지 않는 세대 간의 갈등과 고갈된 자원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사태가 불러일으키는 미래 사회의 모습은 결코 반갑지가 않다.

마지막 반전과 블랙 유머에 쓴 웃음을 지으며

죽음을 물리친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진정한 행복과 행복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유피오의 문제'는

보크먼 박사가 우주 공간에서 들려오는 전파 신호로 사람들의 행복감을 고조시키는 유포리아를 발견하고

이내 그것의 문제점이 발견되지만 이를 상용화해 돈을 벌려는 이와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커트 보니것의 SF 작품들은 우리에게 미래는 이토록 불안한 현재의 우리의 상태가 투영되어 보여지는 거울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그 우스꽝스러움에 쓴웃음을 짓게 한다.

어두운 미래 사회의 단면들을 보았으니 조금 분위기를 바꿔

커트 보니것 표 사랑에 관한 단편들을 살펴 보자.

아마추어 극단의 오디션을 보는 과정에 만나 결혼에 이르고

연극 같은 결혼 생활을 하는 커플의 이야기인 '이번에 나는 누구죠?'.

작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기념하며 결혼 전 신부가 될 사람과 보냈던

어떤 오후를 그린 '영원으로의 긴 산책'.

싸움으로 시작된 사랑의 시작을 그린 '유혹하는 아가씨'.

제목 그대로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당신의 소중한 아내와 아들에게로 돌아가'는

재치있는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본인도 손발이 오그라드는(이리 표현은 안 했지만 분명히 그러셨으리라 ㅋ)

이런 의외(?)의 낭만적인 면이 드러나는 글을 쓰시는 건 귀엽다는 표현 밖에는 뭐...ㅋㅋ

이번에는 반전 작가로의 면모가 보이는 단편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모두 왕의 말들'에서는 전쟁 포로로 잡힌 켈리 대령과 그의 가족 그리고 부대원들이

자신들을 말로 세워 생명을 담보로 체스 게임을 하게 된다.

인간을 말로 취급하는 게임 같은 전쟁을 하는 모든 상황과 그 부조리함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보게 만든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인 '난민',

참혹한 현실 앞에 그야말로 순수한 어린 천사인 '조'이면서 '카를'인 흑인 고아의 부모 찾기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파괴할 수 있는 '반하우스 효과'

다른 말로 '염력'을 가진 반하우스 교수의 이야기인 '반하우스 효과에 관한 보고서',

그를 인간병기로 사용하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야욕에 희생당하지 않으려 잠적한 채

세상의 무기들을 파괴해 나간다.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은 그의 죽음을 기다리지만 그는 자연사할 것이며

이 보고서를 쓰는 유일한 후계자인 나는 장수할 것이라는 마지막 메세지가 통쾌하다.

미국과 러시아가 경쟁적인 우주 개발을 하던 냉전 시대가 배경인 '유인 미사일'은

과학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과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통제되어 온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라는 국적은 다르지만 똑같이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의 편지가 마음을 울린다.

'아담'은 나치에게 가족 모두를 잃고 살아남은 네히트만과 그의 아내가 첫아이를 낳아

그 기쁨을 나누려 하지만 사람들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에 대한 경외를 잃은 우리의 무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커트 보니것 스스로가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왔기 때문일까?

그의 전쟁과 생명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는 이 작품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자, 이제 남아 있는 다른 단편들을 살펴보며 정리를 해볼까 한다.

투자 자문회사의 중개인인 내가 가난하게 살아가는 포스터의 상속 증권을 관리해 주면서

그가 부유한 삶을 마다하는 진짜 속내를, 그만의 비밀을 알게된다는 내용의 '포스터의 포트폴리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을 택한 그의 짠내 나는 소신과 정말 마지막 반전이 허를 찌른다.

위의 단편과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한결 위풍당당한 저택'에서는

실내 인테리어에 모든 꿈을 걸고 사는 부부가 등장하는데 풍자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던 작품.

사람보다 더 똑똑한(?) 개 스파키가 등장해 견생(犬生)보다 못한 인생(人生)들에 도움을 주고

장렬히 죽음을 맞는 '톰 에디슨의 털복숭이 개'.

사전과 단어를 사용해 고급스럽고 지적인 언어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새 사전'.

혼자 남겨진 아이가 옆집에서 나는 남녀의 싸움 소리를 듣고 그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금기시된 어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시끄럽고 과격하게 그려낸 '옆집'.

캐네디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작가의 정치적인 관심사가 드러나 있는 '하이애니스포트 이야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다 미래의 안정을 위해 기계화되고 산업화된 공장에 취직한 데이비드.

그는 자신처럼 그 안에서 길을 잃고 곧 죽임을 당할 사슴과 함께 탈출한다.

우리가 그리고 우리를 망치고 있는 것들에서 탈출하기를 바라게 되는 '공장의 사슴'.

'거짓말'은 집안 대대로 입학해 온 화이트힐 사립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아이가

불합격통지서를 받고 이를 찢어버리고 숨기면서 일은 점점 더 커진다.

