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계를 상상해 보자. 내가 책장을 넘기지 않고 대신 넘겨주는 기계. 이 기계를 쓰면 책장을 넘기는 수고를 덜 수 있지만, 내가 책을 빨리 읽고 싶다고 해도 결코 마음대로 책장을 넘길 수 없다. 내가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며 읽을 수 있도록 기계가 책장을 넘겨준다면, 우리는 타인의 글을 더 정성 들여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미국 드라마 <화이트 칼라>를 보다가 실제로 이런 기계가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수백 년전의 고서를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 특수 유리창에 책을 펼친 채 넣어두고 무려 두 시간마다 딱 한 장만 읽을 수 있도록 책장이 천천히 넘어가게 만든 기계장치였다. 입맛 따라 골라 읽을 수 없으며, 무조건 우직하게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꼼꼼하게 다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속도를 정할 수 없고 아주 천천히 그 책이 보여주는대로 읽어야 하는 철저히 타율적인 독서. 순간 나는 그 독서 기계가 살짝 탐이 났다. 가끔 나는 책을 너무 빨리 읽게 될까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인터넷 정보들을 마우스의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 빨리빨리 넘겨보는 나 자신이 무서울 때도 있다. 소셜미디어가 급증하면서 누구나 1인 미디어 하나쯤은 갖고 있지만, 글을 많이 쓰는 대신에 한 편 한 편의 글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려터진 독서 기계를 바라보며 점점 속독과 발췌독에 길들어가는 나의 메뚜기식 독서에 제동을 걸고 싶어졌다. 전부 이해했다 믿고, 다 안다고 믿으며 빨리빨리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듯 한 글자 한 글자 새겨가며 읽는 그런 독서가 그립다. 그렇게 천천히 타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마침내 글을 쓰는 행위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타인이 그토록 어렵게 쓴 글을 너무 쉽게 읽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천천히 읽어가며 가슴에 새기는 일은 내가 직접 글을 쓰는 행위만큼이나 힘겹지만 뿌듯한 그 무엇이 되 

 

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의 글을 그렇게 천천히 읽어준다면, 서로의 언어를 그렇게 소중히 다뤄준다면 이토록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찢는 오해와 갈등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P.270~271)

 

 

 

어렵게 쓰고, 어렵게 읽었다

 

 

 

 소셜미디어가 급증함으로써 대중의 글쓰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글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고 글의 본뜻을 깊이 있게 우려 내어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글쓰기와 글 읽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우리는 글을 어렵게 쓰고 어렵게 읽었다. 그만큼 글쓰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글 속에 사람의 혼魂이 담겨 있다 여겼던 시대였다. 인터넷이 확산되자 사람들은 좀 더 많은 글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쓴 글을 쉽게 읽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대조차 지나, 쉽게 쓰고 더 쉽게 읽는 시대가 와버렸다. 글쓰기도 쉽고, 아니 쉬운 것처럼 보이고, 글 읽기는 더더욱 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빠른 리액션과 경쾌한 글쓰기만이 지닌 장점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고 진중하게 세상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영역이 줄어든다는 점이 문제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오래 글을 쓰는 사람, 글 한 줄을 쓰는 데도 며칠 밤을 새워야 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평가절하되는 것이 문제다. 그리하여 나는 더더욱 진

 

 

지한 글쓰기, 심각한 글쓰기를 응원하고 싶다. 한 줄을 쓰더라도 한 문단을 쓰더라도 마음에 남는 글쓰기, 억지로 읽으라고 권하지 않아도 한참 보고 곱씹고 또 되뇌고 싶은 글을 읽고 싶다.

 그리하여 요새 유행하는 대중적 글쓰기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장삿속이 아닌, '누구나, 글을 쓴다면 제대로 써야 한다'는 책임감의 문제를 제기한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고, 누구나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쓴다면 그 글의 무게만큼 엄연히 세상살이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글의 무게만큼 삶의 무게도 등에 져야 함을 깨달을 때, 그저 직업이나 이벤트로서의 글쓰기가 아닌 삶의 글쓰기가 시작된다.  (P.272~273 )

/ 내 안에 꿈틀거리는 은밀한 외침.

