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 - 평범한 대한민국 여자가 유럽에서 일으킨 기적
켈리 최 지음 / 다산3.0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 마트와 협약하여 초밥 도시락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7년 만에 유럽 10개국에 700여 개의 매장을 열었다. 며칠에 하나 꼴로 새로룬 매장이 계속 생겨난 셈이다. 6년째인 2016년에는 연매출 4천억 원을 올렸고, 이 책을 쓰고 있는 2017년에는 5천억 원을 넘길 전망이다. 파리시의 벤처기업 프로그램에서 지원 대상이 된 수십여 개 회사 중 매출액과 직원 수, 성장 속도 면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해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런 성과 덕에 2015년에는 프랑스의 경영대학원 석사과정 교재에 나의 회사인 켈리델리와 내 이야기가 성공 사례로 실리기도 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켈리델리의 성공 스토리

 

저자 켈리 최는 유럽 10개국에서 매장이 며칠에 한 개씩 만들어지고, 창업 7년 만에 연매출 5천억 원이라는 고속 성장을 이룬 글로벌 기업, 켈리델리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현재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공을 이룬 여성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수년 전 첫 사업의 실패로 10억 원의 빚더미에 앉아 후배와 만난 자리에서 '저 커피값은 누가 내는 거지?'를 고민했을 만큼 힘겨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무일푼으로 인생 제2막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2년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와 공부는 다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사업 공부에 매진하며 세운 회사, 켈리델리는 2017년 현재 유럽 10개국에 70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으며,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한 혁신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그녀는 '행복'을 1순위로 삼고 이를 기업문화에도 적용하여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직원, 가맹점주, 파트너사, 고객, 나아가 전 인류까지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늘 고민하며 이를 실천하고 있다.

 

 

 

 

2년간 마트 직원보다 더 자주 마트로 출근했다

 

누군가가 저자에게 "지금 다시 첫 사업을 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주저없이 가장 먼저 '공부'를 할 것이라고 답하겠다고 한다. 사장에게는 사장에게 맞는 공부가 있다. 그녀는 켈리델리를 시작하기 전에 10억의 빚, 실패자라는 낙인에 억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끔찍한 과거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그렇게 대략 2년에 걸쳐 철저히 시장 조사를 하고 차별화 방안과 전략을 세웠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나는 요식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유통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심지어 초밥을 만들 줄도 몰랐다. 게다가 경영자로서의 소양도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콘셉트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었기에 2년이라는 준비 기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센강에서 나는 죽었다

 

주변에서도 큰돈을 벌어봤거나 높은 지위에 올랐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 중에는 기회가 와도 잡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신을 한 칸 내려놓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계속해서 불행에 빠뜨리는 선택을 한다. 어차피 과거의 부귀영화는 지금 당장 돌아오지 않는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내가 아닌 현재의 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하고, 나를 한 칸만 더 내려놓고 작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기준 없는 사업은 모르는 사람과 하는 결혼과 같다

 

사업은 '결혼'과 닮은 점이 많다. 자기 자신과 잘 맞는 배우자와 결혼해야 행복하게 잘살 수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해야 즐겁게 일하면서도 성과도 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결혼할 상대를 찾을 때 남의 말만 듣거나 무턱대고 다른 사람을 따라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사업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움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사업 준비를 하다 보면 도움을 요청해야 할 일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그러나 많은 사업가가 초창기에 다른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 좋은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지고도 실패하기도 한다. 이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내밀어야 물에 빠진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행운이 생기는 법이다.

 

 

 

 

행동에 나서라, 그러면 기적이 찾아온다

 

당신이 어디에 있건, 어떤 학교를 나왔건, 나이가 몇 살이건, 어떤 일을 하고 있건 누구나 꿈을 꿀 권리가 있고, 기적과 만날 자격 이 있다. 기적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돈이 없어서, 나이가 많아서, 시작이 부족해서, 여자라서 등등 이는 결코 이유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 경영대학원 교재에 혁신적 경영 사례로 실린 저자의 성공을 통해 우리들은 뜨거운 가슴을 느끼게 된다. 자, 이젠 우리 모두의 차례다. 자신만의 미라클 여정에 나서보자. 특히, 청춘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기존 문명의 보존에 열을 올리는 사이, 스마트폰 문명의 놀라운 혁신성을 이용해 신문명을 창조한 새로운 종족이 미국 대륙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10년 만에 이 새로운 문명은 전 세계로 확산되며 인류 문명 교체를 현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종족이 바로 '포노 사피엔스',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인류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스마트폰 신인류 시대가 도래하다

 

이 책의 저자 최재붕성균관대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 교수이자 비즈모델 디자이너이다. '문명을 읽는 공학자'로서 비즈니스 모델 디자인과 기계공학의 융합, 인문학 바탕의 동물행동학과 기계공학의 융합 등 학문 간 경계를 뛰어넘는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4차 산업혁명 권위자이다. 성균관대 기계공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워털루대학교에서 기계공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는 IT기술 발전을 이끄는 엔지니어로 활동하던 중, 2005년 최재천 교수와의 융합디자인 공동연구를 계기로 ‘인류의 진화’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이는 어떤 기술이 성공하고, 어떤 기술이 실패하는지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에 답을 주었다. 그 이후 디지털 기술로 인한 많은 변화를 '사람의 본질', '사람 중심'으로 접근하는 공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화론, 심리학, 디자인, 인문학 등을 인류의 진화에 접목하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의 등장이 인류에게 가져온 변화가 매우 급격하고 충격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모든 현상을 분석하게 되었다.

