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에게 그리스 고전기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유럽문명과 문화, 철학, 예술 등 모든 분야가 이때를 모범과 기준으로 삼기때문이다. 쉽게 말해 오늘날 유럽인은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가 여기에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그리스 고전기 앞뒤의 역사를 알아두면 서양이라는 절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도 핵심 사건을 중

이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저술한 초기 대화편 <뤼시스>의 내용을 직접 듣고는 어린 플라톤이 자신이 결코 말한 적이 없는 내용을 너무 많이 썼다고 불평한다. 참고로 당시의 소크라테스는 60대였고,
플라톤은 20대 청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말이다. 이 구분이어렵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이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거대한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아론이다.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핵심은 의외로 친숙하다.
그것은 ‘이데아 세계가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데아 세계란 절대적이고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를 말한다. 현실의 모든 것은 낡고 늙고 병들어간다. 시간이라는 필연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반면에 플라돈은 변화하는 불완전한 현실과 구별되는 완벽한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현실 세계

앞서 살펴보았듯 동양에서는 문명 초기에 이미 이러한 생각이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 많은 이에 의해 심도 깊게 탐구되었다. 하지만 서양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로 이원론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이것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외부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받아들이게 했다. 외부 세계를 내면 세계의 반영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근대 이전까지 등장하지 못했다. 그러다 17세기의 예비 단계를 거쳐 18세기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지하고 심도 있게 탐구되었다.

칸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기존의 사람들이 외부에 존재한다고 당연히 믿어왔던 인식 대상의 위치를 인식 주체의 내면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 눈앞에 펼쳐진 외부 세계는 당신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당신의 인식 과정을 통해 내면에 그려진 현상 세계다. 칸트의 철학은 그래서 ‘관념론‘이 된다. 그는 실재론에서 벗어나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처럼 눈앞의 세계가 그저 자아 내면의 현상임을 꿰뚫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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즘의 상태를 지향하려 한다. 그러나 세상은 매우 복잡하다. 우리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겪으며 자신을 낮춰야 할 때가 있고, 좌절과 실패를 감당할 능력을 키워야 할 때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높은 수준의 나르시시즘을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높고낮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처신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실러

나르시시즘은 경쟁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는 힘이다. 사회에서 상대적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부족한 능력이나 허점의 구멍이 커 보이는데 이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을 아낌없이 보듬고 보호하기 위해 자기애에 푹 빠지는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자존감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나르시시즘이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기본적인 나르시시즘이 형성되지 않은 경우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라는 내면의 메시지가 자아를 산산조각낼수 있기에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고 지적에 예민해지는것이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자신감을 잃고 의지를 잃으며 의욕을 상실한다. 그로 인해 자아가 지탱해내지 못한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정無情‘이 필요하다. 상대가 전적으로 의지하고자 하는 욕구를 무시할 수 있고, 자신의 법칙에 맞지않는 방식을 시도할 수도 있다. 비위를 맞추지도 않고 자신의 의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일 자체의 법칙을 따른다. 개인의 의지와 일의 특성과 성질을 고려하고 융합해 나가며 일을 처리하는것이다.

이기적이지 않다고 자처해온 사람이 오히려 이기적일 수 있다.
가끔은 스스로 이기심을 허락하고 상황에 따라 강하게 발휘한다.
는 점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큰 성장이다. 자기 내면에 이기심이존재하고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한다면자신과 주변 사람의 관계가 훨씬 편해질 수 있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다. 화가 나는상황에서 화를 내면 좋은 사람‘ 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기에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고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틀리다‘는 위치에 놓여야 반격할 수 있다고생각한다. 이런 대립감은 그들의 도덕적 주장을 더욱 강화시켜파괴적인 공격성을 드러내게 만든다. 이때의 반격에는 관계의 파괴가 수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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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몸에 좋은 김치를 들기름에 볶는다면, 들기름에 함유된오메가-3가 산화되어 몸에 염증을 일으키는 해로운 물질로 변하게 되는것입니다.


문지기를 제거하여 지방이 창고 밖으로 나와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는방법은 인슐린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방 섭취는 인슐린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비타민B1은 탄수화물 대사 과정에 매우 긴밀한 작용을 하는 만큼 평소정제 탄수화물 위주의 식습관과 설탕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과 음료를 자주먹고, 술도 자주 마신다면 더욱더 비타민B1의 섭취가 필요합니다.


또한 과도한 카페인 섭취는 이뇨 작용을 유발해 우리 몸에 탈수 작용을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를 막는 한 가지 팁을 알려드리자면 커피에 소금을살짝 첨가해 마시는 것입니다. 이는 커피로 인한 탈수 작용을 막는 데도움이 됩니다. 소금은 될 수 있으면 정제된 소금보다는 각종 미네랄이함유된 천일염을 추천합니다.


