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산을 가다 - 테마가 있는 역사기행, 태백산에서 파진산까지 그 3년간의 기록
박기성 지음 / 책만드는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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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박기성은 대학에 입학하여 등산을 시작한 역사학도 출신으로 등산 전문 잡지 <사람과 산>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삼국사기의 산'을 기획하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산을 찾거나 직접 산에 올라 그 현장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등 2006년 6월부터 2009년 7월까지 꼬박 3년의 세월 동안 이 일에 몰두하면서 많은 역사적 인물과 유적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 책이 출간되었다.

 




 

 

태백산 정상에서 제사를 올린 신라 7대 왕 일성이사금,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탈하이, 천 년에 한 명 나올가 말까 한 천재 전력가 이사부, 대야성 최후의 날 남편 김품석과 함께 자결한 고타소랑, '맞장 뜨기'방법으로 고비를 넘겼던 김유신 등의 인물을 소개하고 박제상은 왜 그렇게 고집부리다 왜에 처참하게 죽었는지, 광개토태왕이 보낸 고구려군 5만이 왜군의 항복을 받았던 임나가라 종발성은 어디인지, 관산성에서 성왕과 백제군 29,600명은 어떻게 해서 몰살 당했는지 등의 수많은 미스터리들도 저자는 풀어낸다.

 

또한, 유적들의 대종은 산성이다. 12년 동안  여섯 번의 싸움이 벌어졌던 대구 와룡산(성), 침전지 연못을 만들어 방어한 문경 고모산성,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본진이 머물렀던 논산 황화산성, 유럽의 성들처럼 원통형 치雉들이 있는 유일한 구조물 삼년산성, 목간이 가장 많이 출토된 함안 주산성 등 산성은 방어 진지만이 아니라 이동 진지 역할까지 했음을 알게 되었다. 행군 중 로마군은 날이 저물면 참호 진지를 만들었듯이 서라벌군은 토성을 쌓았던 것이다.

 

태백산 - 2천 년 전 시작된 산악신앙의 단초

 

서기 138년 서라벌의 7대 왕인 일성이사금이 태백산을 순행했다. 몸소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가야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영남의 패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말갈의 침입을 받았고 6대 왕 지마이사금은 가야를 공격하러 낙동강을 건넜다가 대패를 당하고 귀국했던 서라벌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라벌은 경주, 울산, 영일, 청도, 양산, 동래, 경산, 영천, 대구 정도의 약소국이었다. 반면 가야연맹(알타이어語로 '가야'는 '철'을 뜻한다)은 선진 제철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구가 중이라 서라벌은 그 국력이 가야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또한, 뛰어난 기마 궁수 집단인 말갈족은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경계인 영일 죽령을 넘어 남침하기를 밥 먹듯 일삼는 이런 상황에서 일성이사금의 순행이 이루어졌다.

 

서라벌 사람들이 태백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받드는 풍습은 혁거세(알타이어로 '족장'을 뜻한다)가 건국할 당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부전강과 동해안을 잇는 고대 교통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그때 태백산(오늘날의 백두산)의 위용을 보았고 산을 숭배하는 초원사람들의 관습대로 그 산을 영산으로 받들기 시작했다. 이후 서러벌 사람들은 진한 북쪽 끝에 또 하나의 태백산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꿩 대신 닭으로 이 산을 숭배해왔다. 2천 년 뒤 오늘날까지 이어진 산악신앙의 단초端初이다.

 



KIM src



태백산 각화사 대웅전

 

각화사를 출발하여 태백산 사고史庫터에서 1박 한 다음 정상에서 두 번째 밤을 지내고 남동쪽의 청옥산으로 내려와 정상이 잘 보이는 영마루에서 1박 하는 3박 4일의 산행 계획을 잡았다. 최초로 성산 대접을 받은 태백의 위용은 청옥산에서 가장 잘 바라볼 수 있을 듯했다. 이번 산행의 목적은 그 역사적인 현장의 답사이며 그 개연성을 찾는데 있었다.