 

 

 

 

                                                                        -정여울, [그림자 여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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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1 18: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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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1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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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2 0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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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2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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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1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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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2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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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1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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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4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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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6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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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6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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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6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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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0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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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0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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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5-04-27 20:34   좋아요 1 | URL
`내가 너의 그림자를 꿰메줄께`

피터팬이 웬디네 집에 처음 날아 들어왔을 때, 피터팬은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렸다. 항상 분신처럼 따라다니던 그림자를 잃어버리자 피터팬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른다. 그때 웬디는 처음 보는 낯선 아이 피터팬을 다독이며 `내가 너의 그림자를 꿰메줄께` 라고 속삭인다

그림자와의 만남,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이기도 하고, 눈앞의 현실과 잃어버린 꿈의 만남이기도 하다. 내 그림자의 끔직함을 알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은 이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웬디처럼 상냥하게 그림자를 꿰매는 손길이 되어주었다.

appletreeje 2015-04-27 20:57   좋아요 2 | URL
그림자 여행이라는 책 제목을 설명 드리면 아마 더 이해가 빠르실 것 같은데 그림자라고 할 때 피터팬의 그림자 혹시 생각 나세요. 피터팬의 그림자 보면 피터팬이 처음에 웬디 집에 날아 들어왔을 때 그림자를 잃어버리잖아요. 그 때 피터팬이 당황하죠. 그림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심리학에서는 뭔가 자신의 무의식의 꿈 같은 것,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이런 것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웬디가 그 피터팬의 그림자를 바느질로 꿰매주죠. 그림자를 꿰매주니까 피터팬이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행복해하잖아요. 그런 것, 웬디의 손길처럼 따뜻하게 사람들의 무의식에 그림자를 꿰매주는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그림자 여행이라는 제목을 지었고요.

[출처] [그림자 여행] -정여울

나와같다면 2015-04-27 21:21   좋아요 1 | URL
예 요즘 읽는 책이예요^^ 분석심리에 대해 관심이 많거든요.. 예전에 이부영 교수님 `그림자` 책을 읽었을때는 글자로 읽었는데요.. 이제는 마음으로 그림자가 이해되네요.. 조금은요...

제 카톡 인사말이 `내가 너의 그림자를 꿰매줄께`예요♡

2015-04-27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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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2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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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8 00: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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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8 2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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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8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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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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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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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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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2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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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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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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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누구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을 말하지만

  지금 할 일은

  참혹한 시간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

  애인들은 등을 돌리고

  꽃들은 마침내 졌다

  지금 할 일은

  믿음, 희망, 미래, 이런 단어들을

  잠시 버리는 것

  더 혹독하게 살의 냄새를 맡는 것

  유령들과 작별하고

  염통의 지도를 다시 읽는 것

  아, 또다시 삶에 속은 자는

  지게를 지고 다시 생계를 향해 가네

  지금은 더 참혹하게 무너질 때

  알몸의 비극과 결혼할 때

  손쉬운 작별들과 작별할 때

  그러니 벗들,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P.14 )

 

 

 

 

 

 

 

    아니야가는 휠체어가 망가져 땅바닥을 기어서

   학교에 갔다

 

 

 

 

 

    나는 시에 중독되었다

    아니야가는 휠체어가 망가져

    땅바닥을 기어서 학교에 갔다

    섬을 떠난 편지가 이방인에게 전달되었다

    까뮈는 스승 장 그르니에와 마침내 친구가 되었다

    입동(入冬)의 문턱에서 절교당한 계절이 울고 있다

    말하자면 초겨울 비가 내리는 것인데

    나는 건너야 할 것을 건너지 못하는 중이다

    (아니야가처럼 진흙밭을 기어보란 말이야)

