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흰 달
정거장마다
지붕 선이 바이올린처럼 예쁘고
어딜 가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달에 가 있다
달이 물방울처럼 아름다운
브뤼셀은 가까워 오는가
정말 生에 가까운 것이 오려나
당신은 참 좋은 사람예요
갑자기 열차 창 쪽에서
선이 흔들리는 달이
말한다
죄를 사용했던 사랑만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다시 태어나면
여자에게 그렇게 잘 해주는
남자가 되고 싶어요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자기가 자기를 향해 뜨는
달의 뒷면 같은 데를 갖고 싶은
브뤼셀을 한 정거장
지나쳐버린 늦은 밤
뜻밖에 되돌아갈 곳이 생겼다 (P.14 )
자작나무 날개
너무 그리울 때는 자작나무가 있기도 없기도 했다
하루는 암꽃이 하루는 수꽃이 수줍음을 타는 그 자리
낮달이 슬쩍슬쩍 자작나무 편제로 들어왔다
이렇게 하얀 무릎을 모으고 서서 원하는 것은 생의 고저이겠는지
속도이겠는지
너무 예쁘게 보일 때는 말도 못하지만
내, 낮달 스미고 일요일 오고 신작로 깔리는 자작나무 4월이 오면
사랑을 해야지 대신할 수도 대표할 수도 없이
자작나무가 서 있는 일곱 번째 봄
우리는 할 얘기가 많아 껍질박이 흠에 들어가
삼십년은 더 살아야지
날개였던 하얗게 튼 살을 꼬집으며 사라져가야지
그렇게 까불거리며 울어지기도 했다
4 월 산문(山門)에 둘이서 얇게 벗겨지는 것이 깊었다
다른 나무들도 아뜩하게 날개가 없었다고 사랑을 추억하긴 했다 (P.28 )
달방
달이 대중목욕탕 은행나무 위로 뜨자
예쁘고 길쭉한 과일처럼 생긴 젊은 여자와
땅에 끌려 너덜너덜해진 잎사귀 같은
늙은 여자가 함께 보고 있다
젖가슴처럼 아름답게 올라가는
달이 들어간 구석
슬픔을 냄비처럼 손바닥으로 감싸 안고
누이와 밴드마스터들은 야간업소에서 시장으로 흘러나오고
건더기 채로 돌아다니는 추운 건달들도
안으로 하나씩 달을 매달고 그만 자러 들어가는
재래시장 뒷길에 곧 성탄절이 찾아오는
골방이 있었다 방안 가득
고봉밥으로 담긴 달빛이 전축을 틀면
우리가 돌다가 노랗게 여물고 둥글게 안아져
서로 눈을 뜨지 못하던 밤이곤 했다
모든 것을 다 줘버린 사람들이
서로에게 추억되듯이
달은 있던 자리에 단풍든 잎을 붙여놓고
나무 밑둥으로 내려가리라
슬픔을 아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P.58 )
대낮, 망사커튼을 친 거실에서
나란히 누워 있자니
구름은 가끔 약하게 코를 곤다
곱슬머리 한 가닥을
푸른 이불깃에서 떼어내 망사커튼에 비쳐본다
우리의 거리를 잴 수 있는 지밀의 머리칼은 젖어 있고
한 사람이 평생 한 사람으로 흔들렸던 것을
다 기록해 뒀다는 듯
곱슬머리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구름
듣자니
혼자의 외로움으로는 외로움이나 사랑을 다 채울 수 없어
내 모서리는 당신의 모서리로 휘는 법이랬다
모서리끼리 이어진 첫 이음새에서
전기가 울고
망사커튼이 여러 번 접히며 흔들린다
지금 당신의 머리칼은 너울거린다
잇는다는 것이 이런 거라는 듯
꿈을 꾸는 외로움 둘이서 한 줄로 늘어진다
거실에 낸 우리의 샛길, 국수나무 꽃 근처에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머리칼을 쥐고 우리는 국수를 만다 (P.124 )
깊은 맑음
댓잎처럼 수북하게 날리어 가난뱅이가 되렵니다
우수수 져서라도 당신을 좇습니다
층계 때문에 배달도 안 오는 산 동네
이렇게 원했습니다
밑창이 벌어진 나의 구두를 들고 달이 왔습니다
오늘 밤은 참 인생의 귀여운 부위,
댓잎으로 날리어 당신의 드높은 우물에
나 무수히 뜨겠습니다
캄캄한보다 더 깊은 맑음을 풀어서 (P.139 )
-황학주 詩集, <내 잠은 당신 잠의 다음이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