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소리로 울어라
사과는 중력에게 할 말을 잊었다
네가 놀라
벌린 입술
아이들은 찜통 속의 흰 빨래처럼
시끄럽게 구는 법을 잊었다
뒤로 걷는 노인들이
산책로에 접착면을 흘리고 지나갔다
기다란 빛이 쩍 달라붙었다
표백된 아이들
알고 싶은 것보다
궁금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았는데
아이들이 쩍 달라붙었다
야외가 준비한 조심성은 쓸모가 없어졌다
너는 쩍 벌어졌다
사과는 중력에게 할 말을 다하고
빛을 먹으면 기쁨도 뚱뚱해지는 것 같지 않아?
대낮의 복판으로 떨어졌다
숨죽여 웃어라
크게 울어라
적도에는 아직도
울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P.88 )
-유계영 詩集, <온갖 것들의 낮>-에서
기척
가을 숲에서 툭,
두리번거리던 알밤이 떨어진다
청설모 그림자가 먼저 다가선다
내 시선에도 그림자가 생긴다
서로 닮아가는 무게이니
고요의 눈썹을 달고 있다
참나무잎이 낙하하여
풀숲에 떨어진다는 것이
내 안에 눕늗다
숨소리가 마중나간다
그 짝짓기에는 높낮이도 없이
서로의
손가락이 가지런히 닿아서 젖는다 (P.83 )
- 송재학 詩集, <검은색>-에서
끓는 사과
이 가을 가장 뜨거운 것은 사과 씨앗이다
어제의 사과에서 몸을 받아 오늘의 사과를 만들어낸 둥근
목숨 스스로 곡진하여
그 열기 어찌할 수 없어 껍질째 빨갛게 끓는다
밀양 얼음골 십만여 평 사과바다가 씨앗 하나로 창창히
깊어지고
씨앗 하나로 뜨거워져 넘친다. (P.17 )
-정일근 詩集, <소금 성자>-에서
사과나무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다. 몸속에 사과가 쌓인다. 사과가
나를 가득 차지하면 비로소 사과는 숨진다. 사과가 숨질 때
나는 사과나무를 본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때론 다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먹은 사과들이 내
게서 탈주하는 것이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
고 향기 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
무는 아름답다. (P.17 )
-이수명 詩集,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에서
사과꽃
비 맞는 꽃잎들 바라보면
맨몸으로 비를 견디며 알 품고 있는
어미 새 같다
안간힘도
고달픈 집념도 아닌 것으로
그저 살아서 거두어야 할 안팎이라는 듯
아득하게 빗물에 머리를 묻고
부리를 쉬는
흰 새
저 몸이 다 아파서 죽고 나야
무덤처럼 둥근 열매가
허공에 집을 얻는다. (P.11 )
-류근 詩集, <어떻게든 이별>-에서
너무 일찍 온 저녁
누군가 이 시간에 자리를 내주고 떠났다
아무도 세속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시간
태양은 한 알의 사과가 된다
사과와 사과
뉘우치지 못해 어떤 이는 깊게 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물을 길어 창문을 넘
어오기 전
누군가는 태양을 과도로 깍았다
태양 한 조각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 방안에 같이 사는 거미에게
태양 한 조각 거미줄에 걸어주며
점점 컴컴해지는 내장을 태양 조각으로 밝히고
있다
내장의 구멍은 후세로 난 길
안이 밝아지고 바깥이 어두워질 때
태양을 대신할 천체의 둥근 공들은
태양을 한 점씩 먹고 거미줄에 걸려 환하다
그 저녁, 너무 빨리 와서
나를 집어먹은 짐승은 나다.
태양의 마지막 조각을 구멍 뚫린 하늘에 올렸네
젖은 내장도 어둠 속에 걸어두었네
그렇게 한 저녁은 모래뻘 바지락처럼 오고
바지락 껍데기를 뭉개고 가는
트럭의 둥근 바퀴밑 어둠 속
쓰게 쓰게 그렇게
조개들은 먼 무덤을 부르다가 잠든다 (P.62 )
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P.11 )
-허수경 詩集,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중
그대가 올 한 해, 땀 흘려 길러 보내 주신 사과의 즙으로 어제도 오늘도 2:1 비율의 '사과소주'를 만들어 마시고 있습니다.
11월 된서리 내리기 전, 7만 여개의 사과를 따셔야 한다는 그대를 위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