    예배당 벽에 기대어 애인을 기다리며 울던 시인은

    아직도 예배당 건너 항아리갈비집에서 못 나오고 있다

    뫼르소는 면도한 얼굴에 스킨 브레이서를 바르고 마리 카르

 도나를 만나러 갔다

    (비애는 운명일 뿐, 그래서 슬픔은 가벼이 넘는거다)

    한밤중인데도 머릿속이 환하다

    떠날 것을 떠나자  (P.20 )

 

 

 

 

 

 

 

         먼 행성

 

 

 

 

 

 

     벚꽃 그늘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 서자  (P.78 )

 

 

 

 

 

 

 

     -오민석 詩集, [그리운 명륜여인숙]-에서

 

 

 

 

 

 

 

 

 

   

 

 

 

 

 

 

 

 

 

 

 

 

 

 

  

 

좋은 분께서 보내주신 LEMON GINGER tea를 마신다.

뜨거워도 좋지만, 식은 후에도 한결같이 좋다.

서재를 쉬는데도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오시는지는

몰라도 많은 이웃분들께서 친구신청을 해주심에 늘

송구하고 감사한 마음뿐인데, 오늘 아침에는 더욱

그렇다. 새 이웃분의 `滯雨`의 한 귀절이 마음을 두드리며.

눈이 짓무르게 冊을, 온몸으로 읽으시고

피땀과 피눈물로 글을 써주시는

존경하는 어느 분의 서재를 떠올리게 하시는.

환자분들을 온마음으로 진료하시며 잘 지내시리라 믿는다.

봄이 화창하지만, 내 책상은 고요해 그래서 마음이 좋고

이웃님들께 마음의 인사를 감사히 드린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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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3-17 21:49   좋아요 0 | URL
와 저 라넌 진짜 오래가네요. 이주전 라넌이죠?

appletreeje 2015-03-18 09:38   좋아요 0 | URL
예~이주전 라넌 맞아요~~
지난주 커다랗고 아름다운 하노이와 석죽, 불로초, 애니고자서스로 보내주신
꽃들은 친구가 너무나 예쁘다고 감탄을 해~선물했어요.^^

늘 싱그럽고 멋진 꽃들, 감사드립니다~*^^*

2015-03-17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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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8 0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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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7 2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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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8 0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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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7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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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8 0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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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8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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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1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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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1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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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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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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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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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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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phor 2015-04-29 08:13   좋아요 0 | URL
아픕니다
오늘 비가 내려서 더!

appletreeje 2015-04-29 11:29   좋아요 0 | URL
아프지마세요.
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저도 아프네요.
아무쪼록, 편안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
 

 

 

 

 

 

 

                                      잠꼬대

 

 

 

 

 

 

                              옛날 팔공국이란 나라에서 새 임금을 뽑았는데 그 애

                           비는 죽을 때까지 왕 노릇을 해먹으려는 자였다. 백성은

                           섬기지 않고 주색잡기 노름과 배때기에 기름기만 채우다

                           가 제 손으로 임명한 암행어사에게 칼을 맞고 죽었다. 새

                           임금은 전임 홍어임금과 바보임금 둘이서 만들어 놓은

                           선거 제도에 의해 백성들이 투표로 뽑았는데 선거운동

                           당시 훅 가는 공약들을 많이 발표해 몰표를 몰아주었더

                           라. 그런데 임금이 되고 나서 채 일 년도 되기 전에 모든

                           공약은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버리고 제 애비를 닮아가는

                           모습에 온 백성들이 몸서리를 쳤겠다. 한데 이번 임금이

                           되기까지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포졸들과 나라의 녹을

                           받아먹던 몇몇 장수들이 밤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상대방 후보를 깎아내리고 지금의 임금을 추어올리는 방