 

"마침내 풀렸어, 이사금들의 순행 미스터리가. 일성이사금은 바로 여기, 아니 천왕단까지 와 제사를 지냈던 거야. 각화사 자리에서는 입산제, 여기서는 산신제, 천왕단에서는 하늘님께 제사를 올렸던 거야" (20 쪽) 

 

토함산 - 탈하이가 서라벌을 엿보다

 

기원전 19년 서라벌 동남쪽 바닷가 아진포에 9척 거구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탈하이脫解.  서라벌 천 년 역사상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탈하이란 몽고어로 '대장장이들'이라는 뜻이다. 그의 고백에서도 자기의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상 이들은 선진 기술을 보유한 제철 기술자 집단이었음에 분명하다.

 

"시종 두 명과 함께 지팡이를 들고 토함산으로 올라가더니 석총을 지어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 <삼국유사> 중에서

 

동천강을 거슬러 사로 6촌의 하나인 가리마을, 지금의 경주 외동읍과 울산 북구 일대로 들어와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철광 찾기였을 것이다. 우리말로 쇠곳鐵場. 울산 북구 달내達川洞에서 이 땅 최고의 쇠곳을 찾아내고 곧바로 쇠둑부리鎔鑛爐 세우는 일에 착수했을 것이다. 외동읍 모하리 속칭 아랫장터에 쇠북두리가 있다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나와있다. 지도를 펼쳐보니 그 동쪽에 삼태봉이 있는데 이는 토함산 줄기이다. 그렇다면 탈하이가 올라간 토함산이 바로 삼태봉이란 해석이 된다.

 

탈하이가 거기에 뭐하러 올라갔을까? 서라벌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살펴 본 것이리라. 툭 트인 장소에서 서라벌을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산에 올라 삼태봉의 가장 높은 북쪽 봉우리(650m)에 올라갔은데도 서라벌은 보이지 않았다. 하산로를 입실 쪽으로 잡고 지도에 나와 있는 오솔길을 따라 5분쯤 갔더니 갑자기 숲이 사라지며 외동의 들판이 바둑판처럼 나타났다. 마침내 '탈하이의 토함산'에 도착한 것이다.

 

대구 와룡산 - 서라벌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였던 '개구리소년'의 산

 

"전全 진한 임금은 하나도 빠짐없이 와서 이 위대한 왕에게 무릎을 꿇어라" (53 쪽)

 

서기 63년, 백제의 다루왕이 회맹을 소집했다. 이는 진한의 맹주 서라벌을 겨냥한 처사였다. 당시의 서라벌은 백제와는 비교가 안되는 작은 나라였다. 서라벌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화백회의는 전쟁을 결의했다. 진한의 작은 나라들 또한 큰 나라 백제 편을 들지 아니면 서라벌 쪽에 붙을지 결정해야만 했다.

 

이듬해 백제는 군대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다. 이로부터 12년 동안 여섯 번의 싸움이 벌어졌다. 역사 속의 와산성은 어디일까? 전쟁터는 아무래도 달구벌일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진한은 길이 난 고개가 거의 없어서 보급은 물길을 이용했다. '개구리소년'사건으로 유명한 와룡산은 최고 높이 299m, 말발굽 테두리 거의 전부가 200m 이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금호강 쪽에 토성만 쌓으면 강이 바로 해자가 되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백제는 결국 와산성 공략에 성공한 뒤 200명의 수비군을 이곳에 주둔시켰다. 이 때 아르치閼智가 무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아르치 병사들은 과감하고 신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잔인했다. 포로가 된 백제군 200명을 모조리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금金은 알타이어로 '알트', 복수로는 '알타이'이다. 이 알트가 아르치로 변한듯하다. 즉 아르치는 '금 제련, 세공 기술자'인 셈이다. 나중에 김씨가 되는 아르치 집단은 북방계라는 것이 정설이다.

