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등

 

 

 

 

 

            부석사 언덕배기 사과나무 가지가 산길로 휘어진다 열매의

            그늘 아래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 땅에도 어깨가 있는 듯 알갱

            이들 그늘 쪽으로 몸이 기운다 은빛 머리카락 파헤치며 졸

            음 위로 행인들 지나가고 억겹의 생이 무릎에서 감겼다가 풀

            리기를 반복한다

 

 

            노인은 몽유에 의지한 채 실눈을 뜨고 방전되어 간다 목덜

            미가 사과처럼 붉어지는 노인 태양광을 정수리에 달고 열매들

            을 충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노인은 불을 끌어안듯 가을의 심

            장을 가만히 무릎 사이에 모은다

 

            사과궤짝마다 붉은 등이 가득 찬다 작은 등 큰 등을 골라

            내는 노인의 손등이 환하게 빛난다 여기저기 설법의 자리로 흩

            어지는 알갱이들 소우주의 어둠에 사과등을 내건다 천 년의

            빛에서 향긋한 냄새가 잡힌다  (P.43 )

 

 

 

 

 

                    -한성희 詩集, <푸른숲우체국장>-에서

 

 

 

 

 

 

 

 

 

 

 

 

 

현대시학시인선 16권. 2009년 「시평」으로 등단한 한성희 시인의 첫시집. 흘림체로 쓴 풍경의 보고서다. 수많은 꽃과 나무로 전개된 그의 숲 앞에 서면, '싱싱한 잎맥'으로 채색한 '푸른 그늘'이 은은한 메아리처럼 생(生)의 혈맥들을 들춰 보인다.

직립의 생애를 나이테로 새길 수밖에 없는 나무들의 수직은 '유전하는 척추'를 가졌다. 제 터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생은 비루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물려받았고 또 그가 물려받은 삶, 그러므로 시인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직립의 나무 밑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가 물어 나르는 풍경에는 이처럼 전생을 옮기던 부리의 기억이 스며 있다.

시인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무엇으로 변신하는 자연, 윤회의 운명을 지닌다. 그 끝이 비록 소멸이라 하더라도 "비는 빗방울이기 전에 구름이었으며 / 구름이기 전에 강이었고 / 강이기 전에 길"이었던 까닭에, 숲을 일으켜 세우는 궁극의 사념은 우리의 의지에도 이미 뿌리처럼 깊숙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산벚나무의 그림자를 모아 편지를 썼다 흘림체의 그늘에 말린 첫인사는 푸른색이었다 흔들리는 숲의 잎맥으로 바람의 안부를 물었다 봄바람은 꽃을 들고 학생부군청주한씨영준지묘를 기웃거리며 서찰의 서두를 생각 중이었다 문맥의 파동에 떠밀려 꽃잎들이 순하게 하늘로 풀렸다

평생 나무 그림자로 가계를 키워낸 아버지 스물세 살 맨주먹을 나무뿌리 밑에 숨기고 산맥을 오르내렸다 잎사귀를 뜯어내며 나뭇가지를 분지르며 바람에 떠밀려 가는 민둥산을 따라다녔다 삼림청 산림계 말단직원으로 박봉의 자리마다 푸른 그늘이 채워졌다 그때마다 나무들은 허공에다 아버지의 편지를 썼다

넓은 잎사귀의 사연들이 도봉산 발치 아래로 모여들었다 고향집 목련나무가 봄의 겉봉을 뜯기 시작하면 새들의 노랫소리 낮아졌다 성황당 기억 너머 무위의 땅 그린벨트에 낮게 엎드린 당신의 안부를 만났다 골필로 써내려간 문장들이 흘림체로 날렸다

봄날 우편함을 열면 숲에서 보낸 싱싱한 잎맥의 글씨체가 가득했다 푸른숲 공무원으로 아버지는 죽어서도 푸른숲우체국장이 되었다 발신자 없이 배달되는 봄편지에서 꽃잎우표를 붙였다가 떼어낸 산벚나무가 올해는 꽃편지를 풍경 밖으로 서둘러 밀어내고 있었다
―「푸른숲우체국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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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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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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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4: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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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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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5-09-19 06:31   좋아요 0 | URL
부석사 가는 길에 사과나무 과수원이 즐비하던 모습 문득 떠오르네요!
봄에 사과나무 꽃이 핀 모습을 보았다면,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동요의 한 자락 였겠다 싶어 봄에 한 번 가보고 싶더라구요^^
저희 친정동네는 배밭이 많았거든요 봄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장관이었지요!

