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보다 내 사업 -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책
윤태성 지음 / 해의시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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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는 지금 다니는 직장을 생각하는 시기보다 더 빨리 그만두기가 쉽다. 2016년부터 우리나라 기업의 정년은 60세가 됐다. 하지만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는 월급쟁이는 18퍼센트에 불과하다. 2016년에 조사에 따르면 월급쟁이들은 자신의 정년을 남성은 평균 51.7세, 여성은 49.9세다. 기업의 형태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는데 공기업 54.8세, 중소기업 50.8세, 대기업 48.8세였다. 50세 언저리에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하면 정년 연령이 더 올라가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재취업이 어렵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다는 각오가 되고 있다. 사업은 월급쟁이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월급쟁이보다는 창업을 권하다

 

책의 저자 윤태성은 대학 졸업후 두산기계에서 근무하다가 장래를 고민한 끝에 회사를 사직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대학에서 지능형 제품설계를 주제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도쿄공업대학 조수로 임용되어 일본 문부성 소속 공무원인 문부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지식관리 연구가 계기가 되어 도쿄대학 조교수로 이직했다. 그러나 창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결국 데이터 가시화 소프트웨어 벤처인 '오픈놀리지'를 창업했다.

 

현재는 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식 비즈니스와 서비스 혁신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저서로는 <답을 찾는 생각법>, <고객은 독이다>, <한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 <탁월한 혁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융합시대 핵심 키워드: 지식 비즈니스가 뜬다!>, <오픈 놀리지: 지식은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 <상대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막강 데이터력> 등이 있다.

 

그는 경영학 서적에 나오는 어려운 경영 전략이나 마케팅, 고객 관리가 아니라 실제로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을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창업을 위한 실무교본인 셈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막연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내 사업을 준비하는 7가지 포인트'라는 실제적인 지침을 통해 안내하고 있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사업계획의 바이블이 될 것이다.

 

 

 

 

 

창업가 마인드를 가진 월급쟁이도 있다

 

월급쟁이와 달리 창업가는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이에 반해 월급쟁이 중에는 꿈만 꾸고 실제로는 평생 내 사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모든 창업가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꿈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시도했다는 거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창업가.

 

월급쟁이 중에도 마치 창업가처럼 일하는 사람이 있다. 천성적으로 성실한 경우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진 사람도 있다. 목적 가운데 하나는 출세다. 보통은 직원이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내면 어느 정도 직위까지는 별 탈 없이 승진한다. 또 다른 목적은 내 사업을 하기 위해서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다. 직장에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내 사업을 시작하거나, 혹은 직장 자체를 내 사업의 고객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은 월급쟁이라도 창업가 마인드로 일한다.

 

 

내 사업을 5W2H로 나누어 준비한다  

제대로 정의되어 있지 않고 막연한 문제는 맞닥뜨려도 풀 수가 없다. 이럴 땐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는 게 우선이다. 문제가 너무 크다면 몇 개로 나누어 부분 최적화를 한다. 내 사업에 관한 문제를 작게 나눌 때에는 '5W2H'로 나누면 알기 쉽다. 이언제 When, 어디서 Where, 누가 Who, 무엇을 What, Why, 어떻게How, 얼마에How much를 나타내며, 이들은 필수 항목 3가지와 보조 항목 3가지, 실행의 타이밍 1가지로 구성된다.

 

내 사업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5W2H로 나눈 후 하나씩 따져 확인하다보면 어느 틈엔가 내 사업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항목별로 하나하나 체크하는 과정이야말로 내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주의할 점도 있다. 5W2H 각각에 대한 부분 최적화를 다 모은다고 해서 반드시 전체 최적화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내 사업을 실제로 실행해야만 알 수 있는 내용도 많다. 이런 내용은 사업을 실제로 진행하면서 데이터를 다시 입력하고 새롭게 최적화해야 한다. 전체 최적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업을 하는 내내 끊임없이 진행된다

 

 

나의 스토리에 어울리는 사업 아이템을 찾는다 

내 사업에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사업 아이템과 나의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경력과 내 사업을 잇는 스토리가 있으면 왜 이런 사업 아이템이 탄생했는지 고객이 이해하기 쉽다. 왜 이 상품을 개발하려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거꾸로 이해해도 좋다. 관련된 경력과 지식이 전혀 없는 사업 아이템이라면 스토리를 만들기가 어렵다. 스토리를 만들기 어렵다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업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업 아이템은 다루지 말아야 한다. 나만 만들 수 있는 스토리를 구상해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알파고의 경우가 그렇다. 이는 바득에 인공지능을 적용해 인간과 컴퓨터가 대국을 두는 프로그램이다. 예전에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승리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인공지능의 붐이 도래하면서 카이스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엔 인공지능 수업이 한두 과목 정도였지만, 지금은 카이스트 학생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100만 원짜리 갈비탕에도 전략이 숨어 있다

 

내 사업을 생각할 때에는 상품의 가격을 올리거나 내릴 때에 약간의 가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10배나 100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플러스 차별화나 마이너스 차별화가 아니라 슈퍼 차별화를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갈비탕은 어느 식당에서나 한 그릇에 1만 원 정도 한다. 어떤 식당에서는 가격을 낮추어 고객을 늘리기 위해 갈비 양을 약간 줄이고 9,000원에 판매한다. 혹은 갈비 양을 약간 늘리고 11,000원에 판매하기도 한다. 경쟁자보다 10퍼센트 가감된 가격이다. 이 정도 차이라면 고객은 뭐가 다른지 차별화 요소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격이 약간 비싸다거나 약간 싸다는 느낌을 받는 정도다.


하지만 한 그릇에 10만 원하는 갈비탕이라면 어떨까? 놀라서 메뉴를 다시 한 번 쳐다볼 거다. 만약 100만 원하는 갈비탕이라면 고객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된다. 메뉴에 숫자를 잘못 적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그릇에 100만 원하는 갈비탕이 있을까? 이 가격의 핵심 가치는 갈비탕이 아니라 갈비탕을 담는 그릇에 있다. 갈비탕을 다 먹고 나면 그릇을 포장해서 가져가라고 준다. 갈비탕은 사실은 공짜다. 만약 최첨단 신소재로 만든 그릇이라면 혹은 비싼 골동품이라면 100만 원이라는 가격에 수긍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10만 원 하는 커피도 만들 수 있다. 커피는 공짜이고 커피 잔을 10만 원에 파는 식이다.