 

2014년부터 기업, 정부기관, 교육기관 등을 대상으로 '4차 산업혁명과 포노 사피엔스'에 관한 강연을 1,200회 이상 해오면서, 새로운 인류 문명이 일으키고 있는 혁명적 변화와 실상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당면한 혁신 방안을 제시했다. 또 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세바시' 등의 TV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늘려가며,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위기보다는 기회를 볼 수 있도록, 혼란스러움보다는 현명함을 지니고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장(포노 사피엔스, 신인류의 탄생)에서는 포노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 기원과 포노 사피엔스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문명에 대해 정리했다. 제2장(새로운 문명, '열광'으로 향한다)에서는 포노 사피엔스들의 변화가 만들어낸 시장의 변화를 각 분야별로 분석했다. 제3장(온디맨드, 비즈니스를 갈아엎다)에서는 포노 사피엔스 문명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제4장(지금까지 없던 인류가 온다)에서는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필요한 인재상에 관해 기술했다.

 

 

 

 

신인류의 탄생

 

2015년 3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스마트폰의 행성'이란 기사를 통해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즉 스마트폰 없이 살 수 없는 새로운 인류 문명의 시대가 왔음을 거론한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장 이 책을 덮고 다른 일로 갈아탈 것을 제안한다. 지혜가 있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사피엔스에 비유해 <이코노미스트>는 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2007년, 청바지를 입은 스티브 잡스'아이폰'을 들고나와 소비자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할 때만 해도 이런 변화가 닥칠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티브 잡스 본인도 이런 빠른 속도를 감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온 10년 사이에, 전 인류의 생활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부를 만한 급변을 맞이하고 있다. 즉 일상 자체가 이미 혁명이다. 예를 들어, 요듬 우리들은 은행가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은행 업무는 스마트폰으로 해결가능하기 때문이다. 유통도 마찬가지다. 굳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매장까지 가지 않더라도 모바일 쇼핑이 가능하기에 말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소비 행동의 패턴이 바뀐 탓이다.

 

전 세계 인구의 약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스마트폰 사용자는 모두 포노 사피엔스에 속한다. 여기엔 사용 수준에 따라 등급이 있다. 단순히 전화기 사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레벨1에서부터 스마트폰으로 은행업무나 일정 관리, 게임과 SNS를 즐기는 레벨5, 나아가 시스템을 개발하고, 필요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레벨10까지로 분류할 수 있다.

 

 

스마트폰의 일생

 

스마트폰의 대명사 아이폰은 소위 다문화 가정의 출생아다. 이들의 탄생에서부터 소멸될 때까지의 일생을 살펴보자. 미국 캘리포니아 애플에서 디자인을 통해 탄생한 아이폰은 세계 수백 곳에서 제작한 부품을 중국, 베트남 등에서 조립하여 항공기를 타고 이동한다. 이 단계가 청소년기인 셈이다. 이후 유저들의 손에 넘어가서 메신저, SNS, 뉴스검색 등을 수행한다. 이 때가 청년기인 데, 한국인들은 하루 평균 329분 동안 사용한다고 알려진다.

 

대체로 아이폰은 2.92년을 사용하면 장년기에 접어들고 중고폰 시장에 진출하거나 중고폰을 사용하는 지역으로 수출된다. 최종적으로 더 이상 사용이 곤란한 노년기에 들면 주요 부품인 디스플레이, 메모리칩, 카메라 등은 재활용되고 금, 구리, 마그네슘 등은 제련소로 향해 소위 장기기증을 하면서 생을 마친다. 이는 디지털 기기로서의 스마트폰을 살펴본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산업 지도의 변화라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활용되었다는 점이 매우 의미있는 통찰이다. 결국 이 기적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바로 이 책이 언급하는 '포노 사피엔스'이다.  

 

 

불편해도 재미있으면 선택한다

 

우버의 창업자 트래비스 캘러닉은 P2P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회사를 차렸다. 창업 10년만에 겨우 작은 성공을 거둔 그는 그 자금으로 아주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게임방식으로 택시회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곧 망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 하나의 성공 요인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택시 서비스는 장장 100년이 넘게 큰 변화 없이 지속될 정도로 너무나 간단하고 편리해서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손만 들면 탈 수 있고, 미터기에 나온 숫자에 따라 요금만 지불하면 되는 서비스였다.

 

그런데, 우버는 아주 미묘한 차이를 경쟁력으로 강조하기에 게임 같은 즐거움을 주는 자신들의 방식이 결국엔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이 강조한 게임의 경험이란 도대체 뭘까? 우버는 서버에 샌프란시스코의 디지털 맵을 올려 '게임판'으로 사용한다. '택시를 타고 싶은 게임 참여자'들은 앱을 다운받아 가고 싶은 위치를 표시한다. 이때 게임판 위에 버튼이 올라온다. '택시 서비스를 제공할 게임 참여자'는 이 버튼을 눌러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 용어로는 '득템'이 된다.

