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식 백반

     -주역 시편.1

 

 

     나비에겐 골육이 없고 
     작약꽃에겐 위와 쓸개가 없다. 
     골육과 위와 쓸개를 가진 
     나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비에겐 나비의 하루가 있고 
     모란꽃에겐 모란꽃의 근심이 있을 테다. 

     눈 내린 이른 겨울 아침 
     소년과 소녀들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햇살로 물든 금빛 침상에서 
     소년과 소녀들이 꾸는 꿈들 때문에 
     이토록 세상이 빛난다. 
     어른인 나는 어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며 
     초저녁 신성들을 풀지 못한 채 
     이렇게 마른 나무 등걸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후회를 씹어본다. 

     눈길을 걸어서 식당으로 가는 길, 
     가정식 백반을 파는 식당은 은하의 저쪽에 있다. 
     청양고추 하나를 된장에 푹, 찍어 먹는 
     눈보라 치는 이 아침, 
     가정식 백반 일인분을 먹는 
     내게는 가정식 백반의 근심과 기쁨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장석주 시집, <오랫동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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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01 13:31   좋아요 0 | URL
아, 이 시집 표지느낌부터 참 좋아요.^^
담아갈게요.^^

appletreeje 2012-12-02 23:27   좋아요 0 | URL
저도 표지느낌부터 좋았던 시집이었어요~~^^
저녁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의 어느 식당의 유리코팅에 '가정식 백반'이라 적혀있는
글자를 보니 또 이 시가 생각났었지요. 지극히 사적인 느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천만에.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라.
"나는 이런 일을 당했는 데도 고통을 겪지 않았고, 현재의 불운에도 망가지지 않고 미래의 고통도 두렵지가 않으니, 나야말로 행운아로구나!"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도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은 행운인 것이다." (본문 68~69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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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30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2-01 13:47   좋아요 0 | URL
"나는 이런 일을 당했는 데도 고통을 겪지 않았고, 현재의 불운에도 망가지지 않고 미래의 고통도 두렵지가 않으니, 나야말로 행운아로구나!"

이 문장 마음에 가져갈게요. 힘이 됩니다!! 고마워요^^

appletreeje 2012-12-02 23:32   좋아요 0 | URL
언제 읽어도 제게도 힘이 되고 무한한 긍정의 세계로 이끄는 귀절입니다~~
언제나 좋은 날 되소서~^^
 

 

 "그런데 그동안 내가 깨달은 사실은 네 말이 옳았다는 거야. 다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왜 환상이 현실보다 힘이 세어 보이는지, 어떤 종류의 꿈은 한 사람의 생을 온통 지배하는지, 때로는 몽상이 신념처럼 보이는지...그런 것들이었어."  p.40

 

물론 이제는 알고 있다. 기쁨이나 슬픔, 분노나 절망같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든 언어는 순간의 상태를 지칭한다는 것, 사랑의 언어 역시 그 말을 뱉는 순간에만 진실하다는 것. p.42

 

몇 날 며칠 동안 그 글을 쓰고 있었을 남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 어떤 기대나 희망도 없이, 고립과 고독의 높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 그 벽을 두드리듯 한 자, 한 자 옛일을 기록할 때 그의 손을 계속 움직이게 한 것은 사랑과 추억의 힘이 아니라 고립과 고독의 힘이었을 것이다. p.148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 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p.186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어떤 특정한 여성을 사랑했던 게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사랑하거나,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하거나,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진 내면의 환상을 사랑했던 것 같아. 그의 사랑이 훼손되지 않은 채 이십 년 이상 유지됐던 것은 그 사랑이 환상과 이데아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야. 시간에 침식되지 않고 공간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것은 환상이나 이미지밖에 없거든." p.237

 

 나는 자기향상을 위해 걷다가 여기 막다른 곳까지 와 있지만, 사실 자기향상이란 어려운 거다. 정신적으로 깊어지는, 그거는 측정할 길이 없는 거다. 그걸 어디다 꺼내놓을 수도 없고, 물처럼 부어놓을 수도 없고, 바람처럼 어디 부딪쳐서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이 세상이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있지만, 석가가 불교를 만들 때 불교의 연기설에 이미 나와 있었다. 자기 향상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다. p.345 

 