 

 

사업을 시작할 때 반드시 챙겨야 할 실무

 

명함을 준비한다

사무실과 비품을 마련한다(합리적인 수준)

지식을 축적한다

외모와 복장을 관리한다

 

 

내 사업을 준비하는 7가지 포인트

 

누구나 한번은 내 사업을 꿈꾼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도서일 것 같다. 그저 막연하게 사업이나 해볼까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창업 준비자들을 위한 친절한 가정교사인 셈이다.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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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 망국의 신하에서 일본 경제의 전설이 되기까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 박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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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다고 생각하면 한순간도 아니고, 길다고 보면 천 년도 더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다. 하지만 짧은지 긴지는 꼭 흐른 세월의 숫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일들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또는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내 생애를 말하자면, 옛날 고향에 있을 때는 쟁기와 소쿠리를 짊어졌고, 장마에는 나비가 밀을 먹어버릴까 걱정했으며, 가뭄에는 묘판에 물이 부족한 것을 원망하며 살았다. 그러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한탄하여, 겁 없게도 국가의 우환을 자신의 우환이라고 여겨 줄곧 살아왔던 초가집을 떠나 서쪽의 수도 [교토]로 갔다. - '머리말' 중에서

 

 

일본 근대화의 공로자

 

책의 저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막부 말기였던 1840년,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논어>, <대학> 등의 고전을 익혔다.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신하였으나, 막부가 무너지면서 메이지 신정부의 관리가 되어 근대 일본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요시노부의 신하였던 1867년, 27살의 나이에 파리 만국 박람회를 시찰하며 유럽 자본주의를 체험했다. 자본주의와 기업 경영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귀국 후 메이지 신정부에서 대장성 조세사정, 개정국 국장을 역임하며 일본의 조세, 화폐, 은행, 회계 등을 개혁했다. 1873년 '상업이 부흥해야 나라가 선다'는 신념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철도회사, 가스회사, 전등회사, 방직회사 등 500여 개의 기업을 세웠다. 그중 다수는 지금도 일본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도쿄양육원, 일본 적십자사 등 600여 개의 자선기관을 세우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미국, 중국, 인도 등에서 민간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도덕 경영'을 자신의 경영철학으로 삼고 실천했다. 이는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에도 잘 녹아있다. 1926년, 1927년에는 연속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그가 지금도 세계 각국 CEO들의 모델로 꼽히고 있는 이유는 그가 성공한 경영인이기도 했지만, 경영 철학을 만들고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시부사와가 현재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기업 설립, 운영에 관한 업적도 업적이지만, '도덕 경영'이라고 하는 그의 독특한 경영 철학 때문일 것이다. 특히 <논어>를 경영인의 필독서로 생각한 그는 부를 이루는 근원은 인의 도덕이며, 올바른 도리에 따라 쌓은 부가 아니면 그 부는 영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도덕, 경제 합일설은 국내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 '역주자의 말' 중에서

 

 

 

 

엄한 아버지 밑에 될 성 싶은 인물이 나온다

 

인물을 이해하려면 인물의 가계家系를 살펴봐야 한다. 시부사와의 아버지는 어머니 집안의 데릴사위였는데,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고지식하게 일했던 분이다. 그런 와중에 시詩나 하이카이俳諧(이후 하이쿠로 발전함)를 짓기도 하는 풍류風流 기질도 있었다. 자신에겐 무척 엄햇지만, 남에게는 관대해서 도와주는 일에 정성을 다했으며, 평소 근검勤儉을 실천하며 오직 가업家業을 위해 노력하는 견실한 사람이었다.

 

6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한 시부사와는 이후 14~15세까지 독서, 검술, 습자 등을 배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품성 수양이었을 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업과 장사에 신경 써야 하므로 가업에 종사할 것"을 지시했다. 주야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은 집안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1854년, 즉 그의 나이 15살 때 에도에 나가서 책 상자와 벼루 상자를 사온 적이 있었다. 문구점에서 오동나무가 2개 붙어 있는 책 상자와 오동나무 벼루 상자였는데, 나중에 집에 도착한 이 물건들을 본 그의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집안을 무사하게 보전할 수 없으므로 불효자식을 두었다고 탄식했다. 

 

사치에 물든다는 것은 원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차이가 없는 것이다. 미세한 부분이라도 그 분수에 따라 처음 시작될 때 잘 자제하지 않으면, 마침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는 예로부터 얼마든지 그 예가 있다. 지금 이렇게 화려한 벼루 상자와 책 상자를 살 정도라면 다음엔 집도 서재도 맘에 안 든다며, 만사에 사치해서 결국 집안을 견고하게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사전에 엄히게 교육을 했던 것이다.

 

 

 

막부의 신하가 되다

 

알에서 부화한 누에는 네 차례 잠을 자고 먹기를 반복한 끝에, 고치가 된 후 이어서 성체가 된다. 나중엔 결국 알로 돌아간다. 주인공 시부사와도 농민으로 태어나 경작을 주로 하는 신분이었다. 당시는 막부가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폭정暴政 수준이었다. 비록 농민이었지만, 이런 상태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속될 경우 망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당시의 도쿠가와 정치는 문벌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능력이나 지식이 뛰어나도 신분의 상승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시부사와는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 막부를 전복시키는 일에 가담한다.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려면 역도逆道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히토츠바시가家에 출사出仕했다. 위태로운 시세에 처해 있으면서 자신의 본분이 아니라고 정치에 입을 열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므로, 정말로 마음을 다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 분골쇄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더 넓은 세계 유럽으로 견문을 떠나다

1867년, 프랑스 박람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 박람회는 1855년, 1867년, 1878년, 1889년, 1900년, 1925년, 1931년, 1937년 등 총 8회 열렸다. 이 박람회엔 여러 나라의 제왕들이 참석하므로 일본도 다이쿤大君의 친척을 파견하면 좋겠다고 프랑스 공사가 제안해 왔다. 몇 차례 상의 끝에 민부공자 도쿠가와 아키타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7명의 수행원을 붙이기로 하자, 시부사와는 호기로 판단하고 파견을 부탁했다. 