                           을 몰래몰래 붙이고 다닌 덕이라. 한수 이남의 알 만한

                           백성들은 군대를 일으켜 반란으로 임금이 된 애비에 비

                           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지는 모르겠지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 법. 이런 낌새를 눈치챈 광

                           대 무리가 있었으니 이 모든 걸 까발리고 다녔더라. 궁

                           지에 몰린 임금이 포도대장한테 사건을 조사하는 시늉

                           만 하라 시켰으나 여주에서 올라온 나졸이 모든 걸 까발

                           리니 깜짝 놀란 임금이 나졸의 아랫도리 이야기를 들춰

                           내며 고향으로 내쫓더라. 제 애비는 다른 건 몰라도 사

                           내의 아랫도리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임금이었으나 지금

                           의 임금은 못된 짓만 배워서 백성들을 미궁 속으로만 몰

                           아넣더라 이쯤 되니 포졸들은 자기네 식구들을 서로 잡

                           아먹고 알아서 설설 기더라. 임금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곤룡포를 차려입고 이웃 나라로 나들이만 다니더라. 이

                           에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패션쇼만 다닌다고 민심이 흉

                           흉하자 유언비어를 단속하라! 제 나라도 아닌 다른 나

                           라에서 파발만 띄우더라. 이제는 남과 북, 동과 서가 아

                           니라 나와 네가 완전 갈라섰더라. 자, 이제 판은 벌어졌

                           다. 얼쑤!  (P.28 )

 

 

 

 

 

 

 

 

                                 이장님의 부부싸움

 

 

 

 

 

 

 

                                아 아 동포부락 주민 여러분, 오늘도 농사일에 을매나

                             고상들 많었슈. 해가 갯바닥으로 떨어진 지가 은젠디 밤

                             늦은 시간에 왜 그러느냐구요? 아, 우리 마누라가 집을 나

                             갔슈. 낮이 민소에 들렸더니 마량 이장놈이 즌어 축제가

                             성공을 혔네 오쩌네 혔싸서 승질이 나잖유, 아 그려서 집

                             이 오다가 칠성바위 지점집이서 풋고추 배 갈러 자하젓

                             늫구 막걸리 한 사발 허구 왔더니, 갈 일이 바뻐서 죽을

                             래도 죽을 새가 읎넌디 술만 먹고 댕긴다구 지껄여쌓길

                             래, 소가지 좀 냈더니 오디루 내뺐는지 이때까정 안 들오

                             구 자빠졌네유, 아 빨리 겨들오잖구 뭐혀. 자우당간 우

                             리 마누라럴 본 사람은 보넌 즉시 신고혀야유. 간첩 신

                             고는 112구 우리 마누라쟁이 신고는 즈이 집 즌화번호

                             덜 알구 기시쥬? 만약시 혹여라도 숨겨주거나 보고도 신

                             고럴 안 헌 주민은 지가 보기엔 빨갱이보다 더 나뿐 사

                             람잉게 그리덜 아셔야겄습니다요. 아 그러구 이번 정부

                             시책으로 주는, 그러니께 무상으로 주는 비료허구 농약

                             을 받는디 상당헌 불이익얼 감수허셔야 될 것 입니다유.

                             아 동포부락 이장인 지가 헐 일 읎어서 민소나 지웃대넌

                             줄 알면 큰 코 다쳐유. 다 우리 부락을 위해서 나댕기는

                             거유. 그걸 마누라나 주민 여러분이 알아주셔야 혀유.

                             아 이렇게 방송에 대구 왕왕대두 안 들어구 뭐하구 자빠

                             졌냐, 재뜸 사부인 이번에두 숨겨주믄 재미읎슈.어 끄

                             윽, 이렇게 지껄이다봉게 술이 좀 깨네유. 뫼재 큰아들눔

                             아 너만 네 지집 끌어안고 자빠졌지 말고 임마 네 엄니

                             좀 찾아봐 네 애비 혼자 자긴 싫어 이눔아. (P.64 )

 

 

 

 

 

 

 

                                  이중초점렌즈

 

 

 

 

 

 

                                  의정부에서

                                  김극기 할아버지는

                                  남대문에서는 삼만 원이면

                                  하나의 안경으로 먼 곳, 가까운 곳 다 보이는

                                  안경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왔다.