시는 가을의 모습을 노래하군요

appletreeje 2015-09-19 12:49   좋아요 1 | URL
저도 부석사는 가을에만 갔어서
하얀 사과나무 꽃이 피는 봄에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저 시를 읽는데, 부석사 아래 크고 작은 사과들을 쭉 늘어놓고 파는
정경이 떠올랐어요^^
아 봄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관이라니요!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셔서 부럽습니다~

사과 등불 사과 냄새 가득한 가을입니다~~*^^*

2015-09-19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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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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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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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받기

 

               크메르(캄보디아)

 

 

 

 

          -그대가 나를 부르니, 나는 기꺼이 가리.

            -하지만, 그대는 나의 입맞춤에 뭘 주나요?

            -그대의 입맞춤에 내 입맞춤으로 보답하지요.

            -그럼, 내가 주는 마음에 그대는 뭘 주나요?

            -그 보답으로 내 마음을 주겠어요.

            -그럼, 내 사랑엔 그대는 뭘 주나요?

            -보답으로 그대에게 내 사랑 드리리. (P.67 )

 

 

 

 

               -<세계 민족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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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17 22:34   좋아요 1 | URL
마지막 사진에 ㅎㅎㅎㅎ아 소주가 땡기네요 ㅋ

appletreeje 2015-09-17 22:38   좋아요 1 | URL
그래서 소주 마셨어영~ㅋㅋㅋ

2015-09-17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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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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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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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0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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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9-18 04:19   좋아요 1 | URL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나온 시집일까요.
구월이 깊게 물드는 하루입니다.

appletreeje 2015-09-18 08:49   좋아요 1 | URL
이 시집은 실천문학사가 1981년 <팔레스티나 민족시집> <아프리카 민요시집> <폴란드 민족시집>을 펴낸 후, 이제 다시 [실천세계시선] 시리즈로 나온 첫 번째 시집이에요.^^

여행가, 작가, 언론인,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이 책의 엮은이 티보르 세켈리가 평생 세계의 오지를 누비면서 만난 민족구성원들이 하던 말을 채록해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에스페란토어로 쓰인 시집을, 이번에 장정렬 님이 번역해 나온 시집입니다~

다락방 2015-09-18 10:37   좋아요 1 | URL
아아 꽃 예쁘구나 생각하다가 저는 그만 마지막, 고기 사진에 무너집니다. 역시 저는 고기가... 소주도... 고기랑 소주는 진리 ♡

appletreeje 2015-09-18 11:14   좋아요 1 | URL
ㅎㅎ 꽃도 예쁘고 고기랑 소주도 진리옵지요~~
오늘 불금인데~ 저녁때 맛난 고기와 소주 드세요~!!!^^

2015-09-18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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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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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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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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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9-18 11:52   좋아요 1 | URL
캬~~꽃도 너무이쁘고 쌓인 책탑 실루엣에 엄마미소처럼 흐믓해지는 이기분은 뭘까요ㅋ 키우던 꽃에 진딧물이 생겨서 이후로 꽃을 키운적이 없는데 이런 이쁜꽃보면 다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예뻐요~ 그리구 보쌈! 정말 맛있어보여요 ㅋㅂㅋ,,

appletreeje 2015-09-18 13:05   좋아요 1 | URL
하이드님 꽃구독 하며~~매달 내내 예쁜 꽃 만나서 행복해욤~~
책탑 실루엣을 보면 엄마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알라디너님들의
공통된 미소~? ㅎㅎㅎ
해피북님께서는, 그린 베란다도 잘 가꾸시고 맛있는 요리도 잘 하시고~
글도 잘 쓰시고~~ 다시 이쁜 꽃 키워보세요~~*^^*
오늘 저녁은, 신랑님이랑 보쌈~?^^
저는 오늘 저녁은 돼지갈비로 정했습니다~ㅎㅎㅎ

2015-09-18 14: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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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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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적 외갓집 마당가에 피어 있던 다알리아를 오래 들여다보던 시간이 내게는 있다. 그 시간들이 여름이면 내 혈관 속을 쿵쾅거리며 뛰어노는 것이다.  (P.11 )

 

 

 

    할머니 어디 가요?

    -예배당 간다

 

    근데 왜 울면서 가요?