 

 

 

프랑스 수도 파리에 가서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대박람회에 참가하러 왔다는 취지의 국서를 봉정하고 답서를 받아 공식적인 의식을 마쳤다. 시부사와는 공자 신변의 일을 살피거나 혹은 일본에 공적인 문서를 발송할 때에 그것을 집필하거나 했다. 또는 야마다카를 비롯하여 공자 직속의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거나 공자를 위해 잡화를 매입하거나 하는 일도 했다. 마치 서기와 회계를 겸한 거 같은 직책이었지만 평소에는 매우 한가했기 때문에 그사이에 프랑스어를 공부할 생각을 했다.

 

박람회 공식 행사가 끝난 후에는 공자의 유럽 각국 순회 계획이 사전에 짜여 있었다. 먼저 스위스, 네델란드, 벨기에를 둘러보고, 이어서 이탈리아, 영국, 그리고 상황을 봐서 독일, 러시아도 둘러볼 계획이었다. 8월 초순부터 스위스 순방을 시작해 여러 나라를 거쳐서 11월 초 영국을 방문하고 그달 하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11월 말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학 교사를 고용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이국 땅에서 일본의 정볍政變 소식을 접했다 

 

 

메이지 新정부의 관리로

 

막부 정치의 종말은 시부사와에겐 커다란 행운의 기회였다. 이런 정변은 외국과의 교제가 더욱 중요해질 게 분명했다. 즉 외국에 관한 학문은 점점 필수적인 상황으로 변할 것이다. 속히 귀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는 유학을 위해 각종 경비의 절감을 통해 장기 유학을 꿈꾸었지만, 수행하는 공자가 미토가家를 상속받아야 하는 일이 생기자 할 수 없이 귀국해야 할 상황이었다. 

 

모든 게 '그림의 떡'이 된 상황이 되자 그는 메이지 원년(1868년) 12월 3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메이지 2년 12월 초순 도쿄에 도착하여 태정관에 나가보니 생각지도 않게 대장성 조세사정租稅司正이라는 직에 임명되었다. 곧바로 대장성에 출두하여 배명의 건을 보고했다. 당시 대장성에는 한 사람의 지인도 없고 또 직무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대체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사직을 결심하고 대장성의 오쿠마 대보大輔와 면담했다. 여기서 유신정부는 시부사와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다는 말에 감동을 받고 관리로 일할 결심을 굳혔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실업가를 꿈꾸다

 

시부사와는 오사카 조폐국에 용무가 있어 오쿠마, 이토 등과 동행하여 오사카까지 여행한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곰곰이 일본 장래의 경제를 생각해 보니, 결국 정부에서 아무리 마음을 쓰고 힘을 다해 화폐법을 정하고 조세율을 개정하고 회사법 또는 합본 조직을 마련하고 식산흥업의 도움을 준다 해도 지금의 상인으로는 도저히 일본의 상공업을 개량하거나 진보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상업에 투신하여 미치지 못하더라도 솔선하여, 부진한 상업을 작흥시키고 일본 장래의 상업에 일대 진보를 이루려는 뜻을 세웠다.

 

 

 

 

진정한 부의 창출은 도덕 경영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근대화와 자본주의에 앞장섰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유럽의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해 철도회사, 가스회사, 전등회사, 방직회사 등을 설립했다. 그가 세운 '삿포로맥주', '임페리얼호텔', '도쿄전철' 등은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 존재한다. 많은 후대인들로부터 찬사 받는 이유는 그가 이룬 경제적인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들어오기도 전, 즉 상업이 무시 받던 시기에 경제의 중요성을 통찰했으며, 동시에 경제 부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도덕'을 꼽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즈음의 경영자들이 종종 '모럴 헤자드'에 빠져 세인들로부터 비난의 손짓을 받는다. 그래서 시부사와의 도덕 경영이 더욱 깊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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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를 땅만 산다 - 쉽게 배워 바로 써먹는 옥탑방보보스의 토지투자 첫걸음
김종율(옥탑방보보스)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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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택투자가 자전거라면, 토지투자는 오토바이와 같은 것이다. 자전거는 배우기가 훨씬 쉽지만 속도가 붙어도 꾸준히 발로 페달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나아간다. 반면 오토바이는 배우기가 훨씬 어렵지만 일단 기술을 익히면 손목을 조금 움직여 엑셀 레버를 당겨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자전거 같은 주택투자는 어느 날 부동산 경기가 나빠지는 오르막길을 만나면 더 나아가기 어렵지만, 오토바이 같은 토지투자는 오르막길을 만나도 쉽게 오를 수 있다. - '프롤로그' 중에서

 

 

토지투자의 첫걸음

 

이 책의 저자 김종율은 아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김종율아카데미의 대표와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 자산관리과정 지도강사를 역임 중이며, 토지투자·와 상가투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옥탑방보보스라는 블로그의 주인장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저자가 상가 및 토지투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미니스톱 편의점 점포개발본부, 부동산 법제팀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이후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점포건설 부문, GS리테일 편의점 사업부 점포개발 부문, 위메프 카페사업부 점포개발 팀장을 거치면서 단단한 경력을 쌓아왔다. 최근에는 건국대학교 부동산대학원, KBS 인재개발원, 국민은행 본사 부동산팀, 가치 평가부, PB 사업팀, 채널 기획팀을 비롯해 다양한 기관 및 부동한 학원에서 토지와 상가투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집 대신 상가에 투자한다>가 있다.

 

대체로 토지투자는 경험 많은 베테랑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토지투자는 대단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사례는 2010년부터 저자가 직접 투자한 것들로, 그때는 수도권 주택 경기가 안 좋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액 투자나 단기 투자로 꾸준히 수익을 내왔다. 그리고 책은 토지 가치가 상승하는 원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 절반만 알아도 성공적으로 토지투자를 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말이다.