 

비음산 - '임나가라 종발성'

 

"신라 성에 이르니 왜병이 가득했는데 고구려군이 도달하자 도망하기 시작했고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에서 마침내 항복" (115~116 쪽)

 

임나가라에 망조가 든 것은 서기 400년, 광개토태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서라벌을 구원하면서부터였다. 고구려가 신라의 지원 요청을 받고 남정에 나섰던 이유는 야마토가 백제와 화해하면서 서라벌을 침략, 그들의 세력권에 두려고 하는 것을 방기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원 용동과 김해 진례면 사이에 있는 진례산성이 일명 염산고성簾山古城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종발의 '발'을 '발 렴簾'자에서 차음했다면 이보다 더 적당한 입지도 없을 것이다.

 




진례산성

 
창원시 토월동에서 비음산 북릉 안부로 올라서니 허물어진 석축 성벽이 보이고 '진례산성 남문'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비음산 정상을 돌아 진례산성 동문을 지나서 용추계곡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마침내 드러난 성의 규모가 어림잡아 둘레 5km가 되는 큰 성이다. 계곡이 서쪽으로 꺾이면서 경사가 완만한 폭포를 이루는 암반 지형이다. 별다른 축성 기술이 없었을 400년대에도 방어 장치로 충분한 골짜기, 진례산성은 종발성이 맞는 것 같다.

 

 

산은 일반적으로 오르기는 지루하고 내려가기는 팍팍하다. 그래서 꽤 많은 이들이 야생화 사진 찍기, 약초 캐기, 나물 뜯기 등으로 소일하면서 지치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산행을 즐긴다. 그러나, 이렇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앞사람 발뒤꿈치만 바라보면서 무작정 걷는다. 이럴 때 <삼국사기>와 함께 산을 찾는다면 그 느낌이 다르고 산길에서 차이는 돌멩이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도 닦는 길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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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벳 - 세상을 바꾼 1천 번의 작은 실험
피터 심스 지음, 안진환 옮김 / 에코의서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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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벳이란 '어떤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발전시키고 시험하기 위해

부담없이 해봄직한 시도'를 의미합니다" (4 쪽)

 

크리스 록은 적은 관객을 상대로 작은 실험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코미디물을 발전시켜 나갔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그가 해외 순회 공연에서 보여주는 코미디는 실패로 끝난 수많은 건의 '작은 실험 little bets'를 통해 검증하고 익힌 지식의 산물이다. 그는 개략적으로 구상한 소재들을 약 50명 정도의 관객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시험 공연을 미리 해본다. 한 회 분량의 완전한 레퍼토리를 만들기 위해 수백 개의 예비 아이디어를 시도해보고 이 중에서 소수만 엄선해서 실제 공연 무대에 올린다.

 



 크리스 록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칼렌슨은 두 가지 유형의 혁신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개념적 혁신가'와 '실험적 혁신가'가 바로 그 유형이다. 크리스 록처럼 작은 실험을 통해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실험적 혁신가'라고 불렀다. 모차르트 같은 '개념적 혁신가'는 과감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위대한 혁신을 이룩한다. 특히, 칼렌슨은 현실적으로 널리 존재하는 유형이 실험적 혁신가이며 들은 실험적이고 반복적이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접근법을 이용하여 끈질지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특징을 보이기에 더욱 흥미를 가진다고 한다.

 

"만일 1만가지의 방법을 시도했는데 모두 효과가 없다고 해도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한 가지 방식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때마다

나는 한 발짝 전진한 것이기 때문이다" - 토마스 에디슨 (24 쪽)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9천 번 이상의 실험을 시도하면서,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위대한 발명가의 이야기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베토벤은 무수한 실험을 거쳐 기존의 모차르트 식 작곡법에서 탈피할 때까지 남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청중을 대상으로 새로운 양식과 형식을 시도하는 창작의 과정을 거쳤다. 현존하는 베토벤의 악보 중 일부는 교정 부호, 수정 사항, X표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다수의 작은 실험을 통해 성공 가능성을 감지하여 탁월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창조적인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인 검증을 거치고, 불확실성을 극복하여 올바른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큰 실험보다 오히려 작은 실험을 통해 이전의 미지 상태를 깨닫게 된다. 천재는 매우 드물게 탄생하지만, 창조적 아이디어를 발견하기 위해 작은 실험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작은 실험에 접근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실험 실천,실패를 통해 빨리 배운다. 베토벤이 새로운 음악 양식과 형식을 발견했던 것 처럼 실험하면서 새로운 것을 구상한다.