 

게임이 시작되면 내비게이션이 켜진다. 내비를 보고 있으면 뇌는 게임으로 인지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손님을 만나러 간다. 마치 게임을 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우버를 부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 게임하는 마음으로 대화하며 목적지로 간다. 이들은 아이폰 사용자들이다. 당시 아이폰 사용자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대화도, 차를 타는 방식도 모두 새롭고 신선하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다. 게임하듯 내비만 따라가면 되니까. 목적지에 도착하면 요금도 내지 않는다. 게임 안에서의 결제는 게임기가 알아서 해준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저 GG(Good Game) 하는 마음으로 내리면 된다. 우버가 물어본다. 이 기사님은 친절했느냐고. 거기에 대답만 해주면 그뿐이다. 달랑 이 차이이다. 이 경험이 너무 재밌기 때문에 사람들이 택시대신 우버를 탈 거라고 자신한 것이다. 진짜 그랬을까? 놀랍게도 '달랑 이 차이'가 소비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너도나도 우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CD가 필요한 소비자는 떠나주세요

 

2017년까지 완료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대규모 구조조정 방향은 명백하다. 우선, 오프라인 영업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클라우드 서비스 조직을 크게 확대했다. 요즘 판매되는 노트북에는 CD 리더기 자체가 없다. 그러니 CD를 판매하러 다니는 영업 조직을 해체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섭다. '나는 인터넷도 사용할 줄 모르지만 컴퓨터는 써야겠으니 윈도우와 MS오피스 CD를 달라'는 소비자에게 이제 그만 떠나달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니까.

 

이는 앞으로는 거대한 클라우드 서비스를 기반으로 모든 소프트웨어를 제공할 테니 소프트웨어 설치부터 업그레이드, 요금 지불까지 인터넷 문명을 잘 아는 사람만 쓰라고 선언한 것과 같다. 쉽게 말해, '앞으로 우리는 포노 사피엔스만 상대하겠다'고 발표하고 그걸 실천했고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마이크로소프트가 기존 기업들에게 전하는 생존 전략이다.

 

 

GM, 무인택시에 투자하다

 

미국 제조업체의 상징이자 자동차 제조회사인 GM은 2016년 우버의 경쟁 기업인 리프트에 5억 달러(약 560억 원)을 투자했다. 그리고 2017년 한국의 군산공장을 폐쇄해버렸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심각한 배신이다. 어마어마한 일자리가 날아가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중차대한 문제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소비 변화의 데이터를 살펴보면 GM의 행보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난 10년간 우버와 리프트의 성장으로 미국의 택시시장은 무려 1.5배 성장했다. 편리한 서비스에 매료된 소비자가 뜨겁게 반응하면서 만들어낸 변화임에도 이는 엉뚱하게도 자동차산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차량 공유택시와 공유서비스에 익숙해진 미국의 10대와 20대가 차를 구매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친환경 차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일반 자동차를 생산하는 GM의 입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다급해진 GM은 리프트에 거액을 투자해 2025년까지 무인택시를 공동 개발하겠다고 선언한다. 자동차 제조기업에서 이제는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빌리티기업으로 전환하겠다고까지 이야기한 것으로, 생존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롤드컵, 올림픽의 8배 시장효과

 

2017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롤드컵(리그오브레전드 월드컵챔피언십) 결승전. 우리나라의 SKT T1팀과 삼성 갤럭시 팀이 맞붙은 이 경기의 시청자 수는 몇 명이었을까? 온라인으로만 방송되었던 이 게임의 시청자수는 무려 8천만 명에 달했다.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 하나의 이벤트로 8천만 명의 시청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종목은 그리 흔하지 않다.

 

전 세계 겨울 스포츠의 꽃이라고 불리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시청자 수도 천만 명에 불과했으니 충분히 비교될 것이다. 숫자로 보자면 게임산업은 이미 엄청난 스포츠산업으로 성장했다. 북미에서는 시장 규모로 추산할 때 미국 4대 프로 스포츠 중 하나인 아이스하키를 이미 넘어섰다고 말한다. 그만큼 e-스포츠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제 포노 사피엔스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전자오락이라고 폄훼하는 베이비붐세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패스트 팔로워 전략

 

지금껏 한국 경제가 제조기술을 발전시킨 전략은 바로 패스트 팔로워였다. 늘 선진국의 케이스를 벤치마킹한 모델이었고, 이보다 좀 더 나은 스펙을 구축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만드는 도전에 나설 필요성이 없었다. 창조적 도전은 대부분 실패로 결론이 났으므로 한국 경제엔 이런 방식이 맞지 않는 옷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이젠 소비의 방식이 달라졌다. 광고 기반의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고 팬덤 소비가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다. 이젠 상품의 기획부터 유통까지 새로운 소비 시스템에 맞춰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제조 선진국인 독일과 일본에서는 인더스트리4.0을 통해 제조의 자동화와 지능화를 추진 중이다. 스마트팩토리는 대표적인 제조 혁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독일의 아디다스는 스마트팩토리의 상징으로 불리는 새로운 개념의 신발공장 '스피드팩토리'를 독일에 세우고 시범 생산을 시작했는데, 이 공장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의 소비 개념에 맞춰 온디맨드 생산을 실현한 사례이다.

 

온디맨드란 모바일과 같은 정보통신기술 인프라를 이용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요즘 소비자들은 음악도 듣고 싶은 때 언제든 스트리밍앱이나 유튜브를 틀어 듣는다. 영화도 폰으로 보고, 옷과 신발도 디지털 플랫폼에서 원하면 언제든 구매할 수 있다. 이 모든 게 온디맨드 활동인 것이다.