 

"쉽게 배워서 바로 써먹는 투자법 대공개"

 

또한 책은 수많은 토지 관련 법들 중 실전 투자를 위해 꼭 필요한 법조항만을 골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덤으로 다양한 사례들까지 곁들임으로써 바로 옆에서 상황이 벌어지는 듯한 생생한 투자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돈이 되는 이론에는 모두, 해당하는 실전 사례를 덧붙여 설명했기에 토지투자의 첫걸음으로 충분한 부동산투자서인 셈이다.

 

 

 

 

공부법을 바꾸면 토지투자가 보인다

 

부동산과 관련된 법을 공부하다 보면 사법私法과 공법公法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게 된다. 사법이 개인과 개인 간에 필요한 법이라면, 공법은 국가와 개인 간의 법이다. 공법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과 정보는 파악해야 하지만, 이를 모두 알겠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뿐더러 사실상 효율적인 접근방법도 아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공부를 했다면 과감하게 물건을 검색하고 현장 답사를 다니는 게 좋다. 

 

토지 관련 공법에 대해 A부터 Z까지 다 알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상 투자하기 어렵다. '다식우환多識憂患'인 셈이다.자신의 투자 성향과 자금 규모에 맞는 범위 안에서 스스로에게 잘 맞는 투자 스타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런 후 좁은 범위의 공부만이라도 확실히 한 다음 알맞는 투자에 나서고, 또 공부를 계속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지에 관한 넓은 공법들의 체계가 자리 잡을 것이다. 답사와 조사 등 실전을 병행하며 하는 공부만이 필요한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을 구분 짓게해준다.

 

 

뉴스를 잘 읽어라

 

대중교통지향형 개발 방식TOD이란 말이 있다. 이를 투자와 연동해서 해석하자면 '택지개발지구는 혼자 가지 않는다'는 포인트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택지개발지구가 지정되면 반드시 교통이 따라온다. 도로나 철도개발 계획을 수립한다는 의미이다. 이후 산업단지가 따라온다. 집만 지어놓아선 사람들이 절대로 입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통과 일자리는 필수적인 요소인 셈이다.

 

"TOD 개발 = 택지개발자구+교통+산업단지"

 

집이 부족해서 택지개발지구 지정했다가 취소했는데, 철도나 도로가 들어오고 산업단지도 예정대로 들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원래 집이 부족한 동네의 도로가 좋아지고 산업단지가 들어섰으니 집은 더 부족해지지 않을까? 정말 어마어마하게 부족해질 것이다. 이것이 뉴스를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 이유다. "이 동네 가서 집 지을 땅을 사야지!" 택지개발지구지정이 취소된 지역 인근에서는 집 지을 수 있는 땅을 노려야 한다. 

 

 

개발 호재의 발표시점은 투자의 적기가 아니다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개발 호재를 어떻게 이용하는 게 맞을까? 성질 급한 사람은 미군기지가 이전되기 전에 최대한의 정보력을 발휘해서 이전 예정부지에 투자한다. 하지만 개발은 통상 계획보다 지연되는 게 일반적이다. 토지수용은 항상 보상문제와 연동되므로 몇 차례 연기 끝에 비로소 실행된다.

 

투자자라면 반드시 이점을 기억해야 한다. 개발호재가 발표된 시점에 투자 시기를 찾으면 실패한다. 발빠르게 투자한 땅들이 자금난에 부딪혀 경매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개발호재가 실현되는 시점에 투자 시기를 찾아야 성공한다. 즉 미군기지 이전 발표가 기사화된 시점에 투자 시기를 저울질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미군기지의 이전이 완료되는 시점을 앞두고 투자 시기를 저울질해야 성공할 수 있다.

 

 

녹지지역과 관리지역에 관심을 가져라

 

현재는 비시가지이지만 향후 시가지가 될 만한 땅을 미리 파악하고 여기에 돈을 묻었다가 나중에 되팔아 시세차익을 내는 게 바로 토지투자다. 그래서 개발 사업이 시작된 지역에 갔다면 반드시 인근의 개발 가능지를 살펴보고 사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땅이 개발 가능지일까? 이에 초점을 맞추고 공부해야 한다.

 

이미 개발된 시가지 동쪽에 임야가 있고 서쪽에는 농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어떤 땅이 개발될 것으로 예상하는가? 대부분 임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정반대다. 토지의 개발여부는 규제 당국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엔 규제했지만 쌀로 막걸리를 제조할 수 있다. 쌀이 남아 돌기 때문이다. 지방을 답사하다 보면 이런 광경을 많이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논밭이 대거 택지로 수용되어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말이다.

 

따라서, 토지투자자라면 자연녹지, 생산녹지지역, 계획관리지역, 생산관리 지역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둬야 한다. 주거 지역이나 상공업 지역은 이미 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녹지지역관리지역은 아직은 가치가 낮지만 향후에 개발되면 가치가 크게 높아지는 지역이므로 토지투자 1순위 지역으로 꼽아야 한다.

 

 

 

 

 

공포의 '2번 타자'

 

요즈음 프로야구 판에는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과거엔 테이블 세터 중 2번 타자는 안전 주루를 책임지는 주로 번트에 능한 선수가 적임자였다. 그런데, 공격 야구를 이끄는 팀은 공격에 능한 선수를 2번 순번에 기용한다. 1번 타자는 주루에 장점이 있기 때문에 출루하기만 하면 후속 안타에 득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선수를 '공포의 2번 타자'라고 부른다.

 

토지투자도 마찬가지다. 개발 계획지가 1번 타자라면, 개발 가능지가 바로 2번 타자인 셈이다. 소액으로 토지투자에 성공하고 싶다면 개발 계획에 대한 고시나 공고가 있기 4년 전에 미리 사둬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이를 '공포(공고 나기 4년 전)의 2번 타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통상 개발 계획지는 역세권 개발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럼 2번 타자는 어디에 있을까? 1번 타자를 개발한 후 어디를 개발할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보나마나 1번 타자 옆에 붙어 있는 지역을 개발할 것이다. 1번 타자에서 시작된 개발 기대감이 주변으로 확산되면서 2번 타자의 가격은 반드시 상승하게 돼 있다. 우리는 2번 타자를 싸게 사서 가격 상승기에 팔면 된다.