 

놀이 유쾌하고 즉흥적이며 익살 넘치는 분위기

 

몰입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발전시킨다.

 

정의 이룩한 통찰력을 활용하여 해결하기 전 문제의 내용과 요구를 규정한다.

 

순응 작은 성공을 활용하여 완성에 이르는 진로를 결정한다.

 

반복 크리스 록이 코미디 공연을 완성시킬 때처럼 가설을 이용해 반복하면서 개선하고 검증한다.

 

 

고정 사고관 vs 성장 사고관

 

고정 사고관을 선호하는 사람은 인간마다 고유한 재능을 타고나며 지능이나 능력은 바위에 각인된 것처럼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자 안달이다. 반면 성장 사고관을 선호하는 이들은 지능이나 능력은 노력하면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실패나 좌절을 성공의 기회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발전하려는 열망이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사회시리학 교수 캐럴 드웩 박사는 어째서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데 더욱 적극적인지에 대하여 연구하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 그는 성장 사고관의 대표 주자로 마이클 조던을 자주 거론한다. 조던이 농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리 대단한 자질이 보이지 않았지만 엄청난 노력을 통해 위대한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한편 드웩 박사가 고정 사고관의 사례로 꼽는 사람은 존 매켄로이다. 테니스 코트의 악동으로 유명한 그는 시합에서 일단 뒤지기 시작하면 선심에서 관중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비난한다. 그는 경기에 집중하여 게임 상황을 호전시키기보다 분노에 휩쓸려 오히려 발끈하기 일쑤였다.

 

"고정 사고관은 어려움이나 노고,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식되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모두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자신감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장 사고관은 앞에서 언급한 조건들을 모두 기회로 간주한다"

 - 캐럴 드웩(스탠퍼드 대학의 사회심리학 교수)

 

 

구겐하임빌바오미술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성장 사고관은 매우 인상적이다. 80대의 게리는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빌바오미술관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디즈니 콘서트홀을 건축한 사람으로 1989년 건축가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그는 성공적인 건축물을 완성하고 주위에서 수많은 찬사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적어도 시작 단계에서는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는 이를 '건전한 불안감'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접근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를 기회로 인식한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려하기보다 앞으로 얻게 될 통찰력에 더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실패 견본 만들기

 

견본 만들기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유용한 전략이다.  소설가 앤 라모트는 그녀의 저서 <글쓰기 수업>에서 괜찮은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말로 형편없는 초고를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도 동료들과 함께 종이나 골판지를 오리고 구기고 접어서 새로운 건축 디자인을 시작한다.

 

"그들은 더 나은 생각에 이르기 위해 저렴한 견본을 제작한다" (95 쪽)

 

개략적인 시발점에서 최종 버전까지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모형으로 구현되는 수준에 이르지도 못한다. 프랭크 게리와 그의 동료들은 이해 당사자들에게 가장 훌륭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들을 모형으로 제작하며, 건물의 형태와 모형은 장기간에 걸쳐 잘라내고 새로이 붙이는 과정을 통해 점점 세밀해진다.

 



 

픽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견본을 만드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따라 새로운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었다. 픽사는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수천 개의 스토리보드를 구상했다. 사실상 이는 모든 아이디어를 최종 작품에 반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이다. 가로 10cm, 세로 25cm 크기의 흰색 종이 보드 위에 피쇼ㅏ의 스토리 아티스트들이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그 결과 <니모를 찾아서>에서는 4만 3536장이나 되었다. 스토리보드를 사용하여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영화감독과의 스토리 미팅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스토리보드별로 피드백을 제공하고 아이디어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브레인스토밍했다.