    -울려고 간다

 

    왜 예배당에 가서 울어요?

    -울 데가 없다

 

김환영의 동시 <울 곳>이다. 짧은 시 한 편으로 먹먹해진다.  (P.12 )

 

 

 

꽃이 입이 없어서 말 못하는 줄 아나? 꽃은 향기로 말하지.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건 뭐지? 그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는 뜻이지. 그런데 말을 들었는데도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뭐지? 그건 들키고 싶지 않아서야. 숨기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지.  (P.19

 

 

얘들아, 창가에 쌓이는 햇볕도 아깝다. 햇볕을 끌어 모아 어두운 그곳에 보내고 싶다. 얘들아, 어서 돌아와 이 못된 국가의 썪어빠지고 무능한  어른들을 꾸짖어라. 어서 일어서서 돌아와라.  (P.20 )

 

 

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밥상을 빼앗는 사람이 있다. 밥이 하늘이다. 밥을 퍼주는 사람은 하늘을 퍼주는 사람이지만 밥을 가로채는 사람은 하늘을 가로채는 사람이다.  (P.47 )

 

 

내다버려야 할 책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내가 아직 책을 다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 책읽기의 완성은 그 책을 버리는 것.  (P.55 )

 

 

나는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뭇잎의 나뭇잎 앞면보다는 뒷면의 흐릿한 그늘을 좋아하고 남들이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보다 나 혼자 가만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  (P.53 )

 

 

달력에 아무 표시도 없는 좋은 날이 내게도 있다. 오늘이 아무것도 없이 하얗게 비어 있는 날이다. 이런 날은 복 받은 날이다. 내 몸을 아무도 저리 가라 하지 않고 이리 오라 하지 않는 날이다. 마음아, 너도 징징거리지 말고 좀 쉬어라.  (P.62 )

 

 

예천을 다녀왔다. 회룡포 햇볕에 팔뚝을 잃었고, 우리밀칼국수를 먹었고, 흑응산을 걸었고, 구절초를 보았고, 따끈한 날달걀을 먹었고, 고구마를 캐보았다. 영주댐 건설로 망가지는 내성천을 보며 속으로 울었다. 고향은 왜 돌아온 탕자를 울게 만드는 곳인가. (P.116 )

 

 

분명히 어두운데 왜 어두운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과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124 )

 

 

어른이어서 미안하다. 책임지지 못해 미안하다. 어둡고 깊은 곳에 혼자 내버려둬서,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같이 살아 있지 못해서, 우리만 살아 있어서 미안하다.  (P.130 )

 

 

아이들아, 부끄러운 어른으로 그래도 말을 걸고 싶구나. 잠깐만 나와 볼래. 쉿,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몰래 가는 거야. 허락도 허가도 필요 없어, 망설일 필요도 없지. 우리 제주도로 가자. 내가 데려다 줄께.  (P.131 )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최승자의 이 귀절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대 초반이었다. 수십 차례 가을이 올 때마다 이 도발적인 언어가 고요하게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는, 개 같은 가을이다.  (P.146 )

 

 

아침 일찍 일어나 해장국 천천히 떠먹듯이 전동균의 새 시집 <우리처럼 낯선>을 읽었다. 시인의 목소리가 겸손해서 촉촉한 물기에 젖어 있는 것 같다. 나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P.151 )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경우,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연애라고 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P.159 )

 

 

백석 시를 읽다가 함박꽃 만났다. 지금쯤 어느 산기슭에서 한창 피겠다.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데 북한에서는 나무에서 피는 난 같다고 해서 목란꽃이라 한다. 이 꽃이 북한의 국화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함박꽃 한번 못 보고 6월이 가나.  (P.160 )

 

 

쓰르라미 소리가 내 귀를 썰고 있다.  (P.161 )

 

 

이 가을볕 몇 트럭 택배로 보낼 테니 창고 넉넉한 분들 연락주시기를.  (P.195 )

 

 

오늘 저녁 먹고 싶은 게 있다. 열무 생채에다 참비름 무침, 가지 무침 넣고 고추장과 청국장으로 싹싹 비벼서 입에 크게 떠 넣는 것. 고등어구이 한 마리 있으면 금상첨화.  (P.234 )

 

 

사람은 떠나고 짐승만 남았다. (P.244 )

 

 

 

-안도현 雜文, <잡문>-에서

 

 

 

 

 

 

 

  이런 날이 있다.