 

 

시행자가 없으면 개발 뉴스도 무용지물이다

 

책은 과거 경기도가 추진한 명품신도시 1차 후보지 고양시 구산동 일대를 예시한다. 2007년 5월, 언론을 통해 분당의 2배 규모의 구산동 일대에 병원과 학교, 공원, 기업체 등을 입주시켜 자급자족아이 가능한 '명품 신도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 일대는 거의 산과 논으로 이루어진 비주거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일대의 개발은 2011년 백지화되고 말았다. 

 

당연히 이 일대의 땅에 투자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는 바로 사업 시행자의 선정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당시 뉴스로는 개발에 대한 것만 있었고, 누가 이 사업에 참여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비록 개발 뉴스가 발표됐다 하더라도 시행자가 있는지 없는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더불어 개발계획이 승인됐는지 확인해야 한다. 시행자와 행정계획, 이 쌍두마차가 함께 달려야 개발이 실현되는 것이다.

 

땅의 3가지 종류

 

건강해지는 땅~ 개발 호재 실현이 오래 걸리는 땅

안 건강해지는 땅~ 개발 호재가 3년 내에 실현되는 땅

손해나지 않는 땅~ 죽어도 개발되지 않는 땅

 

 

택지개발지구의 전용주거지는 초기에 매입하라 

택지개발지구 전용주거지의 특징은 초기에는 매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사려는 수요는 적고, 시간이 흘러 동네가 예뻐질수록 수요는 늘어나는데 남은 땅은 줄어든다는 점이다. 또 전용주거지의 개수가 더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는 희소성이 커지게 된다. 따라서 신도시 개발 초기에 원주민이 내놓은 값싼 전용주거지를 매입해서 몇 년 후 본격적으로 동네가 조성되는 시기에 판매하는 토지투자 기술도 써먹을 만하다. 

택지개발지구가 등장하면 주변 땅의 가치가 덩달아 오른다. 그런데 택지개발지구 주변의 땅이라고 모두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택지개발지구 등장으로 맹지가 되는 땅도 있다. 맹지란, 길이 없는 땅을 말한다. 지적도를 봤을 때, 도로와 닿는 부분이 조금도 없다면 맹지다. 원칙적으로 맹지에는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으니 투자해서는 안 된다. 오산세교지구 사례를 살펴보면 도로와 토지물건 사이에 완충녹지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맹지인 것이다.

 

 

용도지역을 확인해라

 

어떤 땅이든 항상 따라붙는 꼬리표가 있다. 이게 바로 '용도지역'이란 것이다. '쓰이는 곳'이란 의미인데, 땅의 쓰임새를 미리 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역은 다양한 쓰임새에 따라 용도지역이 구분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을 지을 땅은 '공업지역', 집 짓고 살 땅은 '주거지역', 고도 개발을 할 땅은 '상업지역' 등으로 분류된다.

 

토지투자를 하려면 녹지지역과 관리지역처럼 아직 가치가 낮지만 향후 개발 가능성이 높은 토지에 투자해야 한다고 이미 살펴보았다. 아직은 비도시 지역이지만 도시 지역이 될 수 있는 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강조하는 토지투자 포인트다. 용도지역이 땅의 연봉을 결정짓는다는 해석이 된다.

 

 

 

쓰임이 많은 땅이 투자대상이다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전철은 때가 되면 개통한다. 개통 후 자연스럽게 그 앞 절대농지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역 앞 농지가 좋아진다고 해도 그냥 '역세권농지'로 이해할 뿐이다. 또 이론에 얽매이면 '여전히 절대농지라 행위제한이 많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답사와 실전을 병행한 공부를 하면 '지금은 절대농지이지만 역 개통 즈음엔 결국 해제되어 쓰임이 많은 땅이 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오를 땅은 불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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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리더십 경영
윤형돈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우리가 많이 아는 조선의 인물을 중심으로 별도의 기본 지식 없이 그들의 리더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 책이다. 얼핏 보면 리더십 자기개발서에 가깝다. 다만 다른 자기개발서와는 형식이 다르다. 이 책은 그들을 위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인이 빌려 쓸 수 있는 지식에 집중한 역사 자기개발서, 아니. 역사를 바탕으로 자기개발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이라 하겠다. - '서문' 중에서

 

 

조선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리더십을 배운다

 

이 책의 저자 윤형돈은 다섯 살에 처음 책을 접한 뒤 지금까지 각종 한국사, ·세계사 책을 섭렵해서 메모, 스크랩 해왔다. 중학교 때 역사 답사에 흥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박물관과 유적지를 누볐고, 이것이 지금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 매출 3만 원을 올린 첫 창업을 했고, 이후 갖가지 사업 아이템을 기획해서 용돈을 벌었다. 이 경험은  MBA, 즉 경영학 석사 과정으로 이어졌고, 외국계 기업, 대기업, 벤처기업을 거치며, 투입비용 대비 두 배의 이익은 반드시 뽑는 기획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접하면서 사람들의 장점을 흡수해서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이후, 수십 년간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를 활용한 교육컨설팅, 역사 리더십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제공하여 매출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블로그에 올린 그의 글은 경제경영분야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최신 사례를 덧붙여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 역사, 문화 전문 교육컨설팅, 강연 기업인 역사클릭의 대표이자 작가로서 영어권, 일본어권, 중국어권 경제지 등을 뒤져가며 후속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책에는 조선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비록 과거의 인물들이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인간 군상들과 많이 닮아 있다. 즉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전략을 바꾼 세종,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거부한 중종과 선조, 정치 능력을 앞세워 임기응변식 처세에만 능했던 가짜 리더 원균과 정반대의 이순신, 기득권과 승부를 벌인 진짜 리더 김육 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리더십 롤모델이다.

 

"역사는 우리들의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다"

 

저자가 리더십에 주목한 이유 또한 리더십이 현재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처세의 기술이자, 미래를 대비하는 통찰력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현재의 시각으로 조선의 리더를 해석함으로써 스스로를 물론이고 타인의 삶을 이끌어주는 진짜 리더의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해답을 찾아주는 멋진 역사 여행인 셈이다.

