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쁘띠, 하고 말하면 웃음이
그 말을 경멸한 적 있다.
부르주아 앞에 붙여 썼는데, 요샌 좋다
기득권의 포기가 강권된 때, 졸업을 포기했다
간신히 수료인 셈인데, 박사보다 좋은 게 밥사란다
밥 파는 놈이 되었기에 망정이다
옆 미용실 원장은 쁘띠 같은 분
밥사보다 나은 게 봉사라니까
경멸해도 쁘띠 부르주아가 되었으면 좋겠다
쁘띠, 쁘띠, 쁘띠
밥사 주는 쁘띠가 되어야지
재활용을 내어다 놓는다 내다 놓은 것은 빈 것
올려다보아야 가로수다
봉사보다 나은게 감사란다
(요사이 뜨는 분은 웃자란다)
웃자 웃자자(곱빼기다), 기지개를 켜본다
공무원이 대세라 주사를 치지만
술사가 땡긴다 가로수 한 번 올려다본다
한 박자 쉬는, 한 잔 좋습니다
쁘띠 술사의 말씀입니다 절로 웃어진다
쁘띠 쁘띠 쁘띠- (P.21 )
냉국에 헤엄치는 여름
우려낸 다시마를 만지면
돌고래 등껍질을 만지는 듯하다
다시마튀각은 깨진다 찡긴다
미역만 보면 괜히 눈시울,
미역국만 보면 마음이 뿌예진다
밥알을 말아서 입술로 먹으면
왠지 미안하고 괜스레 고맙다
미역을 그냥 잘라서 맨물에
오이채에 맨 소금 간,
싱거우니, 그래서 식염 식초
그거 좋다, 암 것도 안 들어간 투명이 좋다
미역은 또 물과 어울려 노니, 맑아
이때는 업소용 레시피도 용서 된다
바다 소식 바다 소식 바다 소식
미끌거리는 미역과 사각거리는 오이와
찡기는 밥알이면 소식도 좋다
다시마야 제 물을 다 뺐으니 불어 미끌거리는 것
입천장에 붙어도 이쁜 미역
신맛마저 맑은 냉국
미역만 보면 몸도 마음도, 멱 감듯
해산 한 듯, 다, 풀린다 (P.26 )
밥에는 색이 있다
물드는 것처럼 무서운 게 없다
김칫국물, 스며버린다
희미해질 뿐 안 지워진다
나갔던 김치에 국물을 붓고
새 걸 얹어도 층이 진다
밥물이라는 게 있다
밥은 색을 넘어 어떤 기운까지 빨아들인다
숟갈 젓가락을 넘어
입술지문까지 묻어난다
나갔던 밥에 밥을 얹으면
공구리 친 것 같다고 충고하는 친구가 있다
밥에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
덜어 먹는 마음,
'손대지 않은 거거든요' 설명하는 마음
물들지 않은 밥은 못 버리겠다는 마음이 있다
밥풀 때만큼은 착해지는 손이 있다
밥장사하는 마누라 밥 버리게 하는데, 십년이 걸렸다고
흥분하는 친구가 있다
그 진심을 듣고도 밥을 못 버리는
엉거주춤한 마음이 있다
버리고 우는 마음이 있다
돌아온 밥공기를 보면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이 보인다 (P.43 )
국숫집에 가는 사람들
혼자 먹어도 좋은 게 국수다
상심한 사람들은 국수집에 간다 불려, 국수를 먹는다
울기를 국수처럼 운다 한 가닥 국수의 무게를 다 울어야
먹는 게 끝난다 사랑할 땐 국수가 불어터져도 상관없지
만 이별할 땐 불려서 먹는다 국수 대접에 대고 제 얼굴
을 보는, 조심히 들어 올려진 면발처럼 어깨가 흔들린다
목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 국수를 좋아한다 국수 같은
사랑을 한다 각각인 젓가락이 국수에 돌돌 말려 하나가
되듯 양념 국수를 마는 입들은 입맞춤을 닮았다 멸치국
수를 먹다가 애인이 먹는 비빔국수를 매지매지 말기도
하고, 섞어서 먹는다 불거나 말거나 할 말은 사리처럼
