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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찬 바람이 불며 다소 쓸쓸해지는 기분도 들고 봉인해놨던 감정선 좀 살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상상외의 재미로 콩닥콩닥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몰입감에 푹 빠진 독서를 하게될줄이야.....
이야기는 분명 통속적인 연애담인데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 고급진 소설의 느낌이다. 사실 읽기전 마티네라는 단어도 몰랐기에 그냥 마로니에 비슷한 나무를 말하는가 싶었다. 클래식을 가끔 듣기는 하지만 공연을 자주 가지 않기에 마티네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마티네는 연극ㆍ오페라ㆍ음악회 등의 낮 공연을 가리키는 예술경영용어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한낮에 펼쳐지는 공연을 뜻한다.
남주인공은 천재 기타리스트 마키노 사토시, 여주인공은 프랑스 RFP 통신에 근무하는 기자 고미네 요코다. 둘은 여자가 40세 남자가 38세의 나이에 만나게 된다. 사토시의 공연이 끝난 뒷풀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데 요코는 현재 약혼한 상황이지만 운명적인 강한 끌림을 느낀다. 물론 남녀 모두에게서 끌림이 발생한다.
요코는 마키노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감독 예르코 소릿치의 딸이었고, 그녀는 기타리스트의 마키노 사토시를 팬으로서 좋아하고 있었다. 사토시가 기타에 빠지게 된 계기가 소릿치가 감독한 행복한 동전에 삽입된 곡이었으니 운명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겠다. 서로 만남을 뒤로 한채 요코는 파리로 돌아가게 되고 둘은 서로 연락을 주고 받는다. 과연 이 남녀에게 어떤일이 벌어질것인가?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다. 작가에 대한 약력이 궁금해서 잠깐 긁어봤다.
명문 교토 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1998년 문예지 『신조』에 투고한 소설 『일식』이 권두소설로 전재되고, 다음해 같은 작품으로 제12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 당시 최연소 수상 기록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는 파격적인 평과 함께 예리한 시각과 전위적 기법으로 차세대 일본문학의 기수로 자리매김했다. 아쿠타가와 상의 대학 재학생의 수상은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이후 23년 만의 일이었다.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바라보는 신세대 작가인 그는 1998년 스물셋의 나이에 ‘일식‘으로 아쿠타카와상을 수상할 당시 화려한 한문투 문체와 장대한 문학적 스케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소설하면 흔히 떠올리는 ‘가벼움‘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으로 많은 국내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다. 밝은 문장으로 죽음을, 무거운 문체로 연애를 그릴 순 없냐는 그의 말에서 순문학 작가로의 포부와 자부심이 묻어난다.
수 많은 국내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데 처음 접해봤으니 세상에 읽을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아무튼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른 작품들도 천천히 읽어볼 예정이다. 단 한 권의 책만으로 이렇게 팬이 되어보기도 오랜만이다. 나머지 약력을 살펴보자면....
1975년 6월 22일 아이치 현에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금각사‘라는 명작을 남긴 미시마 유키오(1925~1970)에 푹 빠져 지내면서 미시마가 책에서 조금이라도 언급한 작가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 접한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만, 괴테 등이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오늘날 그를 소설가로 성장하게 한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교토 대학 법학부 입학하여 소크라테스에서 자크 데리다에 이르는 정치사상사를 공부했다. 문예창작과의 제도적인 문인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며, 정치사상사를 문학 공부와 병행하는 것이 작가적 성찰을 얻는데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문학 교육이 아닌 다른 경험으로부터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흥미가 많은 그는 재즈 대담집을 발간하고 건축잡지의 책임편집을 맡는 등 문학 외적인 방면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008년에는 모델 겸 디자이너인 하루나와 결혼했다. 이제는 등단 10년이 넘는 중견작가로, 1993년과 비교해 70% 정도로 규모가 줄어든 일본 순문학 시장에서 소설의 힘을 믿고 소설을 통해 사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며, ‘공감‘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자 한다.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장으로 중세 유럽의 한 수도사가 겪는 신비한 체험을 그린 『일식』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再來)‘라는 파격적인 평과 함께 일본 열도를 히라노 열풍에 휩싸이게 하며 일본 내에서 40만 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메이지 시대를 무대로 젊은 시인의 탐미적인 환상을 그려낸 두번째 소설 『달』을 발표한 이후 매스컴과 문단에서 쏟아지는 주목과 찬사에도 불구하고 3년여 동안 침묵을 지키며 집필을 계속해, 2002년 19세기 중엽의 파리를 배경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대작 『장송』을 완성한다. 같은 해 특유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바라본 산문집 『문명의 우울』을, 2003년에는 이윽고 현대 일본으로 작품의 배경을 옮겨 젊은 남녀의 성을 세심한 심리주의적 기법으로 추구하는 등 실험적인 형식의 단편 네 편을 수록한 『센티멘털』(원제:다카세가와)을 발표한다.
2004년에는 더욱 심화된 의식으로 전쟁, 가족, 죽음, 근대화, 테크놀로지 등 현대사회의 여러 테마를 아홉 편의 단편으로 그려낸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을, 2006년에는 인터넷 성인 사이트를 소재로 삼아 현대인의 정체성을 파헤친 『얼굴 없는 나체들』을 연달아 발표하여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어쩐지 미시마 유키오 생각이 살짝 나더라니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히라노 역시 엄청난 독서양이 그의 소설의 밑거름이 된듯 싶다. 문학외적으로도 사회 참여적 성격이 강한 작가로 아베 정권을 반대하는 리버럴한 사람이라는데 더욱 매력을 느낀다.
이 작품의 매력은 분명 통속적이며 흔한 연애담을 매우 고급진 소설로 풀어냈다는데 있다. 그런 덕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두말이 불여일견이다. 매우 강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