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판의 <르 코르뷔지에 : 언덕 위 수도원>을 보다가

 문득, 르 코르뷔지에의 책들을 찾아본다.

 르 코르뷔지에. 아주 오래전에 나의 서가에 꽂혀 있었던 그의 冊들 몇 권.

 

 

 

르 코르뷔지에, 새로운 ‘진실의 건축’, 라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하다
라 투레트 수도원은 착공되기 한참 전에 이미 건축가가 정해져 있었고, 사전 준비도 거의 끝나 착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착공 직전에 쿠튀리에 신부가 갑자기 계획에 개입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 설계한 건축가 노바리나는 나중에야 르 코르뷔지에가 수도원 건축가로 최종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밀려난 것은 도미니코회 수사 한두 명이 은밀히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떨어뜨린 건축가를 찾아내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의 상대가 그보다 뛰어난 르 코르뷔지에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당사자인 르 코르뷔지에는 이런 모든 과정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해 준 롱샹 성당의 설계 역시 처음에는 노바리나로 결정되었다가 자기 차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역사의 평가는 언제나 냉정하다. 이 사건으로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사에 또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킬 기회를 얻었지만, 노바리나는 이름을 떨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과 풍파를 겪는 동안 쿠튀리에 신부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걸었던 기대는 아주 단순했다.
“조용하며,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1953년 5월 4일,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으로 수도원 건축 부지를 방문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전망이 탁 트인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서서 “이런 곳에 아무런 목적도, 의의도 없는 수도원을 짓는다면 그건 죄악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바퀴 둘러본 후 그는 무심코 끼적이듯 수도원의 외관 초안을 그렸다. 들판 위에 기둥을 세워 언덕의 경사를 그대로 살리는 형태로 그려진 이 초안은 훗날 실제로 완공된 수도원과 거의 일치했다고 한다.(본문 134~137페이지)

 

 

                                                -니콜라스 판, <르 코르뷔지에 : 언덕 위 수도원>-에서

 

 

 

 

 

 

 

 

 

 

 

 

 

 

 

 

 

 

 

 

 

 

 

 

 

 

 

 

 

 

 

 

 

 

 

 

 

 

 

 

 

 

 

 

 

 

 

 

 

 

 

 

 

 

 

 

 

 

 

 

 

 

 

 

 

 

 

 

 

 

 

 

 

 

 

 

스위스라는 무대가 좁았던 미술 천재

1965년 8월 27일 오전 11시, 코르뷔지에는 통나무 작업실을 나와 눈부신 지중해를 바라보며 산책길을 걸어 내려갔다. 수영복 차림의 그를 본 이웃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바보 같은 늙은이입니다. 그러나 아직 머릿속에는 적어도 100년 분량의 계획이 있죠. 그럼 나중에 봅시다!” 코르뷔지에는 바위 사이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의 피부는 지중해의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적당히 그을어 있었고, 몸은 78세라는 나이답지 않게 곧고 단단했다. 오솔길로 내려간 그는 곧장 은빛 파도가 반짝거리는 바다로 걸어갔다. 의사는 그에게 해수욕을 하다가는 심장이 멎을 수도 있으니 절대 바닷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짙푸른 지중해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잠시 후 해수욕을 하던 관광객이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고독한 사람, 급진적 사상가, 논객, 화가, 조각가, 가구 디자이너, 도시계획가, 공예가, 건축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었던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평생을 아끼고 사랑하던 지중해에서 사망했다.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다에 들어간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자살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그의 정확한 사인은 심장발작이었다. 장례식은 1965년 9월 1일 루브르궁 안마당에서 치러졌고, 장례 행렬이 샹젤리제 거리를 지날 때는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당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는 진혼사에서 그를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인 페이디아스(Pheidias)와 르네상스의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반열에까지 올리며 그의 공적을 기렸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는 죽기 한 달 전 출간 예정이던 책을 손보면서 이런 마지막 문장을 남겼다. “삶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빨리 지나가 버렸고 최후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 [인물 세계사]에서.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4-08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8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4-08 04:28   좋아요 0 | URL
건축을 토목공사나 막개발로만 여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르 코르뷔지예 같은 분들은 참말 제대로 읽혀야 할 이야기라고 느껴요. 그런데, 이분은 시멘트를 너무 좋아해서... 늘 이 대목이 걸리더라고요. 시멘트를 안 쓰는 건축으로 뻗어 나가지 못한 대목이 아쉽달까요. 시멘트집이 사람한테 끼치는 나쁜 것들을 못 느꼈달까요.

