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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평점 :
존경하는 작가들이 극찬하는 <윌리엄 해즐릿>에 대한 서평을 보면서 약간은 삐딱한 시선으로(질투를 느끼며) 책 읽기를 시작했고, 결론- <질투에 관하여> 챕터에서 쉼 없이 뚜까맞았다.하하 이런 것도 질투고, 저런 것도 질투고 진퇴양난이다.
결국에 질투라는 감정은 과도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아- 나는 자기애가 넘치는구나(?)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자격지심을 안고 <학자들의 무지에 대하여> 챕터를 읽고 - 나는 쉽게도 설득되고 책 속의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옮기는 무지한 학자가 되어있었다. 덕분에(?) 질투라는 감정은 잠깐 보류해둘 수 있었다. (이거 책 순서가 일부러 이런거야? 완전 밀당의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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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즐릿의 신랄한 비평에도 기분이 나빠지기는 커녕(아 물론 순살이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평했던것처럼 “그래,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 건 왜일까. 이상하게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사실 그가 이야기하는 혐오, 죽음, 질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 학자들의 무지, 맨주먹 권투
이런거 말고, 그가 생각하는 ‘사랑’ ‘아름다움’ ‘우정’ ‘숭고함’ 이 너무 궁금해졌다.(다른 글 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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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가 기어간다. 이 카펫을 들어올려야 거미의 길을 막지 않을 수 있는데, 그는 여기서 ‘혐오’의 감정을 떠올린다. 자신이 거미를 혐오스러워한다는게 아니라, 이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거미를 잡아 죽이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혐오란 무엇인가 궁금해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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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걸 떠올리는 해즐릿을 상상해보면,
일단 거미를 죽이려드는 사람들은 왜 그런건지 궁금해하는것 아닌가? 거기엔 눈 앞에 있는 생물에 대한 연민- 그리고 혐오라는 감정을 갖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걸텐데, 뭉뚱그리자면 생명에 대한 애정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묘하게 따돗하다.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했지만,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밑줄을 많이 그었던 챕터가 <학자들의 무지에 대하여>였다. 결론은 "책 좀 그만 읽고 움직여 이 바보야!"였다.
그렇다, 나는 우리 삶에 필요한 도구, 삶을 지탱하는 것들(물리적인 것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말만 할 줄 알지, 쇠를 달굴 줄도, 전기를 연결할 줄도 모른다. 이런걸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지??
자연스럽게 '조연'으로 여겼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언니네 산지직송에서 안은진 배우가 함께 일한 할머니의 성함을 물어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때 순식간에 주인공이 바뀌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보이고,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우리 삶을 떠받치는 것들에 대해 너무나 피상적으로 바라보고, 내멋대로 단순하게 치부해왔구나- 생각했다.
<학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국 삶을 내 발로 살아야 한다.
"인생의 실천과 경험이 이론보다 낫다는 걸 그는 이해할까?"
"무엇보다도 어떤 시대에나 대중에게는 학자에게 없는 상식이 있다. 대중은 스스로 판단할 때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만 눈먼 안내자에게 판단을 일임할 때는 그릇된 길로 간다. "
"책은 자연을 바라보는 안경으로 쓰이기보다는, 시력이 약하고 나태한 성향의 소유자들을 위해 자연의 강렬한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차단하는 막으로 곧잘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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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그만! 이라고 소리치고 보니, 태어나 처음으로 권투나 레슬링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주먹이 눈앞을 가르는 두려움을 내가 이겨낼수 있을까.(내가 이런 걸 가정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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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생각으로 이미 권투 한판 끝냈다. 난 아마 못할것이다-라고 쉽게 결론을 낸다. 지긋지긋한 [학자]의 굴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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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즐릿 그가 말하는 순서대로 나는 혐오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 거슬리는 사람, 무지한 학자,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 권투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책으로 끝내지 말자고 조용히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