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마음’은 도시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는 도로나 건물 등 물리적 구조에만 관심을 가질 뿐, 마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법률이나 제도, 규정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집니다. ‘도시의 마음’이 도시를 의미 있게 움직이는 하나의 실체라는 걸 인식할 때 진정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아무리 작은 공간이나 장소라도 마음이 담기면 밀도가 달라집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김승수는 25년간 공공정책과 도시에 천착해 온 도시혁신가로 2014년부터 2022년까지 8년간 전주 시장으로 재임했던 시기엔 전주시 곳곳에 도서관과 책놀이터를 조성하고 작가들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전주를 문화도시로 발돋움시켰다.
다섯 개 파트로 구성된 책은 도시의 의미, 도시의 역할, 도사의 마음, 도시의 확장, 도시의 미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도시는 사람을 담는 그릇이며, 삶이 담긴 곳에는 마음도 함께 담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시가 마음을 '변화의 실체'로 받아들일 때 시민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말로, 혹은 표정으로 누군가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말은 단어의 한계를, 표정은 얼굴 근육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지요. 반면 자연은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의 상실을 치유합니다. 인간의 말과 표정에는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가 담기지만, 자연은 위로받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그저 묵묵히 교감할 따름입니다. - 스튜어트 스미스, <정원의 쓸모>중에서
도시의 의미
좋은 도시는 아름다운 공원과 미술관, 놀이터와 정원, 도서관과 가로수 같은 공공장소를 통해 시민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주려 노력한다. 다양한 공공장소가 시민들의 '마음 둘 곳'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런 공간들은 시민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 도시가 당신의 짐을 반쯤, 혹은 아주 일부라도 대신 짊어지겠습니다'라고 말이다.
많은 학자들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도시를 꼽는다. 도시는 원래 인간이 겪는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도시는 수천 년간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 안전과 위생, 건강과 복지, 문화와 예술, 산업과 일자리 등 인간이 홀로 이겨낼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해 준 절대적 보호막이 바로 도시였다.
요즘의 도시에서는 자본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것에서 일상처럼 줄 세우기가 일어난다. 모든 도시에 앞선 자와 뒤선 자,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이런 살벌한 도시에서 공공장소는 중재자가 되어준다. 이곳에서는 시민 모두가 환대받는다. 물론 공공장소가 도시의 경쟁과 경계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공공장소의 환대는 사회적 잣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공공장소는 조건 없는 환대의 장소이다. 돈이 없더라도 입장할 수 있고, 돈이 없더라도 이름을 불러준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우리 모두를 품어주는 '도시의 친구' 같은 공공장소이다. 누구나 갈 수 있고, 누구나 가고 싶은 모두의 공공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도시에게 우리의 자격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고객입니까, 아니면 시민입니까?"
도시의 역할
전주는 책의 도시이다. 저자는 전주 시장으로 일하면서 이런 이미지의 터를 닦는데 성심을 다했다. 독서는 그에겐 '시간의 문턱'이었다. 도서관 건물의 벽은 약 30센티미터 안팎의 건축자재일 뿐이지만 벽으로 구분되는 안과 밖은 차원이 다르다.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곳이 문턱이자 '경계'이다. 책이 바로 그러하다.
"많은 책들은,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어떤 낯선 방들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네." - 프란츠 카프카,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이는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글이다. 그렇다. 책은 우리들에게 들어가지 못한 , 아니 외면햇던 방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삶에 쌓인 고착된 사유를 흔들어 새로운 만남의 세계로 스며들게 하는 시간의 문턱이다. 저자의 어린 시절 추억은 이불장 한편에 자리잡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신만의 도서관이었다. 학교에서 버려지는 낡고 찢어진 책들을 얻어서 만든 곳이다.
한때는 도서관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바로 '장서'였다. 몇 백만 권의 장서 규모가 그 도시 또는 국가의 도서관 정책과 문화력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장서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도서관의 전부는 아니다. 전주시에 주제가 있는 특화 도서관들이 들어서고, 도서관들이 큐레이션을 강화함으로써 서로 다른 길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도시의 마음
덕진공원은 전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시민들과 관광객들 모두의 많은 추억이 쌓여 있다. 연화정도서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 자리엔 콘크리트로 지은 팔각정이 있었다. 1층은 편의점, 2층은 카페, 3층은 전망대 겸 전시실로 사용되었는데 컵라면, 아이스크림, 뻥튀기, 음료, 과자, 커피 등 관공지 먹거리를 팔아 관광 특수를 누렸다.
