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 '피에타'를 보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아멘'을 빼고 다 보았지만 이상하게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인지 감정이 허약해졌는지 왠지 이번 영화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미리 내용을 다 알고 그 어둡고 잔인하고 무거운 영화 속으로 걸어들어 갈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그런데 친구가 예매를 해버려 결국 보았다.
시작부터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나왔지만 이미 상상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인지 담담하게 몰두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사람이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모든 것이 결여(缺如)된 이강도라는 이름의 악마같은 사채업자 하수인이, 채무자들에게 돈을 받기 위해 상해를 폭력으로 협박하고 강요해 장애인이 되게 해 보험금을 타내거나, 궁지에 몰아 자살로 몰고 가는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들로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이강도 앞에 "널 버려서 미안해. 나를 용서해 줘"하며 엄마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강도는 비웃으며 네가 내 엄마가 맞냐고 믿지도 않았지만 차츰 자꾸 자신의 뒤를 쫓아 다니는 엄마라고 믿게 되버린 여자에게 마음을 주게 되고. 그리고 이 영화의 다음 과정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비통한 결말을 맞는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꺼졌지만, 지금도 마음이 뻑뻑하고 얼얼하다.
뭐라고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지는 절대적인 가치와 그 돈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비참한 삶의 현실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작 내 마음이 어지러운 이유는 바로 그 이강도라는 남자와 그 엄마의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며 결여(缺如)와 결핍(缺乏)이 떠올랐다. 특히 사람으로서의 삶에 대해.
결여(缺如)란,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빠져서 없거나 모자람이고 결핍(缺乏)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일 것이다.
이 영화의 악마 이강도에게는 처음부터 사람답게 살아가야 할 모든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극히 당연한 삶을,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엄마라는 사람과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비로서 타인의 비통함을 자신이 당하면서 이해하게 된다.
엄마의 복수와 자신의 상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라도 붙잡으려 비통해하며 마지막으로 타인에 대한 죄책감과 용서를 구하며 죽는 이강도의 모습에 아직도 가슴이 쓰라리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늘 삶의 절망을 또렷이 직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예술이구나, 하는 느낌도 들고 철학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나 비참한 결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구원'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으로 애써 인간의 삶에 대한 '희망'을 만난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뭔가 느낌을 말하려 하면 울컥거린다고, 엄마의 마음보다 강도때문에 자꾸 눈물이 난다고.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다고 하고. 나는 이런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어 감사했다.
'크나큰 사랑으로 사랑하고, 크나큰 경멸로 사랑하라'한 니체의 말이 떠오르는 저녁이다.
힘들고 아픈 영화이지만 김기덕 감독의 소망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다시금 삶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기를 나역시 바란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피에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