그래서 저는 '픽터 파파넥' 같은 디자이너라든지 '하싼 화티' 같은 건축가한테 조금 더 눈길을 두어요.

appletreeje 2013-04-08 09:43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전에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를 참 좋게 읽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살펴 보니 역자가 '말하는 건축가'의 정기용님이시군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건축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말하신.

'의미'가 있는 질서를 만들어 내는 디자인 ,을 모토로 삼은 픽터 파파넥의'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환경과 그가 사용하는 도구를 변형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 스스로까지도 변형시키는 것이다.'가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2013-04-08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樹話에 대하여

 

                                                       -김영태

 

 

 

 

 

                       아무때나 저는

                       실물보다 아름다운 祭器와

                       제기 안에 들은 마른 열매 두 개를

                       보러 가곤 합니다

 

                       이 조그마한 소품은

                       凡夫인 제게

                       평범하지 말기를

                       애써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만

                       樹話가 그린 제기는 아무리 봐도

                       비뚤어진 선이

                       아래로 처진

                       그릇 모양과

                       오래 덧발라 피 마른 색

                       작고 쓸쓸한 열매가

                       평범해지면 못 쓴다구!

                       꾸지람을 대신하곤 합니다

 

                       말년에는 그의 붓이 點이 됐습니다 별 하나 별 둘 그리운 얼굴로 변했

                    습니다 점 찍으려고 구부린 樹話의 큰 키가 저같이 볼품없는 제자도 자

                    네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꼬, 점 중에 끼워 주었을 때 그의 손

                    바닥이 조아린 저의 머리꼭지에 살며시 내려와 쓸어주곤 했습니다

 

                                                                                                        (1978 )

 

 

 

 

 

 

 어제 저녁, 김환기 화백의 탄생 100주년에 맞춰 나온 <김환기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대한 책소개를 읽었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김환기 화백의 책,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생각했고, 그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의 마지막 귀절을 빌어 樹話 김환기 화백이 뉴욕생활 11년 말년에 그린 작품의 제목이다.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點으로 사람들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그린 작품이다

 내가 1995년에 김환기 화백의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사서 읽고 그리고 몇년이 지나고 어떤 개인사적인 변동의 시기에 있었을때, 그리고 몇 번의 이동이 있었을 때 아마 이 책을 잃어 버린 듯 하다. 이 책뿐만 아니라 요절화가 최욱경의 책이나 권진규의 화집, 그리고 김환기나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의 화집등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책들을 그 시기에 잃어 버린 듯 하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는 이제 그 책들에 대해 잊고 있었고, 그 시간들에 대해서도 또한 잊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다시 찾아 왔다.

 혼란과 어쩌면 피폐하기까지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도 그때는 꿈이 어두운 밤하늘 속에서 반짝이는 별처럼.. 깜박깜박 눈에 잘 보이지는 않아도 그래도 조그만 별빛으로 삶 안에 빛나고 있었던 것 같다.

 김영태 시인의 '樹話에 대하여'도  오랜 시간동안 사랑했는데 이 詩도 역시 잊고 있다가 오늘 아침 다시 찾아 읽었다. 내가 사랑했던 이 詩人도 이제는 별이 되어 떠났다.

 인터넷 책방이 없었던 시간에 발품을 팔아 화랑으로 미술관으로 서점으로 삶의 기쁜 꿈들을 가슴속에 가득 담아 무엇인가 희망을 기다리고 사람과 사람에 대해 아름다운 정을 나누던 그 시간이 떠올랐던 어제 저녁이었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부디 우리 무엇이 되더라도 아름답게 다시 만나자.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림모노로그 2013-04-05 10:20   좋아요 0 | URL
제목에서 부터 가슴이 짠하네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 정호승 시인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가 와 같은 애잔함이 드네요 ~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고 시인데 ㅋ
김환기님의 책이 나무늘보님의 가슴 한 켠에 남겨 놓은 의미를 저도 느껴보고 싶어요.
전 아직 이 분의 책을 만나지 못했거든요 ㅎㅎ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어 기쁩니다 ㅎㅎ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해 오늘도 ^^ 힘찬 하루를 열어봅니다 ㅎㅎ

appletreeje 2013-04-05 13:53   좋아요 1 | URL
이번에 새로 나온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간송 전형필>의 저자이신 이충렬님이 쓰신 김환기 정본 전기이고
제가 읽었던 책은, 김환기 화백의 산문집이었는데 절판 되었던 책을 환기미술관에서 2005년에 새로 나왔네요.^^
늘 누군가의 무엇이 되시는 드림님!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