다이어트를 위해 저염식을 해야 한다는 상식과 정반대로 오히려 소금을너무 적게 섭취하면 점점 더 살찌는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연구논문에 저염식은 인슐린 저항성을 증가시키고, 인슐린 저항성은 체중증가와 매우 큰 연관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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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철학 체계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베다》를 기준으로 사람들은 구분되었다. 《베다》의 전통을 따르는 사제 계급을 브라흐마나,
《다》의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개별 사상가를슈라마나라 불렀다. 불교 관련 서적이나 영화에서 가끔 붓다가 바라문과 사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들을 깨닫게 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브라흐마나와 슈라마나다.

모든 종교와 사상에는 핵심 개념이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단정적으로 말해서 불교의 근본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단어 정도는 상식으로 외워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부분의 거대 종교가 그러하듯 불교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방식으로 계승되었고, 다양한교파와 교단으로 분화되었다. 이렇게 많은 분파 중에서 불교의 교파라고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러한 무지가 고정된 자아와 불변하는 영혼을 갈망하는 집착을낳는다. 감각적 쾌락을 실제라고 느끼게 만들고, 생로병사라는 변화를거부하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여기서 고통이 일어난다. 붓다는 자아의실체가 우연하게 임시로 모여 있는 오온임을 밝힘으로써 우리의 부질없는 집착, 거기서 비롯되는 고통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다.

제법무아란 자아는 영원불멸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도 없이 변화한다.
는 뜻이다. 즉, 자아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현상은잠시도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생멸하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즉, 우주의 현재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무아와 무상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고정된실체에 집착할 때 고통이 발생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무지를 깨뜨리고연기를 꿰뚫어 이해할 때 우리는 마지막 열반적정에 도달하게 된다. 열반적정은 번뇌의 불꽃을 바람을 불어 꺼뜨리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무아설에 있다. 자아의 실체를 부정하는 세계관은 지금까지의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개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하는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는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을 상정하고, 고대 그리스부터 근대 합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도 사유하는 존재로서 자아의 자기동일성을 강조하며, 특정 종교나 사상을 떠나서도 보통의 사람들에게 매우 상식적이고 친숙한 사고방식이 내가 있다‘는 전제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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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시 현의 지극히 평범한 농가 출신인 스기무라 사부로는도쿄의 대학을 나와 아동서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낯선 남자에게 추행당할 뻔한 재벌가의 딸을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고 대기업 총수인 장인의 회사에 입사하여 사보를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게 된다. 이때 스기무라가 열심히 부짓집의 꿀을 빨겠다‘가 아니라 ‘나만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고 있어서 면목이 없네‘라는 생각으로 늘 불안해한다는 걸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던 어느날 장인의 지시로 장인의 차를 몰던운전기사의 죽음을 조사하며 어설픈 탐정 흉내를 내다가 사건의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악의를 목도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내용이다.

흔히 나오는 명석한 탐정이 아니라, 돈에 쪼들리고, 멋있지도 않으며, 가족의 실종 같은 평범한 사건을 다루는 서민의 탐정이거든요. 사생활은 지극히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흔히볼 수 있는 사건과 조우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를 쓰고싶어서 태어난 것이 스기무라 사부로입니다."

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사회와 마주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고 지금까지의 삶과 결별한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읽지 않았다면 멈춰!)그것은 ‘이혼‘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혼의 원인은 나호코의 불륜이었다. 이를 두고 독자들 사이에서 공방이 벌어졌지만 이것은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던 수순이었다. "단지 나호코가 바람을피워서 이혼을 할지, 바람을 피려고 해서 이혼을 할지"가 작가의고민이었을 뿐이다. 이로써 스기무라는 대기업의 총수인 이마다.
요시치카라는 뒷배와 아내 나오코, 딸 모모코와의 행복한 삶과 결별한다.

그 악은 지금껏 발표된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기분나쁘고 께름칙하게 묘사되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인간이라는 껍데기에 더러운 물을 가득 채운 듯한 가해자들과 대결하는 스기무라의 모습에서도 탐정으로서의 무게감과 여유를 엿볼 수 있다. 한층 더 탐정다운 처세가 생긴 스기무라를 향해 다테시나 경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정신 바짝 차리고 힘내요. 탐정님." 이 대목에서 앞으로 탐정 스기무라에게 닥칠 사건의 힘겨움을 예감하며흐뭇해한 독자가 나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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