  아침엔 주말이니까, 너무 멋지지만... 쪽수는 318쪽 판형

  310*245mm 1115g의 후덜덜한 책을 오늘은 꼭 독파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로열보덴스텐 텀블로가 사은품으로 딸려

  도착한 <안도현의 잡문>을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 몇 장

  읽는 순간...갑자기 마음이 쿵 내려 앉으며 내내 읽어갔던.

  이 책은, 시인이 몇 년 전부터 그 편리하다는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컴퓨터를 통해 2012년 봄부터 시작한 트위터에다

  쓴 글들이다. 트위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수많은 일이 지나

  갔다고 나온다. 시인이 발 벗고 나서서 지지하던 대통령 후보는

  선거에서 패했고, 시인은 생전 처음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야 하 는 처지가 됐다고 했다.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시를 쓰지 않겠다고 작정했고, 그런 상황은 진행중이라 한다.

 가끔 앞날을 예측하는 한 후배는 이것을 접으라고 권하기도 했다지만, 140자 안쪽으로 글을

 써야 하는 트위터의 한계가 바로 트위터의 가능성이면서 자신에게 딱 맞는 형식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접지 않고 글을 쓴다 한다.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글 1만여 개중에 244꼭지를 고른게 이 책이다.

 안도현 시인이 어릴 적에 쓰지 못한 일기를 새롭게 쓰는 기분으로, 시를 쓰지 않고 지내는 떫은

 시간에 시를 쓰는 마음으로 쓴 글들을 추려 모은, 마치 하이쿠,같기도  한없이 짧고도 투명하

 고 얼얼하기도 하고, 가을볕과 바람에 날리는 가을잠자리 같은 책을 읽으며 문득, '내 두개골

 사이로 차갑고 높고 빛나는 가을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가을 어떤 날이다.

 술 한 잔 하고 싶은...딱 그런 맘인데 딱히 마실 술도 없고 지금은 함께 마실 사람들도 없으므로

 저녁때나, 바람을 찬찬히 읽듯 그렇게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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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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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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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2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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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9-12 20:47   좋아요 1 | URL
우연이 끌림으로 이어지는 책이 있죠. 그런 책 안에서 울림이 일어나는 문구를 발견하면, 뭐랄까, 어릴 적 친구를 만난 듯 든든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는답니다.
트위터나 하이쿠의 매력은 정해진 틀이라 생각합니다. 140자나 5.7.5자에 맞춰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볼 때, 저는 간혹 컬러링북을 떠올려요. 그 자리에 같은 의미를 가진 가장 적절한 글자를 배치하는 게 은근히 도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거든요ㅎㅎ
가을비라 해도 어색하지 않은 비가 조금씩 내리네요. 지금쯤이면 빗소리를 찬찬히 읽으며 마시고 계실까요?^^

appletreeje 2015-09-12 22:03   좋아요 1 | URL
예~~이 책도 제게 그런 우연한 끌림으로 이끈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비종님의 말씀대로~ 그런 울림이 있는 책은 든든하고 편안한 기쁨을
선물하고요~^^
제게도 제가 읽은 100자평,은 그런 의미를 줍니다. ㅎㅎㅎ
이곳은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이 책에 대해 함께 나누며 즐겁고도 심란하게
잘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좋은 시. 좋은 글을 주시는 나비종님!!!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yureka01 2015-09-12 21:27   좋아요 1 | URL
동시대에 살면서 최고의 시인반열에 드시는 분..^^.

appletreeje 2015-09-12 23:02   좋아요 2 | URL
시는, 말로 지은 집이겠지요.^^
그러니 저마다의 삶과 사유로, 내게 맞는 고유하고도 아름다운 집을 짓는
시인들에게, 최고의 시인반열이란 어떤 잣대로 정해진 수식일 뿐,
무의미한 일이겠지요. ㅎㅎ
시인은, 자신과 세상을 함께 마음의 거울로 노래하는 사람들~*^^*

유레카님~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2015-09-13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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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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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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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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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9-13 12:14   좋아요 1 | URL
토요일을 지나 일요일이 된 아침에
시 한 줄로
따사로운 노래가 되셔요

appletreeje 2015-09-13 22:42   좋아요 1 | URL
예~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따사로운 노래같은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숲노래님께서도~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2015-09-13 1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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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 2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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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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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3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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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2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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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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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0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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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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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8: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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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2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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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마르트 이젤