 

 

 

 

혁명의 시대, 결국 답은 '사람'이다

 

한국은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디지털 대국으로 성장했다. 즉 스마트폰, 컴퓨터, TV를 비롯한 가전제품 등을 자국에서 직접 생산하여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세계 몇 안 되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지정학적인 취약으로 지하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대국도 아닌 반도의 작은 나라가 동족 상잔 전쟁을 거치면서 국토가 황폐화된 비극을 딛고 선진국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람' 때문이었다. 지구촌 경제에 닥친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 경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차 혁명시대의 방향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 - 고전에서 찾아낸 뜻밖의 옛 이야기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실록 밖에도 역사의 원천은 무수하게 존재한다.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학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사대부들은 개인 문집 등 방대한 저작물을 양산해냈다. 시와 수필, 상소, 행장, 비문 등 형식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정치, 제도, 과학, 역사, 세태, 풍속 등 다루는 분야도 실로 광범위하다. 이들 저작에는 실록에서 다루지 않은 사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더러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경우도 많다. 양반 사대부만 기록을 남긴것도 아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이에 따라 신분제도가 완화되면서 일부지만 여성은 물론, 중인 이하의 하층민들도 기록물을 생산하여 우리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 '머리말' 중에서

 

 

실록 밖의 기록물에서 찾은 감춰진 역사

 

이 책의 저자 배한철은 구미 출신으로 1995년 〈매일경제〉에 입사했다. 정부 부처를 출입하면서 정책 기사를 주로 써왔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경영학으로 내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저널리즘이 유명한 미국 미주리대학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오랜 꿈은 역사학도였다. 당시에는 역사가 단순히 연대를 나열하고 사건이나 제도를 암기하는 지루한 과목이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국사 선생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수업을 진행함으로써 그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2012년 우연찮은 기회에 문화재 관련 취재를 맡으면서부터 묻어두었던 역사학도의 꿈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와 네이버에 한국사와 고미술, 고전 등을 주제로 다양한 칼럼을 쓰고 있다. 역사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를 위해 오늘도 고전과 문화재를 찾아 기자수첩을 들고 박물관과 종갓집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사 스크랩>(2015년 세종도서 선정), <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2016년 이달의 읽을 만한 책 선정, 2017년 세종도서 선정) 등이 있다.

 

조선 왕조는 '기록의 나라'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는 명예로운 기록물을 남겼다. 즉 조선은 왕이 죽고나면 왕이 재위했던 기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왕조실록으로 후손들에게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가치를 알아본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했는데, 이는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0여 년 동안 시간순으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1893권 888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역사서다. 이를 역사학계에선 '정사正史'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비교적 객관적인 사료로 평가받는 '정사'만이 올바른 내용일까? 소수의 사관들이 저술한 이 기록물이 과연 형평성에 기울지 않고 정확성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파로 나뉘어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표출했던 시대상을 감안해 볼 때 자기 편에게 유리한 내용을 다루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예로 저자는 임진왜란 대 전소된 경복궁을 거론한다. 실록은 한양에 침입한 왜군들이 궁궐을 약탈하고 불태웠다고 기록한다. 반면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 저술한 <송와잡설>에는 왕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 백성들이 몰려나와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고 말한다. 진정 올바른 역사는 무엇인가? 이 책은 48권의 고전에 기록된 우리의 역사를 들춰내고 있다. 

 

 

    

 

 

세종의 황당한 돌출행동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세종은 궁궐에만 머물며 집현전 학사들과 한글 창제에 몰두했을까? 그렇지 않다. 세종도 밖에 나다니길 좋아해서 한 달 이상 궁궐을 비우기 일쑤였고, 술에 취한 날이 많았다. 믿기지 않은가? 선조 때의 문신 박동량의 야사집 <기재잡기>에 따르면 세종은 친히 안성, 평택, 용인, 여주, 이천, 경기 광주 등지로 사냥을 다녔는데 한 달이 지나서 환궁했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당한 돌출행동도 있다. 죽천 이덕형은 <죽창한화>에서 세종이 형 효령대군의 증손녀를 지방의 한미한 집안 선비와 강제로 결혼시킨 비화를 거론한다. 세종은 여러 대군, 왕자들과 함께 제천정(한남동에 있던 정자)에서 잔치를 벌였다. 마침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강을 건너느라 강어귀가 꽉 찼다. 세종은 그들 중 유독 의관이 남루하고 얼굴이 수척한 한 유생을 불러오게 했다. 세종은 예를 다해 선비를 맞고 이름을 물었다. 선비는 "영남의 현석규"라고 답했다.

 

세종은 주위를 둘러보며 "여기 누가 혼기를 맞은 여식이 있소"라고 물었다. 형인 효령대군이 나서 "제 손자 서원군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세종은 "만일 사위를 얻으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효령대군은 "가문이 대등하지 못하다"고 거절했지만 세종은 "영웅이나 호걸인 선비들이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 선비집 아들과 정혼하도록 하시죠"라고 고집을 피워 결국 혼인이 성사됐다.

 

다행스럽게도 현석규는 훗날 세조 때 별시 문과에 을과(3등급 중 2등급)로 급제, 이후 정2품 우참찬까지 벼슬을 했다고 한다. 과연 세종의 안목이 남달라서 백 보 밖에서 우연히 한번 본 사람을 영웅이나 호걸로 판별할 수 있었을까? 결코 믿을 수 없는 행동이다. 명문가의 훌륭한 자제들도 많았을텐데, 왜 시골뜨기를 강압적으로 사위로 삼게 만들었는지 세종의 진의를 알 길이 없다. 

 

 

선조는 반전 종결자였다

 

조선사에서 선조만큼 무능한 왕은 없다. 정치적 판단에서 오류를 범해 임진왜란을 자초했던 왕이었으며, 왜군이 한양까지 올라오는 상황이 생길 것 같으니까 광해군에게 임시 왕을 임명하고 자신은 도성과 궁궐을 버리고 명나라로 피난길에 나선 군주였다. 학교에서 이렇게 국사 공부를 받았으니 이게 전부인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선조의 뜻밖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다.