 

 

 

 

조광조, 용의 비늘을 건드리다

 

나중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는 한자의 파자로, 주초는 바로 조趙가 됨) 사태의 주모자로 몰린 조광조와 당시의 군주 중종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신하인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을 믿고 지켜준다고 믿었고, 또한 중종도 자신의 심복인 조광조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신뢰는 알게 모르게 금이 가고 있었다. 이 금이 본격적으로 커진 계기는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이었다.

 

중종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위훈삭제란 가짜 공신 훈작을 색출하여 박탈하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 조정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훈구파 대신에게 잘 아부한 탓에 공신이 되어 수많은 특권을 누리는 세금 도둑들이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에게 칼을 겨누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문제가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즉 당시 조정의 실세인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반정 참여와는 상관 없이 자신에게 협조적인 인물에게도 위훈을 부여했던 중종 자신도 개혁의 대상이 되고만 셈이었다.


위훈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은 30여 명 정도다. 그런데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은 117명으로, 무려 80여 명이나 차이가 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공신 책봉 자체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반정의 공신은 철저하게 반정 중심 세력의 이권에 따라 선정되었다. 그래서 진짜 공신의 일부는 재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생겼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판은 이렇게 야합이 많았다. 조광조가 개혁정치의 수단으로 내놓은 위훈삭제는 나라를 좀먹는 가짜 공신을 처리함과 동시에 중종에게도 칼을 겨누는 조치였던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들은 이를 이미 알고 있다. 왜 이런 처분을 받아야만 했을까? 저자는 '일 잘하는 사람''공부 잘하는 사람'을 거론한다. 전자는 왕의 분위기에 맞추어 선을 조절하거나 아니면 왕세자의 스승이 되어 모든 걸 걸었을테지만, 불행하게도 조광조는 후자였다. 전체 상황 판단은 뒷전이고 오직 상급자를 바꾸는데 올인했던 것이다. 왕권을 침해하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 증종도 상급자의 자질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아니겠는가. 

 

 

세조의 술자리 정치 

조선조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세종의 아들이자, 대군의 신분으로 군주 세종의 추진 업무에 충실한 역할을 했던 세조는 유난히 술자리에 집착했다. <세조실록>에 '술자리'가 언급된 횟수는 무려 467건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서 술자리가 974건 언급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 왕조의 술자리 반을 혼자서 해먹었다고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조실록 = 술판 실록'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쯤 되면 조선왕조실록의 '주酒님'이다.

 

이 술자리에는 세조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절충안적 성격이 보인다. 우선 그는 칼과 피로 왕의 자리를 따냈다는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친목을 중시한다는 모습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싶었다. 그리고 대신들과 관계를 맺어 불안함을 떨쳐내고자 했다. 나중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한 걸로 봐서, 술이 세조의 수명을 단축한 셈이었다. 

 

세조가 술자리의 힘을 빌려 그들과 화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유독 술자리에서 민감한 국가의 정책을 의논하고, 새로운 학문을 경연했다. 즉 세조의 술자리는 오늘날의 '국무회의'였던 것이다. 희한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도 기업이나 정치인의 중요 정책이나 합의가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술자리에서 결정된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결론이었을까?

 

 

기득권과 승부를 벌인 김육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김육을 우의정으로 발령냈다. 뛰어난 일처리로 인조의 총애를 받은 몸이니 당연한 인사였다. 하지만 김육은 병을 핑계로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뚝심이 남달랐던 효종은 그의 사직서를 모두 반려했다. 하는 수 없이 김육은 왕의 발령을 수용했다. 그런데, 순수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라 특별한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려 즐겁게 생활하며 일하지 못하기에,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일 정도입니다. (중략)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저를 쓰시려면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 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당시 북벌을 준비 중이던 효종은 재원 확보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선 세제 개혁이 필요했다. 하지만 직접 대신들과 힘겨루기에 곤란했다. 이런 판국에 김육이 나서서 백성들을 위해 기득권층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겠다고 하니 아마도 속으론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대동법의 실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묻혀있던 이 법이 다시 고개를 들자 기득권층은 난리가 났다. 예조참판 김집을 중심으로 하는 산당이 김육을 공격했던 것이다.

 

그래도 김육은 기존의 단점을 보완해, 대동법을 밀어붙였다. 효종 6년 7월까지 그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직을 번갈아 맡으며 조정의 정책을 주도했다. 김육의 방납 비리 해결책은 간단했다. 품목을 쌀로 통일하고, 재산이나 땅의 규모에 따라 납부하도록 했다. 인조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품목과 수량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는 벼슬을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30년을 대동법에 매달렸다. 백성을 이한 진짜 리더였다.  

 

 

가짜 리더 선조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선조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이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해서 아름다운 강토를 유린하자 그는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일본의 침공이 거짓말이고, 오히려 조선과 일본이 힘을 합쳐 명을 치려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따라서, 명은 선조가 망명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군사 원조를 요청받은 명나라에서 이여송이 출정하자 선조는 왕의 체통도 버리고 버선발로 그를 맞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중용한 이항복, 류성룡, 이순신 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했다. 그러니 왜란이 발발했어도 충신들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는 믿지도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도 불신하면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사람은 그 직위와 위치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잊는 사람이 참 많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이 권력과 사익을 위해 판결을 거래하는 식의 사건이 태연하게 벌어진다. 아마 이러면 이득은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떡고물이 탐이 나면 모를까. 당연히 떡고물이 권력이기 때문에 끈 떨어지면 끝이다.

 

이 공식은 현대의 공직자, 정치가, 기업은 물론 일개 샐러리맨에게도 적용된다. 앞서 말했듯 가짜 리더의 수명은 꿀 떨어지면 끝이다.


리더의 힘은 책임을 지는 데서 나오고 리더의 권력은 처신을 잘하는 데서 나온다. 누구보다 눈을 뜨고 변화에 주목해야 하며, 팀의 목적을 부각시켜 주고 그들을 독려해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의 허물은 그대로 돌려주고 자신의 허물까지 부하에게 덮어씌우던 선조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역사상 가짜 리더의 말로가 대부분 이렇다.

