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기억의 반을 세월에게 떼 준 엄마가 하루 종일
공중에게, 공중으로, 전화벨을 쏴 댔다 소방 호스처럼
폭포를 이룬 소리들이 공중으로 가서 부서졌다
휘몰아치는 새 떼들
머리 위에 우두커니 떠 있는 공중, 나는
공중에 머리를 박고 공중에 대해 상상하다가 공중을 증
오하다가
털신처럼 깊숙히 발 밀어 넣고 공중에서,
공중을, 그리워하다가 들이마시다가
깊은 밤 네 창으로 가기 위해
내 방의 불을 켠다
네 불빛과 내 불빛이 만나 공중 어디로 가서
조개처럼 작은 집이라도 짓기나 한다면
이것은 연애가 아니라 공중을 일으켜 세우는 하나의
방식
모든 공중에, 모든 공중을, 의심하거나 편애하거나
생략하기도 하면서
휘몰아치는 저 새 떼들 (P.11 )
구부린 책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던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바스라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
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 책을 심자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 줄 때까지 (P.14 )
만년필
먼 바다에서 보낸 당신의 엽서를 받았다 그곳의 소인이
찍힌 엽서가 당도하고 나서 만년필은 잉크를 쏟아 내기 시
작했다
어머, 하고 놀라는 내 입술에서 그것은 뚝뚝 떨어져 네
리고
물고기 아가미에서 뻥긋뻥긋 그것은 쏟아져 나왔다
창밖에는 고개를 숙이거나 자괴감에 빠진 달빛들이 수
북했다
사실, 몇몇 사람들과 만년필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이 있
다 이미 지나간 시대의 불편한 유물이라는 의견과 죽음의
한 속설을 부록으로 달고 있다는 것 따위, 그러나 나는 만
년필을 통해서 당신에게 건너가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핥는 태양의 혀에서 그것은 녹아내리고
당신이 없었던 시간의 길가에서 그것은 흘러내렸다
검은 바다 겹겹
제 삶을 변명하고 싶은 문장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P.44 )
아침의 한 잎사귀
꽃을 줄 걸 그랬네, 별을 줄 걸 그랬네,
손가락 반지 바닷가 사진기 비행기표, 너에게 못 준 게
너무 많은 뜨거운 날도 가고
낙타 사막 비단길 안나푸르나 미니스커트 그리고 당신,
가지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겨울도 지나가네
현(鉉)을 줄 걸 그랬네, 바이올린을 줄 걸 그랬네,
순록의 뿔 구름의 둥근 허리 설산의 한나절, 그리고 고
봉밥
아랫목 여객선 크레파스 세모난 창, 너에게 못 준 게 너
무 많은 아침의 호숫가에서
말들이 튀밥처럼 싹을 틔울 때, 나는
시리고 아픈 세목들을 받아서 적는다네 손가락이 아프
도록 쓰고 또 지운다네
너에게 주고 싶은 한 우주, 이 싱싱한 아침의 한 잎사귀 (P.77 )
-송종규 詩集,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