 상대성 이론처럼, 연기설처럼, 먹을거리의 순환 논리처럼 내 마음도 그러하다. 갈 데만큼 다 갔다. 낭떠러지만큼 다 왔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으니 돌아와야 된다. 모든 건 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출발했으면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고향 떠날 때는 다른 데 가고 싶은 마음으로 왔는데, 여기 있으면 다시 고향에 가고 싶은 거, 그거는 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p.346

 

 어리거든 채 어리거나 미치거든 채 미치거나, 어린 듯 미친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이런가 저런가 하니 아무런 줄 몰라라  p. 350

 

 이 산속에 와서 자리 잡고 나니 평생에 걸쳐 엮어온 어떤 기다림도 끝난 것 같다. 기다림이 완성된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자아내는 물레 같은 것이 회전을 멈췄다. p.366

 

 '마음은 정착하지 않았고 세계 일주의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p.418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야사를 채록해서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도 생각나고 전국을 발로 밟으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도 생각나. 예전에는 그들을 참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 전국을 발로 누비다니... ."

 그러나 세중은 요즘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했다. 그들이 몽상가가 아니었나 싶다는 것이다. 냉철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행동의 실리를 따지거나 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이들이었다면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였다. 세중은 결국, 한 두  사람의 몽상가가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연희는 자신의 내면에만 기록되어 확장되며 빛을 얻어온 환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도 생각이 좀 달라졌어. 그들이 몽상가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패배자는 아니라는 거, 몽상가들이 이 세상에 대해 갖는 긍정적이고 고유한 기능이 있다는 거. 그런 것을 믿고 싶어졌어."

 연희는 환상이 곧 현실임을 수용하고, 자신의 비겁함과 어리석움을 인정하고 나자 비로소 몽상가들이 가진 긍정적인 기능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환상이 한 개인의 내면에서 위무의 기능을 하듯 몽상가는 인류의 소금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모가지를 내놓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남자나, 무엇인가를 찾아 능선을 훑은 사내처럼 몽상가들은 다른 이들이 텃밭을 가꿀때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정복하러 떠나고, 다른 이들이 울타리를 손볼 때 낯선 대륙을 찾아 떠났다. 바로 그들 중에서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사람, 북극을 탐험한 사람, 우주의 구조를 밝힌 사람이 나타났을 것이다. 이제는 정복할 대륙이나 처녀림이 없는 시대에도 여전히 몽상가들은 존재하며 그런 이들 중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의사, 국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는 할머니, 이 첨단 물질문명의 시대에도 여전히 시를 쓰는 시인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 그들 소수의 몽상가에 의해 인류에 전승되는 환상이 영원히 재창조되고 널리 유포되며 보편적으로 향유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남자의 예를 봐. 그는 요즘 중국을 통해 귀화하는 탈북자들의 효시이고, 구십 년대 들어 유행처럼 번진 국토 순례 도보 여행의 선구자이고, 바야흐로 삼색만을 넘어섰다는 독신 가구의 원조이고, 산속에 들어가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샐러리맨들의 꿈이잖아.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듯한 느낌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의 삶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연희는 몽상가란 동시대인의 꿈을 하룻밤 정도 먼저 꾸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p.424~425

 

 

 비굴하거나 모멸스럽게가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살 수 있을까. 환상을 벗어내는 바로 그 지점에 고통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손바닥이 닳아 없어진다는 느낌이 들때까지 세상과 타협하면서, 시간의 마모를 모욕적으로 견디면서, 일상의 진흙탕에서 온몸으로 뒹구는 방법 외에는, 간단없이 노예성의 시기와 맞닥뜨려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환상을 벗어난 냉혹한 현실 원칙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연희가 다시 세중을 만난다면 그것은 다만 환상의 문제와 관계있을 것이다. 고된 일상에 대한 위무의 기능을 하고, 현실과 길항하는 기제로서 생의 에너지원이 되고, 창조력의 근간이 되는 촉매로서의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444

 

 

                                           -김형경 장편소설, <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에서.

 

 

 바람과 참나무와 박새와 청설모와 남자와 여자와 사내와 연희와 세중의 말을 빌어, 눈쌓인 겨울 그 산속에서 있었던 '환상'에 대한 말을 옮겨 놓는다. 나의 겨울도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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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 - 개정판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마음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고 세계일주의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절멸의 고통을 통해 의식을 확장시키고, 삶의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게 하는 生의`환상`에 대한 이야기. 눈쌓인 겨울을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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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빛 1

 

            마종기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        

               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

               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고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혔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

               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

               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 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

               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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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4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5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5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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