 

 

 

 

 

 

                   물감은 소리를 머금고 감춘다

                   빛을 통과시키고 빛나듯

 

 

                   붓을 드는 순간 꽃은 떤다

                   물감에 배인 꽃의 입술

                   벗은 어깨가 흘러가는 곳으로

                   한사코 따라나서보지만

 

 

                   따라갈 수 없는 너머를 가리고 있는 붓은

                   문이거나 장막이다

 

 

                   성(城)의 운명은 무너지는 것

                   감열지처럼 지나간 흑백으로 남은

                   꽃이 제몸으로 예언한

                   물감에 점령되는 날이 온다

 

 

                   성벽을 성벽으로 감춘 그림

                   손수건처럼 잡아당기자

                   에펠탑을 이젤로 쓴

                   몽마르트 언덕이 어깨를 드러낸다

                   빛이 굳어 이젤이 된

 

 

                   사크레 쾨르 성당이 마리아처럼 서 있다  (P.88 )

 

 

 

 

 

 

                      발

 

 

 

 

 

                    발 달린 벌을 본 적 있는가

                    벌에게는 날개가 발이다

                    우리와 다른 길을 걸어

                    꽃에게 가고 있다

                    뱀은 몸이 날개고

                    식물은 씨앗이 발이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걸을 뿐

                    지상을 여행하는 걸음걸이는 같다

                    걸어다니든 기어다니든

                    생의 몸짓은 질기다

                    먼저 갈 수도 뒤처질 수도 없는

                    한 걸음 씩만 내딛는 길에서

                    발이 아니면 조금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을 길이게 하는 발

                    새는 허공을 밟고

                    나는 땅을 밟는다는 것뿐

                    질기게 걸어야 하는 것도 같다

                    질기게 울어야 하는 꽃도  (P.60 )

 

 

 

                          -권기만 詩集, <발 달린 벌>-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

 

 

 

 

 

 

                         어둠이 깃든다

                         수만의 푸른 고기 떼 두근대는 나무에, 나무가 열

                         어놓은 낯선 꽃들에, 꽃 속 수런대는 비밀스런 우물에

                         하루가 저문다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것들의 길들이 저문다.

                         다만 사랑의 기억만이 잉태를 꿈꾸는 시간.

                         이미 누기진 숲 저 안에선 어둠이 알을 낳아 굴리

                         는 소리.

                         바람이 부화를 돕자 달빛도 흔들리며 무늬져

                         숲 전체가 푸른 산고로 흔들린다.

 

 

                         불모의 숲 밖은 갖은 불빛들로 밝게 저문다.

                         나는 숲으로 드는 바람길을 타 넘지 못하고, 도시

                         에서 나와 저무는 길의 이정표에 기대어서 밤을 맞

                         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지로 뒤척이는 밤.

                         숲 안의 어둠이 부화한 새들

                         날아올라

                         달 켜든 하늘 덮는 게 보인다.  (P.48 )

 

 

 

 

 

 

 

                            연애 간(間)

 

 

 

 

 

                           점과 점이

                           마음

                           내어

                           선을 이루지만,

 

 

                           참새라도 앉으면

                           여리게 떨

                           리는,

                           저 전깃줄. (P.144 )

 

 

 

 

                            -이하석 詩集, <연애 間>-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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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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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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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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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8: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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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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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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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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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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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1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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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9-12 08:46   좋아요 0 | URL
와- 엄청 분위기 있어요. 스리토메인은 저렇게도 참 예쁘군요.

appletreeje 2015-09-12 10:31   좋아요 0 | URL
예~스리토메인 너무 예쁘구요~ 멋지고 우아한 리산셔스 암바와
다알리아, 스카비오사들의 클래식한 컬러에 살짝 포인트를 준 빨강 천일홍으로
이 번주 꽃은 참 회화적인 부케였어요~~
낮에는 꽃으로 밤에는 향초로~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늘 고맙습니다!