 

 

                                  난시가 있어서

                                  렌즈만 해도 오륙만 원은 줘야 하는데

                                  폐지 주워 팔아 모은 돈

                                  삼만 원을 쥐고 나온 할아버지에게 말 할 수 없다.

 

 

                                  난시를 교정하면

                                  시력이 1. 0 이상은 나오고

                                  선명도도 좋은데

                                  오늘은 맞춰놓고

                                  돈을 더 가져와서 찾아가라면

                                  분명 비싸다고 옆집으로 갈 텐데

                                  양안 교정 시력 0. 6

                                  이중초점렌즈 안경 조제 끝.

 

 

                                  오늘부터

                                  세상을 삼만 원어치는 보면서

                                  서울판 생활정보지를 둬 부씩 빼어 들고

                                  경로우대증을 내밀고

                                  흔들리는 전철을 타고 집에 간다.  (P.98 )

 

 

 

 

 

 

                                                  -황인산 詩集, <붉은 첫눈>-에서

 

 

 

 

 

 

 

 

 

 

 

 

 

2009년 제15회 지용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황인산의 시집. 심사평에서 "삶과 사물을 깊이 있고 폭넓게 인식하려는 그의 시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시적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평을 들었던 그의 시는 속도와 능률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오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안경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시인은 마치 우리 삶을 둘러싼 풍경들을 '제대로' 조망하도록 시력 교정을 하는 듯하다. 일상의 속도를 늦추면서, 왜곡된 서사를 펼쳐 보이면서, 때로는 넉살과 해학과 풍자로 눙치고 어르면서 고요히 안경을 조제하듯 언어를 투명하게 갈고 닦는다. 유정이 시인의 말 그대로 "황인산식 렌즈로 투과하는 투박한 정경들 덕분에 우리는 부박한 생을 들여다보는 시력을 선명하게 맞추는 날이 올 것이다."

 

 

     

       또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저녁이다. 유난히 힘겹고 무거운 한해를 모두들 함께

       지나왔지만, 그래도 또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해를 시작하고자 한다.

       올해는 연말까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있어 계속 끄급한 마음으로 바빴는데

       어젯밤 비로소 모든 작업을 끝내고, 남대문 시장 한구석에서 안경점 사장으로 일주일

       에 하루를 쉬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시인의 [잠꼬대]와 무상으로 주는 비료와 농약을

       받으러 면사무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술 한잔 하고 집에 오니 있어야 할 마나님이

       안 계셔서 동네 마이크에 각종 사정을 공개하며 떠들어대는 이장님의 공갈 엄포도

       웃으며 읽고, 친구와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영화도 보고 맛있는 동태탕도 먹고 와

       이제야 비로소 한해살이를 마무리 지어 홀가분하다.

 

     

 

       2014년에도 이 작은 나무늘보 서재를 방문해주시고 고운 정을 흠뻑 주셨던 모든

       고마운 이웃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마음의 꿈들, 매순간 새롭게 흘러가는 물처럼 이루시기를 빕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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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울자

 

 

 

 

 

차라리

더 울자

더는 울 수 없을 때까지

더 울자

창밖 나무 꼭대기를 보며 울자

잎들끼리 부딪히건 그렇지 않건

구애되지 말고 더 울자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더 울고 기다리자

기다리면서 울고

울면서 기다리자.*  (P.58 )

 

 

 

* 피나 바우쉬, <Full Moon> 중.