 

심노승의 <자저실기>에 따르면, 명나라에서 '동방문사東方文士'로 칭송받던 차천로가 젊은 시절 과거시험 감독으로 참여해 고향 사람의 답안을 대신 써주었다가 들통나고 말았다. 더구나 이 사람은 장원으로 뽑혀서 상황이 심각했다. 선조는 차천로를 함경도로 축출한 후, 북병사에게는 따로 "재주가 아까우니 잘 대우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선조는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율곡 이이는 "(선조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외모가 깨끗하고 빼어나다"고 묘사했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선조는 학문을 즐겨 웬만한 학자들보다 학식이 높았다. 명종도 하성군(선조의 왕자 시절)을 볼 때마다 "덕흥(선조의 친부, 명종의 이복형)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며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선조는 '도학군주道學君主'를 자처하면서 경연에 나오기를 즐겼다. 경연에서 던지는 질문이 날카롭고 깊이가 있어 강관들도 강의를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박순은 시강하고 나오면서 "임금은 정말 영명한 군주"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석담일기>는 서술했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조상으로 유명한 노비 반석평의 일화도 소개한다.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성품이 바르고 영특했다. 재상은 그 재주를 아껴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글을 가르쳤으며 반 씨 성을 가진 부잣집에 입양시켰다. 반석평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이 정2품 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

 

반면, 재상집은 재상이 죽은 뒤 몰락한다. 반석평은 재상의 자식들을 거리에서 만나자 마차에서 내려 절을 올렸다. 반석평은 그러면서 나라에 글을 올려 국법을 어기고 벼슬에 오른 죄를 스스로 실토하면서 처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를 오히려 의롭게 여겨 후하게 장려하고 국법도 파기했다. 이에 대해 유몽인은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인재는 중국의 천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데도 이들 가운데 신분이 천한 자는 벼슬을 못하게 견고하게 막고 있으니, 이는 사대부들이 편협하고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존경받는 정승, 밤에는 희대의 호색한

묵재 홍언필(1476~1549년)과 인재 홍섬(1504~1585년)은 '부자父子 영의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묵재 홍언필은 재물을 멀리한 원칙주의자였다. 자식들조차 옷을 갖추지 않고서는 만나지 않을 만큼 법도를 엄격히 지켰다. 선조 때 영의정을 3번이나 중임한 아들 홍섬 역시 경서에 밝았으며 가풍을 이어받아 검소하기까지 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고금소총>에는 이들 부자의 전혀 다른 모습이 소개된다. 호색한好色漢인 홍섬은 여종들과 무분별하게 어울렸다. 한여름 밤 여종들이 방에 흩어져 자고 있었는데 그는 알몸으로 자신의 방에서 몰래 나와 평소 눈여겨보았던 여종을 찾기 위해 여종들의 방을 살금살금 기어다녔다. 인기척 소리에 잠이 깬 아버지 홍언필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들이 장성한 줄 알았더니 이제 막 기어가는 것을 배운 모양이구나"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홍섬은 놀라 달아났다. 색을 밝히는데 벼슬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모자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

 

한국드라마가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동시 개봉한 사극형 좀비물인 <킹덤 시즌1>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드라마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뜻밖에 해외팬들의 반응은 극중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모자에 주목한다는 반응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분차별이 명확했기에 사용하는 모자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가히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식사를 할 때도 겉옷은 벗더라도 모자만은 반드시 썼다. 그런데 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덕무의 <앙엽기>의 한 대목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 기우뚱거릴 때 조그마한 배 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르고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남의 눈을 다치게 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난쟁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중략)… 역관들이 연경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가다 비를 만나면 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모자만 쓰고 가니...."

 

모자를 중시하는 풍습이미 고려 때도 존재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인은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를 죄수와 다름없다고 수치스러워했다.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죽관竹冠을 만들어 썼다"고 기록했다. 풍습은 생활양식이기에 폐해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건강식으로 평가받는 한국의 쌈

 

드라마와 K-POP으로 촉발된 '한류'라는 문화 코드가 이젠 한국음식, 한복, K뷰티 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문화란 국경이 없는 무형의 자산임에 틀림없다. 이미 우리나라의 사료에 따르면, 중국의 사신들은 한반도로 다녀가는 걸 선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 좋고, 공기 좋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을 수 있으며, 금수강산으로 풍치도 뛰어났으니 말이다. 

 

세계인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한국인의 은 독창적이면서도 건강에도 좋은 식품이다. 우리의 쌈 문화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상추는 쌈 문화의 대표주자이다. 상추라는 말은 채소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뜻의 '생채生菜'에서 유래한다. 고구려인들이 상추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고구려의 상추씨가 중국에서 인기 절정이었다고 서술한다.

 

"고려국 사신이 오면 수나라 사람들이 채소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후하게 쳐줘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치다. …(중략)… 고구려 사람들은 생채로 밥을 싸 먹는다"

 

 단원의 <풍속도첩> 중 '점심'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체험기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1851~1921년)는 자신이 모셨던 명성황후고종을 비롯한 여러 왕실 인물들의 비화를 소개한다. 그녀는 기독청년회YMCA와 연세대학을 설립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다. 사실 그녀는 조선인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는 그녀의 저서 <상투튼 사람들과 한께한 15년>(1904년)에 소개되었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노동자이다"

 