길고 바라보는 눈길은 면발처럼 엉켜 있다 막 시작한 사
랑은 방금 삶은 면과 같아서 가위를 대야 할 정도의 탄
력을 갖는다 국수는 그래서 잔치국수다 (라면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 곱빼기인 사람들은 국수집에 간다
손가락이 젓가락처럼 긴 사람들,
국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을 때서야 그 빈그릇이 빛
난다 (P.56 )
칠월칠석
호박잎 쌈 싸먹으면
잉어 낚시 간다, 쪄
물기 손바닥에 묻는 호박잎 손에 얹으면
깊어져, 달라붙은 호박잎 떼어 밥을 싸는 일은
죄 같아 묽은 된장을 찍는다
호박잎 먹고는 푸른 똥 싸고 피의 일부는
강물을 닮아가겠지 우기와 건기를 다 기어온
이파리가 몸인 이것
손바닥 같은 호박잎을 손에 얹으면
안지 못한 손
일 안한 손, 호박잎 물든
손금까지 전수 보인다
삶은 호박잎 보면, 삶은 뭉친 잎처럼 깊어져
생모래 먹었다 뱉는 그 끊어지는,
물속에서 폐음절 울음 들리는, 잉어 보러
강변에 나간다 노는 잉어처럼
강에 박힌 밤하늘이
저냥 보인다 (P.101 )
한 상 받다
밥은 얻어먹을 때 맛이 깊다 김은 밥을 쌀 때 바스러
지는 맛에 맛나고 이름마저 칼칼한 깻잎은 잎맥이 밥을
싼 여문 모과 빛에 맛나고 콩장은 이에 찡기는 맛에, 두
부는 숟갈로 끊는 맛에 맛나고 모양도 감사납고 맛도 쓴
고들빼기는 순전히 이름 맛에, 총각김치는 앞니에 끊어
지는 맛에 맛이 깊다 뚜껑을 덮는 밑반찬에 먹는 밥은
얻어먹을 때 비로소 모양도 맛이 된다 공기밥, 얻어먹을
땐 이름까지 맛이 된다 청국장은 황금빛 국에 콩알 맛
에 숟갈 가고 달걀은 후라이가 좋고 계란은 찜이 좋다
맛이라면야 얻어먹을 땐 라면도 좋지만 어머니의 배춧
국이야말로 숟갈 씹히게 좋은 일품요리
다들 아는 당연한 맛이 볼수록 깊어진다 씹을수록 구
뜰하다 받아든 한 상이 ( P.111 )
-윤관영 詩集, <오후 세 시의 주방 편지>-에서
사는 일의 기본은 어쩌면 먹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잘 먹는다는 건, 그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의 여정을
살피며 감사히 맛있게 먹는 일.
무더위와 쌓인 일들에 치이다, 국수가게에서도 일하고 냉면가게에서도
일하다 지금은 아들 민주와 망원동 '父子부대찌개'를 운영하는 시인의
힘 뺀 힘, '어떤 한참 운 사내에게 남은 것 같은 힘의 그림자' 같은
"애벌 삶은 사골엔 풀빛 기름이 인다"는 시들을 만나며, 즐겁게 기운을
한껏 차린다. 이 시집은 이준규 시인의 심심하고 심상하지만 가만히
지켜본 눈빛의 정다운 발문,도 맛있다.
오늘은 소서를 맞아, 흰 국수를 삶아 슴슴한 오이지를 썰어 얼음 띄운
담백하고 시원한 국수를 먹어야지.
그리고 읽을 때는 힘들지만 읽고 난 후엔 힘이 솟는 그래픽노블 '마당씨의
식탁'과 먹방이나 쿡방의 허세를 떠나 먹는 것의 원형의 의미와 즐거움을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산다는 건 잘 먹는 것'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
오늘은 조금 있으면 도착할 꽃님들과, 비소식에 설레는 花曜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