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우를 먹는 저녁
둥글게 휘어지는 해안도로를 오래 달려
포트사이드에 닿았다
환전상과 털가죽과 고가구들이 알록달록 충돌하는
대륙 북단의 항구도시 포트사이드
늦저녁을 먹으러 들어갔던 노천 식당
생나무 냄새를 뿜는 대팻밥이 온 바닥에 깔리고
뜨거운 돌 위에 새우들이 둥글게 몸 굽히며 구어지고 있
었다
콧수염 아랍 남자와 저녁을 먹고 있는
딱 우리 얼굴의 앳된 여자, 교민대회 때는 보지 못한
북쪽 미인계 스파이일까
무슨 미션을 수행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콧수염 남자와 어떤 관계일까 접선중일까
귀기울여 들어봐도 통 말이 없고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것들까지도 잠잠히
지중해의 분홍 새우를 우물거리며
낯선 여자만 흐느끼는, 엿듣는
기이하고 조용한 저녁
구불구불 대패밥 위로 놓인 발들 어색한
먼 바닷가 외딴 곳의 외인들
서로 몸 굽히며 기울이는 낯선 저녁이었다 (P.18 )
당신은 꽝입니다
그 여자 태어났을 때
온 식구 허탈해서 누워버렸죠
꽝 뽑았다고, 딸이었다고
빈 동그라미 안에서
꽝 아기 쌔근쌔근 자고 있었죠
다섯 살 무렵부터
온몸으로 태가 흐르더라는
아주 일품이라는 그렇고 그런 얘기들
아홉 살 때 얻어 읽은 폭풍의 언덕
귓가에 먹먹한 그 폭풍에 사로잡혀
속편을 쓰고 또 쓰고
끝내, 그 여자의 연애는 꽝이었다죠
전생을 보고
머리 위의 후광도 볼 수 있다던
웬 도인이 말했었대요
당신의 오라는 흰빛이군요
꽝은 당연히 흰빛
지금 그 여자 머리 위를 한번 보세요
눈부신 꽝입니다 (P.42 )
핸드메이드
어느 끝단 매듭이 덜 여물게 맺어졌는지
어느 솔기 가위집이 조금 더 넣어졌는지
다 알고 있지
알아서 탈이라고, 열 번 스무 번을 빨도록
늘 맘에 걸리는 그곳
그런대로 잘 되었다, 보기 좋다며
툭툭 털어 손을 떼고 떠나보내도
나는 알고 있는 걸. 2밀리쯤 더 가위집 내어
올이 풀려나갈지도 모르는 바로 그 솔기.
허술한 매듭의 속 내막에 대해서
신의 작품은 천의무봉이라는데
우리를 빚어 하나하나
세상으로 보내던 그때에도
그런대로 되었다, 보기에 좋다, 아쉬운
속내 감춰 좋은 얼굴로
등 투덕여 내보낸 것 아닐까
조놈은 조기가 약한데
요놈은 요기가 약한데
요놈은 날줄 올들이 조금씩, 조금씩
미어지고 있을 텐데
벌어지고 있을 텐데
지금도 마음 쓰며 바라보는 그 눈이
어디 혹시 있을까 (P.64 )
-김연숙 詩集, <눈부신 꽝>-에서
오늘 받은 꽃님들은,
스토크, 아네모네 봉오리, 라넌큘러스 퐁퐁, 은엽아카시아.
아네모네 봉오리는, 지난 번 꽃양귀비처럼 봉오리가 서서히
벌어지며 예쁜 자태를 보여주기를 설레이며 기다리는데
꽃봉오리가 서서히 벌어지기까지의 그 시간은, 마치 공기요정
같기도 하고, 침묵 속의 음악 같기도 하고, 또한 우리 일상의 시간
같기도 하다.
잎색같은 라넌큘러스 퐁퐁과 연핑크의 스토크, 비로드 같은 아네모네 봉오리들이, 은엽아카시아의 달콤한 마치 애플민트 향 같기도 한 향기에 둘러싸여 싱그럽고 고요하고 향기로운 저녁.
벗님이 찍으신 유럽서점 사진과 <인어의 노래> 이야기들과, 63년 동안 전 세계를 다니며 온 몸으로 쓴 시인의 詩들과 '족발'과 '처음처럼'을 먹는, 그런.. 흐려도 좋은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