 

 

갑질의 대가 홍국영

 

홍국영은 정조의 가장 큰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각종 사료의 기록을 보면, 그는 미남이었고, 눈치도 빠르고,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 가리기로 유명한 영조 역시 그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즉위하자 홍국영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정조는 즉위 직후 정후겸과 홍봉한을 숙청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손 시절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공신이 되자 그는 자신의 의무를 잊고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앉히고, 여기서 태어난 조카를 차기 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갑질을 일삼아 동생이 원빈이란 칭호를 받도록 만들었고, 자기 동생에게 당나라 개원례 황조의 비빈 예를 적용, 그녀가 살던 궁에 효휘궁 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1년밖에 못 살고 아들도 못 낳은 후궁의 장례가 당대 최고 신하들의 주도하에 호화롭게 치러졌다. 여기에다 공무를 중지하고 26일간 조의를 표하는 절차를 적용했는데, 이는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나 적용되는 제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도가 넘치고도 넘친 행위였다. 하지만 홍국영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정조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중전이 자식을 못 낳은 상황이고, 정조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인데 무얼 어쩌라는 것인지? 이에 그는 창조적인 답을 내놓았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게 한 후 군호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그 이름은 완풍군 完豊君. 완풍군이라는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 그리고 홍국영의 가문인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하여간 머리를 잘 돌아간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말로는 비참하다.

 

 

영조와 박문수

 

영조는 좀생이 편집증 환자다. 박문수는 이순신처럼 늦게 33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성적도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3수 끝에 41명 중 26번 째 성적이었다. 그럼에도 실무 감각이 뛰어난 탓에 영조의 눈에 들어 불과 15년 만에 병조판서직까지 승진했다. 물론 이후에 파직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영조는 괴팍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별로 신경 안 쓰는 행동을 하는 박문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예의범절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일쑤인 왕이 무례와 막말을 일삼는 박문수만은 감싸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신뢰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인데, 이 신뢰관계는 '서로 간의 대화,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조와 박문수는 세제와 스승 시절부터 탕평책에 대해 토론을 해왔다. 균형 있는 인재 육성을 위한 국가 발전이라는 대계에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속내를 아는 사이니 대놓고 들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영조는 박문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정한 충신이자 탕평을 위한 정확한 통찰력을 가진 인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려운 숙원사업을 하는데 방향성도 같고 통찰력도 있는 인재를 내쳐서야 말이 되는가? 오히려 그의 의견을 더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삿대질을 하고 달려든 그를 한사코 보호한 이유다.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쉬운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만약 이 때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하고 아쉬워하게 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법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럼에도 역사 속의 인물들을 통해 우리들은 진짜 리더십이 무엇인지 제대로 통찰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경제 위기가 목전에 와 있는 듯한 이 때 진정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리더십을 연구하는 많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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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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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라는 개념은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요약하자면 '규정된 언어'다. 어린 시절부터 외우고 노래해 온 익숙한 훈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든가, 하는 수사들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내 왔다. 특히 사유의 범위를 그 함의의 테두리에 가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이후의 시대로 넘어가더라도 그 잔재는 여전히 동시하면서 위력을 가진다. 그래서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다는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해 온 언어가 종말 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 시대의 훈訓들은 기괴하다

 

책의 저자 김민섭은 309동1201호라는 가명으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썼고, 그 이후 대학에서 나와서 '김민섭'이라는 본명으로 이 사회를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으로 규정한 <대리사회>를 썼다. 그런데, 대학에서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느 중간에 위치한 경계인인 그는 그러한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에게 보이는 어느 균열이 있다고 믿는다. 그 시선을 유지하면서 작가이자 경계인으로서 개인과 사회와 시대에 대한 물음표를 우리들에게 건네려고 한다. 가볍지만 무거운, 그러나 무겁지만 가벼운 김민섭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되고 싶어 한다. 저서로는 <아무튼, 망원동>, <고백, 손짓, 연결> 등이 있다.

 

많은 이들이 고백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는 맞는 명제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이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같은 목소리를 내야만 겨우 뭔가가 바꿔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마치 몇몇 동의하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고요 속의 외침'으로 끝나고 만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 왔다. 그마저도 멈춰 버리면 변화를 요구하던 그 힘은 거짓말처럼 소멸된다.

 

이에 저자는 우리들 주변의 훈들을 수집해서 펼쳐 놓고선 이런 언어들이 이 시대와 함께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언어들도 있다. 그러나, 구시대에서나 통했을 법한 그런 낡은, 모욕적인 언어들은 이 시대와, 나아가 미래의 시대와는 함께 보조를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일상의 평범한 훈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잘 맞는지를.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을 읽어 가노라면 분명히 변화라는 욕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들에게 훈의 의미는?

 

훈訓은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들 곁에 늘 함께 했던 친숙한 단어이다.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는 가훈家訓, 학교에서는 교훈校訓, 회사에서는 사훈社訓,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훈련訓練, 무슨 기념일에 강당에 모이면 귀찮아도 듣게 되는 훈시訓示 내지는 훈화訓話, 교칙을 어겨 교무실에 불러가서 듣던 훈계訓戒 등이 떠오른다. 

 

이처럼 훈은 가정, 학교, 회사, 군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일상과 함께 있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훈은 우리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훈은 '~해야 한다'는 지침을 전달 혹은 강요하던 계몽이자 자기계발의 언어인 셈이다. 특히 집단에 속한 한 개인에게 위계적이며 명시적으로 다가간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회사에서는 사장이 임직원들에게, 국가에서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단어로, 문장으로, 계속해서 훈을 내보낸다.

 

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가르치려는 교육의 언어

지배계급이 생산, 유통하는 권력의 언어

한 시대의 욕망이 집약된 욕망의 언어

 

가정(부모 → 자녀) :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정직하게 살아야 해"(훈계)
학교(학교 → 학생) : "정직", "인사" 등(교훈)
학교(교장 → 학생) : "정직한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훈화)
학급(교사 → 학생) :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훈시)
회사(회사 → 직원) : "정직한 제품 생산"(사훈)

 

 

학교의 훈

여고의 훈으로는 대표적인 게 '순결'인데, 이는 '몸을 깨끗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순결함이 훼손되고 나면 더 이상 학교에서든 이 사회에서든 가치 있는 여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여기에 '여자로서 행실이 곧고 마음씨가 맑고 곱다'는 정숙함이라는 가치가 더해지면 순결은 다만 이성과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행실에 가서 닿는다. 따라서, 몸가짐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셈이다. 