 

제대로 질문하기

 

창조적 통찰력을 달성하고 아이디어를 개발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 중 하나가 이론을 버리고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와 아이디어, 필요와 욕구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이것들은 언제나 표면 아래에 숨어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너머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를 수 있다. 그러자면 더 깊이 파고들고 더 넓게 살펴보고 집중해야만 한다.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의 창업자이자 미소금융의 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2006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무하마드 유누스, 그는 자신의 자서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에서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기차역과 버스 정류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극심한 기근이 인도를 휩쓸자 굶주림에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먹거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1974년 당시 그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2년이 흐른 어느 날, 치타공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 조브라에서 그는 하루 10시간씩 맨발로 밟아서 탈곡하는 여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는 '벌레의 시각'이라는 관점으로 빈곤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 대나무 의자를 만들어 하루에 고작 2센트밖에 벌지 못한다는 이 마을의 여인 수피아 베굼의 이야기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또한, 재료비를 사채업자로부터 빌려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업에 종사하는 42명의 재료비를 모두 합쳐도 27달러가 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대부업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들에게 처음으로 27달러를 빌려주었다. 1977년에 그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여 극빈층 자영업자들에게 소액 대출을 시행했다. 96퍼센트가 여성들이었다. 극빈자들도 신용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인도 금융업계가 견지했던 뿌리 깊은 회의론도 극복하게 되었다. 65억 달러 이상을 극빈자들에게 대부하였고, 상환율이 98퍼센트 이상을 기록했던 것이다.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무하마드 유누스 지음


 






 


 

 

다시금 크리스 록의 접근 방식을 들여다 보자. 그는 청중을 열심히 관찰하여 고개를 끄덕이거나 보디 랭귀지가 변하거나 집중에 의한 순간적인 침묵 등 좋은 아이디어를 의미하는 단서들을 포착한다. 또한 그는 새로운 소재를 찾기 위해 광범위한 농담을 즉흥적으로 구상한다.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전혀 호을을 얻지 못한다. 청중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룻밤 공연에서 5~10줄 정도가 반응이 좋다면 이를 중심으로 연기를 구성한다. 수천 개의 예비 아이디어를 시도해야만 하며, 이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수에 불과하다.

 

모든 위대한 창조는 작은 실험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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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리더라면 우든처럼 

2.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3.명참모의 조건 

4.정청 

5.노는만큼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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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 완료했습니다! 첫 미션 수행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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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우든처럼 (전문낭독MP3 파일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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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시대의 지성, 청춘의 멘토 박경철의 독설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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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참모의 조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과 참모들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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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 正聽- 내 사람을 만드는 최고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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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고 지낸 것들 - 나만 위해 아등바등 사느라 무거워진 인생에게
니시다 후미오 지음, 박은희 옮김, 변종모 사진 / 에이미팩토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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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은 <타희력他喜力>이다. 타인을 기쁘게 해주는 힘이란 의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가'에 대하여,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일곱 가지의 실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잔잔한 깨우침을 주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

 



 

인생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 비극과 마주했을 때 등 우리가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뭔가 목말라 하는 것이 있다. 이 목마름이야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일지도 모른다. 가족, 사랑, 우정, 헌신, 공감 등과 같은 가치는 우리가 이를 잃거나 또는 필요한 상황에 처했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다.

 

불가의 가르침 중에 '자리이타自利利他'란 말이 있다. 남을 이롭게 하면 나 자신도 이롭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눔으로써 이를 통해 행복감을 맛본다는 것이다. 홋카이도에서 작은 라면집을 경영하고 있는 50살의 미치히로씨가 이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는 늘 똑같은 앞치마에 낡은 두건을 동여매고, 허드렛일로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라면을 삶아낸다.