 

 

 

 

 

 

 

만우절, 헌법재판소 담벼락

 

 

 

 

 

헌법재판소 담벼락에 기대 서 있다 받은

통합진보당 해산청구사건 방청권을 들고

맞은편 찻집에 앉아

재판소 담벼락 소나무들을 본다

 

 

거짓말도 없이 봄을 속여먹은 날씨

잠시 멈춘 관광버스 속, 재판소를 향한 손짓들

여기, 어떤 거짓보다 비루한 현실이 있고

잠시 두고온 곳에선 한 사람이

구원 같은 거짓도 힘겨워

자꾸만 달아났다. (P.6 )

 

 

 

 

 

 

 

증인

 

 

 

 

 

윤산 계곡의 나무들

부드러운 붉은 흙과 돌부리들

멀리 수원지의 반짝이는 물

학교 가는 길 늘어선 가게들

마주치는 고양이들과 강아지들

법대 가장자리의 돌계단

무엇보다 저 나무가

지켜보는데

미안해요 아직 훌륭해지지 못했네요. (P.67 )

 

 

 

 

 

 

지금의 사랑

 

 

 

 

 

지금의 사랑이

아무 것도 뒤늦지 않다고

어떤 것도 헛되지 않다고

말해준다.  (P.95 )

 

 

 

 

 

 

 

 

좌익사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 공판*을 보고서 탄 전철

국가정보원 홍보방송에

여전히 박혀 있는

성립할 수 없는 단어

 

 

이 좀비세상에서

나는 사유를 잃을 수 없는 좌익

외로운 이들 중 하나

 

 

범죄자를 필요로 하는 권력아

이 사람을 보라.*  (P.114 )

 

 

 

 

*서울고등법원 2014노762, 2014년 6월 9일 변론기일.

*니체의 책 제목 [이 사람을 보라] 에서 따옴.

 

 

 

 

 

 

 

Liberal Democracy in Court *

 

 

 

 

 

'자유민주주의'가

'진보' '자주' '민중' '주체' '인간해방'

이란 말을 삭제하는 것을 본다

 

 

자신을 부정하는 '자유'가

'식민지'라는 의견을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계급해방'이라는 합헌적 가치를

뭉개는 것을 본다

 

 

스스로 모순되는 '민주주의'가

'종속'과 '착취'에

비루한 침묵만을

허하는 것을 본다

 

 

이 슬픈 세상을

어찌 견딜까.  (P.133 )

 

 

 

*통합진보당 해산청구사건 2014년 6월 24일 방청 후.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절망스럽고 괜찮다

절망스럽고 괜찮을 것이다

 

 

절망스럽지 않고

괜찮지 않다.  (P.240 )

 

 

 

*존 쿳시의 소설(민음사,2009) 제목에서 따왔다.

 

 

 

 

 

 

 

 

연두가 흐른다

 

 

 

 

 

 

후줄근한 잠바를 입고

원고펑크 사과메일을 쓰고

난로에 발을 올린 채

흐려지는 바깥을

돋아나는 나뭇잎을 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모른다

몸 안으로

연두가 흐른다.  (P.3 )

 

 

 

 

 

 

                                                        -오정진 詩集, <연두가 흐른다>-에서

 

 

 

 

 

 

멍게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천둥벼락 같았다는 유마의 침묵도

저렇게 고요했을 것이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멍게는 얼마나 배려 깊은 존재인가

 

 

바다에서 온 지우개 같은 멍게

멍게는 나를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

소리를 내면 입 안이 울림의 공간

 

 

메아리치는 텅 빈 골짜기

범종 소리가 난다

 

 

멍  (P.202 )

 

 

 

 

 

                                                   -최승호 詩集, <얼음의 자서전>-에서

 

 

 

 

 

 

 

 

 

 

 

 

 

 

 

 

 

 

 

 

 

 

 

 

 

 

 

 

 

 

 

 

 

 

 

 

 

 

 

 

 

 

 

 

 

 

 

 

 

 

 

 

 

 

 

 

 

 

 

 

 

접힌 부분 펼치기 ▼

 책 이야기

 

 

 