2013-04-05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4-05 10:49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나라에서 아름다운 숨결로 즐겁게 만나겠지요

appletreeje 2013-04-05 13:24   좋아요 0 | URL
예~그러리라 믿습니다. ^^

수이 2013-04-05 14:53   좋아요 1 | URL
'아름답게 다시 만나요' 언제 어디에서고! 나무늘보님~ :)

appletreeje 2013-04-05 15:12   좋아요 0 | URL
예~~그래요. 우리 모두요, *^^*

mira 2013-04-05 17:39   좋아요 0 | URL
저도 이책 기대하고 있어요

appletreeje 2013-04-05 23:25   좋아요 0 | URL
저도요~^^
mira-da님! 반갑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후애(厚愛) 2013-04-05 20:34   좋아요 0 | URL
다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책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appletreeje 2013-04-05 23:30   좋아요 0 | URL
정말 다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지요~^^
이건 우리 알라디너들의 공통고민이겠지요~?

후애님! 편안하고 포근한 밤 되세요~*^^*
 
김환기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이충렬 지음 / 유리창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1995년에 문예마당에서 출간된 책으로 읽었다. 그런데 어느 시간에 이 책을 잃어 버려 몹시 안타깝고 허전했다. 이제 탄생 100주년에 나온 이 김환기 전기를 읽어봐야겠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리는,

댓글(7)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04-0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5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러고 있는,

 

 

 

 

                           비가 자운영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

                         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

                         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

                         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

                         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P.10 )

 

 

 

 

 

 

 

                        야채사(野菜史)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고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 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P.11 )

 

 

 

 

 

 

 

                                   연희

 

 

                                                                    제가요, 외로움을 많이 타서요,

                                                사람들이랑 잘 못 놀면 울어요, 그렇지 민호야?

                                                              -11세 소녀가장 연희 인터뷰 중에서

 

 

 

 

 

                            나도 연희야 외로움을 아주 많이 타는데 나는

                            주로 사람들이랑 잘 웃고 놀다가 운단다 속으로 펑펑

                            그렇지?(나는 동생이 없으니까 뼛속에게 묻는단다)

 

                            열한살 때 나는 부모도 형제도 많았는데

                            어찌나 캄캄했는지 저녁 들판으로 집 나가 혼자 핀

                            천애고아 달개비꽃이나 되게 해주세요

                            사람들 같은 거 다 제자리 못박힌 나무나 되게 해주세요

                            날마다 두 손 모아 빌었더니

                            달개비도 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되었단다

 

                            사람들이랑 잘 못 놀 때 외로워 운다는 열한살짜리 가장

                            열한살짜리 엄마야 민호 누나야 조숙히 불행해 날마다

                            강물에 나가 인간을 일러바치던 열한살의 내가 오늘은

                            내게도 신발을 주세요 나가서 연희와 놀 흙 묻은 신발

                            을 주세요 안 그러면 울어요 외로움을 내가요 아주 많이

                            타서요 연희랑 잘 못 놀면 울어요

                            달개비도 천애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열한살 너의 봄 때문에 사람들이랑 잘 못 놀아준 봄들을

                            돌려세우는 저녁이란다  (P.72 )

 

 

 

 

 

                                                    -김경미 詩集, <고통을 달래는 순서>-에서

 

 

 

 

 

 

 

 

 

 

 

 

들판 가득, 이름 아름답지 않은 개망초꽃들을 보며

 

망하는 건 속으로 어떤 이름에 몰래 침 뱉을 때, 골목 뒤편에 숨은 채 갚아주겠다 벼를 때, 전적으로 네 쪽이 고약했다, 누군가를 팔아넘길 때. 라는 김경미 시인의, 2001년에 나온 <쉿, 나의 세컨드는> 이후 <고통을 달래는 순서>를 다시 읽는 아침.