이처럼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덕진공원의 이 장소는 어떠한 공공의 목적과 의미를 지녔는지를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연화정도서관은 '유산'의 관점으로 지어졌고, 유산의 관점으로 물려지는 것으로 공공 목적과 의미를 해석했다.

(사진, 전주시 연화정도서관)
공공청사의 물리적 한계는 물리적인 데 있지 않다. 바로 시민들을 생각하는 도사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시청사市廳舍는 시민들에게 두 가지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시민을 대하는 마음이다. 시청은 시민을 위한 정책들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곳이지만 경험의 장소로서의 시청 또한 정책 못지않게 시민들을 향한 도시의 태도를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도시의 대표적인 공공장소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도시의 지향이다. 시청사의 상징이 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상징은 허상에 그치고 만다. 멋지다는 이유로 관광용 사진 찍기에 활용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상징은 '우리 도시'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그 길을 묻고 함께 가자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팔복예술공장은 전주시 팔복동에 위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주시는 1957년 동洞을 신설했는데 팔과정八科亭의 팔八과 신복리新福里의 복福을 합쳐 '팔복동이라 명명했다. 팔과정은 17세기 이곳에 살던 선비 송사심의 제자 8명이 과거에 급제하자 이를 기념해 지은 정자이다. 신복리는 당시 이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이후 팔복동은 1969년부터 전주와 전라북도의 핵심 산업단지로 한 축을 담당했다.
팔복예술공장의 재생은 2015년 전주시가 문체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공모에 선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곳은 폐업한 카세트테이프 공장인 '쏘렉스'를 매입해 재생한 공공장소이다. 쏘렉스는 1997년 썬전자라는 이름으로 카세트테이프 공장을 시작, 한때 500여 명의 공장 직원이 근무할 정도로 전주와 팔복동을 대표하는 기업이었지만 사양산업이 되면서 1989년 폐업했다. 이후 이곳은 팔복예술공장으로 탈바꿈하기가지 방치된 채 세월의 풍화風化를 견디고 있었다.

(사진, 팔복예술공장)
풍화는 우리를 기억의 문으로 안내한다. 기억의 문을 열면 광대한 이야기 세상이 펼쳐진다. 도시의 기억에서 읽어내는 이야기들은 그 도시의 고유성과 정체성, 공동체성을 만들어내기에 우리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의 이야기는 우리 마음속에 단단하게 뿌리 내린 나무 같은 존재로 만들어준다. 도시는 바로 기억의 집합이다.
도시의 확장
도시의 경험적 확장이 삶의 확장이다. 좋은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도시를 다양하고 넓게 쓴다. 아중호수도서관은 국내 최장의, 100미터가 넘는 곡선 모양의 도서관이다. 숲과 정원, 나무와 꽃, 하천과 호수까지 끼고 있는 곳이라 자연과 도시,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최적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호수를 따라 걷는 '책의 길'이 생겨났듯, 책과 자연을 통해 시민들의 다른 삶도 생겨날 것이다. 많은 시민들이 아름다운 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어떻게 호수를 따라 길다란 도서관이 탄생했을지에 대한 궁금함 때문에 향후 완공시 자부감 넘치는 공공장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도시의 미래
'책의 도시 전주'라는 표어는 책이 삶이 됨을 상징한다. 이는 전주의 정체성과 이상을 선언한 셈이다. 그래서 이어가야 할 유산이기도 하다. 책의 도시 전주의 뿌리는 전주 한지로부터 시작된다. 전주는 최고의 한지를 생산했다. 한지 장인이 생산해 낸 종이가 외교문서, 국가의 공문서, 서적출판 등에 사용되었다.
완판본完板本의 의미를 아는가? 이는 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完山의 완完과 목판木板의 판板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 전주에서 싱업 목적으로 출간한 방각본坊刻本을 일컫는다. 넓은 의미로는 조선시대 전주에서 출간된 책을 말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책과 함께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반면 서민들에겐 독서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일단 한문 서적에 접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후에는 서민들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세책점은 돈을 받고 필사본 소설을 빌려주는 점포였는데, 책쾌와 더불어 조선시대 서민들의 독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후반엔 전기수가 등장, 마을이나 시장판, 양반집을 넘나들며 소설에다 맛깔스런 연기를 곁들여 이야기 세계를 사로잡았다.
도시가 마음을 놓치면 시민들의 삶도 놓치게 된다
지난 약 25년 동안 도시 현장에서 많은 정책이 새롭게 태어나고, 또 사라지는 걸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부침은 있어도 10년, 20년이 넘는 동안에도 잘 이어지는 정책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역사를 잇고, 만들어가는 정책들에는 늘 깨어 있는 관점과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늘 따뜻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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