천천히 드러나는 인간적 속물 근성이 잘 드러난 작품.

문제아 중의 문제아인 '짐'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밴드에서 함께 연주하게 만드는 헬름홀츠 선생의 감동 드라마 '아무도 다룰 수 없던 아이'.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인 에니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에피칵',

나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에피칵'의 도움을 받지만 이로 인해 에피칵은 사랑을 알게 되고,

기계인 자신의 숙명에 괴로워하는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에피칵'의 최후의 선택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의 작품들 면면에는 차가운 절망과 어두운 현실을 녹이고 밝혀줄 인간적인 온기가 스며있어

읽고 있노라면 마음으로 그 밝고 따스함이 전달된다.

그래서인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작품들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기막힌 상상력이 구조화된 소설이라는 방에서

그만의 블랙 유머에 친숙해지며

때론 서늘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독특한 작가의 시선에 감탄하는

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의 단편들이 준 첫인상은

각 작품이 가진 개성이 제각각 다르고 뚜렷해

커트 보니것이 작가로서 가진 역량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가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단편 하나에 응축해 놓은 주제의식과 고민의 깊이는

얼마나 깊고 넓은지 씁쓸한 웃음으로 넘기기에는 그 묵직함은 장편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없이 짓누르지 않는 것은 그의 명랑한 기운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들이 주는 무게감 있는 울림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커트 보니것의 장편들을 읽을 준비는 충분히 끝낸 셈.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로 시작된 커트 보니것과의 인연!

사실 처음 커트 보니것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커트'라는 이름 때문에

'너바나'의 요절한 음악 천재 커트 코베인이 먼저 떠올랐지만,

이제는 소설 천재 커트 보니것으로 내 마음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으셨다는 거.

역시 우리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네요.

작가님, 몽키하우스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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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카멜레온 레온 똑똑 모두누리 그림책
제인 클라크 지음, 브리타 테큰트럽 그림, 민유리 옮김 / 사파리 / 201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주변 사람이 자신들과 다른 나를 짜증나는 존재로 본다면....

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물음에서 출발한 그림책 <눈분신 카멜레온 레온>

레온은 카멜레온입니다.

그것도 화려한 형광색!

가만히 있어도 이미 충분히 남들과 다른 레온.

레온도 카멜레온이니 다른 카멜레온들은 기대를 합니다.

다른 환경에 가면 레온도 자기들처럼 몸 색깔을 바꿀 거라고요.

그래서 그들과 레온은 수풀 우거진 숲속으로,모래사막으로, 회색빛 바위산으로 가봅니다.

모든 카멜레온들은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을 보호색으로 바꿔 몸을 감추지요.

그러나 레온의 몸 색깔은 바뀔 줄을 모르고,

어느새 밤이 찾아옵니다.

레온의 눈부신 몸 색깔 때문에 다른 카멜레온들은 잠을 잘 수가 없어

모두 잔뜩 짜증 난 얼굴로 레온을 힐끗거립니다.

슬픔에 빠진 레온.



결국 레온은 형광색인 자기 몸 색깔로 있어도

튀지 않고 주위와 잘 어울리는 곳을 찾아 떠납니다.

마침내 레온은 자신의 몸 색깔과 같은 형광색 새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이내 먹이를 찾아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고

레온은 다시 슬픔에 잠기지만

이내 자신과 비슷한 형광색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갑니다.



과연 레온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두가 이 책을 보며 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레온이 만나기를 바랐던 바로 그것!!

그러니 굳이 보여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

"넌 왜 우리랑 달라?"

살면서 한번 쯤 아니 여러 번 맞닥뜨리게 될 이 질문을

아이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요?

사실 이 질문은 만날 때마다 그리 반가운 질문은 아닐 겁니다.

'우리'라는 영역을 정해 놓고 멋대로 밀어내는 것이니까요.

(뭐, 끼워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지만 말입니다 ^^;)

그렇지만 이 질문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데에

<눈부신 카멜레온 레온>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마 레온처럼 당황스럽고 슬픈 감정이 들겠지만,

힘을 내서 출발해 봅니다.

나로 있어도 아무 문제 없는 곳으로,

나와 같은 친구를 찾아서 말이지요.

그렇게 힘든 감정들을 이겨내고

찾아낸 것들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울까요?

그리고 얼마나 내가 자랑스럽고 기쁠까요?

이 책은 나로 있는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고

찾을 수 있다는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도 알려주지요.

<눈부신 카멜레온 레온>의 글은 함께 레온을 응원하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어주고,

그림은 레온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아이들 그림책에서 보기 힘든 색인 형광색이 정말 멋지게 표현되어 있어요.

저는 이 그림책을 보면서 브리타 테큰트럽 작가님이 색깔도 참 잘 황용하시는 분이구나란 생각과

형광색이 이렇게 눈부시게 예쁜 색이었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요.

역시 그림책과의 만남은 언제나 신선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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