 

반면에 남고에는 여고의 경우와는 달리 '몸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는 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남학생들은 '용감'하게 자신의 '미래'를 '열정'적으로 '개척'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다보니 남학생들의 몸이 다소 더럽혀지는 것은 오히려 영광의 상처가 된다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게끔 만들어 버린다.


하나의 훈은 그 훈을 받아들일 주체들을 규정하게 된다. '성실', '정숙' 등 단어만으로 나타내는 방식이 더 많지만, '성실한 사람이 되자'라든가 '정숙한 여성'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사람이나 여성으로서 그 대상을 호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고와 남고의 교훈이 각각의 구성원을 호칭하고 있는 방식 역시 현저히 다르다.


여고: 사람(14회), 여성(10회), 어머니(3회), 겨레의 밭(3회), 딸(2회)
남고: 사람(8회), 인간(2회)

(주) '겨레의 밭'~ 대구여자고등학교, 상주여자고등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

 

겨레의 밭

억세고 슬리고운 겨레는

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이루어지나니

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

- 경남여고 교훈

 

 

원주여고 교훈의 개정을 반대하다

논란을 빚던 원주여고 교훈(본보 4월 24일자 18면 보도)이 그대로 유지돼 68년의 역사와 전통성을 이어갈 전망이다. (……) 동문들은 이날 자리에서 "교훈은 학교의 가치관, 교육 방향 등 핵심 덕목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라며 "시대가 변해도 교훈은 변하지 않는 학교의 긍지이며 전통"이라고 했다. 또 "전통은 지켜왔기 때문에 전통이며 지켜가기 때문에 전통이다"라고 강조했다. 교훈 개정을 추진하던 학교 측 역시 무엇보다 총동문회의 의견을 중요시하겠다는 방침인 만큼, 원주여고의 교훈은 변경 없이 1945년 학교를 설립하면서 정해진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로 이어질 예정이다. - '강원일보(2013년 5월 21일) 18면 '원주여고 교훈 그대로 유지 만장일치' 중에서

 

원주여고는 결국 총동문회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68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게 되었다. 학창 시절을 보낸 공간이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을 앞둔 교정을 찾았을 때 어떠한 심정이 될지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공간의 이전을 두고서는 울며 손을 흔들었지만, 언어의 이전에는 분노했다.

 

그들에게 공간보다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은 언어였고, "시대가 변해도 교훈은 변하지 않는 학교의 긍지이며 전통"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훈을 지켜냈다. 이처럼 동문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오랜 전통의 학교들이 있다. 반면에, 책은 개정에 성공한 사례도 소개한다. 즉 강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은 학교의 교가 중에 후렴구에 등장하는 매우 어색한 '여자다워라'라는 가사를 '지혜로워라''은수銀水은수되어라'로 각각 바꾸었다는 것이다.

 

 

 

회사의 훈

개인들의 무관심과는 달리, 회사의 경영책임자들은 한 공간을 장악한 언어가 가진 위력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회사의 이익과 연결한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삼성신경영실천위원회'에서 발간한 <삼성인의 용어: 한 방향으로 가자>(1993)에서는 한 조직의 용어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두었다.


한 조직의 용어를 통일하는 것은 그 구성원의 사고와 행동을 하나로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조직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가치관을 언어를 통해 서로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업의 용어 통일은 기업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기능을 합니다. 회장께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용어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첫째, 그룹의 용어를 명확히 통일하고, 둘째, 삼성 특유의 용어를 만들고, 셋째, 용어의 질을 한 차원 높이자는 특유의 용어論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책자는 삼성이 21세기 세계 초일류기업을 실현하기 위해 전 삼성인의 사고와 행동을 한 방향으로 통일하는 데 필수적인 삼성용어의 해설집입니다. (……) 삼성인이면 누구나 이 용어 하나하나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경영의 참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이 빨라지고 단결력을 높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인의 훈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1001, 2002, 2004)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속에 성을 짓고 삽니다"(2003)

"여기는 캐슬특별시입니다"(2004)

"당신은 캐슬에 사십니다"(2005)

"당신을 말해 줍니다"(2007, 2008)

"언제나 변치 않는 가치"(2009)

"특별해진다면 그곳은 캐슬입니다"(2010)

"행복은 캐슬로부터"(2011, 2012)

 

롯데캐슬의 광고 문구는 끊임없이 개인과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을 연결시킨다. 누구나 보다 나은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여기엔 '편안함'이라는 절대적 자기만족에 '특별함'이라는 상대적 자기만족이 더해지는 셈이다. 공간에서 '특별함'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마침내 아파트의 브랜드가 개인의 품격을 담보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같은 단위의 지역에서도 이제는 어느 아파트의 단지에 사는지가 중요해졌다. 아파트의 브랜드가 개인의 품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입주한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신의 단지 주변에 성곽을 쌓아나갔다. 그것은 같은 단지의 아이들끼리만 어울리게 한다거나, 입주민이 아니면 출입을 금지한다거나,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브랜드 아파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완전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들은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동 래미안", "○○동 자이", "○○동 힐스테이트" 등으로 대답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긴다. 브랜드 아파트가 경쟁하듯 들어서면서 그 희소성이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건설사들은 조용히 욕망의 언어를 더 만들어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서브 브랜드'라는 것이 탄생한다. 예컨대, '프리미어 팰리스'라든가 '메가트리아', '로이뷰', '더테라스', '트리지움' 등과 같은 이름이 기본 브랜드 뒤에 덧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 2차적인 욕망을 담은 훈이 가장 먼저 가서 닿은 지역은 어디였을까? 그렇다. 역시나 '강남'이었다. 

 

 

 

시대에 뒤쳐진 낡은 언어들을 청산하자

 

우리 주위엔 아직도 과거의 많은 훈들이 남아서 이 시대와 함께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야만의 언어들,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낡은 언어들이 여전히 우리들 곁에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모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이를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시대의 논리에 맞는 훈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주된 메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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