고종 32년(1895) 위세를 떨치던 콜레라가 잠잠해지던 10월 8일, 경복궁에서 엄청난 참극이 발생한다. 그날 새벽 언더우드 부인은 대궐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그리고 왕비가 죽었다. 공격 부대는 총을 쏜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대궐 안으로 쳐들어갔다. 의화군(의친왕)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에게 간청했지만, 대비를 홀로 남겨두고 갈 수 없다면서 의화군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정병하"두 분 전하(고종, 명성황후)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언더우드 부인은 정병하를 가리켜 "천한 사람이 왕비 덕에 출세하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암살자의 하수인이 됐던 것"이라고 했다. 적의 무리는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 찔러 죽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나이 공부 - 나이 듦에 대한 희망의 여정
토마스 무어 지음, 노상미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나이가 든다는 말을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사람이 되고 점점 더 자신이 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나는 치즈와 와인을 떠올린다. 어던 것은 그냥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 그런 것들은 준비가 될 때가지 함쪽에 가만히 두면 된다. 그럼 시간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내부의 연금술이 작용해 맛과 향을 부여하면서 좋아진다. - '서문' 중에서

 

 

점점 더 사람이 되자

 

이 책의 저자 토마스 무어세계적인 영성 지도자이자 심리치료사다. 그의 저서 <영혼의 돌봄>은 뉴욕타임스에서 46주 연속 1위를 기록한 베스트셀러였며, 그밖에도 <영혼의 종교>, < 섹스의 영혼>, < 영혼의 오푸스, 일의 즐거움> 등 스물네 권의 책을 썼다. 그중 세 권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서상'을 수상했다. 또한 융 심리학, 원형 심리학, 신화, 상상력, 예술 분야에서 많은 글을 발표해왔다.

 

그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한때 수도사였고 음악가였으며 대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심리치료사가 되었다. 열세 살 때 집을 떠나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고 드폴 대학교에서 음악과 철학을 접했으며 미시간 대학교에서 음악학 석사를, 윈저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를,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종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철학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았고 많은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삶의 부정적인 요인들도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그의 글과 책들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자기 내면에 잠자고 있는 영혼을 일깨우고 영적인 삶의 길을 찾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현재 그는 영성, 심리 치료, 생태학 등을 주제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나이로는 분명 노인인데도 세상과의 상호작용은 여전히 미성숙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공감도 사회도 알지 못한다. 타인에게 가슴을 열 줄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생긴 분노나 힘든 감정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많은 경험을 해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결코 허물을 벗지 못한 애벌레 상태로 머물기 때문이다. 해는 바뀌지만 이들의 나이는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나이를 잘 먹으려면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을 받고 변해야 한다. 감화를 받지 않고 인생을 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도 못하고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들은 나이가 들지 않는다. 비록 활동적이라 해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연결되지 못한다. 진정으로 나이가 든다면 깊은 맛을 보게 되므로 영혼의 선물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나이가 드는 것이 즐거운 경험이다. 

 

 

 

 

나이 드는 단계

 

나이 드는 단게

 

1. 불멸의 느낌

2. 나이 듦의 첫맛

3. 성인으로 자리 잡음

4. 노년으로 이동

5. 세상만사 순리대로

 

태어나서 25년 가량은 나이 생각을 별로 하지 않으며 끝을 상상하지도 않는다. 그러다 젊음이 지나가버리면 그 첫맛은 일종의 충격이다. 그다음 단계는 몇 년이 걸리는 점진적 과정으로 인생의 틀을 잡고 어엿한 한 인간이 되는 시기이다. 네 번째 단계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으며 많은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노년을 맞춤 외투처럼 걸칠 수 있다. 그때에는 자신이 어른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 단계는 어찌 보면 불가사의하다. 나이를 잊고 육체적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무덤덤하게 처리하면서 판단이나 다른 제약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생과 나이 먹는 일에 대해 보다 신비롭게 접근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된다.

 

40대 중반인 저자의 동료가 스스로 나이 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리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인쇄물을 읽으려면 팔을 쭉 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작은 비극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그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것은 첫맛의 경험, 젊음에서 빠져나와 더 큰 시간 감각과 인생의 호弧에 대한 자각 속으로 들어가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던 것이다. 인생의 이 중대한 변화, 나이 들고 있다는 이 자각은 처방전을 조정하거나 독서용 안경을 구입하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순간들은 진정한 통과의례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저 이 지구상에서 몇 년 살았는지에 대한 햇수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게 되면 진지하게 인생에 임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또한 이것은 세숼 속에서 젊음의 희망과 야망이 가치 있는 경험과 뒤섞이는 것이다. 한 인간의 타고난 재능과 잠재력이 미묘한 뭔가가 되는 과정이다. 심리학자 은 이를 '개성화'라고, 영국의 천재 시인 키츠'영혼 만들기'라고 불렀다.

 

 

특정 원료를 다루는 법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반성할 때 우리들은 되돌아보며 자신을 과거에 놓는다. 과거는 현재를 유의미하게 해주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쌓아 놓은 저장고이다. 물론 고통이 연상되어 과거가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강해서 이것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돌아보며 반성하는가? 열린 대화를 통해 반성을 한다.

 

융은 영혼을 만들거나 원료를 처리하는 과정에 연금술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원료 자체는 라틴어로 '프리마 마테리아'라고 부른다. 여기서 프리마는 '처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원시原始' 혹은 '날것'이라고 뜻할 수 있다. 보통 우리들은 이를 '원료'라고 말한다. 연금술사는 실제 원료를 모아서 유리 용기에 넣고 다른 물질과 혼합해서 가열하고 관찰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기억과 생각들로 행하는 일이다. 

