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정치 외교 능력을 발휘한 사람들이 종횡가입니다. 그들은 천하의 형세를 잘 알고 여러 나라의 정치 상황과 군사역량 등에 해박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각 나라 사이를 분주하게 다니며 주도면밀한 사유와 교묘한 말재주를 수단 삼아,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전략을 세움으로써 전쟁이라는 폭력보다 언어의 힘으로 천하의 질서를바로잡았던 것입니다. 무인武人의 시대가 아니라 전략가와 웅변가의 시대가 된 것이지요.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했고 소피스트의 수사학學을 비난했습니다. 공자는 정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좋은 사람을 멀리했습니다. 선진 제자 가운데 말재주로 유명한 종횡가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도 소피스트는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서구 사회에서 소피스트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 사회에도 유의미한 사유 방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종횡가도 이런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곡자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비자』가 군주론이라면 『귀곡자』는 이에 대항하는 신하론이라 할 만합니다. 권력에 대항하는 신하들의 기술과 전략입니다. 언어의 힘과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권력의 전략학이지요. 그래서 병서 兵書의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이 "병술은 속임수이다" (兵者, 龍道也)라는 말로 시작하듯, 귀곡자의 주장도 이 속임수와 기만술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필자는 공자가 왜 정치 영역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해 귀곡자를 정치적 기술, 전략적사고, 유세의 기술,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기술, 정보 획득의 기술을 설파한 사람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권모술수와 음모를 정치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기술과 사고로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안합의 질문에 거백옥은 잔인하고 포악한 왕을 다루는 방법을상세하게 알려주는데, 그 방식이 아주 독특합니다. 필자는 이 방식이 전쟁의 용병술과 관련이 깊고 귀곡자의 전략과도 유사하다고생각합니다. 거백옥은 "겉으로는 그를 따르는 척하되 마음속으로는 그와화합하면서 그를 감화시키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形莫若就, 心莫若和)라고 충고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전략을 펴는 것입니다.
적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것을 이용해 적이 그것을 따라 반드시 움직이게 만든다. 故善動敬者, 形之, 敵必從之.(『손자병법』 「세」)이는 전쟁에서 적에게 이점이나 허점을 보여 적을 유인하는전략적 배치를 형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백옥이 말한 겉으로는그를 따르는 척한다‘는 말은 전술에서 상대를 유인하는 전략적 배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거백옥이 지적했듯이 이런 전략적 배치를 하더라도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적일지라도 감동하며 수용할 정도로 멋있는정치 행위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멋있는 정치적 술수, 깍듯한예의를 갖추면서도 엄격한 비판을 갖춘 언어, 우회적이고 암시적이면서도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촌철살인의 감각, 상대를 불쾌하지 않게 하면서도 유머가 넘치는 비판적 언어는 도대체 어디에서볼 수 있을까요? 냉소와 조소, 원한과 증오가 섞인 말만 넘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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