당신도 기억하는 항구도시의 스피노자와

그의 존재에의 긍정과 사랑을 좇는 [공통체]*

[율리시즈]**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의 느낌,

조지 오웰이 말하는 '보통 사람들의 품위'.  (P.167 )

 

 

 * 안토니오 네그라마이클 하트, [공통체: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

사월의책, 2004.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슬픔이 일으킨다

 

 

 

슬픔이

잠도 없이

조용히 날 일으킨다

 

 

그렇게

절망보다

그리움보다

늘 슬픔이

먼저 와서

오래 기다린다

 

 

붉은 옷을 입으려다

조간신문 날짜를 보고*

검은 색을 읽는다  (P.209 )

 

 

 

*2014년 1월 20일. 용산참사 5주기이다.

 

 

 

 

-오정진, <쓰지 않은 일기 : 100 days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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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12-20 01:27   좋아요 0 | URL
법은 `가진 사람` 마음이고,
사랑은 `나누는 사람` 마음이니,
우리는
법대로 살기보다는
사랑대로 살아야지 싶습니다..

appletreeje 2014-12-21 03:10   좋아요 1 | URL
당연히 사랑대로 살아야겠지요..

2014-12-20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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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0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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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1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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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0 16:07   좋아요 1 | URL
많이 먹먹했던 하루고_
오늘도 마찬가지 심정입니다.

appletreeje 2014-12-21 03:15   좋아요 1 | URL
앞으로가 더 걱정이고 막막합니다..

2014-12-20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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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0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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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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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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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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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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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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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14: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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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 2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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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1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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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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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4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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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5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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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15: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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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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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1 14: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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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1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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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5-01-23 19:47   좋아요 1 | URL
몸 안으로 연두가 흐른다니요,
참 시인들이란...
제 몸 안엔 뭐가 흐르는지 살펴봐야겠어요. ^^*

appletreeje 2015-01-23 23:44   좋아요 1 | URL
그렇치요~?^^ 몸 안으로 연두가 흐른다니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생명`으로 살아가는 일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 같기도 해요.^^

다크아이즈님의 몸 안에는 글이 흐를 것 같고,
제 몸 안엔 알콜이 흐를 것 같아요.ㅎ
지금도 오늘 받은, [주객전도]를 읽으며 낄낄대고 있는데욤.^^;;


다크아이즈님! 반가운 댓글 감사드리며~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詩21 2015-04-02 00:39   좋아요 1 | URL
좋은 하루 만드세요. 아직 난 댓글에 익숙해저야 겠네요

appletreeje 2015-04-02 06:41   좋아요 1 | URL
예~~감사합니다!
저도 댓글은 늘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저 서재지기님께 마음을 전하거나
어떤 글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을 때 와락
제 마음이나 생각을 함께 이야기하는 일 같아요.

올려주신 책 [아무 날도 아닌 날]은 저도 요즘 읽은 책이라
반가웠습니다~~
유준님께서도 좋은 날 되세요~~~*^^*
 

 

 

 

 

 

 

흑산도 하고 수심 오십 미터에서 건져 올렸다는 생물 홍합들

이 이대로는 절대로 포장마차 끓는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노라며

입술을 앙다물고 버티시는 바람에 오늘도 목포집 아주머니는 시

퍼런 바다와 싸우느라 구슬땀을 흘리시다

 

-이시영 [홍합] 전문

 

 

 

 내 한 친구는 어떤 상황을 명쾌하고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계곡의 상류는 조용하고 하류는 시끄럽다네. 물이 적으니 소란도 적은 법, 세상사도 그렇지 않은가."

 이 도사(?)가 홍합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홍합 안주를 돈 받고 팔기 시작하면서 인정에서 물질의 시대로 경계가 넘어간 것이지."

