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 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 김태정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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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한 번쯤


          하루 한 번쯤
          처음 영화관에 가본 것처럼 어두워져라.
          곯아버린 연필심처럼 하루 한 번쯤 가벼워라.
          하루 한 번쯤, 보냈다는데 오지 않은
          그 사람의 편지처럼 울어라.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밖에는
          없을 것처럼 좋아해라.


          - 이병률의《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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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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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거나 보여지지 않는 것들의, 얇은 막마저 찢어져 나가는 `가나는 노래다`. 삶의 찰나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때,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 `떠떠떠, 떠`는 마치 석류의 붉은 속 같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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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모닥불 




      도서관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게 여전히 특별한 장소로 남아 있다. 
      그곳에 가면 늘 나를 위한 모닥불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때는 그것이 아담하고 친밀한 모닥불이고,
      어떤 때는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하게 넘실대는
      화톳불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모닥불 앞에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왔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잡문집》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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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인가, 중간고사가 끝나면 학교 뒤 밭길을 걸어 걸어가 얕은 언덕을 넘어 친구의 집으로 가곤 했다. 금호동 산꼭대기 낮은 집들이 오손도손 앉아 있던, 담요나 이불들이 볕 좋은 날 널려있던 그 동네가 왠지 참 이유없이 좋았다. 우리 집이 있던 을지로 6가와는 달랐던 정서가 있어서였을까.

 친구네 집으로 가면 우리는 그녀의 대학생 언니와 오빠들의 방에 들어가 턴테이블에 패티김의 LP판이나 돈 맥클린의 '빈센트',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잉'들을 들었고 때론 장독대의 포도주를 국자로 떠가지고 와 마시고 그 방의 책들을 꺼내 읽으며 둘 만의 재미있고 오붓한 시간을 즐겼었다. 그러던 어느날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을 한 권 꺼내 읽었는데, 무엇인지 몰라도 빛처럼 그 시들이 내 마음으로 들어 왔다. 시인 고은의 詩集. 친구에게 부탁해 그 시집을 빌려온 그 날부터 나의 첫 시인은 高銀이 되었다. 본명 고은태(高銀泰), 법명 일초(一超) 환속시인. 불분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아이에게 그의 시들은 하나의 출구였을까, 하나의 도피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우주(宇宙)였을까. 그 이후 내 노트에는 그 황홀하고도 탐미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시들로 가득하였다. ' 폐결핵' ' 천은사운(泉隱寺韻)' ' 해연풍(海軟風)' ''내 아내의 농업(農業)' '애마(愛馬) 한쓰와 함께' '저문 별도원(別刀原)에서' '저녁 숲길에서' '예감(豫感)'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삶' '봄밤의 말씀' 等等.  그리고 또 한 쪽에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敵)'이 자리잡고.

 우리는 그때부터 고은이란 시인의 추종자가 되어 장편소설 '어린 나그네'를 시작으로 산문집 '환멸을 위하여'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등을 종로서적으로 나가 사 모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때인가는 역시 시험이 끝나면 588번 버스를 타고 시인이 살던 화곡동의 집을 찾아가 목련꽃이 만발하던 시인의 담장 밖을 맴돌다 가쁜 숨을 내쉬며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대학생이 되어선 그 친구가 유학을 떠나 우리의 시인원정기는 끝났다. 그리고 1991년 장편소설 '화엄경'과  세월이 또 지나 시집 '어느 바람'을 지나  2001년 '순간의 꽃'과  '만인보'가 아직  내 책장에 꽂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젠, '순간의 꽃' 속에 들어 있는 '그 꽃' 을 끄덕이는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니 시인 고은선생님은 어린 나에게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각인시켜 준 분이었고,  때묻고 어리숙한 아직도 사는 일의 정답을 잘 모르는 한 사람의 기나긴 시간을 함께 한 시인이었다.

 이제 고은 시인은 '마치 잔칫날처럼' 내 곁에 다시 오신다. 잔칫날이란 모두가 어우러져 흥겹게 삶을 누리는 날이 아닌가. 우리에게 산맥이 되고 젖줄이 되신 시인께 아련한 날의 기억을 더듬어 감사드린다. '밤은 죽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새 세상이 되가는구나.' (詩, '패러수트' 에서)

 

 

 

 

 

          과육(果肉)

 

 

 

         1

 

         마침내 빈 말수레들이 돌아간다

         빈 수레라 해도

         거기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실려 있다

         이상한 노릇이다 과일이 벌써 익었다

         그 캄캄한 살이 싱싱하게 아프리라

         저 남쪽에서 소묘(素描)한 반원(半圓)이 겹겹이 사라진다

         내 둘레에서 방금 사용한 단어(單語)들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손을 놓은 처녀의 은(銀)방울도 떨어진다

         그녀의 입술은 또다시 위아래가 해후(邂逅)처럼 닫히리라

 

 

          2

 

         벗이 왔다 둘이 올 것을 하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무덤을 여기까지 떠올 까닭은 없다

         여기는 벗 하나로도 충분하다

         과일이 절로 떨어진다

         그것이 감인지 사과인지 모른다

         그렇다 마지막에 추상(抽象) 감탄사(感歎詞)로 길이 끝

        난다

         벗이여 더 고백(告白)하지 말아라

         너무 많은 진실은 허황하구나

         저녁 햇빛에 고백이 모여 고백을 태운다

         이제부터 나는 벗에게 과수원으로 인도한다

         가을이 떠나간다

         과일로 꽉 찬 과수원은 빈 과수원의 과거이다

         과일 속의 살의 무지(無知)에 다다르고 싶다

         그 삶의 암흑! 충실! 그리고 그 살 속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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