 

그는 최근에 여동생이 한 사람 생겼다. 암투병을 성공적을 이겨낸 가수 다카유키의 부탁으로 치토세 대학병원 암 병동에 입원해 있는 환자 이토 토키요의 오빠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카유키로부터 전화를 받고 가게 영업이 끝나자마자 그는 토키오를 찾아갔다. 병실의 분위기로는 병문안을 정기적으로 오는 사람이 없음을 직감하게 했다. 두 달 시한을 받은 토키오에게 오빠가되기로 약속했다. 이후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꼭 병문안을 갔다. 토키오는 그를 잘 따랐고, 이젠 그의 아내에게도 언니라고 불렀다.

 

토키요는 새어머니의 구박을 견디지 못하고 일찌감치 가출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를 매우 미워했다. 그래서, 그녀는 작은 사무실의 경리로 취직해서 월급 모으는 재미로 살았다. 밥값이 아까워 점심시간에 찬밥에 물을 말아 장아찌로 먹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했다가 밤이면 퇴근해 단칸방에서 잠자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유일한 꿈은 돈을 모아 따뜻한 남쪽나라 섬에서 사는 것이었다.

 

미치히로가 병문안을 다닌지 한 달쯤 지났을 때, 토키요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도 누군가를 돕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도 암 환자들을 위한 콘서트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노래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다. 또한, 화사한 드레스도 입어보고 싶었다. 이 소망을 들은 미치히로는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그래, 알았어. 이 오빠만 믿어" (27 쪽)

 

9월 7일에 'For 토키요' 콘서트를 열기로 하고 가수 다카유키를 비롯한 출연자를 모두 초대했다. 놀랍게도 토키요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는 마지막 생의 불꽃이었던 것이다. 8월 7일 새벽, 병원에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토키요는 혼수상태를 오갔다. 담당의사가 장례 준비를 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토키요 아버지에게 전화했지만 그런 딸이 없다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미치히로도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 받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그는 사고뭉치였다. 툭하면 아이들과 주먹다짐에다 외박을 밥먹듯 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한 뒤 그는 잡부일을 전전하다 고기잡이 배에 올랐다. 파도가 유난히 거친 어느 날, 갑자기 덮쳐온 파도를 얻어맞고 그는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대로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선장이 던져준 밧줄을 잡고 그는 필사적으로 갑판위로 올랐다.

 

"구석에 버려진 녹슨 나사 하나도 언젠간 다 쓸모가 있는 법이야.

인생, 생각보다 그렇게 모질지 않다네" (40 쪽)

 

하얀 드레스와 티아라가 준비되었다. 사진사도 오고, 콘서트 공연에 참석하기로 했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토키요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하얀 드레스에 반짝이는 티아라 때문에 얼굴에 광채가 났다. 손에는 누군가 길에서 꺾어온 코스모스와 클로버로 만든 꽃다발도 들려 있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모두 기념촬영을 했다.

 

"다음 생에 태어나도 내 동생이 되어줘. 그땐 네 결혼식에서 이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은 너를 한껏 축하해줄게.

고맙다, 내 동생. 내 하나뿐인 동생..." (44 쪽)

 

8월 8일 새벽, 단 2개월 간의 여동생 토키요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토키요의 나이 43세. 토키요의 아버지는 이번에도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장례식은 지인들만 모인 조촐한 자리가 되었다. 영정 사진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티아라를 쓴 토키요의 모습으로 결정했다. 토키요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남태평양의 어느 섬 사진과 함께 이 영정 사진은 미치히로의 집에 장식되어 있다.

 

이 세상에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빛과 소금이 되어줌으로써 더욱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다.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먼저 자신의 손을 남에게 내밀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길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타희력이며, 자리이타 정신인 것이다. 

 

이 책은 모두 7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 '꿈 케이크'를 무료로 만들어주는 '카쇼 시미즈' 제과점, 쿠키 마사토의 후회없는 삶의 조건, 교통사고를 통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장애인 스포츠 스타 코유야 카즈유키, 장애인들에게 일하는 기쁨을 제공하는 세탁 공장 건성사 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데 이를 우리가 잊고 지낸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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