 연희와 놀고 싶은 하루,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림모노로그 2013-04-04 11:21   좋아요 0 | URL
<연희> 이 시는 정말 슬픈 것 같아요 흑 ~ ㅋㅋㅋ
감동의 시, 나무늘보님이 올려주시는 시 때문에 가끔 ㅋㅋ
미칠 것 같아요 ㅋㅋ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appletreeje 2013-04-04 13:59   좋아요 0 | URL
연희, 정말 찡하지요. 그런데 보이진 않더라도 연희가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우리 드림님의 댓글로 더 감동스러워 미칠 것 같아요. ㅎㅎ
드림님께서도 좋은 하루 되세요. ^^

2013-04-04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3-04-04 12:29   좋아요 0 | URL
언제나 시를 읽고
고운 꽃 알아볼,
이러고 있을 때일 테지요~

appletreeje 2013-04-04 14:03   좋아요 0 | URL
그렇치요~?
언제나 시를 읽고 고운 꽃 알아볼,
이러고 있을 때일 테지요~~*^^*

후애(厚愛) 2013-04-04 18:15   좋아요 0 | URL
저도 <연희>가 슬픈 것 같아요...
눈물이 글썽글썽~ 제가 요즘 눈물이 많아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appletreeje 2013-04-04 18:54   좋아요 0 | URL
그러시겠지요. 후애님.
그래도 억지로라도 웃으시면 웃을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우리, 힘든 일이 많더라도 웃기로 해요. ^^
후애님! 편안하고 좋은 저녁 되세요. *^^*

보슬비 2013-04-04 22:55   좋아요 0 | URL
마음들이 모두 비슷한가봐요.
저도 연희 읽고 뭉클했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appletreeje 2013-04-05 13:37   좋아요 0 | URL
그렇치요? 연희, 그리고 또 다른 연희들도요.
보슬비님!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

이진 2013-04-05 00:53   좋아요 0 | URL
아아, 김경미 시인은 정말 여성적으로, 그리고 포용적으로 글을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군요.
아름다워요. 만나고 싶은 시인이에요.

appletreeje 2013-04-05 13:39   좋아요 0 | URL
정말, 읽으면서 새삼스레 좋았어요.^^
이진님께서도 좋아하실 시집같아요.
소이진님!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나를 외로운 공주로 만들어, 나에 대한 자신의 열등

                     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집과 아내와 아이가 있는 그의 고독

                     이, 집도 남편도 아이도 없는 나의 고독보다 무섭다는 사실

                     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나를 감성만 살아있는 여류시인으로 만들어, 창

                      조적인 지성에 압도당한 자신들의 무력감을 숨겼다. 여자보

                      다 강하고 여자보다 똑똑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조선

                      의 선비들은 상상력이 빈곤해,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못한

                      다. 뿌리가 자유롭지 못한 나무가 가지를 뻗고 풍성한 열매

                      를 맺을 것인가. 유행을 따르는 허접스런 문자유희로 넘치

                      는 지식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말도 어렵게 비틀고

                      꼬아야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P.82 )

 

 

 

 

                    오해

 

 

 

 

                       술보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시가 쉽다고

 

                       노란 세월이 밀려온다고, 빗대어 쓰면

                       몰라도 뜻을 묻지 않고

 

                       출퇴근하는 지하철을

                       밥벌레들이 기어들어가는 순대에 비유하면

                       직장인들을 모욕했다고 분개하고

 

                       나도 모르는 말들을 주절주절 갖다 붙이면

                       그들은 내 시가 심오하다고..... (P.90 )

 

 

 

 

                      아이와 다람쥐

 

 

 

 

                           조카아이와 슈퍼마켓에 갔다 아이와 슈퍼마켓에서 나왔

                         다 내 손엔 물건들이 들려있고 아이의 손은 들어갈 때처럼

                         빈 손. 내 눈은 길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계산대를 통과하

                         며 얄팍해진 지갑을 만지는데, 아이가 갑자기 소리 지른다

                         "이모! 여기 다람쥐 있어!" 어디? 어디? 없는데, 없는데. 높

                         이 달린 내 눈엔 사람들과 물건만 보이는데 "여기 다람쥐

                         있어!" 반짝이는 눈, 자그마한 손을 따라가니 정말 다람쥐

                         가 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아주 낮은 곳에. 그 아이

                         에게 당연한 기쁨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랑도 그러하리라  (P.60 )

 

 

 

 

                        개미

 

 

 

 

                             누가 나 좀 뒤집어다오

                             이대로는 못 살겠어

 

                             국어사전을 기어오르다 배가 뒤집힌 개미가 방바닥에 추

                          락해 발버둥친다 어서 저 스탠드 불빛 밑으로 도망쳐야 하

                          는데 아무리 몸부림친들 등이 배가 되고, 배가 등이 되기는

                          글렀다.

 

                              불쌍한 것.