 

심리 치료는 영혼의 재료에, 즉 기억과 관념과 감정과 관계와 성공과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매우 강렬한 대화 형식이다. 이 모든 것을 반성이라는 용기에 넣고 강렬한 분석으로 가열할 수도 있고 변형할 수도 있게 된다. 우리들은 인생의 재료를 담아 관찰할 수 있는, 그리고 감정적 열기와 변형을 촉진할 수 있는 용기들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반성적인 삶을 사는 데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현대의 삶은 행동이나 행동 계획에 전념한다. 앞으로 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이 아니며 진실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이용하는 것이다. 반성은 평가나 계획에 도움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반성은 그 자체로 우리의 존재 상태를 심화시킨다. 우리는 반성을 통해 더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그러한 변화는 나이 듦의 일부이다. 

 

 

건설적인 힘으로서의 분노

 

나이 들수록 화가 점점 심해지고 빈번해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이렇게 해보라고 저자는 권한다.

 

1. 화를 들여다보자.

2. 과거를 들여다보자.

3. 늘 강해야 한다.

4. '영혼의 힘'과 접촉하자.

5. 분노는 긍정적으로 무엇을 원할까?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우리들은 일반적인 편견, 즉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유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분노는 좋은 목적에 유익할 수 있으며, 분노를 긴장의 타당한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노인을 상대할 때 분노를 좋지 않게 여기는 선입견을 덜 갖게 될 것이다. 노인들은 자신들을 형편없이 여기는 세계를 향해 분노를 표출할 힘이 필요하다.

 

먼저 전반적으로 분노를 긍정적이고 좋은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분노를 포함해 모든 감정은 과장되거나 극단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잠재적으로 모든 감정은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노는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를, 그리고 나서서 불만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분노를 보여주는 이 특별한 영혼의 힘에 나이 제한은 없다.

 

 

외로움과 혼자 있는 것

 

나이 들면서 우리는 유연성과 회복력을 요구하는 통로들을 통과한다. 우리는 잃고 얻으며 또다시 잃는다. 저자가 책에서 계속 반복하는 주제는 나이 듦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그 초대를 받아들여서 몇 번이고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많은 변화가 모여 지켜본 인생이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 된다.

 

혹은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월든>에서 '나는 생각하며 살고 싶어서, 오직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 바라보며 인생이 가르쳐줄 것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는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기 위해서 숲으로 왔다'고 말했던 인생이 된다. 삶이 우리를 나이 들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을 환영하고 그 연금술에, 영혼의 화학적 성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 꾸준한 변화에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나이 먹는다'는 말을 세월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잘 '나이 드는' 와인과 치즈에 관한 말로 이해하면 좋겠다. 이들은 나이 들수록 더 좋아지며, 심지어 나이를 먹음으로써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 인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나이 들 수 있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 변하면서 더 진짜가 되고 더욱 풍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그 모든 작은 죽음들

 

평생 죽으면서 사는 방법 증 하나는 인생에 늘 따르는 '작은 죽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실, 실패, 무지, 좌절, 질병, 우울증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런 경험들은 어떤 의미에서 반反생명적이다. 삶의 과정을 중단시키거나 지연시킨다. 우리들은 그런 경험을 피하고 극복하고 통과하고, 결국엔 그런 경험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또 다른 방법은 그런 경험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이 역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죽음끝남과 실패의 형태로 자주 찾아온다.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활기찬 인생의 과정에 죽음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더 큰 의미에서 죽음은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깊이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은유적 죽음은 우리 삶의 끝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이다. 나이를 잘 먹어서 죽음의 역학에 익숙해지면 병에 걸리거나 오래 살아 실제로 죽음이 닥치고 있음을 알게 되어도 기겁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 노년을 환영하고 귓가에 들리는 죽음의 속삭임을 반길지도 모른다. 죽음은 우리의 일부였기에 다가오는 죽음이 삶을 강렬하게 만들어줄 것임을 아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라

 

나이 듦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나이 들지 않았으면 어떨지 상상하면서 나이 듦을 피하지 말자. 자신보다 형편이 나은 젊은 사람 생각도 하지 말자. 다시 젊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말자. 나이 듦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부정하지도 말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그리고 자신의 나이대로 살자. 잘 숙성된 명품 와인이나 치즈처럼 말이다.

 

"노인이라는 낯설고 무서운 강을 품위 있게 건너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콜드콜 - 행운의 문을 여는 열쇠
이계준 지음 / 더미디어그룹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무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장내를 둘러보니 부산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다음 패널을 준비하기 위해 음향 설비를 황급히 정비하는 주최 측 직원들, 무대 계단을 내려오는 이전 패널 토론자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청중들. 하지만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혼잣말을 반복하며 나 자신을 세뇌하려고 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연봉을 150배로 키운 사나이

 

책의 저자 이계준은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한 후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뉴욕 소재 사모 펀드의 파트너이자 아시아 대표로 재직 중이다. 미국에서는 콜드 콜(cold call: 물건 등을 팔기 위해 임의로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여전히 먹지만 한국에서는 성공 확률이 낮다. 그럼에도 그는 콜드콜을 오히려 "행운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정의한다.

 

그에게 콜드콜은 인생 여정의 순간순간을 잇는 중심축이었고, 매번 뜻한 바를 이루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즉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콘트리트 호스를 잡던 건축기사가 수십억 연봉의 미국 투자사의 고위임원이 된 비결은 단 한가지 바로 콜드 콜이었다. 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전 약속없이 직접 전화해 자신과 상품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말하는데, 미국에선 일반화된 세일즈 기법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콜센터 말곤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건축학도의 선택

 

자기 자신에게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의 열정이 바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교 3학년 때인 1996년 여름부터 친구의 권유로 권투를 시작, 6년 넘게 해왔다.