 녀석의 해석인지 넋두리인지 모르겠지만 꽤 그럴듯했다. 시장에서 홍합은 여전히 싼데, 술집 인심은 야박해진 것이다.내가 술을 배우던 때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인정의시대였다. 홍합을 흔히 빈자의 굴이라 한다. 값이 싼데 맛은 좋다는 뜻일 게다. 포장마차 주인은 홍합이 담긴 양은대접을 서너번은 더 채워주었다. 홍합을 워낙 좋아했던 나는 그 홍합 안주가 무료라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돈을 받고 팔았다면 당당하게 먹고 싶은 만큼 시켰을 텐데, 공짜인지라 청하기가 무색했던 셈이다. 그 공짜 홍합에도 예(禮)가 있었으니, 알맹이를 다 까먹었다고 한그릇을 더 청하는 건 예가 아니었다.

 

 

 국물까지 알뜰하게 먹고 난 뒤에야 당당히 추가를 외칠 자격이 주어졌던 것이다. 또 충분히 끓어서 국물이 진득해지기 전에 퍼주는 건 주인의 예가 아니었고, 단골에겐 마지막 홍합을 퍼주는 게 또 예였다. 왜냐하면 홍합을 끓이면 거대한 들통 바닥에 홍합 알갱이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중간한 때 홍합을 받으면 껍질만 수북하고 알맹이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포장마차에서는 홍합을 미리 꺼내두었다 주문이 오면 토렴하듯 홍합을 빠트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골고루 분배가 되는 장점은 있었는지 몰라도 알맹이가 말라서 그다지 인기는 없었던 것 같다.

 홍합은 요리법이 간단하다. 그런데 홍합탕 하나 끓이는 데에도 마늘을 넣네 어쩌네, 파는 넣네 안 넣네 말이 많다. 나는 홍합 그대로의 순수한 요리법을 지지한다. 홍합 무게의 절반쯤 되는 물을 넣고 오직 홍합만으로 탕을 끓이는 것이다. 비린내를 잡아준다는 술도 필요없고 마늘이며 파도 의미없다. 더러 후추를 뿌리기도 하는데, 이거야말로 '과공비례(過恭非禮)'(?)다. 홍합은 그냥 홍합 스스로 맛을 내는 희한한 재료다. 그렇게 맑게 끓이면 국물에 청량감이 있고, 시원한 맛이 머리끝에 이른다. 그리고 뒤늦게 감칠맛이 천천히 찾아든다. (P.12~15 )

 

 

 

 홍합은 성을 바꾼다. 생식을 위해서 성을 바꾸는 건 고등동물에서는 볼 수 없다. 홍합은 성을 바꾸어서 개체수를 늘린다. 수컷은 기꺼이 암컷으로 성을 바꾸어서 잉태한다. 이 눈물겨운 결정이여. 홍합은 살을 찌우고 비우기를 반복한다.  (P.12 )

 

 

 

 

 

                                                                            -박찬일, <뜨거운 한입>-에서

 

 

 

 

 

     간밤도 달렸기 때문에, 아직도 약간 어지럽지만 정신 차리자, 생각하며 꺼내 읽기 시작한

     박찬일 님의 <뜨거운 한입>을 펼치자마자 첫번 째로 딱 나오는 이 '홍합'에 대한 글을

     읽으며 흠...흠... 나도 이따 저녁에는 홍합탕을 끓이자. 아무것도 넣지 않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비롯해 소중한 님께서 어제 보내주신 네 권의 책들을 짜르륵, 넘겨본다.

     서경식 님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 원철스님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좋아하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배우 고바야시 사토미 님의 <사소한 행운>.

     다들 참 마음에 쫙 든다. 오늘은 즐독의 하루를 누리고, 저녁에는 '홍합탕'을 끓이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시집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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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4-12-17 11:53   좋아요 0 | URL
바다를 넉넉히 품에 안은 짭쪼름한 숨결을
기쁘게 누리셔요~

appletreeje 2014-12-18 09:03   좋아요 1 | URL
예~시원하고 감칠맛 있게 잘 누렸습니다~^^

2014-12-17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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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8 0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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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7 1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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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9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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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0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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