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의 조건은 슬프게도 마이클 영의 예견을 뒷받침한다. "능력을지나치게 따지는 사회에서는 많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평가하기가 어렵다. 하층계급이 이처럼 도덕적으로 취약해진 적은 없다." 18이는 또한 존 가드너가 1960년대 초에 했던 ‘탁월함‘에 대한 언급과교육의 인재 선별 기능에 대한 으스스한 기억을 소환한다. 능력주의의악영향을 인정하면서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모든 젊은이가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은,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언제나고통은 존재하며, 존재해야만 한다.
Rednecks
주로 미국 남부의, 가난하고 학력이낮은 노동자의 보수적 성향을 조롱하는 비하적 표현, 햇빛에 노출되어일하다 보니 목 부분이 시뻘게 달이올라 있다 하여 붉은 목이라 부
자유주의자들이 분배적 정의에 찍은 방점은 오직 GDP를 늘리는 게최선이라는 입장에 적절한 균형추가 된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는 전반적인 번영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그리고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도 염두에 둔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GDP 증대를 위한 정책들(가령 자유무역협정, 저임 국가로의 노동 아웃소싱 등등)은 승자가 패자에게 적절히 보상을 해줄 때만 정당하다. 예를들어 세계화의 득을 본 기업과 개인의 증대된 이익은 세금을 통하여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직 노동자들의 직업 훈련 지원비로 쓰여야한다.
오늘날 그런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로버트 케네디 이후수십 년이 지나자 진보는 공동체 애국심, 일의 존엄성 같은 것을 대체로 내버렸으며 대신 사회적 상승의 담론만 주구장창 틀어놓고 있다. 임금 정체, 아웃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못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거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엄청 기운이 나는 조언을 해준다.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당신이 배운 것에 달려 있답니다. 하면 됩니다!"
고속 금융거래 말고도 그 경제적 가치가 의심스러운 금융 혁신 사례는 많다. 투기자들이 아무런 생산 활동 없이 선물 가격에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신용파산스왑 CDS, Credit Default Sweps은 카지노 도박과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은 진다. 돈은 한 쪽에서 다른쪽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투자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기업이 이익금을 활용해 연구개발에 투자하거나 새로운 장비를 구입하는 대신 자사주를 매입하면 주주들은 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업의 생산력은 전혀 발전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그것은 경제성장을 돕기보다 방해하는 데 금융 활동이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도덕 및 정치적으로 그것은 ‘시장이 금융계에 주는 막대한 보상‘과 ‘그것이 실제 공동선에 거의 기여하지 않은 것‘ 사이의 큰 불일치가 있다는 의미다. 이런 불일치에다 금융 종사자들이 투기 활동을 하면서도 분에 넘치는 명성을 누리는 현실은 실물경제에서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존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우리를 이끌어간다.
능력주의의 폭정 속에서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는 공정성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성공과 실패 또는 승리와 패배를 어떻게정의하는가도,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승리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도 문제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체로 외면 받고 있으며, 우리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전까지는 그 문제를 다루지 않으려 한다.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 환경을 넘어 길을 찾으려면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의 의미는 지난수십 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직업의 귀천 없음을 무너뜨리고, 많은 이들이 엘리트는 교만하다고 여기게끔 달라지지 않았던가? 세계화의 승리자들이 자신들은 얻을 만한 걸얻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그리고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지도록 바뀌지 않았던가? 엘리트층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를 위험 수준까지 밀어내게 될 때, 능력에 대한 의문은 특별히 중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 서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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