                              구경하던 내가 연필로 꼬리를 눌러 몸통을 뒤집어주자 개

                           미는 죽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내가 자기를 죽일 줄 알았

                           나? 놈을 안심시키려 불을 끄고 다른 일을 하는 척. 한참 뒤

                           에 다시 불을 켜고 보니 개미는 열심히 기어가는 중. 방금

                           제 몸이 뒤집힌 사고도 잊고, 언제 그랬냐 싶게 씩씩하게

                           먹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P.83 )

 

 

 

                                                    ㅡ최영미 詩集, <이미 뜨거운 것들>-에서

 

 

 

 

 

 

최영미의 한 마디


 

살수록 알수록 시집 후기를 쓰기가 어려워진다.
뭔가 덧붙인다는 구차함.
다 털어놓는 민망함이여.
시로 나를 털고 털어, 사방에서 부수고 일그러뜨려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인지?
어디서부터 속였는지?
내가 그걸 정말 느꼈는지?

마음의 조각들을 다시 붙여, 멀리서 바라본다.
말과 말 사이, 빈틈없는 것들은 빛나고
아닌 것들은 시들시들
주름을 감출 수 없다.
감추지 않으련다.

시를 청탁한 잡지사의 편집자들, 내 시를 가슴으로 읽은 사람들, 원고 정리를 도와준 친구들, 미국의 전승희 선생님을 기억하며, 귀한 발문을 주신 방민호 선생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추천의 글을 얹어 주신 황인숙 시인에게 고마움을 보내며 사진을 찍고 표지를 만든 분들, 함께 작업한 실천문학 식구들과 새 책을 내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 이미 뜨거운 것들과 말을 섞으려 나는 또 떠나련다.
-2013년 봄, 최영미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3-04-02 20:09   좋아요 0 | URL
아, 최영미 님이 새봄에 새 시집 내셨군요!
참 반가운 봄소식입니다~

appletreeje 2013-04-02 22:01   좋아요 0 | URL
예~~오늘 선물로 받은 최영미시인님의 새 시집을 반갑고 진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비로그인 2013-04-02 20:49   좋아요 0 | URL
쪽수를 적어놓으셔서 꼭 그런 건 아닐테지만, 특히 최영미의 시들은 시집이 아닌 산문집 같은 느낌이 드네요...

최영미의 후기는, 시인은 자의식마저 그냥 흘려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무척 슬프고 고단한 존재들이겠다는 퀘퀘한(? ) 생각도 들구요.

appletreeje 2013-04-02 22:07   좋아요 0 | URL
ㅎㅎ 쪽수는 제가 나중에 자료로 쓸때 찾기 쉽게 늘 적어요. 원래 시집의 시들은 신명조이지만 제가 그냥 저 보기 쉽게 맑은고딕으로 올려서 더 그럴 듯 해요. ^^;;;
다른 분들과 달리 제가 늘 이런 부분을 잘 못해요. ^^;;;
그치요. 시인들은 자의식마저도 그냥 흘려버리지 않겠지요. ^^

수이 2013-04-03 09:29   좋아요 0 | URL
우왓!!!!!!!!!!!!! 아이와 다람쥐! 최고.

고딩때 최영미님의 저 시집 읽고 나도 시인이 될 거야! 주먹을 꼬옥 쥐던 그 여린 마음이 새삼 그리워지는 아침입니다. 나무늘보님, 오늘 하루도 덕분에 즐겁게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appletreeje 2013-04-03 10:38   좋아요 0 | URL
아이와 다람쥐! 정말 좋지요.^^
저도 이 시 읽으며 많은 느낌이 들었어요.
앤님! 오늘도 즐겁고 좋은 날 되세요~~

2013-04-03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3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04-04 11:22   좋아요 0 | URL
이 시집도 ㅠㅠ
저 아직 나무늘보님이 주신 시집 다 못 읽었는데 ㅋㅋ
떠나고 싶다는 시인의 말에 무지 공감을 느끼며 ㅋㅋ
오늘도 좋은 하루 ~ ^^

appletreeje 2013-04-04 15:20   좋아요 0 | URL
최영미 시인의 새 시집은, 정말 반가웠지요.
저는 선물로 받았는데, 알라딘에서 보니까 시인사인본이 오네요.^^
이궁, 이왕이면 저도 사인본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쪼금.^^;;;
드림님께서도 좋은 하루 되세요 ~ ^^

후애(厚愛) 2013-04-04 18:16   좋아요 0 | URL
모르는 시집들을 나무늘보님 덕분에 많이 읽게 되고 보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

appletreeje 2013-04-04 18:55   좋아요 0 | URL
예~~후애님께서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