 

그는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또한 건축물에 내포된 건축가의 인생철학까지도 좋아했었다. 세계 건축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일본인 건축가는 삼류 권투 선수 출신이다. 이런 영향을 받은 저자는 일찌기 권투에 빠진 듯하다. 당연히 그는 권투 산수가 아니라 건축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것이다.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밤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축 설계 수업의 학점은 늘 B였다. 아마도 예술가적 기질과 창의력이 부족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의 성향은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결실을 맺는다는 소신파였다. 마침내 그는 졸업 설계 수업에서 A학점을, 그리고 졸업 작품전 우수상을 거머 쥐었다. 이듬해 '대한민국 건축 대전'에 입선함으로써 건축가의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문전 박대

 

1999년, 그는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는 IMF 외환 위기 이후라 대부분의 기업체들은 대졸 신인 사원 채용 규모를 확 줄이고 있었다. 졸업 동기들은 굴지의 대기업 건설사와 대형 건설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홀로 남겨진 저자는 학교에 나가 취업 게시판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지 않자, 군 입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엇다.

 

그래서 병무청에 들러 병역 특례 취업에 대해 문의를 했다. 돌아온 대답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격이니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조언이었다. 일단 병역 특례 업체로 지정된 건설사 리스트를 구해서 대형사들로부터 하나씩 취업 여부의 가능성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하던 전화는 끝까지 해 보자'

 

마침내 이력서를 보내 보라는 회사가 두 곳 있었다. 대기업 계열사와 최하위급 중소건설사였다. 이는 그가 전화를 걸었던 총 130여 개 기업체 중 약 1.5%에 해당하는 케이스였다. 누군가 '성공이란 99%의 실패에서 나온 1%의 성취'라고 말했다. 기회의 문을 연 것 자체를 성공으로 본다면, 그는 '98.5%의 실패에서 나온 1.5%의 성취'라는 역사적 쾌거를 이뤘다.

 

 

결정적 전환점

 

2005년 초여름, 그는 부동산 컨설팅사에 입사한 지 1개월 정도 되던 날, '화이자 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화이자는 서울 광장동 주택가에 본사와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시설이 낡고 협소해서 추가로 직원을 채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사업 확장을 위해서 최우선적인 과제가 바로 신사옥 매입이었던 셈이다.

 

한국 화이자와 미팅을 가졌다. 중년의 터키 출신 사장은 필수조건을 제시했다. 을지로, 테헤란로, 여의도 등지와 같은 고층 건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사무 공간 면적을 산출해 주었다. 이에 저자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소위 브로커들을 접촉해 오피스 매물 정보를 취합했다. 한편, 화이자는 매주 경과상황을 문의해왔다.

 

추후에 인지한 내용이지만, 화이자는 2년 동안 이 건물 저 건물을 잇다라 '간만 보고' 결정을 못 내렸다는 것이었다. 화이자가 분명 중요한 고객사인 건 맞지만,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화이자 프로젝트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낙담하지 않았다. 다들 외면한 프로젝트였다니 그의 실패는 오히려 희망의 상징이었다.

 

 

위험한 자신감

 

저자는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지난 1년여 동안 뛰어다닌 끝에 화이자 사옥 문제를 결국 해결해 냈기 때문이다. 이 공로로 회사에서 그의 위상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제 본업이던 리서치 일은 신입 직원에게 넘기고, 투자 자문 팀을 신설했다. 상업용 부동산을 맴하는 일에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주로 매도편에서 일을 했다.

 

실력있는 사람에게는 때때로 불건전한 인물들이 대시하기 마련이다. 저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업용 건물 매각 입찰 때 유리한 조건을 얻고자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암흑의 세력들로 그에게 거액의 약속어음을 미리 대가로 제안하면서 자신들의 낮은 입찰액을 수용해 주도록 압박을 가해 왔던 것이다.

 

과연 어디서부터 발을 잘못 들였던 것일까.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 있었던 걸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의 세계로 끌려들어 간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암시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존심과 양심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후 그는 녹음기로 그들의 협박을 일일이 녹음 파일에 저장하면서 강경한 태도로 대응했다.

 

 

 

 

2007년 가을, 그는 애경에 입사했다. 부동산 사업을 그룹의 신 성장 동력으로 추진하는 애경이었으니 그에게는 딱 맞는 궁합이었다. 이후 그는 생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얻엇다. 선진 유통 시설의 벤치마킹을 위해서였다. 동료들과 함께 회사 사장님을 모시고 출강을 떠났다.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 시애틀 등지로. 애경 수원 쇼핑몰은 한국 최고수준의 '쇼핑 허브'로 탈바꿈했다. 실천은 진통과 역경을 수반한다. 그러나 끝내는 성공으로 귀결한다.

 

그의 야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학길에 올랐다. 콜롬비아 비즈니스 스쿨에서 MBA를 취득하고자. 경영에 대한 정규 교육과 함께 금융과 부동산 관련 이슈 등에 대해 견문을 더욱 넓혀야 겠다는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후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도전했다. 어차피 위험이란 말 속에는 기회도 공존하기 때문에. 미국 부동산의 매수에 한국 자본을 연결하는 일을 위해 그는 '콜드 콜'을 이어나갔다.

 

 

13년만에 연봉을 150배로 키우다

 

2015년 4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사무실에서 파티가 벌어졌다. 4억달러(약 4500억원) 규모의 자금 유치를 성사시킨 기념으로 마련된 '클로징(거래종결) 파티'였다. 이 자리에 13년 전 건축기사가 주인공으로 서 있었다. 회사 중역들은 가장 큰 공을 세운 그를 '영웅Hero'이라 치켜세우며 슈퍼히어로 '캡틴아메리카'의 방패를 선물했다.그의 연봉은 약 150배 급등했다. 그의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책을 펼쳐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