2015-09-14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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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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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작지 않은 마을 하나를 상대로 사기 치고 도망갔다는 수프 남자 이야기를. 하지만 그 떠돌이가 실은 오래전 그 마을에서 이 집 저 집 오래도록 돌아가며 노역을 해 주고 임금을 받지 못한 자였으며

변복하고 나타나 보복을 한 거라는 속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 그럼에도 그를 사기꾼으로 알던 너나 네 가족 모두, 따지고 보면 착각에 빠진 황제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소녀는 몰랐던, 그보다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진실을 이제와서 알려 주는 남자가 하나도 고맙지 않을뿐더러, 어찌어찌 살아남은 마을 이웃도 아닌 외부인인 듯한 남자가 왜 떠나지 않고 자기 옆을 맴도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설마 당신이 수프 남자냐고 묻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대로 우리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누구네 집에든 으례 생기는 억울한 일이 이번에는 우리 집에 왔을 뿐이라고 체념하면 되나요? 하지만 온

 

 

마을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경우가 또 좀 다르잖아요. 우리는 시신을 묻은 게 죄라고 치고 마을 사람들은, 소 말 닭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남자는 쇠스랑을 땅에 집고 몸을 일으킨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서로 목적은 다를테지만."

 그가 돌아서서 소녀에게 내미는 한 손은 거칠고 못이 박인 데다 피 냄새가 난다. 소녀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마도 너와 네 가족에겐 잘못이 없을 거다. 잘못이라면 하나, 뽑은 순무를 굳이 갖다 바치려던 것이지. 바란 것 달리 없다 하지만 실은 세금의 일부라도 어떻게 해 볼 요량으로 말이야. 어째서 우리는 좋은 것, 큰 것,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을 마땅히 황제에게 갖다 바치는 법이라고 인식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없어? 애당초 황제가 저 반도까지 뻗어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전쟁 따위 없었다면 다른 세상에서 그런 귀신들이 몰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근본적인 문제를 찾기보단 어차피 내야 할 세금 이걸로라도 때우자 싶었던 생각이 안일했을 뿐이고, 그 안일한 의도와 그걸 수용하는 자의 아량에 차이가 있었던 거겠지."

 그저 기진한 상대를 일으켜 주려는 뜻 외에 다른 의도는

 

 

없을테지만, 소녀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공을 튕겨보내듯 바라보기만 한다. 상실감으로 온몸에 금이 간 이에게 어디서부터 올이 풀렸는지를 충고하는 일은 부질없다.

 "그러고 앉아 있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시간은 꺾이지도 역류하지도 않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도모해야 할 것은 등뒤가 아닌 눈앞에 있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곳에는 각자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무언가란 대개 땅이거나 그 땅에서 난 작물, 그 땅에서 기르던 동물들, 또는 그 땅에 붙어살던 가족이라 한다.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일구어 씨를 뿌리고 거두면서도 남의 것임이 당연했던 땅과 거기 속한 모든 것을, 각자 다른 이유로 잃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보습을 갈고 있다 한다. 그들은 머지않아 맥박의 움직임에 귀 기울일 테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일어날 것이다. 이 마을에서 무사히 살아 나간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주로 어린이와 젊은이들인데- 세금 도둑들의 삶터에도 똑같이 불을 놓겠다는 결심으로 혼절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라 하며, 그는 몇몇 일행과 함께 마을에 아직 쓸 만한 식량이나 물건이 남은 게 있는지를 찾으러 왔다가 예상보다 심각한 마을의 상태를 보고 원래 목적을 접어 둔 채 곳곳에 굴러다

 

 

니던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한다.

 소녀는 미소한 간지러움에서 시작하여 금방이라도 살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은 근육의 움직임을 느낀다. 분노인지 희망인지 모를 그것은, 동생을 버린 것을 자각한 뒤 처음으로 꿈틀거리는 감각이다. 소녀는 오래지 않아 내부에서 외부로 솟아오르는 파열음을 듣게 될 것이다. 비로소 소녀는 눈앞의 남자와 그의 손이 실제임을 믿는다. 팔을 뻗어 그것을 잡자 거칠고 난폭한 현실이 손안에 뿌듯하게 만져진다. 소녀는 그리로 다가간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일행인 듯한 여러 사람들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 가야 할 곳, 보습을 대기 위한 준비를 할 곳으로 빠르게 걷는 소녀의 찢어진 치맛자락 뒤에 한 조각의 뼈가 붙어 떨어질 듯 말 듯 달랑거리지만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P.120~123 ) /  [카이사르의 순무].

 

 

 

 

             -구병모 소설, <빨간구두당>-에서

 

 

 

       쫀득한 서사와 조용하지만 깊은 사유, 그리고 세련된 판타지소설을 읽는...지금 이 시  

       간들이 꽉차게 좋은, 9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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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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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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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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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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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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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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